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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카이라이, 그리고 폭력조직과의 결탁

편집부  |  201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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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 보시라이의 아내 구카이라이(穀開來) 역시 범상치 않다. 1960년생이며, 전 총정치부 부주임이자 신장군구 제2서기 구징성(穀景生)의 다섯째 딸이다.


부친 구징성(穀景生)은 1935년 12월 9일 베이징에서 항일학생국구운동인 ‘12•9’ 운동 발기인의 한 사람이며, 모친 판청슈(範承秀)는 자칭 송나라 명신 범중엄(範仲淹)의 후손으로 항전 시기 태항산구에서 유명한 여장부이자 부녀회 간부였다. 문화대혁명으로 부모가 연이어 수감되고, 4명의 언니도 농촌으로 쫓겨나면서 구카이라이는 초등학교도 다닐 수 없었다. 결국 미장이로 일하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팔았다. 당시 고기를 썰 때에 무게를 달지 않고도 몇 근, 몇 냥인지 정확히 맞출 수 있어서 ’일도준‘(一刀准)으로 불리기도 했다.


총명했던 구카이라이는 비파를 배우기 시작하자 실력이 일취월장해 전문 연주가 수준에 도달했다. 독주 연주가로도 뽑힐 정도여서 ‘마오 주석 서거’라는 기록 영화의 배경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1977년 대학교 입시(高考)가 부활하면서, 구카이라이는 이듬해 베이징 대학에 입학했다. 고생스러운 유년 시절로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해 입학 시험에서 백지에 가까운 답안지를 냈지만, 출중한 문학 실력으로 법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 졸업 후 베이징대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중국의 첫 번째 변호사가 된다. 훗날 구카이라이는 보시라이의 실질적 정치 참모가 되는데, 이때부터 법률보다 정치에 능통했다고 한다. 또 주역을 깊이 연구해, 함께 식사한 주역 전문가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 정도의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하지만 구카이라이도 보시라이처럼 거짓이 많다. 구카이라이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진현에서 보시라이를 처음 만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 홍콩 문회보(文匯報) 동북지사장 장웨이핑(姜維平)은 1978년 베이징대 재학시절부터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가 아는 사이였다고 밝혔다. 문회보 광저우 지부 린(林) 부주임은 구카이라이와 대학 동창으로 한 기숙사에 살았으며, 당시 보시라이가 구카이라이를 찾아왔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장웨이핑은 구카이라이가 보시라이와의 사이에 제 3자가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1984년 보시라이는 다롄시 진(金)현 부서기로 취임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니 폭력조직이 필요했다. 그는 우선 진현의 두 폭력조직을 찾아갔다. 하나는 호표(虎豹)로 불리는 쩌우셴웨이(鄒顯衛)이었는데, 주로 현지 식당에서 ‘보호비’를 거두고, 다른 하나는 판(範)모모라 불리는 인물로 현지의 토목건축을 독점한 후 하도급을 통해 수익을 거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보시라이와 가까워진 후 보시라이를 적극 지원했다. 그들은 같이 먹고 마시면서 세력을 키워갔다. 감옥에서 ‘폭력이 진리’라는 그릇된 생존 법칙을 터득한 보시라이는 공산당에 폭력조직을 더해어렵지 않게 다롄을 주물렀다. 보시라이는 충칭에서도 이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처음 쩌우셴웨이와 보시라이는 아주 친밀해 한동안 쩌우셴웨이가 보시라이의 경호원처럼 활동했다. 보시라이의 도움으로 그는 다롄 경제기술개발구에 이부톈(一步天)이라는 가라오케를 운영했고, 보시라이는 개발구 당위원회 부서기를 겸직했으므로 손쉽게 손님을 이부톈으로 보내주었다. 쩌우셴웨이는 이어서 식음료와 오락 관련 사업을 하여 10년도 채 안 돼 1,000만위안 이상을 벌어 들였다.


1992년 10월 19일, 쩌우셴웨이는 사냥총과 칼로 무장한 7개 조직을 거느리고 가오푸숭(高福崇), 창푸성(常福勝) 조직과 싸움을 해 가오푸숭을 살해하고 창푸성에게 중상을 입혔다.


보시라이의 측근이 쩌우셴웨이에게 상황이 나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려줬고, 쩌우셴웨이는 황급히 해외로 도피했다. 그는 1995년 4월 다롄에 몰래 왔다가 고의 살인죄, 유망죄, 불법 구류죄로 체포돼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형 집행을 연기시키고, 입증할 자료를 거짓으로 꾸며 사형을 15년형으로 바꾸었다.


복역 중에도 쩌우셴웨이는 두 칸짜리 단독 주택에서 살았다. 집 안에는 없는 것이 없이 감옥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며 지냈다. 2000년 3월 21일 쩌우셴웨이는 병보석으로 감옥에서 풀려났고, 출소 십여 일만에 다른 폭력조직과 다투다 또 살인을 했다. 그러나 보시라이의 보호로 수사망을 피하다가 이듬해 체포됐다.
 

당시 랴오닝성 성장이었던 보시라이는 라오닝성 당서기 원스전(聞世震)과 정치생명을 건 일전을 벌이고 있는 터라, 쩌우셴웨이를 모르는 척 했다. 2001년 11월 3일 쩌우셴웨이는 사형당했다.  쩌우셴웨이는 보시라이의 수많은 비리를 안고 사라진 것이다. 보시라이는 쩌우셴웨이의 형제에게 ‘그는 일을 너무 크게 벌렸다. 원스전이 이 사건을 물고 늘어져 전국이 다 알게 돼 나도 방법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보시라이는 진현으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다롄의 명물 진스탄(金石灘)을 촬영해 사진을 집으로 부쳤다. 그는 부친 보이보에게 이 사진을 덩샤오핑에게 보여주고, 국가급 명승지로 개발해야 한다는 조언도 곁들여 달라고 말했다.


최고지도자가 승인한 개발 사업은 국가의 투자와 은행 대출을 받기 쉽고, 정치적으로도 실적을 쌓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국가급 명승지가 생기면 많은 베이징 고위층 인사들이 다롄에서 휴가를 보낼 것이며, 정치적인 친분을 쌓고 뇌물 제공이 용이하다는 것을 계산했다.


보시라이는 이 일의 파급력을 키우기 위해 자신이 촬영한 사진을 다롄일보에 발표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진 편집인은 그의 사진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저열한 습작’이라고 혹평했다. 보시라이는 상황이 여의치 않자 다른 편집인을 찾았다. 그 편집인마저 ‘차별화 되지도 못했고, 시적 정취도 없으며, 상상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 만들어 낸 장난’이라고 평가했다. 보시라이는 1999년 다롄시 서기가 되자 다롄일보 광고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을 체포했다.


보시라이는 인맥을 동원해 그의 사진을 국가 관광국에 보냈고, 베이징에서 전문가와 교수를 초빙해 진스탄을 둘러보게 했다. 진스탄은 서서히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국가에서 자금을 지원했으며, 땅값이 오르고 관광업도 발달하기 시작했다. 폭력배 두목 정(鄭)씨가 개발 항목을 독점했고, 수익 일부는 정씨의 손을 거쳐 보시라이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80년대 초, 진저우(金州)의 향토 기업의 발전은 특별히 빨랐다. 이는 자오쯔양(趙紫陽)과 후야오방(胡耀邦)이 ‘대외로는 개방, 대내로는 활기차게’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진현은 바다를 끼고 있고 다롄과도 가깝다. 간석지에 양식장이 발달해 시장도 들어섰고, 현지인들의 생활수준도이 높았다. 보시라이는 이를 통해 경제 관련성과를 더했다. 훗날 보시라이는 중앙 정부 상무부장을 역임하게 된다.
 

당시 보시라이는 진현 관리들에게 ‘지금 최대 급선무는 덩샤오핑이 하루라도 이곳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덩샤오핑을 접대하기 위해, 진저우에 호텔을 증축하고 대규모 토지 공사를 잇달아 진행했다. 보시라이는 이것을 하드웨어라고 불렀고, 도처에서 선발한 미녀로 접대를 준비하면서 이를 소프트웨어라고 했다.


보시라이는 베이징을 방문할 때마다 덩샤오핑을 찾아가 장하이(長海)현의 해삼과 진현의 후지 사과를 선물하며 진스탄의 푸른 하늘과 흰 구름, 골프장을 자랑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덩샤오핑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베이징 고위 간부가 다롄을 찾았다. 잘 마시고 배부르게 먹은 고위간부들은 다롄과 랴오닝성의 간부와 공무원들을 다독이며 ‘보시라이를 잘 보필하라’고 말했다. 보시라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신기원 전재]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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