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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륜과 육친 정을 저버린 보시라이

편집부  |  201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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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 홍위병들은 자신들이 마오쩌둥과 함께 일으킨 혁명과 ‘천하대란’의 불길이 ‘반혁명분자’뿐 아니라 자신들의 아버지까지 태울 것이며, 그들마저 ‘반동’이자 ‘주자파’의 ‘앞잡이’로 만들 것임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따라서 16, 17세의 홍위병들은 몸을 돌려 마오를 공격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대다수 홍위병들이 마오쩌둥을 배신하고 자신의 부모를 지킨 반면, 보시라이는 정치 상황에 맞춰 자신의 아버지를 밟고 위로 올라가려 했다. 홍콩 언론의 보도를 보면, 보이보가 ‘반역자 사건’으로 숙청될 당시 그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인물은 바로 아들 보시라이였다. 당시 보시라이는 조반파의 ‘혁명선봉’을 적극적으로 맡고 있었다. 아버지와 모든 관계를 단절했다며 혁명 구호를 미친 듯이 외쳤고, 직접 나서 보이보를 걷어차고 뺨을 때리기까지 했다.


1968년 6월, 19세가 된 보시라이는 제7기계공업부를 찾아가 연일 사람들을 선동하며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 때문에 기계공업부의 정상 운영이 불가능해지자 당시 항공재료연구소 소장이었던 야오퉁빈이 책임자로 나서 협상을 벌었으나 별다른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러자 그날 정오 무장투쟁을 벌이던 몇 명이 갑자기 야오퉁빈의 집에 찾아가 그를 심하게 구타했다. 그 중 보시라이는 야오퉁빈의 가랑이를 걷어차 정신을 잃게 했고, 다른 몇 명은 쇠몽둥이로 그의 머리를 수차례 가격해 ‘두개골 골절과 경뇌막 파열’을 일으켰다. 야오퉁빈은 결국 그날 오후 3시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46세였다.


야오퉁빈은 중국 항공재료 및 공정공학의 창시자로 유학 당시 예비당원으로 중공에 가입했다. 야오퉁빈의 죽음은 국방부와 중공 중앙을 경악하게 했다. 인민대회당에서 회의 중이던 저우언라이는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정도였다. 이후 1999년에 야오퉁빈은 ‘양탄일성(원자•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훈장을 수여받았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많은 시민들은 온갖 악행과 인명 살상을 일삼던 홍위병을 철저히 처벌하라고 소리를 높였다. 중공은 수많은 평민 출신의 홍위병을 총살하거나 수감했지만, ‘연동’ 조직원에게는 살길을 열어주었다.


1979년 보이보는 후야오방의 도움으로 복권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다. 당시 야우퉁빈 사건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유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정부는 보시라이가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형사처벌을 면해주었다. 하지만 당시 보시라이는 이미 19살이었다.


보시라이의 정부측 약력을 보면, 1968년부터 1972년까지 ‘문화대혁명 중 학습반에 들어가고 노동에 참가했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실상은 차를 훔치다 잡혀 감옥에 갇혀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인생 경험은 보시라이의 후반기 성격과 야심을 결정지은 중요한 순간이었다.


홍콩 ‘문회보’의 둥베이사무실 주임을 지낸 장웨이핑은 1999년 6월부터 9월까지 일련의 기사를 통해 보시라이의 정책 실패와 사생활 추문을 폭로했다. 이 때문에 2000년 12월 다롄 국안국에 체포되었고, 2001년 5월 비밀 재판에서 ‘국가안보 위협 및 국가기밀 누설’ 혐의로 8년형을 선고받았다(이후 6년으로 감형됨). 장웨이핑 사건은 국제 여론의 폭넓은 관심을 받았고, 그는 건강악화로 2006년에 석방되었다. 2009년 2월 캐나다 정부가 특별 비준한 난민자격을 얻었다. 기자이자 직접 박해를 받은 당사자로서 장웨이핑은 보시라이의 많은 비밀을 폭로했고, 보시라이를 연구하는 해외 기관의 주요 소식통이 되었다.


장웨이핑은 보시라이가 타이청 감옥에 수감될 당시 동료였던 쑨을 만나 그의 수감 후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쑨의 증언에 따르면, 문화대혁명 초기 부모를 잃은 보시라이는 폭력행위를 일삼던 연동과 함께 다니다가, 연동이 반혁명분자로 숙청되자 동네 불량배들과 어울렸다. 그들과 함께 살면서 좀도둑질을 일삼던 보시라이는 베이징 카오야 식당 앞에서 지프를 훔치다 잡혀 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에서 보시라이는 두 명의 죄수와 어울렸다. 한 명은 위에서 말한 쑨이고, 다른 한 명은 ‘보스급’ 인물인 왕이었다. 처음에 두 사람은 보시라이를 몹시 때렸다. 하지만 눈치 빠르고 아첨 잘하는 모습을 본 두 사람은 보시라이를 그들의 부하로 삼았다. 어느 날 보시라이의 시중이 시원치 않자 왕은 그의 얼굴과 엉덩이를 흠씬 두들겨 패며 물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진리인가?”
쑨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보싼(薄三, 보시라이)은 “진리란 진정한 이치를 일컫는 것”이라고 답했고, 그 때문에 얼굴을 여섯 차례나 더 얻어맞았다. 왕은 그에게 “주먹이 바로 진리이며, 두목이 바로 아버지이다”라고 소리쳤고, 보싼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연신 용서를 구했다.”


이 사건 이후 보시라이는 ‘깡패 두목’이 말한 명언을 가슴 속 깊이 새겼다. 수년이 지난 후 그는 자신의 심복에게 말했다. “감옥에서 죄수 두목에게 수없이 괴롭힘을 당했다. 한 번은 하도 맞아 무릎 뼈가 깨지고 살도 다 문드러졌다. 몹시 비통한 가운데 나는 한 가지 진리를 깨달았다. 수많은 진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강한 힘이며, 자신에게 맞서는 자는 모두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경쟁자는 모두 처단하고, 폭력에서 정권을 창출한다’는 보시라이의 핵심 정치사상이 형성되었다.


보이보의 복직으로 보시라이도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78년 보시라이는 베이징대 역사학과에 진학해 세계사를 전공했고, 1년 후 중국사회과학원으로 옮겨 국제신문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졸업 후 중난하이로 온 그는 중공 중앙 반공청에서 국가 부처급 간부로 일했다.


1984년 보시라이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랴오닝성 진현으로 내려가 현 위원회 부서기를 맡았다. 당시 다롄시 위원회 서기를 역임한 추이룽한은 보이보와 동향 사람이었다. 보이보는 직접 추이룽한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을 부탁했고, 추이는 단번에 이를 승낙했다.


보시라이가 베이징을 떠나 진현으로 내려간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현급 간부에서 시작해 중국 정계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신성이 되고자 했다.


두 번째는 경제적 이유에서였다. 당시 보이보는 국유토지 정책이 과거의 ‘무상’ 할당에서 점차 ‘유상’ 양도로 바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지방 관료는 토지만 점유하면 큰돈을 벌 수 있었고, 특히 다롄 같은 신 경제개발구는 선전처럼 정책적 혜택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경제를 담당해 왔던 보이보는 아들을 진현으로 보내 큰돈을 벌게 했다.


세 번째는 혼인 문제 때문이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보이보가 감옥에 갇히자, 혼비백산한 보시라이는 평범한 외모의 군의관 리단위와 결혼했다. 그의 장인은 당시 위세를 떨치던 베이징시 위원회 서기 리쉐펑이었다. 하지만 1976년 4인방이 숙청되자 리쉐펑은 점차 힘을 잃었고, 반대로 보시라이는 보이보의 복권에 힘입어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리단위는 돈과 권력을 밝히던 보시라이에게 그저 쓸모없는 짐에 불과했다.


보시라이는 베이징대 재학시절 같은 대학을 다니던 구카이라이와 교제했다. 그녀는 신장자치구 제2서기를 지낸 구징성의 딸이었다. 보시라이는 리단위와 이혼하기 전 구카이라이와 불륜관계를 맺었지만 고집이 센 리단위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리단위는 도처에 서신을 보내 도움을 청했다. 두 사람의 싸움은 4년이 지나서야 끝을 맺었고 리단위는 아들의 성을 리씨로 바꾸었다. 보시라이는 리단위를 피하기 위해 베이징을 떠나고 싶었다. [신기원 전재]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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