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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오리가 톈진 화재 진상을 은폐하는 이유

편집부  |  201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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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샤오후이(周曉輝 시사평론가)


[SOH] 톈진시 지현(薊縣)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한 지 이미 1주일이 지났다. 하지만 대륙 인터넷에는 당국에 사망자수 발표를 요구하는 민중들의 질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톈진의 분위기는 상당히 긴장되어 있다. 톈진 매체에는 화제사건과 관련해 단 한 글자도 보도되지 않고 있고 위로는 공산당 간부들에서 아래로는 피해자 가족, 생존자, 소방관, 공안, 의료인, 장례식장 직원, 기자 및 일반 민중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함구령이 내려졌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함구령은 톈진시 서기 장가오리(張高麗)가 내렸다고 한다. 그는 톈진 전체 당원간부들이 대외적으로 발언을 통일해 큰 국면을 중시하고 안정과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그 누구도 이번 화재의 사망자수를 화제로 삼을 수 없고 추도식에 참가하는 것을 불허하며 만일 이를 어길 시에는 당의 기율과 국법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장가오리가 진상을 은폐하려는 목적은 물론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18대에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무시하고 이처럼 멋대로 행동하게 했을까?


중공의 전직 고위관리가 밝힌 바에 따르면 선전시 서기로 재임하던 기간에 장가오리는 홍콩 창장(長江)그룹 회장 리자청(李嘉誠) 일가와 특수한 관계를 맺었고 이를 기반으로 장쩌민과 연계를 맺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장가오리의 보장하에 리자청은 아들이 가진 전기통신회사를 이용해 장몐헝(장쩌민의 아들)의 중국왕퉁(中國網通)에 500억 위안을 투자하게 했다. 이 자금의 대부분은 장몐헝이 차지했고 외국으로 빼돌렸다. 이 회사의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장쩌민은 새로 정보산업부를 만들고 국유통신회사를 재편하게 했다. 또 리자청에게 보답하기 위해 장쩌민은 베이징에서 가장 좋은 지역인 동방광장을 그에게 주었다.
 

2001년 장쩌민은 자신의 정부(情婦) 황리만(黃麗滿)을 선전시 서기로 만들기 위해 장가오리와 거래를 했다. 즉, 그를 산둥성에 보내 서기에 오르는 것과 정치국 진입을 보장하기로 한 것이다. 장가오리는 당연히 그의 말을 따랐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1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장가오리는 산둥성 부서기, 대리성장, 성장으로 승진했다. 2002년 16대 퇴임을 앞둔 장쩌민은 자신의 심복 우관정(吳官正 당시 산둥성 서기)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시켜 중앙기율위원회 서기를 맡게 했다. 그리고 장가오리를 우관정에 이어 산둥성 서기에 임명했다. 결국 불과 2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장가오리는 산둥의 1인자가 되었고 장쩌민의 은혜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퇴임 후 장쩌민이 태산(泰山)을 참배하려 하자 장가오리는 태산 전역에 봉쇄령을 내리고 타이안(泰安)시 전직원 및 지난(濟南)의 청장급 이상 간부들을 총동원해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가졌다. 그는 “장쩌민은 전당, 전군, 전국 인민이 가장 경애하는 위대한 지도자”라고 찬양했고 또 “장쩌민 만세”를 외쳤다. 한편, 후진타오가 이 말을 들은 후 크게 화를 내며 장가오리를 중국석유화학으로 좌천시킨 후 쌍규(雙規)에 걸어 제거하고자 했으나 군권을 장악한 장쩌민을 감안해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장가오리는 장쩌민을 배경으로 삼아 산둥에서 파룬궁탄압에 앞장 서는 등 각종 악행을 저질렀으며 산둥 관리 및 민중들의 반감을 샀다. 이에 산둥성 민중들이 장가오리를 제보하는 투서가 중앙기율위원회에 산더미처럼 밀려들었다.


제보된 내용 중에는 문란한 사생활, 가족의 부패, 음란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2005년 1월 초에는 산둥성 지난, 칭다오, 옌타이 등 지역의 당정기관 및 인터넷 사이트에 장가오리의 비리에 관한 전단이 나타난 적도 있다. 또 80여 명의 인민대표 및 당대회 대표들이 연명으로 중앙기율위원회 및 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 장가오리를 파면하고 탄핵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제보가 너무 심해 중앙기율위에서 그를 찾아가 상징적으로 일부 비리 물건을 내놓게 했다. 결국 장가오리는 5천 위안에 구입한 별장과 로렉스 시계 2개, 여러 폭의 유럽 유화 등을 내놓았는데 시가로 환산하면 300만 위안에 달한다. 당시 후진타오가 이 자료를 보고 장가오리를 쫓아내려 했다.
 

하지만 장쩌민의 비호 하에 산둥성에서 무사히 임기를 마친 장가오리는 2007년 베이징에 진입해 중앙정치국 위원이 되었고 또 톈진시 서기가 되었다. 톈진에 재임하던 기간에 장가오리는 매체를 엄격하게 통제해 절대 부정적인 뉴스가 보도되지 못하게 했다. 톈진시 정법위서기 쑹핑순(宋平順)과 부서기 리바오진(李寶金)이 사망한 것도 장가오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한편 2012년 보시라이가 낙마하고 장쩌민을 두목으로 하는 혈채파의 세력이 약해지자 장가오리는 후진타오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톈진시 정법계통에 ‘후진타오 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당중앙과 고도의 일치를 유지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반면 저우융캉과 정법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하지만 5월 말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장쩌민의 ‘3개 대표론’을 옹호하면서 ‘또한 후진타오 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당중앙과 고도의 일치를 유지해야 한다’고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다. 장가오리의 이런 변화는 분명 후-원-시 및 저우융캉 등의 격렬한 투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장가오리는 자신에게 불만을 가진 후진타오가 자신의 상무위 진입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자신의 힘에 의지해 도박을 건 것이다. 중공 지도부의 다툼은 곧 있을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더욱 격화될 것이다.
 

확실한 것은 장가오리가 톈진에서 대화재의 진상이 밖으로 누설되지 못하도록 엄밀히 통제하는 이유는 베이다이허 회의 때문이다. 왜냐하면 후방이 안전해야 전방에서 승산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쩌민이란 든든한 배경도 사라지고 저우융캉 세력마저 미미해진 지금 장가오리 혼자 톈진 내지는 전국민의 분노를 감당해낼 수 있을까? 과연 그의 의도대로 실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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