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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당(黨)문화] 제8장 습관성 당(黨)문화 사유(2·3)

편집부  |  202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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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SOH 자료실]


목차


2. 당을 떠나지 못하는 창작 내용


3.당을 떠나지 못하는 창작 사유 과정


***********


2. 당을 떠나지 못하는 창작 내용


일찍이 옌안 시기에 중공은 문예창작을 위한 기조를 정했다. 바로 문예는 정치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공은 정권을 건립한 후 여전히 이 “문예의 지도방침”을 신봉해 왔다. 중공에는 선전부가 있어 그것의 “문예방침”에 대한 강제적인 집행을 보증하고 있는데 이는 문예창작의 내용에서 당의 요구를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중공 중앙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매년 개최하는 춘절(春節) 갈라에는 전국적으로 가장 우수한 배우와 예술가, 창작팀이 집중되며, 수백 개에 달하는 전국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중계방송 할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해외에 까지 마수를 뻗친다. 매년 춘절 갈라는 바로 지난 일 년 동안의 정치, 사회와 예술창작의 축소판으로 당문화가 집중적으로 두드러지게 표현되는 것이라 할 만하다. 21세기 “춘절 갈라”에 이르러서는 아예 중공 통치의 암흑에 대해서는 털끝 만한 풍자도 하지 못하게 하고 주제를 미리 정하여 전문적으로 “춘절갈라”를 위한 전용 가사를 썼다. “좋은 나날”, “점점 더 좋아지네”, “5복(五福)이 문 앞에 왔네”, “갈라의 즐거움”, “태평성세의 대 친목회” 등으로 공산당의 축제로 민족의 기쁨을 대체했고, 당문화로 전통문화를 단속했다. 백성들의 고통, 민족의 위기는 곳곳에 자욱한 짙은 정치 분위기 속에서 증발되어 버렸다.


“당”이 문예작품의 기조를 엄격히 규정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요구와 규정을 준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작품이 봉쇄당할 것이다.


중국 각지에는 곡조가 아름다운 민요들이 아주 많으며 줄곧 민간에서 전해져왔다. 그러나 민요의 내용은 대개 애정을 위주로 한 것이다. 비록 어떤 것은 고향 산천을 노래한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중공의 문예는 정치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기조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때문에 1980년대 이전에 이런 가곡들은 원래 대부분 중공이 허락하는 범위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민요들을 당문화에 독해된 예술계 인사들이 직접 훔쳐다가 당의 공덕을 노래하는 데 이용하거나 혹은 당문화의 요구에 따라 고쳐서 정치적인 내용을 부여한 “재창작”이 되어 거짓에 미혹된 민중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중공도 새롭게 고친 “민요”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를 테면, 산베이(陝北) 민요에서 탈바꿈해 나온 “동방홍”, “번신도정(?身道情)”, “산단 단화 붉게 피었네”, 몽골민요에서 나온 “초원에 지지 않는 태양이 솟네”, “나는 말을 타고 초원을 지나네”, 티베트족 민요에서 나온 “북경의 금산위에서”, ” 마오 주석께 하다를 드리네”, 허저(赫哲)족 민요에서 유래한 “우쑤리강 뱃노래” 하니(哈尼)족 민요에서 유래한 “아보(阿波) 마오 주석” 등이다. 이런 가곡들이 “재창작”을 거쳐 민간으로 전해간 후 사람들에게 마치 각 민족 민중들이 모두 열광적으로 중공이나 그 당두목을 옹호하는 것과 같은 일종의 가상을 준다. 그런데 중공은 파렴치하게도 민족 음악에 달라붙은 이런 부체(附體) 작품을 “민족 음악을 발전”시킨 이른바 “공헌”이라고 떠들어 댄다.


2005년 후난(湖南) 유선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제작한 “슈퍼 여자가수(超級女聲)” 프로그램은 전국을 풍미하여 젊은 사람들의 폭넓은 환영을 받았다. 이 프로의 인기는 중공의 가장 중요 매체인 중앙 텔레비전 방송국을 직접적으로 위협했다. 그리하여 순 오락적인 이 프로그램은 곧 매체의 비난을 받기 시작했고, 도처에서 모두 없애라는 함성이 들려왔다. 금년에는 이 프로그램에서 주최측이 특별히 당의 찬가를 불러 인기가 올라간 소위 “원로 예술가”를 초청하여 시합에서 일등을 차지한 가수와 함께 “공산당 경전” 가곡 “말아, 너 좀 천천히 걸어다오”, “산 노래를 친인에게 드리네” 등을 불렀고, 아울러 “원로 예술가”에게 젊은이들을 가르쳐 주길 청했다. 당을 떠나지 못하는 이런 “창조적인 구상”은 상당부분 중공이 유지하고 있는 기조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승인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창작 내용에서 당의 사유습관을 벗어나지 못하는 또 하나의 표현은 당이 부정하는 것이면 따라서 부정하는 것에서 표현된다. 신불(神佛)에 대한 신앙이 봉건 미신으로 부정되었고, 전통문화는 독재와 전제(專制)의 동의어가 되었으며, 중공 이전의 역사인물들은 반드시 “역사적 제한” 속에 존재해야 하며, “봉건”이란 한 마디로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충효인의(忠孝仁義) 등의 전통미덕, 제왕장상(帝王將相), 재자가인(才子佳人), 성현충양(聖賢忠良) 등 인물들을 별책에 몰아넣었다. 


십년 문화혁명의 파괴는 “4인방”의 착오로 귀결되었고 몇천 만 명이 굶어죽은 인위적인 기근은 3년 “자연재해”로 변했으며 “6.4” 학살은 정부의 행위가 이해할 만한 것으로 학생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한다. 파룬궁에 대한 비방은 천지를 뒤덮을 지경이다. 중공과 견해가 다른 정당이나 단체에 폄하하는 색채를 띠지 않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중공의 말을 들으면 애국이고 중공을 비평하면 반(反) 중국이 된다. 중공에 의해 부정된 이런 대상들은 대개 예술 작품에서 비판받고, 추악하게 표현되며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형상으로 왜곡된다.


역사적으로나 현실생활 가운데 중공의 어두운 면과 중공의 공격대상은 창작의 금지지역이 되어 사람들은 멀리 피한다. 중공의 금지지역을 우연하게 건드린(이를테면 민주, 헌정, 인권 등의 화제) 기자, 작가는 분분히 체포되기에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단속한다. 간혹 민감한 화제가 제기되긴 하지만 역시 진실한 면모와는 거리가 멀고 중공의 “휘황한 형상”에는 별로 영향이 없으며, 중공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창작범위가 아주 넓어 작품도 매우 풍부해졌다고 생각한다. 특히 최근 몇 년래 정보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문예창작에 참여하는 민중이 점점 더 많아지고 창작의 제재도 더욱 넓어졌거니와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창작 주제들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이른바 음란한 성(性) 문학이 횡행하는 것이다. 


이는 민중들의 창작이 완전히 자유롭고 당을 벗어났기 때문이 결코 아니고 도리어 사람들은 이런 주제가 중공의 이데올로기에 위협을 주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비로소 거리낌 없게 된 것이다. 중공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당의 금지구역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튼튼히 박혀있기 때문이다. 금지구역을 에돌아 공을 치는 것은 습관적인 창작 사유의 일부분으로 이는 사실 중공이 제정한 창작 규칙에 대한 복종을 대표한다.


3. 당을 떠나지 못하는 창작 사유 과정 


문예창작에 대한 당문화의 가장 큰 영향은 사람들의 사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유행하는 많은 사극 가운데 고대 궁중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는 전부 서로 물고 뜯는 것으로 관료 사회는 예전부터 그래왔고 모두 검은 것으로 표현된다. 이런 창작 사유는 당문화 역사관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결과이며, 전통 관념을 말살하고 현대인의 관념으로 옛 사람을 표현한 것이다. 몇천 년 동안의 전통 중국사회를 온통 암흑으로, 사람마다 서로 투쟁하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로 묘사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중공의 “광명”을 돌출시키려는 것이다. 부패는 고금중외에 걸쳐 관리사회의 일반적인 폐해라는 것으로 중공의 부패를 희석시키려는 것이며, 중국인들을 기만하여 중공 악정(?政)의 원인을 전통 문화에 귀결시키려는 것이다.


실화문학작품을 창작함에는 흔히 이런 형식이 있다. 만약 천재인화가 발생하면, 이를테면 본 절의 첫 부분에 든 예처럼 당이 어떻게 인민에게 관심을 가졌는가를 말해야 한다. 만약 관리라면 곧 어떻게 당의 지도하에 인민을 위해 봉사했는가, 이를테면 《쿵판선》 따위를 쓴다. 만약 관리가 제멋대로 나쁜 짓을 했다면 마지막에는 당이 최종적으로 정의를 유지한다. 만약 정책이 잘못된 것이면 끝내 당이 어떠어떠하게 착오를 시정한다. 만약 어두운 면이 있다면 관리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며 최후엔 여전히 당의 “위대하고 광명하며 정확함”을 부각시킨다. 


경제방면의 어떤 성과이든 기필코 당의 “영명한 정책”의 인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떠한 기업의 발전이든 반드시 당과 정부의 “간절한 배려”를 떠날 수 없다. 교육, 과학기술상의 어떠한 성과든지 “당중앙”의 “정확한 영도”와 “친절한 배려”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인재가 나오거나, 개인이 어떤 성과를 올려도 기필코 당의 “배양”을 벗어나지 못한다. 군대는 더욱 “승리는 당의 지도를 떠날 수 없다.” 샤강(下? 사실은 실업)한 노동자마저 약간이라도 상황이 개선되면 역시 당의 “배려와 지지”를 떠날 수 없다. 종교마저도 “모든 성과는 전부 당과 정부의 지도, 배려와 지지를 떠날 수 없으며 오직 당의 지도를 옹호하고 사회주의의 길을 걸어야만 광명한 전도가 있다.”는 등이다.


중공의 부패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으며 민중들의 원망은 발설할 곳이 없다. 최근 들어 “반(反)부패 영화”들이 민중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전형적인 것들로는 이를테면 《생사 선택》, 《신중국 가장 큰 안건》 등이다. 사실 이런 작품과 “문화혁명”이 막 끝났을 시기의 상흔(傷痕)문학이나 상응하는 영화들 이를테면 《천운산 전기》, 《수갑을 찬 여객》, 《해외 동포》 등과 같이, 그들이 어떻게 주제를 발굴하든지, 역사와 현실에 대해 어떻게 사고하고, 어떻게 일부 사상의 금지구역를 돌파하려 시도하든지, 어떻게 사람의 생존상태에 관심을 갖고 예술의 표현형식을 확장하든지 간에 모두 당문화의 사유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작품의 결말은 또 조직을 믿고 당을 믿으며 당은 잘못을 바로잡을 결심이 있다는 데로 귀결된다. 그러나 중공이 조성한 사회 병폐, 민중의 고난은 두루뭉술하게 “시대의 비극” 탓으로 돌렸고 중공의 죄책(罪責)을 가볍게 했다.


중국 민간에는 “악고(惡?)” 창작이 상당히 유행하였다. 예를 들면 모 공장의 상인은 레이펑(雷鋒)과 마오쩌둥의 어록을 콘돔 박스에 인쇄했다. 보기에는 이것이 몇 년래 중공 당문화 주입에 대한 일종의 배반인 것 같지만, 사실상 여전히 중공이 수립한 우상의 권위에 대한 인정으로 여전히 당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당문화는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오늘날 중국인들의 생활은 일체 방면에서 모두 “당”에 점령되었다. 이는 곧 사람들의 사유가 당문화의 언어요소를 벗어날 수 없게 했으며 이런 요소로 사고하고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부 이른바 특수한 창조적 구상이 있는 광고어 “××를 끝까지 진행하자”, “××를 꼭 실현하고야 말겠다”는 것 역시 창작 사유 과정이 당문화의 언어 요소를 떠나지 못한 예들이다.


1980년대 말부터 시작하여 아주 많은 중국인들은 이른바 “옛노래 다시 부르기”에 몰두하였다. 즉 적나라하게 중공을 찬양하는 이른바 “홍색경전”을 현대악기로 새롭게 연주하거나, 혹은 현대 창법으로 부른다는 의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것은 순전히 옛날을 회고하기 위해서이며 “위대한 수령에 대한 열애”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한다. 어떤 학자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1945년 이후 독일 민중들은 히틀러를 노래하는 형식으로 옛날을 그리워했으며,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표대회 이후 구(舊) 소련 민중들도 2천만 명이 넘는 소련인들을 학살한 스탈린을 찬양하는 가곡을 통해 옛날을 그리워했다. 사람들이 지나간 노래에 열중하는 것은 사실상 당의 유전자가 일찍부터 사람들의 문화세포에 스며들었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자신의 일부분으로 여긴다.


창작 습관이 당의 사유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런 표현은 당문화로 뒤덮인 거대한 사회 환경에 장기적으로 물들었기 때문인데 자각적으로 형성된 습관이 있고 또 장기적인 압력 하에 강요당해 이렇게 된 상황도 있으며, 개인 이익, 정치자본을 긁어모으기 위해 의식적으로 이렇게 한 것도 있다. 또는 당문화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도리어 벗어나지 못하고 창작 사유습관이 비자각적으로 여전히 당을 떠나지 못하는 상황이다(이를테면 “악고” 작품은 여전히 당문화 중에서 맴돌고 있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당은 강제적인 수단을 통해 당문화를 민중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정신적 양식”이 되게 했으며 한 세대 또 한 세대에 걸쳐 문예 창작자들을 양성했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은 또 되돌아와 대중과 그들 자신에게 영향을 끼쳐 결국에는 당문화를 사람들이 창작하는 사유습관의 고정적인 추세로 되게 했으며 사람들의 창작이 습관적으로 당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여기서 특별히 제기할 것은 문예는 단지 창작 중에서 아주 전형적인 한 방면일 뿐이라는 점이다. 창작이 습관적으로 당의 사유방식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각 업종에 고루 스며들어 있다. 구체적으로 창작한 것은 아마 같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당문화의 영향을 받아 소재 선택에서부터 사고, 구체적인 창작에 이르기까지 매 과정마다 모두 당문화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진정으로 자유롭게 창작하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려면 우선 당문화 사유 속에서 뛰쳐나와야 한다.  (계속) / 에포크타임스



편집부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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