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그인
    • 회원가입
    • 사이트맵
페이스북 바로가기 트위터 바로가기
  • 중국

  • 국제/국내

  • 특집

  • 기획

  • 연재

  • 미디어/방송

  • 션윈예술단

  • 참여마당

  • 전체기사

검색어 입력

[해체 당(黨)문화] 제7장 생활 속의 당문화(1)

편집부  |  2021-07-10
인쇄하기-새창



▲ [사진=SOH 자료실]


목차


1. 중국 전통 책력을 농력(農曆) 또는 음력으로, 설을 춘절(春節)로 부름


1) 황력(皇曆)을 농력 혹은 음력으로 부름


2) 신년(新年)을 춘절(春節)로 호칭


***********


1. 중국 전통 책력을 농력(農曆) 또는 음력으로, 설을 춘절(春節)로 부름 


오늘날 중국인들은 전통적인 역법(曆法)을 농력(農曆) 혹은 음력(陰曆)이라고 부르며, ‘정월 초하루’를 춘절(春節)로 부른다. 여기에서 사용한 ‘농력’, ‘춘절’ 등의 설법은 뚜렷한 당문화의 함의를 지니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지 한 명사의 변화로 보이지만 수천 년 역사의 전승은 이로 인해 단절되고 말았다.


1) 황력(皇曆)을 농력 혹은 음력으로 부름


중국인들은 역사를 아주 중시해 왔으며 역사에 대한 기재의 상세함과 정확함은 오랜 역사를 지닌 유럽이나 혹은 아프리카와 비교해 볼 때도 차이가 몹시 크다. 이것은 물론 중국인들이 역사 기록에 대한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중국 특유의 역사 편찬의 이기(利器)인 기년방식(紀年方式)이 있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역사”는 바로 “어느 해”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를 기재하는 것이다. 만약 기년(紀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곧 역사를 편찬하는데 아주 큰 장애를 초래한다. 바로 이 때문에 유럽의 역사에서 통일 역법(17-18세기)이 존재하기 이전의 연대는 모호하거나 심지어 혼란했던 것이다.


중국 전통 역법은 간지(干支)로 연도를 기록하는 문제를 해결했다. 소위 “간지”란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를 줄인 말이다. 이 중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를 10 천간이라고 하고,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를 12 지지라고 한다. 


기년(紀年)은 순서에 따라 간지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오는데 갑자(甲子)를 시작으로 60년을 주기로 순환하는데 끊임없이 돈다. 이와 같은 간지 기년의 방식은 중국 역사로 하여금 연대를 정하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몇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중국인들은 여전히 아주 쉽게 중국 사서(史書) 중의 기년을 서기로 대응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중국인들은 월(月), 일(日)과 시간까지도 모두 간지로 기재했다. 바꾸어 말하면 천간과 지지에서 각기 한 글자를 이용하여 매 시각을 모두 연, 월, 일, 시의 간지로 표기할 수 있다. 때문에 모두 여덟 글자로 특정한 시간을 표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06년 6월 6일 아침 6시를 간지로 표기하면 병술년(丙戌年) 갑오월(甲午月) 병인일(丙寅日) 신묘시(辛卯?)에 해당한다. 만약 이 시각에 출생한 사람이 있다면 그의 “생진8자(生辰八字 역주: 우리나라에서 보통 사주팔자라고 부르는 것)”는 바로 병술(丙戌), 갑오(甲午), 병인(丙寅), 신묘(辛卯)가 된다.


중국 최초의 역법은 헌원황제(軒轅黃帝)가 반포한 것이다. 헌원황제가 ‘인문초조(人文初祖)’로 존중받는 것에서도 역법에 대한 중국인들의 중시를 보아낼 수 있다.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기재된 황제,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와 순(舜)은 모두 역법을 수정했다. 순임금 시대에 사람들은 이미 일 년의 날짜 및 절기 구분에 대해 상당히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금 사람들이 사용하는 양력은 바로 태양력(양력으로 간칭)으로 그것은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주기를 기초로 한 것이다. 때문에 양력에서 달의 구분은 실제 달의 주기와는 관계없는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이슬람교 역법은 전형적인 태음력(음력으로 간칭)으로 그것은 완전히 달의 주기를 기초로 달을 정한 것이다. 이 경우 1년 12개월은 대략 354일이 된다. 그러므로 33년이 지나면 양력과 1년의 차이가 발생한다.


음양 평형을 중시한 중국 고인(古人)들이 제정한 전통 역법은 달의 주기와 지구가 태양을 도는 공전 주기를 동시에 고려했다. 매월 평균 길이는 삭망월(朔望月)에 가까운데 ‘삭일(朔日 달이 태양과 지구 사이에 놓일 때 지구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는 날을 말함.)’을 매월의 초하루로 정했다. 그러므로 매월 중간에 ‘망일(望日 보름)이 있게 된다. 한편 윤달을 설치하여 일 년의 평균 길이를 실제 공전주기에 가깝게 했으니 이는 ‘음월양년(陰月陽年)’식의 음양합력이다. 


이 역법은 매 년이 기본적으로 계절 변화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또 매 달의 날짜와 달의 주기를 서로 대응시킬 수 있다. 그 외에도 일찍이 순임금 시기에 계절 변화의 24절기(節氣) 구분을 이미 완성했다. 전통 역법 중의 절기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공전주기의 변화에 따라 결정하는데 이것은 태양력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중국 전통 문화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중시했고, 도가에서는 인체를 소우주(小宇宙)라고 여겼다. 때문에 천상(天象)에 대한 관측을 몹시 중시했다. 한(漢)나라 초기에 사마천(司馬遷)이 《사기》를 쓸 때 전문적으로 ‘천관서(天官書)’를 썼는데 별의 운행 규칙, 위치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영향 등 각 방면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한편 천간과 지지를 오행(五行)에 대응시킴으로써 방위, 색깔, 계절, 오장(五臟), 사회 구조 등에 진일보 대응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주역 예측학이 발달했다. 간지로 월(月)을 표기할 때에는 여기의 ‘월’ 역시 전통 역법 중에서 실제 달의 운행주기를 기초로 한 월이었다. 즉 주역 예측 역시 반드시 전통 역법을 기초로 한다.


역사적으로 한 황조(皇朝)가 건립된 후 황제가 새로 등극하거나 혹은 무슨 큰 일, 천재지변 등이 발생할 때면 모두 연호를 고쳤다. 그러므로 역법 속에 또 연호를 더했다. 예를 하면 우리가 잘 아는 ‘정관(貞觀)’, ‘영락(永樂)’, ‘강희(康熙)’ 등은 모두 연호에 해당한다. 전통 황조의 역서(曆書)는 모두 황제가 반포했기 때문에 황제의 연호와 연계되어 있었고 아울러 관방에서 출간했다. 때문에 전통 역법을 ‘황력(皇曆)’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또한 최초의 역법이 황제(黃帝)로부터 내원한 까닭에 ‘황력(黃歷)’이라고도 부른다.


황력(皇曆)은 간지 기년, 24절기를 포함하여 매일의 길하고 흉함, 마땅함(宜)과 꺼림(忌), 혼례, 의식과 잔치(仪式庆典), 건축이나 이사, 일상생활, 제사와 장례 등의 방면과 관련된다.


중국 역법은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을 충분히 체현했고 자연 순환의 운화(運化) 법칙 즉, 시공(시간과 방위)이 서로 움직이고 ‘음’과 ‘양’이 작용한 결과를 함축하는 동시에 우주의 상생상극, 화복(禍福)의 전환, 왕조의 변환, 순환왕복 등 법칙에 대한 중국 고인(古人)들의 이해를 반영하였다. 그 배후에 반영된 것은 도가 문화와 중국 전통 사회의 천지신명을 경외하고 천시(天時), 지리(地理), 인화(人和)를 고려하는 가치관이다.


중국 역법은 음양 평형, 천인합일, 예측학의 내포로 인해 중공이 소멸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중공이 정권을 잡은 후 ‘황력(皇曆)’이 전통 사회의 통치 질서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그 중 아주 많은 예측학, 풍수 등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고 여겨 ‘황력’을 폐지했다. ‘황력(黃歷)’ 혹은 ‘하력(夏歷)’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역사를 돌아보게 할 수 있기에 중공은 전통 역법을 ‘음력’으로 부르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음력’이란 말은 마땅히 틀렸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국 역법은 ‘음양합력’인데 ‘음력’이라고 부르면 전통 문화 중의 음양평형이란 관념을 깨뜨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공은 ‘음’이란 글자 역시 여전히 도가의 술어이므로 이 역시 수련의 내포를 지닌 것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중공은 1968년 ‘네 가지 낡은 것’을 없앨 때 전통 역법을 ‘농력(農曆)’으로 고친 것이다.


중공이 전통적인 황력을 농력이라고 부르자 사람들에게 일종의 착각이 생겼다. 마치 전통 역법의 역할이 농업에만 제한된 것 같고 농업에서만 쓰이는 것으로 여겼다. 이는 또한 중공의 유물론 원칙과도 일치하는데, 즉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하듯이 농업 사회에서 생겨난 역법은 그 작용이 농사에만 국한된다는 것이다. 마치 농민들에게만 쓸모가 있을 뿐 현대 사회와 다른 사람들과는 별로 큰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전통 역법은 이때부터 변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사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전통 황력의 작용은 절대로 농업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백성들의 생활과 더욱 밀접한 부분이 있으며, 직접적으로 ‘천지인’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을 포함하여 천간과 지지를 기초로 오행의 상생상극에 근거하여 확정한 매일의 길흉과 의기(宜忌), 그리고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믿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각종 명절이나 제사 활동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일상생활과 긴밀히 연관된 이런 문화 내용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수시로 자신의 전통 문명을 되돌아보게 할 수 있었다. 중공은 그것을 쉽게 농력이라 불렀지만 실제적으로는 박대(博大)한 문화내포를 함축한 전통 황력을 얕잡아 보고 파낸 것으로 전통 문화의 전승을 단절시켜 버린 것이다. 오늘날 젊은이들과 농력을 말해 보면 다만 얼마 남지 않은 겨우 몇 가지 명절만 알 뿐이며 농민들의 농사와 관계가 있다는 것만 알뿐 그 중에 포함된 심후한 전통문화의 내포는 모른다. 그 외 중공 당문화 중에 농민은 늘 ‘정치적 각성’이 높지 않고 ‘봉건, 우매, 낙후’ 등과 연계되어 있다. 중공이 황력을 농력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전통 역법에 대한 일종의 폄하이다.




▲ 중공은 전통 복장, 윤리, 반(反)부패, 개혁 등 생활 곳곳에 당문화란 음료수를 섞어 넣었다. [사진=에포크타임스]


2) 신년(新年)을 춘절(春節)로 호칭


설을 쇠는 것은 중국인 사회에서 최대의 전통 명절이다. 《설문해자》중의 ‘년(年)’의 의미는 ‘오곡이 무르익는다’는 뜻이다. 옛날 사람들은 풍성한 수확을 거둔 후 신명(神明)의 보우에 감사를 드리기 위해 신에게 감사드리는 제사를 거행했으며 아울러 새해에도 기후가 순탄하길 기원하는 중요한 의식을 거행했다.


전통적인 신년(新年)은 섣달 초파일부터 시작해 정월 보름에야 끝난다. ‘섣달 초파일(臘八)’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개오(開悟)하여 성불하신 날인데 민간과 사찰에서는 이날 모두 납팔죽(臘八粥)을 먹어 새해에도 오곡이 풍성하고 가축이 흥성하기를 빌었다.


이어 섣달 이십삼일에는 ‘작은 설을 쇤다.’ 이 날은 조왕신(灶王爺)이 승천하는 날이다. 민간에서는 조왕신이 일 년 동안 식구들의 일거일동을 감독한 상황을 섣달 이십삼일에 천정(天庭)에 가서 보고하는 날이라고 여긴다. 섣달 그믐이 되면 다시 조왕신의 새로운 초상을 붙인다. 이런 활동은 중국인들이 “머리 석자 위에 신령이 있다(頭上三尺有神靈)”는데 대한 일종의 표현이기도 하다. 조왕신의 감독 역할을 믿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히 자신의 행위에 대해 단속을 하게 된다.


섣달 삼십일을 ‘섣달그믐(除夕)’이라고 부르는데 이 날 신년 축하가 최고조에 이른다. 이는 “신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그중 천지상[天地桌]을 차려놓고, 문신(門神)을 붙이고, 복신(福神), 재신(財神), 귀한 신, 희신(喜神), 태세신(太歲神)을 맞으며, 조왕신의 초상을 청해오고, 춘련(春聯)을 붙이며, 폭죽을 터뜨리는 등은 모두 중국인들이 신을 공경하는 전통과 관계가 있다. 천지상은 신불을 공양하고 신을 맞이하기 위해 임시로 만든 상이다. 춘련의 원형은 도부(桃符)인데 전설에 귀신이 복숭아나무를 두려워한다고 여겨 오대(五代) 때 촉(蜀)나라의 군주 맹욱(孟旭)이 복숭아나무로 만든 부적에 “신년납여경 가절호장춘(新年納餘慶,嘉節號長春)”이란 글을 쓴 것이 춘련의 정식 시작이었다.


조상에게 제를 지내는 것도 설을 쇠는 중요한 부분이며 대개 자신의 집에 조상의 위패를 순서대로 정문 대청에 세워놓고 제물(祭物)을 진설했다. 그런 다음 제를 지내는 사람들이 나이 순서에 따라 향을 피우고 절을 했다. 《논어》에 이르기를 “초상(初喪)을 삼가고 멀리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두터운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慎終追遠,民德歸厚矣 역주:《논어 학이(學而)》)”. 때문에 조상에게 제를 지내는 것은 효도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옛 사람의 도덕 전통에 대한 계승이기도 하다.


1949년 9월 27일, 중공은 정권을 탈취한 후 정부를 세울 토론을 하면서 ‘정월 초하루’를 ‘춘절’로 고쳤다. 마치 그저 ‘봄’을 경축하는 일반적인 명절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만들었다. 이것은 그럴듯한 이름처럼 보이지만 중공이 전통 문화를 비판하고 대체하며 무신론을 선양할 필요에 따라 만든 것이다. 이렇게 고침으로써 전통적인 설 명절에 신명의 보살핌에 감사드리고 신명과 선조를 공경하는 문화적 내포가 사라졌다.


이때 설날에 나누던 덕담이 “금년에 북경에 가서 마오 주석을 뵐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혁명 정신을 대대로 전하자!” 등과 같은 정치적인 말로 변했으며 춘련은 “착취에서 벗어나도 공산당을 잊지 말고, 행복할 때도 마오 주석을 잊지 말자!”로 변했으며, 신을 공경하고 조상에게 제를 지내는 것이 “쓰라린 과거를 회상하고 오늘의 행복을 생각하는” 것으로 변했으며 조직적으로 정치적인 영화를 보고 ‘교육적 의의’가 있는 갈라 공연을 조직한다. ‘단배’하면서 부르는 노래는 “인민 공사에는 새 풍속이 많기도 하네. 시어머니 작은어머니 모두 노래 부르네. 춘절에는 미신을 믿지 말고 모두들 무대에서 공연을 하네.”였다. 설에 집에 붙이는 그림은 신을 공경하고 복을 빌던 것에서 ‘대약진’, “인민 공사는 좋다”, “춘절에 노삼편(老三篇)을 학습하자”, “온 집이 공보(公報)를 읽자!”로 변했다.


중공 신문에서는 백성들이 설을 쇠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어떤 사람은 온 가족이 모인 기회를 이용해 마오쩌둥 사상 가정 학습반을 꾸릴 작정을 했고, 어떤 사람은 그믐날 밤에 쓰라린 과거를 회억하는 밥(忆苦饭)을 먹을 준비를 하면서 ‘이 설밥은 계급 교육의 밥으로 우리는 꼭 뱃속에 넣을 것이며 마음속에 기억하며 영원히 계급의 쓰라림을 잊지 않으며 영원히 당을 따라 혁명할 것이다!’ 라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정 비판회를 열거나 혹은 친척친구를 만나 함께 ‘사상 수확’을 교류하며 ‘문화 대혁명의 아주 좋은 형세’를 마음껏 이야기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의 전통 명절인 설은 공산당에 의해 백성들에게 당문화를 주입하는 정치수업으로 변질되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전통적인 경축 방식이 약간 회복되긴 했으나 30년 동안 파괴를 겪고 새로 태어난 세대는 이미 전통을 다시 회복할 가능성이 없어졌다. 최근 20년 동안의 ‘춘절 연합 갈라’를 중공은 중국 백성들의 ‘새로운 풍속’이라고 떠들어대고 있다. 그러나 이 갈라는 완전하게 ‘주선율’을 노래했는데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주제로 시종 관통하고 있다. 아울러 격조는 날이 갈수록 거칠고 저속하다. 천백년 동안 설 속에 포함되었던 정신적 추구와 인생의 감회는 중공에 의하여 거의 다 파괴되었다 (계속) / 에포크타임스



편집부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목록  
글쓰기
번호
제목 이름 날짜
42 [해체 당(黨)문화] 제8장 습관성 당(黨)문화 사유(6)-하
편집부
21-09-12
41 [해체 당(黨)문화] 제8장 습관성 당(黨)문화 사유(6)-상
편집부
21-09-04
40 [해체 당(黨)문화] 제8장 습관성 당(黨)문화 사유(5)
편집부
21-08-29
39 [해체 당(黨)문화] 제8장 습관성 당(黨)문화 사유(4)
편집부
21-08-22
38 [해체 당(黨)문화] 제8장 습관성 당(黨)문화 사유(2·3)
편집부
21-08-15
37 [해체 당(黨)문화] 제8장 습관성 당(黨)문화 사유(1)
편집부
21-08-07
36 [해체 당(黨)문화] 제7장 생활 속의 당문화(5)
편집부
21-07-31
35 [해체 당(黨)문화] 제7장 생활 속의 당문화(4)
편집부
21-07-24
34 [해체 당(黨)문화] 제7장 생활 속의 당문화(2·3)
편집부
21-07-18
33 [해체 당(黨)문화] 제7장 생활 속의 당문화(1)
편집부
21-07-10
12345
글쓰기
402,431,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