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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그 사람 - (26)
 
  
2007-09-04 04:37:34  |  조회 8131

장쩌민과 쩡칭훙은 양씨 형제를 공격하는 자료를 수집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한편 배후에서 양바이빙의 ‘100인 명단’ 사건을 확대시키고 정가에 루머를 퍼뜨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의 계획대로 베이징에서는 “양씨 형제가 안하무인이다”, “양상쿤이 덩샤오핑을 대신하려고 한다”, “양상쿤, 양바이핑이 무혈정변을 일으키려 한다”, “덩샤오핑이 멀지 않아 사망한다”, “양상쿤이 군사위 주석이 되려 한다.” 등등 양씨 형제에 대한 갖가지 소문이 난무했다.

장쩌민과 쩡칭훙은 또한편 장아이핑, 왕다오한 등 양씨 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접촉하여  덩샤오핑에게 군대내에서  세력이 큰 양씨 형제가 정권을 탈취하려는 야심이 있으니  중앙군사위원회를 개편해 양씨 형제의 군사권을 박탈할 것을 제안하게 했다.
 
이러한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채 양상쿤은  100인 명단이처리 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소식이 있을리 없었다.  양상쿤은  장쩌민을 찾아가  이유를 물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의견도 들어 보아야 하니 좀 기다려 보자고  했다. 그런다음 쩡칭홍은 덩샤오핑의 아들 덩푸팡을 만나기로 하고 장쩌민은 정치부 부주임 위융보(于永波)와 함께 덩샤오핑을 찾아 갔다.   중앙군사위 부주석 류화칭도 그자리에 있었다. 장쩌민은 병석에 누운 덩샤오핑에게 닥아가 충성심이 가득담긴 표정을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양씨 형제가 군사권을 빼앗으려는 움직이 보입니다. 양씨 형제를 경계하셔야 할것 같습니다."
  
 덩샤오핑은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은밀히 사람을 시켜 정가의 소문을 알아 보도록 했다.  장쩌민의 말 그대로 이었다.  덩샤오핑은 자신의  건강도 악화되니 후사를 빨리 정해야겠다는 결심과  14차대표대회에서 개혁개방 노선을 굳히는 동시에 6.4사건의 명예회복을 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여 후환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하여 덩샤오핑은  장쩌민과 쩡칭홍이 쳐 놓은 음모의 덫에 걸려들고 만다. 더욱이 천윈과 보이보(薄一波)까지 가세해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교체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엉뚱하게 양씨 형제의 군사권을 박탈하고 노장인 류화칭, 장전(張震) 을  장쩌민의 보좌관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중공 제14차 대표대회에서 장쩌민의 후계자로 당시 49세인 후진타오를 지명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중공 역사상 후계자의 후계자를 정한적은 없었다.

 훗날  장쩌민은 쿤이 쓴 자신의 평전에서 후진타오가 덩샤오핑이 직접 정한 후계자라는 것은 공개된 비밀었음에도 불구하고 “나 장쩌민은 10년 전부터 후진타오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장쩌민은 후에  자리를 지키고 물러나지 않아 국민들의 질책을 받았지만 자신의 평전에서는 오히려 지도자의 연령층을 낮추는 것을 지지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또 장쩌민은 자신이 "대부분의 서방 지도자들과 한 시대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후진타오를 국가 부주석으로 임명하여 국제 사회에서의 중국의 이미지를 개변하기를 바랐다”라고 쓰게 했으며 “누구도 우리가 후진타오를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장쩌민은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모두 평전을 통해 다시 엮어냄으로써 진실을 감췄다.

류화칭에 의하면 당시 이미 퇴직한 덩샤오핑은 14차대표대회가 열리기 전야인 10월 6일, 중앙정치국에 중공군사위원회 인사 배치와 관련해 편지 한 통을 보냈다고 한다. 편지에는 “앞으로 류화칭, 장전이 장쩌민을 도와 군사위 일상 업무를 주관하게 하고 장래 후계자 선택은 군대에 익숙한 사람이 담당해야 한다”라고 썼으며 새로운 군사위 지도자 성원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제기했다.

드디어 중공 제14차 대표대회가 10월 12부터 18일까지 7일간 베이징에서 열렸고 회의에서 양씨 형제는 뜻밖에 군사권을 박탈당했다. 양바이빙은 유명무실한 정치국위원으로 되어 보기에는 승직한 것 같았으나 사실은 군사권을 박탈당한 것이었다.

계략이 뛰어난 덩샤오핑이었지만  장쩌민과 쩡칭훙 두 사람의 음모계책에는 넘어가고 말았다. 이일로 덩샤오핑과 양씨 형제의 60년 동안 쌓아온 우정은깨어져 서로를 외면한 채 발길을 끊었다. 자신의 가장 유력한 지지자였던 후야오방, 자오쯔양, 양씨 형제를 잘라 버린 덩샤오핑은  스스로 망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류화칭은 덩샤오핑에게 충성하려고 했지만 나이가 많은데다 능력의 한계가 있어 정치투쟁 중에서 장쩌민과 쩡칭훙의 적수가 될 수 없었으며 몇 년 후  숙청되고 만다.

두얼굴의  장쩌민은 언제나 이용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는 비굴할정도로 아첨하지만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헌신짝 버리듯 했다. 가장 전형적인 예가 바로 양씨형제에 대한 그의 태도변화인 것이다.   1989년 11월, 중공 제13차 5중 전회에서 덩샤오핑이 군사위원회 주석직무를 내려놓고  장쩌민이 군사위원회 주석직무를 맡아 취임 연설을 할당시 였다. 장쩌민은 자신이 “충분한 준비가 없고 능력이 부족하다.” “군사 업무에 생소하다”며  양상쿤이 군사위 제1부주석, 양바이빙이 군사위 비서장을 맡는 것이 자신의 업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장쩌민의 이 연설은 10여 일 뒤 ‘인민일보’, ‘해방일보’ 등 여러 주요 관영 신문 제1면에 발표되었는데  이러한 장쩌민의 겸손한 태도를  보여주는 연설이 관영 신문 제1면에 발표되었다는 것은 양씨 형제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후에 덩샤오핑의 앞에서 양씨 형제를 모함한 사람 역시 장쩌민이 아닌가!

이런 이중적인 수법은 덩샤오핑의 가족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덩샤오핑이 살아 있을 때,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부인 줘린(卓琳)을 만나게 되면 멀리서부터 크게웃는 얼굴을 보이면서 존경의 표시를 하였지만 덩샤오핑이 사망한 뒤에는 덩샤오핑의 자녀들을 사정없이 심하게 대했다. 중국에서 가장 부패한 관리로 불리는 장쩌민의 아들이 오히려 덩샤오핑의 아들을 부패의 혐의가 있다며 직책을 빼앗으려 했고 덩샤오핑과 관련된 언론에 대한 그의 가족들의 해명할 기회를 박탈했다.

장쩌민이 처음 베이징으로 불려가 덩샤오핑을 만났을 때의 모습을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장쩌민은 당시 굽실거리며 억지로 웃음을 지은 채 불안해하고 있었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런 장쩌민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덩샤오핑에게 아첨하러 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은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덩샤오핑이 웃으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새로 올라갈 총서기라고 소개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하던 일만 하면서 한 번씩 힐끗 쳐다볼 뿐이었다.

장쩌민이 베이징에 처음 입성한후, 가장 먼저  계획한 일이 바로 덩샤오핑의 저택을 드나드는일 이었다. 처음 덩샤오핑의 저택에 들어갔을 때, 장쩌민은 누가 비서이고 누가 간호사이며 누가 외손자이고 친척인지 잘 몰랐으며 심지어 잡일을 하는 사람과 경호원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장쩌민에게는 하나의 원칙이 있었는데 즉, 덩샤오핑의 저택에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누구에게도 절대 미움을 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덩샤오핑의 저택은 늘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으나 경험이 풍부한 장쩌민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장쩌민은 복도나 정원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심지어 어린이를 보아도 튀어나온 배를 가급적 들이밀고 허리를 약간 굽히며 얼굴에 웃음을 띠운 채  “먼저 지나가세요!”라고 공경하는 태도로 말했다. 이런 과분한 행동은 아이들을 즐겁게 했지만 많은 사람들을 역겨워 했고 경호원과 보일러 근무자들은  꿍꿍이가 있다며 두려워했다.

아시다시피 덩샤오핑은 담배를 즐겨 피웠다. 때문에 그의 건강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담배까지 별도로 생산되었는데,  덩샤오핑의 간호사는 그가 제때에 약을 먹도록 책임졌을 뿐만 아니라 담배를 적게 피우라고 일깨워주는 일도 했다. 덩샤오핑이 담배를 피우려고 하면 간호사는 방금 전 피웠던 시간을 알려주면서 조금만 더 참으라고 권했다. 니코틴은 아편보다 중독성이 심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사람에게 인이 박히게 만든다. 때문에 애연가들은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 피우지 못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덩샤오핑이 담배를 피우고 싶어할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의 건강을 생각해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장쩌민은 민첩하게 준비해 두었던 담배를 꺼내 라이터 불까지 붙여서 덩샤오핑에게 건네주었다. 덩샤오핑의 간호사는 놀랍기도 하고 화도 났지만 장쩌민이 덩샤오핑의 환심을 얻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덩샤오핑의 자택에서 덩샤오핑에게 차를 따르고 물을 부어주며 슬리퍼를 가져오는 등 잡일은 모두 간호사와 경호원이 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늘 간호사 혹은 경호원을 앞질러 물을 따르거나 슬리퍼를 가져가 덩샤오핑의 시중을 들어 근무자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덩샤오핑의 집에 드나드는 ‘귀족’들은 지금도 그때 국가주석인 장쩌민이 앞장서 물을 따랐던 일을 흥미진진하게 담론하고 있다.

덩샤오핑 탄생 97주년 기념일인 2001년 8월 22일, 덩샤오핑의 발탁으로 오늘날이 있게 된 장쩌민은 언론에 덩샤오핑을 찬양하는 문장들을 발표해 은인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시하는 동시에 그의 추종자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이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들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배은망덕하고 의리 없는 장쩌민은 도리어 중앙선전부에 명령을 내려 덩샤오핑을 기념하는 문장을 언론에 발표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장쩌민이 이력서를 뜯어고친 이야기가 있다. 1992년 10월에 열린 제14차 당대표대회를 통해 장쩌민은 총서기 자리를 확실하게 지켰지만 여전히 자신의 경력이 부족함을 느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즉시 비서에게 명령하여 이미 검열했던 이력서를 다시 가져오게 하고 “1946년 4월, 중국공산당에 가입, 사업을 시작했다”라고 쓴 부분에 물음표를 달아 비서에게 건네었다.  비서는 장쩌민이 이력서를 고치려고 한다는 것을 바로 눈치 채고 즉시 이력서를 책임진 직원을 찾아가 “총서기께서 상하이 교통대학에 입학한 1943년부터 이미 상하이 지하당 주변조직과 가까이 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라고 말했다. 상하이 지하당에 가까이 한 것도 아니고 주변 조직에 가입한 것도 아니며 그저 주변 조직에 ‘가까이’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얼마나 ‘가까이’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장쩌민은 이렇게 해방전쟁시기 간부로부터 항일전쟁시기 간부로 변신했으며 경력이 하나 더 많아지게 되었다.

중공14차 제1차 전회가 열린 뒤, 장쩌민의 뜻에 따라 신화사가 발표한 ‘중국공산당 제14차 중앙위원회, 중앙군사위원회 지도자 프로필’에는 장쩌민이 “1943년부터 지하당이 이끄는 학생운동에 참가했고, 1946년 4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라고 기록했다.  1943년 당시 장쩌민은 난징 괴뢰정부의 중앙대학에 다니고 있었기에 상하이 지하당 주변조직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사실무근이었다. 상하이 학생운동을 잘알고 있는 차오스는 신화사가 발표한 장쩌민의 프로필에 어처구니없어 하며  장쩌민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더해갔다. 14차 이후, 장쩌민과 차오스사이의 모순은 갈수록 첨예해졌다.

 
1992년 중공 14차대표대회에서는 2002년 16차대회에서 장쩌민의 권력을  후진타오에게 넘겨주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 덩샤오핑은 또 리루이환, 완리 등의 사람에게 마음속 타산을 낱낱이 이야기해줌으로써 확실한 집행을 보장했고 동시에 장쩌민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그들을 위로해 주었다. 10월 19일, 덩샤오핑은 14차에 참석해 전체 대표들을 회견하고 정치국 상무위원들과 후진타오와 악수하면서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나온 사진에서 덩샤오핑과 후진타오가 중간에 있었고 장쩌민은 뒤에 있었다. 장쩌민은 자신의 체면이 깎였다고 노발대발하면서 사람을 파견해 자신과 기타 인물들을 사진에서 모두 지워버리게 했다. 중공중앙 판공실에서 나중에 후진타오에게 준 사진은 배경이 새까맣게 된 채 덩샤오핑과 후진타오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12년이 지난 2004년,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 기념일 때, 이 사진은 놀랍게도 3종류의 같지 않은 판본이 나타나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14차 이후 후진타오라는 인물이 갑자기 떠오르며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장쩌민과 쩡칭훙은 정보부문에 밀령을 내려 후진타오의 일거일동을 엄밀히 감시하게 한 동시에 그에 대한 모든 자료를 수집했다. 후진타오는 자신의 위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잘 알고 그때부터 권력을 물려받기 전까지 매사에 조심하는 길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장쩌민과 쩡칭훙은 음모로 양씨 형제를 넘어뜨리고 총서기 자리를 지키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담력과 야심이 팽창한 두 사람은 음모계책을 꾸미는데 더욱 열중했으며 가짜정보와 불리한 자료를 산포하는 방식으로 중공고위층에서 사람을 끌어 모으고 반대 의견이 있는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타격했다. 때문에 쩡칭훙은 중공고위층에서 ‘블랙킬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기도 하고 증오하기도 한 인물이 되었다.

14차 대회이후, 장쩌민은 겉으로는 덩샤오핑을 공경하는 척 했으나 속으로는 덩샤오핑이 자신을 제거하려고 후계자를 정한 것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칼을 갈았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죽은 뒤, 덩샤오핑의 가족에게 보복을 했는데 보일러실 일꾼, 경호원과 같은 사람들까지 영향이 미쳤다. 이일은 후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자.



對중국 한국어 단파방송 - SOH 희망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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