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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그 사람 - (22)
 
  
2007-07-28 05:08:10  |  조회 5251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실시하고 시장을 활성화시켜 경제상에서 미국과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몇 개 경제특구만으로는 절대 부족하므로 반드시 전국적으로 경제를 개혁하고 전면적으로 개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권을 잡고 있는 장쩌민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개혁개방에 따라 국민들을 통제하기가 갈수록  힘들고 도한 자신의 관직을 잃을까봐 걱정했다. 고위층에 올라 간 장쩌민은 우쭐거리기 시작했고 덩샤오핑마저 무시하려 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과 맞서기위해 “사기업과 자영업자들을 망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일체 불안정한 요소를 맹아 상태에서 소멸하자”는 대응책까지 내 놓았다. 그런 그가 훗날 장쩌민 자신의  가족이 중국에서 가장 큰 부패관리로 되자 그는 또 “자본가를 입당시키자” 말했다.

 덩샤오핑은 천윈과 리셴녠의 말만 믿고 장쩌민을  총서기 자리에 올려놓은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1990년 봄, 덩샤오핑은 상하이에서 시장 주룽지를 여러차례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덩샤오핑은 주룽지가 중공 고위층중에  경제 방면의 인재이고 기백있으며 실속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잔머리나 굴리고 허풍떠는 장쩌민과는 비교가 안되었다. 상하이에 있는 장쩌민의 추종자들이 이 일을 장쩌민에게 보고하자 장쩌민의 질투심은 또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무덕, 무능한 장쩌민은 권력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 주변의 능력있는 사람을 보면 질투를 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장쩌민이 대권을 손에 잡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어 과도기의 일시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최고 직위에 오른 장쩌민은 득의양양했지만 자신의 지위가 아직 확고하지 않고 경력과 능력, 인맥 등에서 한계를 느꼈다. 권력에 대한 강렬한 집착은 그로 하여금 강렬한 질투심이 형성되게 했고 경력과 능력, 인맥이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들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했다.

1991년 2월, 덩샤오핑은 상하이에서 음력설을 보내기 위해 베이징을 떠나면서 “베이징에서는 내가 말을 해도 듣는 사람이 없으니 상하이로 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상하이에 가면  주룽지를 국무원에서 일하게 할 생각으로 양상쿤에게 부탁해 상하이 정부 관리들에게 이 소식을 전달하게 했다.

 1991년 음력설을 맞아 덩샤오핑은 상하이에서 연설을 발표해 개혁개방과 시장경제 활성화를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해방일보’ 총편집국장 저우루이진(周瑞金) 등은 덩샤오핑의 이 연설과 관련해 ‘개혁개방에 앞장서자’,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개혁개방에 임해야 한다’, ‘더 확실하게 개방을 추진해야 한다’, ‘개혁개방은 대량의 능력과 인격을 겸비한 간부를 필요로 한다’ 등 4편의 문장을 썼다. ‘황푸핑(皇甫平)’이라는 필명으로 발표된 이 문장들은 1991년 음력 초하루 날 ‘해방일보’에 처음 실렸는데 그 배후에는 사실 덩샤오핑이 있었다.

 덩샤오핑은 이런 일들을 하면서 장쩌민을 무시했으며 그에게 통보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덩샤오핑과 상하이 시장 주룽지의 직접적인 관여 하에 발표된 개혁개방 관련 문장들은 장쩌민의 질투와 반발을 샀다. 장쩌민은 개혁의 추세에 대해 침묵했을 뿐만 아니라 베이징 정부 내의 좌파인물들의 공격과 비판을 지지했다. 장쩌민은 사람을 파견해 상하이에 머물고 있는 덩샤오핑을 감시하게 하는 동시에 자신은 베이징에서 덩샤오핑을 누르기 위해 기타 원로들을 찾아다니면서 바쁘게 보냈다.

같은 해 4월 12일, 제7기 전인대 4차 회의에서 덩샤오핑은 반대 의견을 물리치고 상하이 시장 주룽지를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했다. 5월에는  주룽지에 대한 덩샤오핑 자신의 지지를 표시하기 위해 주룽지와  함께 베이징 강철회사를 시찰했고 “우리 당 고위층 간부들 중에 경제를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주룽지와 같은 인재는 더욱 높은 자리에서 일해야 한다”고 칭찬했다. 이는 소심한 장쩌민에게 또 다시 놀라움과 질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부터 장쩌민은 측근에게 부탁해 꼬투리를 잡게 하고 기회만 있으면 주룽지를 내리누르고 배척, 타격했다.

 덩샤오핑도 장쩌민이 암암리에 자신을 반대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장쩌민에 대하여  강렬한 불만을 갖게 되었다. 정치국 상무위원 차오스와 부총리 톈지윈(田紀雲)이 여러차례 개혁을 지지하는 연설을 발표하자 덩샤오핑은 “이렇게 훌륭한 연설은 오랫만에 듣는다”고 칭찬했다. 이는 또 장쩌민 마음속에 차오스와 톈지윈에 대한 원한의 씨앗을 뿌려놓았다. 장쩌민 등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강렬한 불만과 실망이 이어지는 가운데 덩샤오핑은 양상쿤, 완리 등과 상의하여 자오쯔양을 다시 복귀시키려고 했으며 이듬해 열리는 제14기 전인대 회의에서 중공 지도부를 대폭 개편하려 했다. 이 소문을 들은 장쩌민은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1991년 6월,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을 복귀시키기 위해 먼저 그의 지지자들인 후치리(胡啓立), 옌밍푸(閻明復)과 루이싱원(芮杏文)을 복귀시키고 후치리를 기계전자공업부 부부장으로, 루이싱원을 국가기획위원회 부주임으로, 옌밍푸를 민정부(民政部) 부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몇 달 뒤인 1991년 말, 그토록 강대해 보였던 소련공산당이 며칠 사이에 무너져 전 세계 정치구도에 거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소련공산당의 해체는 중공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잃게 했고 큰 충격을 주었다. 강대한 소련공산당도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중공은 긴장 상태에 빠졌다. 중공은 늘 “소련의 오늘이 우리의 내일”이라고 말해왔는데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으니 자신의 장래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중공은 또 늘 미(美)제국주의와 일체 반대 세력은 모두 종이호랑이라고 말해왔는데 소련의 해체와 동유럽 정세의 급변은 공산당이야 말로 진정한 종이호랑이라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나무가 쓸어지면 원숭이들도 흩어지듯 독재 정권들은 잇달아 붕괴되었다. 소련의 해체를 기점으로 베를린 장벽의 붕괴, 폴란드의 노동조합 승리,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발생한 벨베트 혁명, 헝가리의 민주화,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사형, 불가리아의 제1차 전국 대선 등으로 공산세계는 힘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공산당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폴란드는 10년, 헝가리는 10개월, 독일은 10주, 체코는 10일, 루마니아는 10시간 걸렸다”고 생생하게 표현하는 사람도 있었다. 공산정권의 연쇄적인 붕괴는 장쩌민으로 하여금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게 했다.

 중공 창당 7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1991년 7월 1일,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경제건설 중심’ 노선과  평화적인 방법으로 중국 체제를 유도하는 방식을  포기할것을 요구하면서 사상 통제를 강화했다.  “4가지 기본원칙을 지키는 개혁개방과 자본주의화 한 개혁개방을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쩌민은 “이론적으로 개혁개방에도 이데올로기적인 투쟁이 있다”고 하면서 직접 비판의 화살을 상하이의 ‘황푸핑’과 주룽지 및 덩샤오핑에게 돌렸다. 개혁개방을 강하게 반대한 장쩌민의 이런 연설은 좌파들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튿날, 장쩌민은 큰 압력을 받고 있는 주룽지 부총리를 홍수 피해가 큰 후베이(湖北)에 보내 재해 상황을 알아보게 하고 자신은 베이징에서 좌파들과 함께 주룽지를 공격할 새로운 음모를 꾸몄다.

 장쩌민은 공산당의  고압정책이 중국경제가 낙후한 근본 원인임을 모르고 오히려 개혁개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계속 좌파의 길로 가려고 했으나 이는 시대를 읽을 줄모르는  뒤떨어진 사고방식이었다.
 쿤은 ‘장쩌민평전’에서 개혁에 공이 큰 장쩌민이 중국을 개변시켰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장쩌민은 처음부터 보수적이고 개혁을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회주의적 태도와 쇼를 잘하는 장기 덕분에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 특히 외국인들을 속일 수 있었다.

 장쩌민은 나중에 사태의 변화로 어쩔 수 없이 개혁을 지지하는 쪽으로 나오기는 했으나 국민들에 대한 사상 통제만큼은 고삐를 늦춘 적이 없었다. 장쩌민은 사상자유를 극도로 증오했으며 반체제 인사들을 애국하지 않는다고 질책했다. 그는 자신의 평전을 쓴 작가 쿤에게 “나는 그들의 혈관 속에서 흐르는 피가 중화민족의 피가 맞는지 의심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다. 나라와 국민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애국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장쩌민처럼 국토를 팔아먹는 일본 매국노와 러시아 스파이가 애국자란 말인가?   다음시간에는 리펑과 군부에 아첨하는 장쩌민을 이야기를 하도록하고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하자


對중국 한국어 단파방송 - SOH 희망의소리
11750KHz, 중국시간 오후 5-6시, 한국시간 오후 6-7시

http://www.soundofhop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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