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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그 사람-(42)-제13장 주위 권고를 뿌리치고 파룬궁 박해에 팔을 걷고 나서다.
2007-12-02 09:14:17 | 조회 8224
(제13장 주위 권고를 뿌리치고 파룬궁 박해에 팔을 걷고 나서다)
파룬궁에 대한 장쩌민의 이지를 잃은 독단적인 탄압, 첫 번째 이야기…….
장쩌민이 정권을 잡은 15년 동안(수렴청정 2년 포함), 중국에는 홍콩, 마카오 반환, WTO 가맹, 파룬궁 탄압 등 역사에 기록될 만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장쩌민은 다른 사건과는 많은 관련이 없었지만 파룬궁 탄압에 대해서만은 특별한 관련이 있었다.
파룬궁 탄압은 장쩌민 정치생애에 있어 전환점이었다. 6.4사건 이후 베이징 정부에 발탁되어 험악한 정치투쟁 중에서 점차 권력을 공고히 한 그였지만 파룬궁 탄압으로 예상치 못한 큰 굴레를 짊어지게 되었다. 장쩌민은 다른 사람들의 권고를 듣지 않고 탄압 기구를 가동한 시각부터, 자의적이 아니게 모든 국가사무를 파룬궁 탄압과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고 자신의 운명도 파룬궁 탄압과 함께 하는 신세가 되었다.
기독교 신자들이, 속세의 인간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힘으로 강대한 로마 제국의 300여년 박해에도 넘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파룬궁도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항쟁을 지속해 과오를 승인하지 않는 장쩌민을 진퇴양난에 빠뜨렸다. 때문에 1999년 이후의 장쩌민의 사상과 행위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파룬궁에 대한 박해부터 알아야 한다.
(1. 죄를 뒤집어씌우다)
4.25 청원이 있은 후, 중국 전역에서는 파룬궁에 대한 조사가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언론에서는 선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공안은 정보를 수집했고, 당 조직에서는 사상 교육을 준비하는 등 탄압을 위한 작업들이 철저히 진행되었다. 장쩌민은 이 일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고 추진시켰다.
파룬궁 창시자인 리훙쯔 선생이 1998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자, 장쩌민은 심지어 미국과 5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감소시키는 조건으로 리 선생을 소환하려고까지 했다. 이에 대해 리 선생은 1999년 6월 2일, ‘나의 약간의 소감’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여 “나는 사람들에게 선(善)하라고 가르치는 동시에 무상으로 사람들을 도와 질병을 제거하고 보다 높은 사상경지에 도달하게 했을 뿐이며 금전과 물질적인 보수를 전혀 받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선해지게 하고 도덕이 고상해지게 하여 사회와 국민에게 좋은 역할을 했는데, 설마 이 때문에 나를 소환하려 하는 것인가? 내가 알기로는 소환하는 사람은 모두 전범(戰犯)이거나 인민의 공적(公敵)이며 더 있다면 형사 범죄자이다. 만약 이렇다고 한다면 나는 내가 이중 어느 조항에 부합되는지를 모르겠다.” 라고 말하였다.
리 선생은 또 “사실 나는 거듭 사람들에게 진(眞), 선(善), 인(忍) 원칙을 기준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으므로 나 자신도 당연히 본을 보여야 했다. 나 그리고 파룬궁 제자들이 이유 없이 비난과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지만 모두 대선(大善), 대인(大忍)의 흉금으로 대했으며 정부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우리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소리 없이 참고 있었다……. 사실 나는 일부 사람들이 왜 기어코 파룬궁을 반대하는지 잘 알고 있다. 바로 언론에서 말한 것처럼 파룬궁을 배우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1억이란 숫자는 확실히 적지 않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많은 것도 문제인가? 좋은 사람이 많을수록, 나쁜 사람이 적을수록 더 좋은 것이 아닌가?”라고 밝혔다.
장쩌민은 리 선생이 권고하는 글을 보았지만, 이미 비열하고 소인배적인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가늠하는데 익숙해진 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또 자신이 전 국가 기구를 장악하고 있는데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매수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99년 6월 7일, 장쩌민은 파룬궁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하기 위해 중앙 정치국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장쩌민은 파룬궁이 생기고 급속히 전파되고 있는 것은 “국내
외의 적대세력이 우리 당과 군중을 쟁탈하고 지반을 쟁탈하는 정치투쟁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내린 결론에 그 어떤 증거와 논증 과정을 제시한 적이 없는 그는 이번에도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파룬궁이 억만 군중의 몸과 마음을 개변시킨 사실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모든 공산당원과 공청단원 그리고 재직· 퇴직 공무원들에게 파룬궁 수련을 금지시키고 ‘사상적으로 분명한 선을 그을 것’을 요구했다.
장쩌민은 4월 25일 저녁, 그가 쓴 편지에 대한 정치국 회원들의 반응으로부터 대다수 정치위원, 심지어 상무위원들마저 파룬궁 탄압을 반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주룽지가 있는 부서에서도 파룬궁을 적으로 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자신의 명령을 집행해 주는 부서를 따로 만들기로 결정했으며 정부, 법률기관, 경제부문의 구속을 받지 않게 하려고 했다. 장쩌민은 여기까지 생각하고 리란칭(李嵐淸)을 찾았다.
당시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 장쩌민 본인을 제외한 기타 6명은 파룬궁 탄압을 반대했고 이때 중공 고위층에서 악명 높은 보이보(薄一波)는 이 소식을 듣고 일부러 나서서 장쩌민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태도를 표명했다.
장쩌민은 그와 사이가 좋은 리란칭에게 당성(黨性)과 망당망국(亡黨亡國)론으로 압력을 가해 끝내 그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파룬궁 문제 처리 전문팀을 구성하고 리란칭을 팀장으로 임명했으며 총과 붓으로 인민을 통제해야 한다는 중공 이론에 근거해 뤄간과 딩관건(丁關根)을 부팀장으로 임명했다. 장쩌민은 또 공안부 부부장 류징(劉京) 등을 합류시켜 함께 파룬궁 문제를 해결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연구하고 국가기관과 지방 정부에 긴밀한 협조를 요구했다. 이 기구는 6월 10일에 설립되었기에 ‘610사무실’이라고 불렀다.
‘610사무실’은 ‘중앙문혁소조’와 마찬가지로 법률적인 근거 없이 세워진 100% 불법조직이었다. 610사무실이 세워진 목적은 법률의 단속과 경제와 인사 심사를 피해 파룬궁을 탄압하려는데 있었다. 이 불법조직의 총 두목은 사실 장쩌민으로, 중요한 밀령은 그가 하달했으며, 하달시 증거가 남는 것을 우려해 도장을 찍지 않아도 610사무실이 명령을 집행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도 되지 않았다.
독재체제 하에서 장쩌민은 부당한 수단으로 법률의 구속을 받지 않는, 모든 국가 기관을 능가하는 ‘610사무실’을 조직했으며 법을 집행하는 사법기관을 협박해 20여년
간 지속해 오던 법제화 발전을 철저히 중단해 버려, 중국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조성했다.
탄압에 대해 호언장담은 했으나 구체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한 장쩌민은 또 쩡칭훙을 찾아 비밀리에 계책을 논의하고 중앙사무실과 국무원사무실을 통해 6월 14일에 ‘탄원 파룬궁 수련생들을 접견한 중앙, 국무원사무실 탄원사무실 책임자들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1. 연일 일부 파룬궁 수련자들은 공안이 탄압을 시작할 것이라는 등, 당원과 단원, 간부들이 수련에 참가하면 당에서 제명당하고 직장에서 해고된다는 등의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있다”, “2. 당과 정부는 신체를 건강히 하는 정상적인 연공 활동을 반대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 거듭 성명한다, 정부는 정상적인 연공 활동을 금지시킨 적이 없다. 국민들은 기공을 믿고 수련할 자유가 있다……. ”
당시 정부 관리들이 국민들에게 발표한 이 거창한 약속을 돌이켜 보면 장쩌민 등 중공 관리들이 얼마나 술수에 능란하며 신용이 없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원래 파룬궁 활동은 모두 공개적이므로 ‘진·선·인(眞·善·忍)’을 믿는 파룬궁 수련생들은 중공 언론에 아무런 경계심이 없었다. 그러나 대량의 공안과 스파이들은 파룬궁 수련생으로 가장하고 연공장에 들어와 정보를 수집하고 사진을 찍고 녹화했으며 연공장의 책임자를 알아냈다.
(2. 탄압 개시)
7월 19일, 장쩌민은 중공중앙 고위층 회의를 소집하고 총서기의 신분으로 탄압 개시 명령을 내렸다. 수만 명의 무장경찰이 베이징으로 진입했으며 인근 부대 군인들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했다. 다음 날인 7월 20일, 장쩌민은 전국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또 그들 중 지도자 역할을 한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은 모두 체포되거나 심문을 받았다. 장쩌민은 또 7월 29일, 인터폴을 통해 리 선생을 소환하려 했으나 인터폴은 이를 거절했다.
파룬궁에 대한 장쩌민의 이지를 잃은 독단적인 탄압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치기로 하겠다.
中文:http://www.dajiyuan.com/gb/5/6/12/n952739.htm
對중국 한국어 단파방송 - SOH 희망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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