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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그 사람-(41)-제12장 파룬궁수련생들의 평화적인 청원과 먹구름으로 뒤덮인 중국 대지
2007-11-24 04:49:36 | 조회 8235
파룬궁 수련생들의 평화적인 청원과 장쩌민 군부의 탄압, 그 마지막 이야기.
(8. 장쩌민의 고집)
4월 25일 저녁, 장쩌민은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대자보를 썼던 마오쩌둥처럼(역주 - 1967년 8월에 개최된 제8기 11중전회에서 마오쩌둥은 이 대자보를 써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이 자본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정치국 전체 회원에게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신앙하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 무신론이 설마 파룬궁이 선양하는 쓰레기들에게 밀린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는 편지를 썼다.
상무위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는 또 “파룬궁이 서방 나라들과 관련이 있는지와 막후에서 지휘하는 ‘고수’가 있는지 여부를 중시 할 것과, 이 위기에 대해 반드시 빠른 시일 내에 유력한 조치를 취하여 재난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라고 썼으며 “파룬궁처럼 종교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단체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며, 파룬궁 총본부가 해외에 있으므로 이번 사건 역시 해외 세력이 배후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억측을 했다.
중앙사무실에서는 즉시 이 편지를 문서로 만들어 전국 각 지방 정부에 보냈으며 ‘본 자료는 학습하고 관철하는 용도로만 쓰이며 의견청취, 토론, 연구용이 아니다’라는 특별 요구사항까지 추가했다.
4.25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뤄간과 자칭린 그리고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회의를 열어 대처 방안을 모색했다. 장쩌민은 가지고 온 자료들을 테이블 위에 내던지며 “파룬궁 수련생들이 중난하이에 모이자고 약속한 증거를 왜 못 찾습니까? 인터넷상에도 관련 공지가 있습니다. 이번에 각지에서 온 2만여 명 파룬궁 수련생들은 사전에 약속을 하고 분산되어 행동하는 방식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중난하이를 포위했습니다. 공안 부문에서는 사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뭘 하고 있었습니까? 이런 직무 유기 행위가 다시 있어서는 안 됩니다!”하고 호통을 쳤다. 그리고 뤄간을 보며 “정권이 위협받고 있는데 안전 부문, 그리고 베이징시 정부는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이번 사건을 교훈으로 삼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라고 비평했다.
이어 장쩌민은 시치미를 떼고 “파룬궁이라는 괴상한 이름을 가진 공법은 이번에 처음 들어보는데 어떻게 설립된 단체이며 우두머리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날 정치국 7명의 상무위원 중 장쩌민을 제외한 기타 사람들은 모두 명확하게 진압을 반대했다. 주룽지는 “파룬궁 수련생은 대부분 40대 이상이며 여성이 많습니다. 그들은 단지 신체를 건강하게 하려고 할 뿐입니다. 한 파룬궁 수련생은 ‘지금 회사에서는 의료비를 지원해 주지 않는데 파룬궁을 연마해 신체를 건강히 할 수 있고 게다가 지금 실업자가 그렇게 많지만 파룬궁을 연마하였기에 폭동을 일으키지도
않는데, 이렇게 좋은 공법을 왜 정부에서 지지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이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제건설과 국제 사회에서의 이미지를 위해 더 이상 정치 운동을 벌이는 방식으로 사상문제를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파룬궁에 정말 나쁜 사람이 있다면 개별적으로 처리하면 되니 일반 수련자들은 그냥 내버려 둡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손으로 주룽지를 가리키며 “당치 않는 소리! 당을 망치고 국가를 망치고 있네! 우리 동지들이 이처럼 앞을 내다보지 못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파룬궁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큰 착오를 범하게 될 겁니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뤄간이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지 총서기께서 말씀해 보십시오.”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히 없애야 합니다! 그럼요, 단호하게 없애야 합니다!” 장쩌민은 두 손을 내 흔들면서 “당장 해야 할 일은 파룬궁 수련자 숫자와 분포 상황은 어떠한지, 책임자가 누군지, 전 사회를 동원해 찾아내야 합니다. 파룬궁이 우리와 민중을 쟁탈하고 있으므로 반드시 정치적인 시각으로 당과 국가의 생사존망을 연결해 이 문제를 인식해야 합니다. 절대 방심하지 말고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라고 고함을 질렀다.
이번 정치국 회의 기간 중 장쩌민은 내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지르며 히스테리에 가깝게 행동했다. 기타 위원들은 장쩌민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모두 침묵을 지켰다.
장쩌민이 이처럼 흥분해서 날뛴 것은 또 하나 말하지 못할 원인이 있었으니 바로 차오스가 파룬궁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차오스는 15차대회에서 은퇴했지만 덩샤오핑이 후진타오를 제4세대 지도자 핵심으로 지정한 비밀을 공개했다. 때문에 장쩌민은 자리를 내놓기 싫어도, 또 자신의 측근을 대신 올려놓으려 해도 16차대회 때가 되면 후진타오에게 모든 권력을 넘겨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그는 차오스가 지지하는 것이라면 무조선 반대했다. 이전에 양 씨 형제가 선발한 100명 고위층 장령들은 단지 능력으로 인해 선발 되었을 뿐 전부 양 씨 형제 세력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장쩌민은 명단에 오른 사람들은 무조건 강직시켰다. 예를 들면, 42세에 부총 참모장으로 된 허치쭝(何其宗)은 양 씨 형제에게 중용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나중에 권력을 잡은 장쩌민에 의해 난징부대 부사령관으로 밀려나 다시는 승진할 수 없었다.
이러한 그였기에 차오스가 파룬궁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자 기어코 파룬궁을 탄압하려 했으며 극단적인 태도를 취했다.
차오스는 1998년 파룬궁에 대해 조사를 진행해, “국가와 국민에게 백가지 이로운 점만 있을 뿐, 한 가지 해로운 점도 없다”는 보고서를 썼으며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으나 민심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다.”는 옛 사람들의 교훈을 첨가해서 강조했다. 이 보고서를 본 장쩌민은 불쾌해 하면서 즉시 뤄간에게 넘겨주며 “뭘 썼는지 알 수 없어!”라고 했다. ‘총명’한 뤄간은 즉시 장쩌민의 뜻을 알아차리고 “파룬궁이 해외에 정치 세력이 있다”는 루머를 퍼뜨리는 동시에 부단히 사건을 허위조작 하여 죄를 덮어 씌웠다.
정협주석이었던 리루이환(李瑞環)도 탄압을 반대했기에 여러 장소에서 장쩌민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아무런 실권이 없는 각 당파들을 이끄는 신분이었으므로 영향력은 발휘할 수 없었는데 당시 중국에서는 “가장 한가한 4가지를 말하라면, 갑부의 마누라, 관리들의 돈, 실업자, 리루환이다.”라는 우스개 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9. 탄압을 위해 가짜 증거 조작)
장쩌민과 쩡칭훙은 정권을 탈취하고 공고히 하며 정적(政敵)을 타격하는 데는 정보기관이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줄곧 국가 안전부를 집중 관리했다.
장쩌민은 총서기로 당선된 후, 국가안전부를 통제하기 위해 ‘중앙정책연구 소조’를 설립하여 국가 안전부를 지휘하게 했으며, 1997년에 정치국 후보위원, 조직부장으로 당선된 쩡칭훙은 측근을 국가 안전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국가안전부를 자신들의 정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기관으로 만들었다.
질투로 이지를 상실한 장쩌민은 어떻게든 파룬궁을 탄압하려 했으나 기타 6명의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다며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쩌민과 쩡칭훙은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는데 바로 국가 안전부를 이용해 증거를 조작하는 방법이었다. 얼마 뒤 미국에 있는 국가안전부 첩보원이 “파룬궁 창시자의 배후에서 미 중앙정보국(CIA)이 수천만 달러의 경비를 제공하고 있다”는 등 가짜 정보를 보내왔고 이런 정보는 국가안전부를 통해 고위층에 전달되었으므로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정보의 진실성을 알기 어려웠다.
1992년 14차 대표대회 전야, 양 씨 형제를 모함하여 덩샤오핑을 속였던 장쩌민과 쩡칭훙은 이번에도 똑같은 수법을 되풀이 했다.
중공은 적대세력을 극히 두려워하며 증오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장쩌민은 이를 이용해 ‘확실한 증거’들을 내놓으며 “당과 국가가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력을 다해 파룬궁을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공은 당이 망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으며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죄를 감당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상무위원들은 장쩌민의 탄압을 감히 막지 못했다. 이렇게 되어 장쩌민은 고위층 관리들의
동의를 얻는데 성공하고 중공 폭력기구를 이용하여 파룬궁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미 중앙정보국이 파룬궁을 지지한다는 거짓 정보는 많은 중국인들을 속였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외국인들까지도 속였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국가의 리더인 미국에 늘 맞서는 입장인 프랑스는 이번에 중공이 퍼뜨린 거짓말을 쉽게 믿었다. 그러나 나중에 자국 정보기관을 통해 조사한 결과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제야 파룬궁에 대한 경계를 느슨히 했다. 현재 국제사회는 파룬궁 배후에 그 어떤 정치 세력도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10. 겁쟁이 장쩌민)
1999년 5월 8일, 나토와 유고슬라비아의 교전 중, 중국대사관이 미사일 습격을 당해 기자 3명이 사망하자 미국은 실수라고 해명했지만 중국은 인정하지 않았다.
사건 발생 후, 중국 군부는 군사위 주석인 장쩌민에게 즉시 군복 차림으로 TV에서 연설할 것을 요구했는데 정장을 입고 TV에서 항의하고 즉시 주중 미 대사를 만날 것을 제안하는 사람들도 있어 고위층에서는 의견 충돌이 심했다.
정작 큰일에 부딪히면 소심해지는 장쩌민은 몹시 당황했으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쩡칭훙을 불러 상의한 끝에 그는 이 골치 아픈 일을 후진타오에게 맡겨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기로 결정했다. 다시 말해서, 당시 국가 부주석인 후진타오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처럼 중요한 일에 나설 이유가 없으므로 사람들은 국가주석 장쩌민 혹은 국무원 총리인 주룽지가 나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주룽지가 나서지 않는다면 분노한 사람들은 이번의 대사관 폭발 사건과 주룽지의 ‘분노를 삭이는 외교’를 연관시킬 것이며, 이렇게 되면 모든 책임이 주룽지에게 돌아가 계속 누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었고, 후진타오의 경우, 그가 만약 연약하게 행동하면 분노한 국민들에게 실망을 줄 것이고, 강경하게 처리할 경우 중미 양국 관계가 긴장될 것이었으므로 이번 사건이 16차 당대표대회에서 후계자인 후진타오를 제거할 수 있는 구실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타산을 한 장쩌민은 사건 발생 후 이틀 동안 줄곧 얼굴을 내밀지 않아 국민들의 불만을 샀는데 그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야 TV로 후진타오의 연설을 볼 수 있었을 뿐 3일이 지나도 장쩌민은 실종된 사람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중국인민대학에는 ‘장쩌민-겁쟁이’, ‘중앙 지도자들은 모두 죽었다’ 등의 표어들이 붙었으며 전 국민들은 모두 격분해 했다.
對중국 한국어 단파방송 - SOH 희망의소리
11750KHz, 중국시간 오후 5-6시, 한국시간 오후 6-7시
http://www.soundofhop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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