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H]
귀왕은 한밤중에 당승을 배알하다-67화
달빛에 취해 모처럼 한가롭게 경서를 외던 삼장은, 3경 무렵이 되어서야 경서를 접어 배낭 속에 집어넣고 잠자리에 들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밖에서 쏴아 하고 사나운 바람소리가 들려오니, 삼장은 바람에 등불이 꺼질까 편삼소매를 펼쳐 등불을 가렸습니다. 꺼질 듯 말 듯 가물거리는 등불을 바라보는 삼장은 웬일인지 가슴이 떨려오고 졸음에 겨워 탁상 위에 엎드렸지만, 눈은 감겨도 정신만은 또렷하고 귀에서는 연신 창밖 음산한 바람소리가 윙윙거렸습니다.
삼장이 몽롱한 가운데 창밖의 동정에 귀 기울이고 있을 때, 바람소리에 뒤이어 “스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얼핏 고개 들어보니 문밖에 웬 사내가 서있는데 방금 물에서 나오기라도 한 듯, 온몸이 흠뻑 젖어 있고 두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사내 : “스님, 스님!”
삼장 : “아니 그대는 도깨비인가? 아니면 사악한 요괴인가? 어째 깊은 밤중에 찾아와 나를 놀리는 건가? 난 탐욕을 부리거나 화를 내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며, 당나라 천자님의 어명으로 서천에 불경을 가지러 가는 사람이다. 내겐 세 제자가 있는데 그 어떤 요괴도 물리칠 수 있는 장사들이다. 내 특별히 자비로운 마음으로 알려주는 것이니 얼른 사라지고 더는 우리 선문을 찾지 말도록 하라. 나무관세음보살”
사내 : “스님, 난 요괴도 도깨비도 아니오. 부디 밝은 눈으로 날 똑똑히 봐주시오.”
삼장이 자세히 그 모습을 훑어보니 머리에는 충천관을 쓰고 허리에는 푸른 옥띠를 두르고 몸에는 나는 용과 춤추는 봉황을 수놓은 홍갈색 황포를 입고 발에는 구름무늬를 수놓은 무리를 신고 손에는 북두칠성이 새겨진 백옥규를 들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삼장 : “아니, 어느 왕조의 폐하십니까? 어서 들어와 앉으소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소승에게 해주소서.”
사내 : “(눈물 섞인 목소리로 호소하듯)스님, 서쪽으로 40리가량 떨어진 곳에 내가 세운 오계국이라 불리는 나라가 있소.”
삼장 : “헌데 어찌 이리 경황없이 찾아오신 겝니까?”
사내 : “5년 전, 이 나라에 심한 가뭄이 들어 초목은 말라죽고, 백성들은 굶어 죽어 여간 어려운 형편이 아니었소. 나라의 창고는 텅텅 비고 조세도 동이 나, 문무백관들의 봉록이 정지되고 짐의 소반에도 고기요리가 자취를 감춘지도 오래오. 짐은 홍수를 다스리던 우왕을 본받아 밤낮으로 기우제를 정성껏 지냈었소. 그렇게 3년이 지나고 종남산으로부터 한 도사가 찾아왔는데, 그는 바람과 비를 부를 수 있고 무쇠로도 금을 만들 수 있다는 거였소. 과연 그의 도술은 영험해 그가 치는 영패 소리에 따라 큰 비가 억수로 쏟아졌소. 짐은 비가 석 자 가량만 내리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오랜 가뭄에 부족하다며 두 치 가량 더 내리게 하는 거였소. 이렇듯 의를 중히 여기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난 그와 팔배의 예로 의형제를 맺었었소.”
삼장 : “그것은 폐하의 더없는 복입니다.”
사내 : “복이라니 어찌 하시는 말씀이시오?”
삼장 : “도사에게 그리 훌륭한 도술이 있다면 비가 필요하면 비를 오게 하고 금덩이가 필요하면 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게 아닙니까? 그만하면 족하시겠는데 구태여 황궁을 떠나 예까지 오셨습니까?”
사내 : “그와는 2년 동안이나 침식을 같이해 왔소. 어느 해 따스한 봄날, 백성들은 나들이를 즐기고 문무관원들은 관청으로 돌아가고 비빈들은 각자 처소로 돌아갔소. 짐도 도사와 손을 잡고 어화원의 꽃동산을 거닐었었지. 그러다 팔각 유리정이란 우물가에 이르러 도사가 우물 에 무언가를 던졌고, 갑자기 수없는 금빛 광선이 솟구쳐 올라왔소. 내게 우물 속에 무슨 보배가 있나 들여다보라고 하더니, 짐을 그 우물 속에 떠밀어 넣어 버렸소. 그런 다음 돌 판을 가져다 입구를 봉하고 진흙으로 덮은 다음, 그 위에 한 그루의 파초를 심어 놓았소. 가련하게도 짐은 죽은 지 3년이 되도록 우물에 빠져죽은 원귀로 남아 있을 뿐이오!”
삼장은 귀신이라는 말에 소름이 끼쳤지만 그런대로 기운을 내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삼장 : “폐하, 말씀이 앞뒤가 잘 맞지 않습니다. 죽은 지 3년이나 되셨다면 문무백관들과 삼궁의 황후들은 어찌하여 폐하를 찾아보지 않는 것입니까?”
사내 : “그의 도술은 참으로 세상에 드물 정도요. 짐을 죽이고,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둔갑을 하니 모두 속아 넘어간 것이오.”
삼장 : “폐하는 너무도 용기가 없으시군요. 모든 이를 속였더라도 자신의 억울함을 폐하께서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저승의 염라대왕에게 상소하지 않으신 겝니까?”
사내 :“그놈은 본디 신통력이 굉장한 데다 문무 관원들과도 아주 친숙하오. 도읍을 지키는 서낭신과는 술친구요, 바다의 용왕들과는 친척간이며, 동악천제와는 친구간이요, 십대 염왕들과는 이복형제사이란 말이오. 이런 형편이 되고 보니 어디에 호소할 곳조차도 없구려.”
삼장 : “폐하, 저승에서도 호소할 곳이 없다시면서 어찌 이승을 찾아오신 건지요?”
사내 : “내 이 원혼이 어찌 감히 스님을 찾아올 수 있겠소? 다만 야유신이 일으킨 한자락 바람에 불려왔을 뿐이오. 짐의 3년 수재도 이미 만기가 되었다며 스님을 찾아 배알하라는 거였소. 스님에게 제천대성이란 제자가 있어 어떤 요괴라도 처치한다고 하던데, 내 이리 진심으로 청하는 바이니 부디, 짐의 나라에 들러 요괴를 잡아 없애고 옳고 그름을 밝혀 주시기 바라오. 그리만 해주신다면 내 결초보은하겠소.”
삼장 : “그 일은 저의 제자가 아주 적임이기는 하오나, 그 요괴가 폐하의 모습으로 변해 모든 신하들이 일심동체로 그를 믿고 있을 터, 행여 대역부도의 죄를 물을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사내 : “조정에 믿을 만한 사람으로 태자, 태자가 있소만! 그 애는 금란전 오봉루에 있으며 학사들과 함께 강론을 하기도 하고 요괴와 함께 조회에 나가기도 하오. 다만 3년이 지나도록 황궁 출입만은 금지되어 제 모후와도 만나질 못하고 있소.”
삼장 : “그건 무슨 연유인지요?”
사내 : “혹여나 모자가 만나, 대화 속에 일의 진상이 드러날지 모르니 그리해서라도 자신의 지반을 튼튼히 하려는 거요.”
삼장 : “태자께서 조정에 계신다 한들 소승이 만날 수나 있겠습니까? 아직도 요괴에 속아 부왕이라 믿고 계시는데, 제 말을 어찌 믿으시겠습니까?”
그러자, 그 사내는 손에 들고 있던, 가장자리에 금을 상감한 백옥규 하나를 내놓았습니다.
사내 : “그 요괴가 짐으로 둔갑하면서 이것만은 둔갑시키지 못했소. 비를 빌던 도사가 백옥규를 훔쳐갔노라고 속였으니, 태자가 이 물건을 보게 되면 짐을 생각할 것이고 반드시 원수를 갚으려 할 것이요.”
삼장 : “그럼 제가 이 물건을 맡았다가 제자를 시켜 폐하를 위해 그놈을 처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삼장의 도움을 받게 된 원혼은 자신이 아직 할 일이 있다며 서둘러 머리를 숙여 작별을 고했고, 삼장도 마주 일어나 그를 바래주려다 발에 무엇이 걸려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깨어보니 한바탕 꿈이었습니다.
삼장 : “제자들아, 제자들아”
팔계 : “아함, 스승님. 예전에 전 아무 걱정 없이 편하게 살았는데, 왜 출가를 하셔서 먼 길을 걷게 하시고, 원래는 중노릇만 시키신다더니 종으로 부리시고 이 밤에 안 주무시고 무엇 때문에 불러대시는 겁니까?”
삼장 : “방금 엎드려 졸다가 이상한 꿈을 꾸었지 뭐냐.”
오공 : “스승님, 꿈은 워낙 생각하는 일에서 생기는 겁니다. 스승님은 산에 오르기도 전에 요괴가 있을까봐 겁부터 내시고 뇌음사가 먼 것을 부질없이 걱정하시며 장안 생각이 간절해, 언제면 고향으로 돌아가랴 수심이 많으십니다. 생각이 많으신 만큼 꿈도 많아지시는 것이지요.”
삼장은 꿈에서 보고들은 것을 상세히 오공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오공 ; “예, 예! 스승님 더 말씀하시지 않아도 알겠습니다. 보나마나 그 요괴가 국왕행세를 하고 있을 테지요, 가서 진위 여부를 알아보고 이 금고봉으로 꼼짝 못하게 만들어 놓겠습니다.”
삼장 : “참, 국왕이 증거물 하나를 두고 갔느니라.”
팔계 : “스승님, 꿈에서 본 거라면서요?”
오정 : “불을 켜 들고 나가, 문 밖을 찾아보면 될 게 아닙니까?”
오공이 문을 열어보자 달빛 어린 섬돌 위에 과연 금테를 두른 백옥규 하나가 놓여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오공 : “그렇다면 스승님, 이 물건이 있는 걸로 보아 유령의 말이 정말인 것 같습니다. 그 요괴는 제게 맡기시고 스승님께서는 세 가지 일을 맡아 주셔야겠어요.”
오공은 몸에서 보드라운 털 한 가닥을 뽑아 선기를 불어넣고 ‘변해라’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그 털은 붉은 칠을 한, 자그마한 함으로 변했고 오공은 백옥규를 그 함 안에 담아 넣었습니다.
오공 : “스승님, 내일 아침 금란가사를 걸치시고 이 함을 손에 들고 정전에 나아가 경문을 외워주십시오. 그사이 저는 성안 사정을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만일 요괴가 없다면 부질없이 사단을 일으킬 필요가 없으니까요. 만약 태자가 성 밖으로 나오게 되면 제가 그를 이곳으로 유인해 스승님과 만나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삼장 : “그럼 난 그를 어찌 응대해야 한단 말이냐?”
오공 : “태자가 오게 되면 제가 한걸음 먼저 와 알려 드릴 테니, 스승님은 그 함의 뚜껑을 조금만 열어놓으십시오. 그럼 전 두 치가량의 작은 중이 되어 그 속으로 들어가 있겠습니다.”
그런 뒤, 오공은 삼장에게 계책을 마저 알렸습니다.
어느덧 먼동이 트기 시작하자 오공은 팔계와 오정에게 함부로 나다니지 말라 이르곤 하늘로 날아올라 성곽에 다다랐습니다.
오공 : “과~연! 진짜 임금이 용상 위에 앉아 있다면 상서로운 빛과 오색구름이 눈부시련만, 요괴가 옥좌를 차지하고 있어 검은 기운이 금문을 둘러싸고 있구나!”
오공이 이리 탄식하는 사이, 요란한 포 소리와 동쪽 성문이 활짝 열리며 사냥꾼 대오가 용맹을 떨치며 달려 나왔습니다. 그들은 성문을 나오자 동쪽 교외로 빠져 산과 들길을 달리고 있었는데, 중군영 한복판에 젊은 장군 하나가 갑옷과 투구로 몸을 차리고 누런 바탕에 흰 점이 있는 말 위에 높이 앉아 있는 게 얼핏 보였습니다.
오공 : “말하지 않아도 뻔하지! 저게 태자가 아니겠어?”
오공은 구름을 낮춰 사냥꾼들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몸을 번뜩여 한 마리 흰 토끼가 되어 태자의 말 앞에서 깡충거리며 뛰어다녔습니다.
사냥감을 발견한 태자는 활시위를 당겼지만 오공은 일부러 자기를 맞히게 해서는 번개같이 날아드는 화살을 손으로 붙잡았습니다. 그리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고 줄행랑을 놓았습니다. 화살을 맞은 토끼가 내빼는 것을 본 태자는 단신으로 말을 달려 토끼를 뒤쫓아 갔습니다.
이렇게 달리고 달려, 어느새 보림사 산문 앞에 이르자, 오공은 법술을 거두고 화살을 산문 문설주에 꽂아놓고는 곧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오공 : “스승님, 왔습니다. 왔어요!”
오공은 삼장에게 알리고 나서, 두 치가량의 작은 중으로 둔갑한 뒤 붉은 빛깔의 나무함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태자 : “아니 어찌 된 일인가? 내 분명히 토끼를 쏘아 맞혔는데 토끼는 어디가고 이 화살만이 기둥에 꽂혀있단 말인가? 으음… 보림사? 이곳은 부왕께서 금과 비단을 보내 불상과 불전을 보수하게 하신 곳인데 오늘 뜻밖에도 내가 오게 되었구나. 잠시 안에 들어가 보기로 하자.”
태자를 호위하던 기마대가 뒤좇아 산문 안으로 들어가니, 절 안의 모든 중들은 깜짝 놀라 허둥지둥 달려 나와 이마를 조아리며 영접을 했습니다. 태자가 불전에 들어가 참배를 하고 사방을 둘러보는데 정전 한복판에 웬 중 하나가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태자 : “이런, 이리 무엄한 자를 봤나? 태자가 참배를 왔으면 마중 나오진 못해도 몸을 일으킬 일이지, 꼼짝 않고 앉아 있다니. 여봐라. 저놈을 당장 끌어내라! 어서”
가까스로 만나게 된 태자에게 예를 갖추지 않아 경을 치게 된 삼장은 이 난국을 어찌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을 기대해주세요.
-2024년 6월 8일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