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전회에 소개했던 약왕 손사막의 업적을 포함해 선대에 이뤄진 약재에 관한 연구는 명나라 대의학자 이시진(李時珍)이 집대성했습니다.
이시진의 자는 동벽이고 호는 빈호로서 호북 사람이며 1518년에 태어나 1593년 75세의 나이로 삶을 마칠 때까지 약재의 올바른 정보를 정리하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이시진은 대대로 의업을 이어온 집안 출신으로 조부는 민간 시골의사를 지칭하는 영의(鈴醫)로서 촌락에서 한약방을 운영했습니다. 조부는 인품이 후덕하고 의술 또한 훌륭하여 인술을 펼쳤지만, 사회적 지위가 낮아 괄시를 면치 못했으며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살림이 어려웠습니다.
당시는 의학자가 유학자보다 대접을 받지 못했던 시절이라 조부는 자신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죽음을 앞두고 아들 이언문(李言聞)에게 총명한 손자인 이시진은 반드시 유학자가 되어 벼슬길에 오르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언문은 호는 월지(月池)로서 명의로 이름 높았으나 지방 유지와 관리에게 심심찮게 모욕을 당하던 터라 자신 역시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과진(果珍)은 애초에 학문에는 뜻이 없었습니다. 이시진은 둘째로 몸은 약했으나 성격이 강직하고 순수했으며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이시진이 부친의 책들을 훑어보다가 약왕 손사막의 저작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는 “무릇 훌륭한 의사, 즉 대의(大醫)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을 안정시키고 뜻을 평정하게 하여, 바라거나 구하고자 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먼저 큰 자비와 측은지심을 가지고 사람들의 고통을 구해 주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며, 병이 있어 치료받고자 하는 환자가 있으면, 그 귀하거나 천함, 가난하거나 부유함, 나이의 많고 적음, 아름답거나 추함, 원한과 친근함, 동족과 이민족, 지혜의 많고 적음을 묻지 말고, 한마음으로 부모와 형제처럼 생각해야 한다. 환자를 고쳐주면서 이것저것 생각하지도 말며 자기에게 어떤 좋은 일이나 언짢은 일이 있어도 가리지 말아야 한다”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이 글은 훗날 이시진이 과거 공부를 하면서도 의학자의 뜻을 놓지 않는 버팀목이 됐습니다.
이시진은 14세 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황주부 과거 시험장에 가서 향시를 치러 합격하여. 집안 식구의 큰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17세 때와 20세 때 23세 때 무창에서 치른 향시에서는 모두 낙방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사실 이시진은 유학 공부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출세욕도 없었습니다. 3번의 낙방 끝에 이시진은 아버지에게 “가업을 이어 의학을 공부하겠다”고 결심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버지는 이시진이 벼슬에 뜻이 없음을 알고 힘껏 아들을 지지해 주었습니다.
이시진은 이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의학이론을 배우고 실제 임상경험과 약성원리 등 10년 동안 의학 연미에만 전념했으며, 아버지를 따라 왕진 갔다 돌아오는 것이 유일한 문밖출입이었습니다.
서기 1539년 기주 지역에 홍수가 발생하여 수재를 당한 주민들의 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번져 아버지와 아들은 한 팀이 되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치료했습니다. 이때 이시진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질병으로 고생하는 백성을 구제하는데 주력하리라 결심했습니다.
의술이 일취월장하던 이시진에게 평소 주색을 탐하는 류교라는 조카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하반신이 붓고 대소변을 보지 못했으며 통증으로 앉거나 누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 지방에서 이름 있는 한의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았으나 차도가 없자 이시진을 찾아왔습니다. 이시진은 류교는 대장과 방광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친은 이시진의 진단과 치료법이 일리가 있다고 보고 그의 약 처방에 동의했습니다. 이시진은 멀구슬나무 열매(楝實), 회향 풀(茴香), 천산갑(穿山甲) 등 여러 약초에 견우(牽牛)를 배로 넣고 달여 복용하게 했습니다. 약을 한번 마시니 병세가 즉시 약해졌고 3번 복용하니 병이 나았습니다.
가족들은 이시진의 정확한 진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시진은 조부가 남긴 진료기록에 독창적인 약재를 가미해 효과를 배가시켰던 것입니다.
이시진은 이후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의술을 체계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본초(本草)를 중시했습니다. 당시 여러 서적에 약재의 효능과 기원에 관한 서술이 있었지만, 통일되지 않았고 어떤 약재는 정반대의 효능이 실려 있거나, 독성 약재를 안전하다고 표기한 서적도 있었습니다. 또한, 이름은 같으나 기원 식물이 달라 지역마다 다른 약재를 같은 약재로 착각하고 쓰는 일도 있었습니다. 31세가 되면서부터 이시진은 몸소 체험하고 실체를 확인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면서 약재 즉, 본초를 집대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이시진의 명저 ‘본초강목’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으며 지금까지도 한의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수준 높은 저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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