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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라이, 파룬궁 탄압으로 해외 각국서 고소돼

편집부  |  201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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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 보시라이는 랴오닝 성장이 된 후, 왕리쥔을 진저우(锦州)시 공안국장으로 발탁했다. 왕리쥔이 직간접적으로 파룬궁 수련자 장기 적출에 개입한 정황은 다수 포착됐지만, 사실 장쩌민, 보시라이의 명령을 집행한 것에 불과하다.


2009년 왕리쥔 수하에 있던 한 경찰은 파룬궁박해 추적조사 국제조직(WOIPFG)에 왕리쥔이 파룬궁 수련자의 장기를 적출하는 등 탄압을 주도하고 있다고 제보했다. 제보는 2002년 4월 9일, 선양 군구 총병원 15층 수술실에서 군의관 2명이 30대 중학교 여교사 파룬궁 수련자를 마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장기를 적출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이하는 녹취록의 일부다.


“메스를 대자마자 피가 뿜어 나왔다.…. 그때 우리는 각각 권총을 한 자루씩 들고 옆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때 이미 가슴을 열었는데 그 여인은 크게 비명을 지르면서, ‘파룬따파 하오(파룬따파는 좋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의사가 주춤하며 나를 바라봤고 또 우리 상사를 바라봤다. 상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계속해서 혈관을 잘라냈다. 먼저 심장을 적출했고 다음에 신장을 들어냈다. 심장 혈관을 잘라내자 그녀는 한동안 경련을 일으켰다. 소리를 들려주고 싶지만, 흉내조차 낼 수 없는데, 찢어지는 듯했다. 그 다음에는 아아! 하면서 줄곧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크게 벌렸다. 나는 더 생각하고 싶지 않다.”


1997년 7월 20일 파룬궁 탄압이 시작된 이래, 전국 각지 파룬궁 수련자는 자발적으로 베이징을 찾아가 탄압 중지를 청원했다. 공안 소식통에 따르면, 2000년 여름 베이징 경찰이 체포한 파룬궁 수련자는 100만명 이상이다. 중국은 청원자의 직장과 가정에 대한 연좌제를 적용해, 상당수 파룬궁 수련자들은 성명, 주소, 직장명을 밝히지 않았다. 베이징 경찰은 현지 송환이 힘들어지자, 장쩌민과 뤄간의 명령으로 파룬궁 수련자 200만명을 전국 각지 노동교양소와 감옥으로 이송했다. 수감 시설은 이후 시작된 살아 있는 파룬궁 수련자를 대상으로 한 장기 적출의 창고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지속적으로 파룬궁 수련자를 체포했다.


2004년 2월 장쩌민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보시라이는 상무부장에 취임했다. 며칠 후 보시라이는 ‘보시라이 15조례’라 불리는 내부 문서 ‘사업 개진 의견 15조례’를 하달했다. 문서에는 상무부 신설 규정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모든 외부 업무 대화는 반드시 녹음해 2시간 안에 문서로 만들어 보시라이에게 보내야 하며, 4시간 안에 단신 보도를 내보내야 하며, 각 부(部) 책임자는 24시간 휴대폰을 켜놓고 있어야 하는 등등이다.


2004년 4월 보시라이는 우이(吳儀) 부총리와 함께 미국을 방문했다. 상무부장 취임 후 첫 방미였지만, 보시라이를 맞이한 것은 고소장이었다. 4월 21일 NGO ‘파룬궁 친구들’은 미국 국토안전부에 서신을 보내 미국 212(a)(2)(G) 조항에 따라 보시라이를 강제 출국시킬 것을 요구했다. 뉴욕 파룬궁 수련자들도 뉴욕주재 중국 영사관 앞에 집결해 인권 탄압 주범 장쩌민의 심복 보시라이를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워싱턴에서도 비슷한 집회가 열렸다.


이에 앞서 2004년 3월 25일 독일 파룬궁 수련자 40여 명은 독일 방문을 앞둔 보시라이를 연방최고검찰원에 ‘반인류죄, 고문죄, 집단 학살죄’로 고소했다. 이와 함께 독일 인권단체들은 독일 정부에 보시라이의 입국 금지를 요구했고, 보시라이는 독일 방문 일정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방미 중이던 4월 22일, 보시라이는 투숙중인 호텔에서 미국 법정이 보낸 고소장을 받았다. 고소장에는 보시라이가 다롄시장과 랴오닝 성장 재직기간 중 파룬궁을 탄압한 혐의에 대해 상술되어 있었다. 당시 보시라이는 우이 부총리가 주최한 연회 참석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미국 언론은 보시라이가 랴오닝 성장 재직 기간에 최소 103명의 파룬궁 수련자가 탄압으로 사망해 전국 4위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보시라이의 명령 하에 랴오닝성의 마싼자 노동교양소, 장스 교양소, 룽산 교양소, 다롄 교양소에서 파룬궁 수련자를 대상으로 잔혹한 탄압이 이뤄진 정황과 피해자 진술이 확보됐다. 이후 보시라이는 영국, 캐나다, 미국, 독일, 아일랜드, 한국 등 30여개 국가에서 고문죄와 반인류죄 등으로 장쩌민, 뤄간, 저우융캉과 함께 고소됐다.


제17대 전국대표대회(이하 17대)를 앞둔 2007년 1월, 보시라이의 부친 보이보가 사망했다. 17대에서 보이보의 후원으로 부총리 등극을 노렸던 보시라이는 17대 전 사망한 보이보의 죽음이 애통하기 그지없었다.


2007년 10월 열린 17대에서 보시라이는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발탁되긴 했지만 서열이 가장 낮았고, 12월 사실상 좌천에 해당하는 충칭시 당서기로 임명됐다.


상무부장 재직 시절 직속상관은 우이 부총리였다. 우이는 초기에 보시라이를 호의적으로 대했다. 하지만 수년 후 우이 부총리는 보시라이가 화려한 언변으로 상대방을 잘 속인다는 사실과 상부에 허위 보고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또 우이 부총리와 국무원 주요 고위직과 분열을 획책하고 권력 다툼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움직임을 목격했다.


칼럼니스트 장웨이핑은 상무부 고위급 인사의 제보를 인용해, 보시라이가 충칭으로 밀려난 것은 우이 부총리와의 불화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중국 관계의 불문율은 전임자의 추천 혹은 허락 하에 후임자를 발탁하는 것이다. 2007년 초 보시라이는 부총리 선임을 확신하며 무리하게 업무를 추진하다 사면초가 형세로 몰렸다. 우이 부총리는 보시라이를 후임으로 앉히는 것을 강경하게 반대했고, 후진타오도 이에 동의했다. 중앙정치국 구성원들도 보시라이가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충칭시에서 보충 학습을 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우이 부총리는 퇴직을 앞두고 정계에서 깨끗하게 물러나겠다면서 반드시 보시라이를 충칭시로 보낼 것을 재차 강조했다.


위키리크스는 상하이 주재 미국영사관이 2007년 작성한 문서를 입수해 ‘소식통을 따르면 중국 상무부장을 역임한 보시라이는 충칭시 당서기를 맡았지만, 그의 정치 인생의 종착역이 될 것이며 다시 승진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폭로했다.


2007년 11월 5일, 호주 뉴사우스 웨일즈 고등법원은 원고 파룬궁 수련자 판위(潘宇)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다. 판위는 2000년 랴오닝성 룽산 노동교양소에 수감돼 4만 볼트 전기 고문을 받는 등 신체적 정신적 고문을 받은 바 있으며, 탄압 정책을 주도한 보시라이를 고문죄 등으로 고소한 바 있다. 재판부는 결석 재판에서 피고 보시라이의 유죄를 인정했다.


2007년 9월 3일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APEC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후진타오를 비롯한 중국 대표단이 도착했고, 보시라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식통에 따르면 보시라이는 수년간 각국에서 파룬궁 탄압 혐의로 고소당해 해외 일정을 꺼렸지만, APEC 당시 보시라이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진입 및 부총리 승진이 확정된 것으로 여기고 별 두려움 없이 호주를 방문했다고 한다.


4일 저녁 8시경, 서양인 파룬궁 수련자 조나단 솔로몬과 개리 해스티는 고소장을 들고 보시라이 투숙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10시 30분경, 후진타오를 따라 호텔로 들어오던 보시라이를 알아보고 이름을 크게 불렀다. 보시라이는 자신을 알아보는 호주인을 반갑게 맞이했고, 이들이 건넨 고소장을 흔쾌히 받아들었다. 경호원이 미처 제지할 틈도 없이 고소장이 전달된 것이다.


호주 법정은 보시라이가 혐의를 부정하거나 반박하지 않고 법정에도 출석하지 않은 점과, 원고측이 제출한 증거를 토대로 보시라이의 유죄를 선고했다.


보시라이가 호주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은 중국 관계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위키리크스는 난징 소식통을 인용해, 보시라이가 권력 중심에서 멀어져 충칭으로 밀려난 배경은 원자바오 총리의 반대도 크게 작용했다고 전했다. 원 총리는 보시라이가 호주, 스페인, 캐나다, 영국, 미국 등에서 고소당해, 중국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서 국제적으로 불리하다고 지적했다는 것이다.


위키리크스는 또 원자바오가 보시라이의 승진을 제지했을 뿐 아니라, 중공 원로들의 지지를 끌어냈다고 밝혔다. 보시라이는 문화대혁명 당시 아버지 보이보와 단절을 선언해 정치적인 입지를 얻었지만, 중공 원로들로부터 ‘신의를 저버린 비루한 사람’이라는 혹평을 사던 터였다.


난징 소식통은 보시라이가 충칭시 서기로 오면서 직면하게 될 난제를 전망했다. 공기와 수질 오염, 싼샤댐 안전 문제와 이주민 문제, 실업문제, 전염병 문제를 5년 내 극복하지 못할 경우 능력을 입증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또 후진타오가 인사에 개입해 왕양 전 서기를 잠재적인 문제가 많은 충칭시에서 멀리 배치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한다.  [신기원 전재]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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