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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와 5.18은 좌익폭동이었다. 남한에 민주화운동은 없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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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30
4·19,5·18 좌익공작은 성공했다 회복될 수 있는가 무너져 가는 국가 공권력   현역 야당 정치인인 L씨는 평소에 친북발언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배후에는 Y(59세)라는 지하인물이 있다.   Y는 모든 문제의 해결을 법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집단행동을 더 선호하며 그 집단을 무력투쟁의 일선에 나가게 하고 자신은 바람처럼 사라진다고 해 그들 사이에서 '그림자'로 통하고 있다.   민주당의 이부영 전 의원은 임동원(전 외교안보연구원장·현재 김대중씨가 세운 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한완상(전통일원장관·현재 방송통신대 총장)과의 '3각 공작'으로 우리의 대북협상 채널이었던 이동복 특보를 '훈령조작'의 책임을 물어 해임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들의 와해공작 후 우리의 대북외교는 비둘기론, 햇볕론, 맏형론 등의 낱말들이 난무하던 끝에 마침내 선장을 잃은 배처럼 표류하기 시작했다.   지난 해 11월 국민회의 당무위원이었던 허인회는 간첩 김동식과 만난 후 간첩신고를 하지 않아 구속됐다. 그후 지금까지 허인회와 안기부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국민들은 안기부가 핫바지가 되었다고들 한다. 게다가 요즘 경찰관들도 안기부 직원들을 우습게 본다고 한다.   그런 안기부에서 간첩을 잡아 '고문'이라는 것은 엄두도 못내고 자신들의 결백을 보이기 위해 수사과정을 비디오로 녹화하는 방식을 택했고 이 비디오는 정치인들에게도 방영해 주고 있다. 국가 공권력보다 간첩 말 믿는 세상   그런데 허인회는 안기부가 '조작'했다며 강변하고 또 언론 기자들도 안기부의 말은 들은척도 하지 않고 허인회의 말만 받아쓰고 있다.   세상이 뒤바뀌어 간첩이 '진실'을 말하고 나라의 공권력이 '거짓말'을 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간첩을 만난 적도 없다며 강변하던 허씨는 '불고지죄'를 위헌의 소지가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신청을 냈다. 간첩을 만나지 않았다는 사람이 위헌신청은 왜 내는가?   자신의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평화로운 나라에 간첩이 넘어와 그 평화가 위협을 당함에도 신고를 하지 않겠다는 발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성적인 사고로는 말이 안된다. 그렇다고 몽둥이를 들 수도 없는 현실이다. '음지에서 양지를 추구한다'는 명예심으로 살아온 대공수사관들의 의욕이 상실된 지 이미 오래이다.   나라의 앞날을 염려하는 애국인사들의 한숨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려온다.   간첩을 잡아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들이 쏟아지고 있다. 4·19에 불당긴 지하공작원   그러나 우리에게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도 다 가버리면 이러한 질문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북한의 남조선 대남적화공작사업은 성공리에 결실을 맺으려 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남쪽의 어떤 세력도 더 이상 적화통일의 장애물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이제라도 그들과 싸워 이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우리 근대사의 사건들 속에 나타난 그들의 실상을 잘 알아야 하겠다.   6·25전쟁으로 무력적화통일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김일성은 남한에 배치됐던 지하공작원들을 모두 교체했다.   대북 전문가들에 의하면 1959년 당시, 새로 배치된 공작원들은 1천여 명이었으며 이들은 각종 정보의 수집과 동조자의 포섭과 북한의 통일혁명이론의 전파 등으로 혁명역량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들 중 이석이라는 지하공작원이 있었다. 그는 1946년 10월 대구폭동 때 남로당 경북도당 간부였으며 6·25 때 월북했다가 1955년 4월 남파되었다. 그 후 그는 마산에 아지트를 설치하고 상여꾼, 지게꾼들을 상대로 친목계를 통해 의식화, 조직화를 진행시키던 중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터지자 재빨리 계원들을 민주당 마산시당 앞으로 집결시켜 사태를 격화, 폭발시키는 데 선두에 서게 했다.   1972년 보안사령부에 의해 검거되었을 때 이석은 4·19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사람은 자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당시 대학가에서는 '신진회' '신조회' '협조회' '농촌사회연구회' '암장그룹' 등의 이념서클이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특히 좌익조직으로 대표되는 '신진회'는 57년 12월 14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 동인지 '우리의 구상'에 실린 문리대 2학년 유모의 논문 "무산대중을 위한 체제로 지향"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문제되어 그가 구속됨으로써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다.   柳외에도 이수정, 이영일, 이기택등은 4·19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고 있다. '신진회'는 4·19투쟁과정에서 지하 지도부 역할을 수행하였고 혁신계 운동의 흐름 속에서 '민족통일학생연맹'을 조직하여 좌경적인 남북학생운동을 전개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처럼 북한은 해방과 더불어 남조선 적화의 꿈을 버리지 않고 줄기차게 사상과 조직을 정비해 오고 있었고 여기에 우리의 대학을 비롯한 노동계가 그들의 전위부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주었던 것이다. 대학과 노동계가 북한 전위대 역할   3·15부정선거를 시발로 터진 학생운동의 불길이 연일 꺼지지 않자 북쪽의 지도부에서는 그 불길의 방향에 대한 정보수집 및 분석으로 남쪽의 위기감에 버금가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1960년 4월 15일 평양의 남산뒤편에 위치한 노동당 3호청사에서는 김일성을 위시한 대남전문부서 전문가들이 모여 2차대남정세에 대한 공개 집체토론회를 개최했다.   논쟁의 초점은 남한에서 급속히 전개되고 있는 학생들의 반정부 투쟁의 혁명적인 성격과 전망에 두었다.   대남연락부장 어윤갑은 2시간에 걸쳐 "남조선 학생운동은 어디까지나 성격상 소부르조아 운동이고 이승만파쇼의 탄압으로 정권타도로까지 나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혁명의 주체세력인 노동자, 농민이 가담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번 투쟁은 성공할 수 없다"는 내용을 골자로 보고를 했다.   그리고 문화부장 김중린은 보충보고를 통해 "식민지 국가에서의 혁명적 인텔리 학생들의 역할은 매우 크다"면서 학생들의 데모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그의 경험적 설명을 덧붙였다.   4월 17일, 3월 28일부터 시작된 정세토론을 결산하면서 연락부장 어윤갑은 "혁명적이고 선진적인 노동계급의 진출없이 학생투쟁만으로 미국의 비호를 받고 있는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견해는 계급적인 제한성을 가진 학생투쟁에 대한 지나친 과대평가"라며 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을 과소평가하는 '착오'를 범했던 것이다. 4월 26일, 남한의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북한은 발칵 뒤집혔다. 4월 26일 노동당 정치위원회가 재소집되고 이 자리에서 어윤갑은 김일성에게 비판을 받았다. 김일성은 "벌써 두번 때를 놓쳤다"고 통탄했다. 혁명기본세력과 타도대상 분리   그리고 그들은 이 자리에서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면 미국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확인하게 되었고 대남공작지도기구의 개편을 통해 대남공작을 본격화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처럼 남한의 4·19는 북한의 대남공작 방향을 확고하게 설정하는 계기가 되었고 60년대는 북한의 대남공작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됐던 시기였다.   더불어 남한에서는 4·19를 계기로 각종 좌익세력들의 조직결성이 활성화되었으며 본격적인 이념전쟁에 들어가는 시발점이 되었다.   4·19 이후 북한의 3호 청사는 대남공작을 본격화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남한에 침투시킬 공작원을 선발하는 문제였다.   공작원의 기본조건은 남한에의 연고관계, 공작 실행능력, 사상성 등으로 했다.   60년 5월에서 7월 사이 수백명의 공작원 후보들이 3호 청사로 모여졌고 바로 이들이 60년대의 대남공작을 수행하는 주인공들이었다.   이들 중 전남 나주출신의 여자공작원 라경애는 60년 9월말경 서해 침투로를 통해 충남 당진해안으로 침투하여 고향인 나주로 잠입, 그녀의 가족들과 접선하고 그들의 비호하에 친족 1명을 대동하고 11월초 복귀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동월북한 친족은 1개월간 교육을 받고 남한에 재침투하여 공작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이처럼 4·19후 라경애를 비롯한 이숙현, 김남식 등은 체포되었지만 보령출신의 이길영, 강릉의 정운고, 제주도의 김용익 등은 복귀하여 문화부 및 조사부 지도원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북한은 4·19후 지하조직을 급속히 확대시키기 위하여 수많은 연고관계 공작원들을 남파시켰고 남한 내 공작원들의 친족들은 그들을 따라 월북, 밀봉교육을 받고 재침투하는 공작이 원만히 전개되었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붕괴된 지 11년, 장면 정권이 들어선 지 10개월만에 5·16 군사혁명으로 새로운 군사정권이 출현되자 북한 노동당 지도층은 또 다시 놀라고 당황하게 되었다.   그들은 미군이 모든 것을 장악, 통제하고 있는 한국군 내부에서는 독자적인 군사쿠데타와 같은 변혁적 행동은 전혀 불가능하며 미군의 조종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다. 불변의 선 대남혁명, 후 통일실현   5·16은 그들의 고정관념을 뒤엎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체득하게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은 비록 혁명사상이론으로 무장되거나 의식화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민주적 의식, 사회정의 의식으로 무장한 청년학생들의 주체적 투쟁으로 한 기성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을 창출해 낼 수 있다는 사실과 군부에서는 미군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정의감과 애국심으로 각성된 진보적이고 변혁적인 중견급 장교집단을 주축으로도 새로운 정권을 출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곧 남한 사회내부에 확고하게 준비된 정치세력만 조성되어 있으면 그 정치 세력이 주체가 되어, 독자적인 혁명을 조직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대남전략의 방침도 먼저 남한에서 혁명을 수행하고, 그에 기초하여 남북통일을 실현시킨다는 이른바 "선 대남혁명 수행, 후 남북통일 실현"으로 수정했다.   이 대남혁명에서 기본동력은 노동자, 농민, 지식인, 청년학생, 도시소시민, 중소상공업 잔, 애국적 군인, 민족자본가 등이며, 타도대상은 제국주의 침략지배세력과 그와 결탁한 매판예속 자본가, 지주, 반동관료, 친일, 친미 세력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65년의 한일기본조약추진은 그러한 대남혁명 구현의 좋은 계기가 되었다. 당시 대일 굴욕 외교반대투쟁으로 표출된 세력이 대남혁명에 이용됐음은 물론이다. 서울대내에 故 황성모교수 등을 주축으로 한 민족비교연구회(민비연) 산하 박범진 등은 그 주류였다. 이밖에 김학준, 현승일, 김덕룡 등 6.3세대가 그 후속부대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혁명공작의 기본 지침들은 60년대와 70년대를 통해 남한내 합법적 정당 진출의 모색이라든가 조총련을 통한 우회공작 등 각종 대남적화공작으로 나타났었다.   그리고 남한은 79년 10월 26일 朴대통령의 서거로 또 한차례의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된다.   각종 시위가 난무하고 치안은 부재상태에 빠지고 마침내 계엄령이 선포되는 등 일련의 사건들은 북한의 대남적화공작에 또 한차례의 호기가 되었다.   80년 5월 광주사태가 발생하자 북한의 지도부는 4·19와 5·16에 준하는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오진우를 사령관으로 하는 '전선 사령부'를 구성하고 해주에 10만의 특수부대를 대기시켜 놓고 남한에 그들의 공작원들이 가열찬 투쟁을 전개하여 광주를 해방구로 접수한 후 서울을 향해 투쟁의 불길이 번지도록 획책했다.   그러나 광주의 사태는 불과 10일만에 완전히 진압되고 말았다. 김일성과 그 일당은 또 한차례의 기회를 잃고 말았다. 5·18 당시 '전선사령부'구성, 전쟁태세   5·18 직후 일본의 언론기관 및 교회계통에 널리 살포된 '찢어진 깃발-목격자의 증언'이란 소책자가 있었다.   이는 광주 현지로부터 천주교 계통을 통해 일본에 보내진 광주사태 보고서라는 것인데 필자도 발행처도 익명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특전사 대원들이 총검으로 임신부의 배를 째서 태아는 꺼내 그 어미에게 던졌다.   또 여대생 세명을 발가벗겨 놓고 총검으로 등을 찌르고 가슴을 십자로 째서 청소차에 던졌다.   도청 앞 광장에 4백75구의 시체가 전시되어 있다… 등등 끔찍한 것들이었다.   성균관대 이명영 교수는 이 책자의 제작에 대해 "누군가가 사태의 악화를 노려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그것을 또 다시 찢어진 깃발로 확대, 재생산하여 해외에 유포시킴으로써 세계에 反韓여론을 일으키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그는 "남조선 혁명을 노리는 세력이 아니고서는 할 사람이 없다"면서 이것을 남한내의 '통일혁명당'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   또 하나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는 광주사태의 지명수배자였던 윤한봉(45)에 관해서다,   그는 전남대 농대재학 중 1974년의 민청학련사건 때 전남 부책임자로 일한 바 있고 광주사태 때는 '학생소요의 총책'으로 지목되어 내란죄 혐의로 수배중 81년 4월 마산항에서 화물선으로 미국으로 밀항하여 미국내에서 반한활동을 줄기차게 전개했다.   그는 서경원, 문규현의 밀입북을 주선하는 등 대북 커넥션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정치적 흥정에 의해 손을 흔들며 광주에 입성해 현재 일어나고 있는 '5·18 특별법 정국'의 강약을 주도하고 있다.   세번째 불가사의. 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 2층 회의실에서 최후의 항전에 대비하다가 전사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전남대 정외과 재학시절 운동권에 들어가 이념적 세례를 받고 1978년 졸업 후 서울 소재 주택은행에 입사 6개월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광주로 내려가 광천공단의 노동자로 위장취업을 했다.   그곳에서 같은 대학의 휴학생 박기순이 운영하는 '들불야학'에 참여하여 계급운동가로 성장해갔다.   이명영 교수는 윤씨에 대해 "탁월한 선전선동의 기획자이며 실천자였으며 그가 죽지 않았으면 통일혁명당의 실체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애석해 했다.   광주의 불가사의 제4호. 광주사태 당시 계엄군이 광주비행장 근처에서 한 시민군을 체포했는데 그는 왼쪽팔에 '월산 제2동 지도원동무'라고 씌어진 완장을 차고 있었다고 한다.   이 용어는 그 당시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용어인데 그들은 버젓이 그런 완장을 차고 다니며 마치 자신들의 세상이 온 것인 양 행동했던 것이다. '4·19 인민봉기', '5·18 기념식'   이와 같이 4·19와 5·18의 이면에 보이지 않는 북한의 공작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북한은 4·19를 '4·19 인민봉기'로 개칭, 이를 반미 구국항쟁으로 규정한 후 매년 "평양시 기념보고회"를 개최하는 한편 5·18에 대해서도 매년 기념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지난 2월 23일 조선일보는 성혜림 망명사건을 특종보도했다. 다수의 대북전문가들을 비롯한 일반 국민들도 북한의 식량위기와 고위급 인사들의 잇따른 망명 등을 근거로 북한의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의견을 내놓고 있다.   과거 우리는 김일성이만 죽으면 북한이 붕괴되고 통일도 될 것이라는 꿈같은 생각을 해 왔었다. 북한보다 남한 먼저 붕괴할지도   그런데 북한은 붕괴되지 않고 그의 아들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받아 오히려 남조선 적화통일을 위한 전략전술에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대남 적화사업을 충실히 해 가고 있다.   따라서 김정일이 죽거나 망명한다고 해서 북한 정권이 하루아침에 붕괴되리라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오판이다.   지금 우리는 일련의 북한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연막속에 우리 내부의 조직이 와해되어 가고 있는 소리는 듣지 못하고 있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많은 애국인사들은 오히려 한국의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갔다고들 걱정하고 있다.   김정일의 처였던 성혜림은 "서울에 간첩이 2만여 명 있다"고 했다.   물론 성혜림의 발언 이전에도 안보전문가들은 못해도 4만 명 이상의 대남공작원들이 서울시내를 누비고 다닌다고 판단해왔다.   북한에서 고급정보를 접할 수 있는 신분에 있었던 그녀의 말에 신빙성을 둔다면 2만명의 간첩들이 우리 사회 요소요소에 침투하여 북쪽의 지령에 따라 대한민국 붕괴의 꿈을 착실히 키워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지난 88년 8월 하순 노태우대통령은 젊은 학자 10여명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일본에 있는 조총련이 지난 80년이래 최근까지 매년 평균 2천4백억원의 막대한 자금을 한국에 보내오고 있습니다.   그 돈의 대부분이 대학 운동권의 지원자금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최근까지 약 2조원의 공작금이 조총련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온 셈입니다. 이 자금이 현재 국내에서 여러 갈래로 쓰이고 있지만 가장 우려되는 것은 우수한 학생들을 집중적으로 훈련 시켜 언론계에 침투시키는 것입니다.   지난 80년부터 현재까지 약 8백명이 침투되어 있답니다.   매년 평균 1백명 꼴로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젊은이들이 각 언론매체에 침투되고 있는 셈이죠"라면서 올림픽이 끝나는 대로 좌익을 발본색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국가의 안보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이들 좌익세력에 대해 어떤 조처도 취하지 못하고 물러나 오히려 그들의 역공작(?)에 말려 교도소에 수감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있다.   현시점을 기준으로 수치를 역산해 보면 언론계에 침투한 좌익분자는 1천 6백명 이상이 된다는 추산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들 좌익(대한민국 타도세력 내지 김일성·김정일 추종세력)들이 제4부라고도 하는 국가조직의 심장부에서 노동당의 지령에 따라 대남 공작을 전개해 가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노 대통령과 성혜림의 발언으로 나타난 좌익분자나 간첩들은 어디에 숨어서 어떻게들 행동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의문점을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기술공작 넘어서 국가 기관 침투 성공   1989년 김일성은 신년사를 통해 "오늘날 남조선에는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이 소수의 운동이 아니라 다수의 운동으로 전환되었으며 일부 계층에 한정된 운동이 아니라 각 계층을 망라한 대중운동으로 확대되어 있다.   이는 남조선에서 통일 운동이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가서 남조선 정세에 중대한 변화가 생길 것임을 말한다"라고 했다.   김일성의 이 자신에 찬 신년사는 그를 경모하고 추종하는 분자들이 '남조선 각계각층'에 안전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4·11총선은 그런 각성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전직 대공수사관 H씨는 "제5공화국 이후 북한의 대남공작전략은 소수의 간첩을 남파시켜 정보를 탐지하는 이른바 '기술공작'단계를 넘어섰으며 국가안보정책의 방향을 호도하는 공작, 군·경·안기부·기무사 등 안보담당 기관을 붕괴시키는 공작, 교육정책을 적색화하여 국가의 기간을 붕괴시키는 공작 등 거대한 규모로 조직된 힘으로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힘의 공작' 단계로 들어갔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 내부는 스스로 붕괴되어 가고 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있다. 우리 주변에 대한민국의 붕괴를 위해 생명을 바쳐 투쟁하는 적군은 많아도 자신의 생명을 바쳐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사람은 보이질 않는다.   우리의 대공기능도 불신을 당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미 적군이 국회를 비롯한 권력의 심장부까지 침투하여 대공기능 무력화 작업을 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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