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로 퍼옴~=== 우마차 타고 핸드폰 든 중국 ====
지은이 :김병추
차례
나는 왜 이 책을 썼는가?
1. 꽌시가 있어야 비로서 사람이다
외국인은 '봉'
꽌시를 찾아서
밥도 먹고 꽌시도 만들고
선물은 꽌시의 척도
세계의 중심은 중국
12억 인구도 우리의 자존심
빨리 하면 손해, 무조건 천천히
자기와 상관없으면 나서지 마라
절대로 나는 잘못 없다
체면이 밥 먹여 준다
과시는 필수 겸손은 선택
집단 속에 나를 감춘다
자율은 불편하다
애매모호하게 대충, 그러면 길이 열린다
메이꽌시 속에 숨어 있는 옥
2. 우마차 타고 핸드폰 든 중국
우마차 타고 핸드폰 든 중국
개방은 중국을 이렇게 변화시켰다
그러나 개방의 역풍이 불고 있다
변화하는 중국인의 성모랄
알 수 없는 중국인의 수입
거리의 여자
근현대사를 알면 중국이 보인다
조선족 중국인?
가짜와 위조가 판치고 있다
세상에서 대가 제일 센 여자들
제일 재미있는 오락은 떠드는 일
3. 중국 장사 결코 만만치 않다
계획경제를 잘 활용하라
시야를 넓혀라, 12억 인구는 실제 시장이다
중국 장사 쉽게 보았다간 큰코다친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언제나 윗사람이 있다
허풍도 능력이다, PR을 적극적으로 하라
중화민족의 자존심을 이용하라
'커이'(좋다)라고 말할 때 조심하라
같이 만만디로 대하라
반드시 현장 확인을 해라
가르치면서 장사해라
서비스도 상품이란 것을 모른다
한국에 초청하여 상담하면 의외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자기 할 일을 다하게 하라, 뇌물은 그 다음이다
속 얘기는 하지 마라, 약점 잡히면 크게 당한다
잊지 말 것, 계약서에는 모든 것을 명기하라
다 알고 있다, 다만 때를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끝까지 안심하지 마라
중국인과 분쟁이 생기면 조기에 수습하라
미련은 미련한 짓이다
4. 중국 투자에 왕도는 없다
중국투자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상품을 선택할 것인가
파트너 선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
투자를 위한 협상
계약서 작성은 어떻게 할 것인가
현지화와 중국인의 이해
인사 노무 관리
생산
판매
중국인 간부 육성과 관리
5. 중국에 이 정도는 알고 가자
중국 출장 갈 때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안전한 여행을 위하여
심각한 중국의 교통 문제
중국에서 휴일을 보내는 법
공항에서 이런 점은 주의하라
호텔에서 이런 점은 주의하라
알아두면 요긴한 것들
남은 이야기 - 대륙의 문이 열리고 있다
부록 - 모든 길은 도시로 통한다
북경(베이징)
천진(티엔진)
상해(상하이)
청도(칭다오)
광주(꽝조우)
대련(따리엔)
심양(션양)
중경(총칭)
무한(우한)
장춘(창춘)
나는 왜 이 책을 썼는가?
옆의 그림을 한국인에게 보여주고 느낌을 물어보도록 하자. 백이면 백, 구제 불가능한 게으름뱅이라고 욕을 할 것이다. '나무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을 한국인들은 아주 미워한다.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아무 일도 안하고 뭔가 이루어지기만을 마냥 기다리는 것은 아주 나쁜 태도임을 철저히 교육받아 왔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지 서둘러 재빨리 처리해야 '거 참, 시원시원하게 일 잘하는구먼'이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럼 이번에는 중국인에게 이 그림을 보여주자. 과연 어떤 평가가 나올지 궁금한 부분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전혀 반대의 평가가 나오기 쉽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사고 방식에 따르면 감이 익을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현명한 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익어서 저절로 떨어지는 감이야말로 진짜 먹을 만한 맛있는 감이라고 그들은 생각할지 모른다. 그들의 그런 눈으로 보면, 한국인들은 익지도 않은 땡감을 따서 먹겠다는 조급한 사람들로 보일 수도 있다.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 눈에는 아무 일도 안하고 기다리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상황이나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는 정중동의 자세가 바로 중국인의 기다림이다.
이처럼 한국인과 중국인 간의 사고 방식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차이는 사고 방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번에는 직접 감을 따도록 해보자. 한국 사람은 십중팔구 대뜸 감나무 위로 올라갈 것이다. 아니면 열매를 딸 수 있는 길다란 나무 막대기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안으로 감나무에 달린 모든 감을 다 따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중국인들은 과연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그들은 우선 감을 따는 일과 연관된 꽌시를 찾아 나설 것이다. 인간 관계를 뜻하는 꽌시(관계)는 중국을 이해하는 키 워드(Key Word)라고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중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땅덩어리가 큰 나라이지만,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아주 작고 좁은 나라이다. 왜일까? 바로 꽌시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12억이라는 엄청난 사람들이 꽌시라는 촘촘한 그물망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법이나 주먹보다 앞서는 게 꽌시다. 따라서 감 따는 일과 관련된 꽌시를 찾아 책임 있는 사람들의 동의와 지원이 보장되어야만 그 일을 안심하고 추진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과 중국인은 생김새는 비슷하나, 속살은 천양지차이다. 때로는 180도 반대라고 생각될 때가 많다. 그러나 북경 공항에 내리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중국을 알 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같은 동양인이고 유교적인 배경도 흡사한데 틀리면 얼마나 틀리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오해이다. 필자도 처음에는 그런 착각을 가지고 중국에 왔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은 그것이 너무나 수업료가 많이 드는 값비싼 착각이었음을 절감하고 있다.
이 책에 그려진 중국은 철저히 필자의 눈을 통해서 본 중국이다. 나는 중국을 객관적으로, 또는 정확히 알리고자 해서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또한 나는 그럴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단지 장사꾼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삶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온 사람이기도 하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중국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이다. 내가 이 책을 쓴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나보다 늦게 중국에 오는 사람이 나와 똑같은 착각을 범하고 똑같은 비용을 지불한다면, 그것은 너무 비경제적이라는 것이다.
남보다 조금 먼저 중국에 왔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렇게 물어왔다.
"중국에서 무엇을 하면 돈을 벌 수 있습니까?"
"중국에서 공부하고 싶은데, 과연 전망이 있을까요?"
"중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중국 사람은 어떻습니까?"
"중국은 어디를 구경해야 제일 인상에 남을까요?"
이 책이 그런 물음들에 대한 나 나름대로의 답변이다. 그러나 철저하게 나의 주관에 입각한 대답이다. 따라서 부정확하고 편파적일 수 있다. 어쩌면 이런 물음에 대한 답변은 본인 스스로 체험을 쌓은 후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에 대한 환상과 착각은 한국에 놓고 오는 편이 훨씬 빠르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거기에 조금이라도 이 책이 도움이 된다면 나로서는 대만족이다.
1995년 3월 1일
북경에서, 필자
1. 꽌시가 있어야 비로서 사람이다
외국인은 '봉'
꽌시를 찾아서
밥도 먹고 꽌시도 만들고
선물은 꽌시의 척도
세계의 중심은 중국
12억 인구도 우리의 자존심
빨리 하면 손해, 무조건 천천히
자기와 상관없으면 나서지 마라
절대로 나는 잘못 없다
체면이 밥 먹여 준다
과시는 필수 겸손은 선택
집단 속에 나를 감춘다
자율은 불편하다
애매모호하게 대충, 그러면 길이 열린다
메이꽌시 속에 숨어 있는 옥
외국인은 '봉'
그들은 왜 외국인을 그렇게 보호하려 하는가. 그 의도를 생각하면 나는 왠지 불쾌한 기분이 들곤 한다. 마치 돼지를 잡아먹기 위해 정성껏 키우고 보호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다'라는 중화 사상은 종종 자기 도취를 넘어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성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개방 이후 물밀듯이 밀려든 외국인들은 중화 사상의 후예들이 사는 터전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을까?
중국 관광을 해본 적이 있는 분들이라면 어디 한번 구경할라치면 매표소부터 외국인과 중국인을 다르게 구별해 놓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 매표 창구도 다르지만 가격도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한 배 반내지 두 배부터 시작하여 심한 곳은 열 배가 넘는 곳도 있다.
비행기 삯도 다르고 호텔 숙박비도 다르다. 외국인 전용 상점에 가보면 일반 시중에 비해 물건값이 두 배에서 세 배 정도까지 더 비싸다. 얼마 전까지는 화폐도 외국인 전용이 따로 있었다. 식당의 음식값이 다르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정도다.
무슨 인종 차별 정책의 중국 변종(?)인 듯한, 이것이 차별이라면 대체 이런 이상한 차별은 왜 생겨난 것일까? 그리고 거기에 대해 중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외국인은 바가지 씌워도 된다. 왜? 봉이니까!
대부분의 중국인은 외국인이 자기들 땅에 와서 싼 물가와 싼 노동력을 이용해 큰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자기들이 착취당하고 있다고까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외국인 고객에게 겉으로는 잘 대해 주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바가지 씌울 상대로 업신여기고 있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술에 대해서 전혀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가질 만한 일로 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속여도 될 만큼 외국인들은 자신들의 땅에 와서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집사람과 애들을 데리고 중국의 길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곤 한다. 그런데 물건을 골라 값을 물어보면 서투른 발음 때문에 금방 외국인임을 알고는 뻔히 아는 가격을 두 배에서 세 배까지 높여서 부른다. 방금 내가 듣는 앞에서 중국 사람과 가격을 흥정했으면서도, 그것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떳떳이 바가지를 씌우려 든다.
왜 외국인에게는 그렇게 비싸게 파느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당신네들은 돈이 많지 않느냐"는 말을 노골적으로 내뱉는다. 더 이상 말은 안하지만 그 말 뒤에는 "솔직히 말해서 당신 돈은 여기서 우리를 이용해 벌은 게 아니냐, 그렇게 번 돈에 비하면 이건 얼마 비싼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 이익을 중국 인민들에게 좀 나누어준다고 해서 어디가 덧나냐?" 하는 말이 숨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지상 과제는 급속한 경제 개발이다. 그런데 땅과 자원, 인력은 넘쳐날 정도로 많이 있으나 자본과 기술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부득이 외국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들에게 경제 개발을 위해선 외국인은 참으로 중요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 당장 필요가 있기 때문일 따름이다.
자기들 이해가 충족되면 어찌될까? 중화사상의 화려한 부활을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옛날부터 주변 민족들을 동이니 남만이니 하며 오랑캐라고 했던 배타성이 그대로 드러날 게 틀림없다.
싸우다가도 외국인이라면 꼬리를 내린다
중국은 외국인의 안전(security)을 세계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나라라 할 수 있다.
우리 사무실의 총각 직원 한 명이 선을 보기 위해 잠시 귀국한 적이 있었다. 신부측 부모는 다른 것보다도 중국이라는 험한 나라에 딸을 보내려니 꽤 염려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총각은 외국인에게는 북경이 오히려 뉴욕보다도 훨씬 안전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 꽤나 애를 먹었다고 한다. 분명히 북경은 뉴욕보다, 그리고 유럽이나 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 외국인 안전 문제에 대해서는 안심할 수 있는 나라다.
그러나 원래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그렇게 100% 안심할 수 있는 나라냐, 하면 그건 또 꼭 그렇지만은 않다. 중국인끼리는 범죄도 많다. 밤중에 중국인들이 사는 동네나 가로등이 없어 으슥한 거리를 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돈 많은 중국인으로 오해받아 강도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살다 보면 중국인과 싸워야 할 때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중국말을 잘한다고 해도 처음 말다툼을 할 때는 잘 모르지만, 말이 빨라지고 거칠어지면 중국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말이 빨라지고 급해지면 4성(중국어의 독특한 성조)의 사용이 부정확해져 발음이 틀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상대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슬그머니 꽁무니를 뺀다. 한창 열을 올리며 싸우다가도 외국인과 싸워 좋을 것 없다는 판단이 머리를 드는 것이다.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제도적으로 외국인에 대한 보호가 잘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호받는 외국인, 그러나 그게 사육(?)되는 것이라면
그들은 왜 외국인을 그렇게 보호하려 하는가? 그들의 진짜 의도를 생각하면 나는 꽤 불쾌한 기분이 들곤 한다. 마치 돼지를 잡아먹기 위해 정성껏 키우고 보호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만일 외국의 자본과 기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만큼 자신들의 경제 개발이 완성된다면,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대할까. 아마 외국인을 배척하는 기치가 본격적으로 드러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보호는 해주지만 뽑을 것은 다 뽑아 먹겠다는 그들의 태도를 중국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당해 봤을 것이다. 가끔씩 우리 주재원들끼리 만나면 그들에 대해 공통적으로 분개하는 점이 있다. 우리 회사가 간혹 중국측 회사와 이해가 상충되어 담판을 짓는 일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중국인 직원은 자기 소속을 망각한 채 애매한 태도를 취하거나 아니면 노골적으로 중국측 편을 드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 나라 회사라지만 그래도 우리 회사에서 녹을 먹고사는 처지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나라는 어떠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한때 간도 쓸개도 없이 외제라면 무조건 좋아하고 국산은 무조건 질 낮은 것으로 치부하면서 우리를 비하하지는 않았던가. 한때 '미국놈 것은 똥도 달다더라, 미국놈 방귀는 냄새도 향내나더라', '그래도 일본놈들이 잘한 게 많다'느니 하며 비주체적인 태도로 외국을 바라보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외래어 문제만해도 그렇다. 외래어를 잘 써야 유식하게 생각하고 온통 상품 이름이나 간판도 외래어 투성이가 될 정도였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것, 우리 자신을 되찾자'는 반성을 해야 될 때가 있었다. 물론 우리것을 되찾자는 것이 과도한 민족주의와 국수주의가 돼서는 안될 것이다.
바로 나는 중국인들에게 이 말을 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래 너네 것을 고집하고 자존심을 갖는 것은 좋다. 그렇다고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외국인을 배척해도 되는 것인가? 외국인도 중국에서 소득세를 낸다. 그리고 아직은 우리가 더 이익을 보는지 너희가 더 이익을 보는지도 잘 모르는 일이다. 지금은 버는 것보다 쏟아 붓는 돈이 더 많고, 너희네들을 착취하지도 않는다.'
상술이 뛰어난 사람 가운데 중국인을 꼽을 만큼 그들은 자기 이익을 챙기는 데 철저하다. 아마 개방이 되고 나서 막말로 그동안 가려져 있던 '뙤놈' 기질이 한껏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결코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괜한 기대나 믿음을 먼저 가질 필요는 없다. 중국인에게 '필요한 사람'이나 '친구'가 되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존재가 바로 외국인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필요해서 보호는 해주지만 어쩌면 이들에게 외국인은 키워서 잡아먹는 '봉'일지도 모른다. 이 점을 냉정히 깨닫고 중국인들을 대해야 할 것이다.
꽌시(관계)를 찾아서
중국 사람들이 꽌시를 찾아내어 들이미는 것을 보면, 참으로 신통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중국 사회는 구석구석까지 꽌시로 연결되어 있다.
보통 새로 사업을 시작한다면 우리는 어떤 일부터 시작할까? 아마 대개는 그 사업이 과연 성공 가능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타진해 보고자 시장 조사부터 착수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자금과 인력 및 판매계획들을 짜는 게 순서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사업의 성패를 좌우할 자금 확보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다.
그럼 중국인은 어떻게 무슨 일부터 시작할까?
어떤 종류의 일을 하든지 간에 중국인은 제일 먼저 꽌시(관계)를 찾으려 한다. 혈연과 학연, 지연 등 자기가 갖고 있는 꽌시를 모두 동원해서 그 일에 필요한 꽌시를 잡으려 한다. 만일 그렇게 해서도 꽌시를 잡지 못하면 자신은 그 일을 추진할 능력이 없다고 이내 포기하고 만다. 그래서 그들에겐 꽌시를 많이 갖고 있을수록 실력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그들에게 꽌시는 모든 일의 시작이고 끝이기도 하다. 꽌시가 있어야 일을 시작하지만 또 일을 하면서 꽌시를 많이 만드는 게 제일 중요한 목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꽌시(관계), 관계라는 뜻의 이 말은 중국에서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식으로 하면 인맥 관계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 의미는 현격히 다르다. 우리 사회에선 인맥보다 자금이 많거나 그 방면에 전문적인 능력, 또는 정보력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인맥은 부수적이거나 수단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중국의 그것은 모든 일의 절대적인 전제이자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꽌시(관계)가 있어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바쁘고 힘겨운 현대 생활 속에서 가족과 친인척들과도 제대로 왕래도 못하며 산다. 중국적인 의미의 꽌시를 만들 틈도 없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줄도 없고 빽도 없이' 산다. 그래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꽌시가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아무리 꽌시가 없는 사람이라도 부모, 형제, 부모의 형제나 친인척, 형제의 배우자, 그 배우자의 친인척 등 사돈의 팔촌까지 적잖은 꽌시를 찾아낸다. 또 이뿐만 아니라 동네 이웃, 동학(통슈에)이라 하여 동창생까지 꽌시로 연결되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렇듯 중국 사람들이 꽌시를 찾아내어 들이미는 것을 보면, 참으로 신통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중국 사회는 구석구석까지 그물망처럼 꽌시로 연결되어 있다.
말하자면 꽌시는 중국인에게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될 공기와 같은 존재다. 꽌시가 전혀 없는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로 볼 수 없다. 동물적인 의미라면 몰라도...
무슨 일을 하려는데 메이꽌시(몰관계), 즉 꽌시가 없어서 원활히 일을 진행할 수 없다면, 중국인들은 무능력함을 한탄하는 정도를 넘어서 인간적인 굴욕감마저 느끼는 것도 꽌시의 이런 점 때문이다.
해가 떠도 꽌시, 달이 떠도 꽌시
꽌시의 위력이 이 정도인만큼 기존의 꽌시를 잘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중국인들이 꽌시를 유지 발전시키는데 들이는 정성은 몇 안되는 명절 때에 유감없이 발휘된다.
추석에는 월병(유에빙)이라고 하는 빵떡을 선물로 주고받으며 서로의 꽌시를 확인한다. 중국의 가장 큰 명절인 춘절(춘지에:우리의 설날)에는 각종 선물 교환으로 약 1-2주일 전부터 모든 업무가 마비될 정도다. 구정이 시작되는 날부터 약 2주일 동안은 꽌시가 있는 집들을 일일이 방문한다. 또 방문을 받을 경우에는 대단히 반갑게, 그야말로 정성을 다해 접대한다. 그리하여 다시 1년 동안 꽌시를 통해 많은 것을 이루고, 또 새로운 꽌시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중국에서는 왜 이렇게 꽌시가 발달하게 되었나?
중국의 끝없이 넓은 땅 중에는 타민족의 땅을 합병하여 자기 영토로 만든 것이 많다. 자연히 중앙 권력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각 성마다 제후들의 지방 분권이 발달하게 되었다. 중앙의 일률적인 제도가 제대로 미치지 못하니 자기 영토 안에서의 '인간 관계'가 더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꽌시가 유래한 것도 이런 중국 역사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각 성 및 각 지방은 또다시 작은 지역으로 나누어지고, 거기에 작은 단위의 꽌시가 발달하여 모든 게 꽌시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꽌시의 지방색
중국 사회가 꽌시로 촘촘히 얽혀 있다 보니 지방에 따라 꽌시의 색깔도 매우 독특하게 드러난다. 땅이 넓다 보니 지방색이 강한 것은 당연한데, 그 지방색에 따라 그곳 꽌시의 성격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동(산뚱) 사람들은 자칭 의리가 강하다고 이야기한다. 처음 만나면 새 친구요, 두 번째 만나면 벌써 옛 친구가 된다. 그리고 친구가 되어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해 사람의 가벼움과 얄팍함을 좋아하지 않으며, 북방인의 무모함 또한 좋아하지 않는다. 바다를 끼고 있어 마음이 넓다고도 하며, 산동 사람끼리 산동 반도에서 만나면 해결되지 않는 일이 없다고 한다.
광동(관뚱) 사람은 이재에 밝고, 장사에 능하다고 한다. 중국에서 돈 구경하려면 광동에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중국에서는 광동 사람과 장사해 봤자 큰돈 벌 수 없다고 할 만큼 그들은 결코 손해 보는 법이 없다고 한다.
동북(똥베이)사람은 성격이 활달하고 매사에 적극적이며 남자다워, 어디를 가도 그 성격의 호탕함으로 금방 표가 난다고 한다.
상해 사람은 감각이 발달되어 있어 장사를 잘한다. 형식을 중히 여기고 멋을 부릴 줄 알며 타지방 사람의 촌스러움을 흉본다고 한다. 상해에 가서 옷자랑하지 말고 멋부리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절강(저찌앙)과 복건(후찌앤) 사람은 근면하고 부지런하다고 한다.
북경 사람은 명예를 중히 여기고 예의가 바르다고 한다.
그 외 어느 지방에 가든지 그 지방의 고유한 특징들을 설명하는 말들이 있다.
그 특징에 따라 꽌시의 성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을 이해하는 첫걸음, 꽌시
꽌시를 모르면 중국인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장사에서 예를 들어보자. 전세계에서 거의 실패한 적이 없다는 일본인도 중국에서는 크게 성공한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그러나 홍콩과 대만,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의 화교들은 거꾸로 중국에서 실패한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그 이유를 한마디로 대면, 그들은 같은 민족으로서 다른 어느 나라도 가질 수 없는 꽌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꽌시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데다가, 그들만의 무기인 꽌시를 적절히 이용해서 사업을 풀어 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꽌시는 한 번 맺으려면 당연히 시간이 많이 소요될 뿐 아니라, 서로 믿지 않으면 결코 맺어지지 않는다. 좋은 꽌시는 서로 믿으며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고 어려운 부탁을 할 수 있는 관계다. 어려운 부탁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언젠가 자기도 어려운 부탁을 받을 때 자기 일처럼 그 부탁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사람들은 간혹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뒷돈(Under Table Money)으로 해결해 보려고 한다. 한국에선 작은 돈이지만 중국에서는 위력을 발휘할 만큼 많은 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오늘날의 중국사회를 돈이면 뭐든지 다 해결될 수 있었던 예전의 한국 사회와 동일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중국인의 의식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착각에 불과하다. 중국인은 아무런 꽌시가 없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돈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우선 꽌시를 동원해서 해결하려고 하지, 처음부터 돈으로 해결하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꽌시가 좋고 오래된 사람에게는 돈을 받기도 하는데, 그것은 보통 일이 원만히 잘 해결되고 난 후의 일이다. 뇌물을 통한 뒷거래는 반드시 꽌시가 있어야 가능하다.
중국을 알려면 우선 꽌시부터 잘 이해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꽌시는 중국을 이해하는 데 첫 번째 요소인 것이다.
중국은 그야말로 꽌시의 나라다.
밥도 먹고 꽌시도 만들고
음식 문화가 발달했다고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다소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우리에겐 너무 낯설고 고역스럽기까지 한 이런 자리에서 그들은 서로 꽌시를 만들고 중요한 일을 성사시킨다.
중국에서 꽌시를 만드는 데 제일 많이 이용되는 장소가 바로 식당이다. 식당에서 그들은 기존의 꽌시를 더욱 돈독히 할 뿐 아니라, 이를 이용해서 새로운 꽌시를 연결하기도 한다.
개방과 더불어 자본과 기술을 가진 외국 손님을 끌어들여 투자하도록 만드는 상담도 식당에서 이루어진다.
식당에선 음식만 먹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배갈(빠이쮜오)을 서로 부딪쳐야만 상담도 시작된다. 그리고 한 건 성사되면 또 한 잔 마시며 성대한 식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중국 사람의 심리다.
중국에서 식당은 밥이나 술만 먹는 자리가 아니다. 식당에선 수백, 수천만 달러가 오가는 상담도 이루어지고 중요한 꽌시도 만들어진다. 그래서 중국의 음식 문화는 세계적으로 알아줄 만큼 상당히 발달해 있다.
밥 먹고 합시다!
중국인은 먹는 일을 하늘로 삼는다고 한다. 못먹고 못살던 시절의 얘기가 아니겠는가 하겠지만, 어느 정도 먹을 게 해결된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못먹던 시절에는 하루하루의 삶이 온통 먹기 위한 전쟁이었으나, 먹는 것이 해결된 오늘날에도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즐거움으로서 역시 '하늘을 받들 듯' 먹고 마신다. 중국인들에게 '밥 먹었느냐' 하는 이야기는 가장 일상적인 인사말 중의 하나다. 그래서 '먹었습니다', 혹은 '배불리 먹었습니다'는 중국인에게 가장 기분 좋은 대답 겸 인사다.
우리도 가난했던 시절에 '식사하셨습니까?', 혹은 '진지(아침) 드셨습니까?' 하는 인사가 서양의 '굿 모닝' 인사처럼 통용되던 적이 있었다. 그 시절을 지금의 중국과 비교해 본다면 대충 오늘날 중국의 모습을 짐작할 수도 있겠다.
식사 시간 즈음에 중국인 기사를 데리고 밖에 나가면 먹는 일에 대단히 신경을 써야 한다. 상담을 하다 식사 시간을 넘기고 나와 보면 차는 있는데 운전사가 없어 난감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급하게 뒷간을 보고 온것처럼 표정을 지으며 밥 먹으러 갔었다고 하면, 나무란다거나 내가 올 때까지 배고픈 것을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는 차마 말할 수도 없었다.
상담할 때도 식사 시간이 되면 상담에 맥이 빠지고 만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 상담을 계속하든지, 식사 후에 다시 하든지, 같이 식사를 할 입장이 못되면 그 날은 일단 물러나야 한다.
나는 것은 비행기만 빼고, 다리 있는 것은 책상만 빼고 다 먹는다.
확실히 중국의 어느 지방을 가더라도 가장 잘되고 번성하는 장사는 바로 '음식 장사'란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낮에도 마찬가지지만 밤에는 모든 음식점이 거의 만원이다. 어느 음식점에 가도 사람들로 흥청거린다.
중국의 속담에는 '나는 것은 비행기만 빼고, 다리 있는 것은 책상만 빼고 다 먹는다' 라는 말이 있다. 중국에서 유명하다는 광동요리(관뚱차이), 사천요리(쓰추안차이)만이 아니다. 어디를 가나 흥청거리는 음식점에서 그들은 별 희한한 음식을 즐긴다.
비교적 비위가 좋은 편인 나도 가끔 중국인들이 먹어보라고 권하는 몬도가네식 음식 앞에선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맛을 느낄 겨를도 없다. 그저 두 눈 딱 감고 '이것도 경험이다'는 생각으로 꿀꺽 넘겨버리곤 했다. 뱀고기나 뱀수프, 뱀피, 뱀쓸개즙 등 뱀 요리정도는 이상하거나 눈살 찌푸려지는 축에도 끼지 못한다. 원숭이의 골 요리나 골 수프가 있고, 거북이 요리, 개구리 내장 요리, 하다 못해 전갈 요리까지 있다.
이름 외우기가 어려울 정도로 음식점의 요리 종류는 웬만한 곳에가도 보통 50 내지 60종이 넘는다. 음식을 주문하면 보통 여러가지를 시키는데 십중팔구는 남게 시킨다. 중간쯤 가면 상에 접시 놓을 자리가 없어 두세 개를 포개 놓거나, 남은 음식을 다른 접시에 함께 담아 놓고 새 접시를 놓기까지 한다.
그 음식들을 술과 함께 맛있고 배부르게 먹어주는 게 예의다. 상대가 잘 안 먹거나 조금만 먹으면 불안해하고 또 별로 기분 좋지 않게 생각한다. 한 번 식사하면 보통 두 시간 넘게 걸리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같이 식사하는 것 자체가 큰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음식 문화가 발달했다고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다소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우리에겐 너무 낯설고 고역스럽기까지 한 이런 자리에서 그들은 서로 꽌시를 만들고 중요한 일을 성사시킨다.
'한국 가면 배가 고프다'
한중 외교 관계 수립 후 경제 정치 교류가 증가하면서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초대받은 중국 사람이 돌아와서 보통 하는 말이 한국에 가서 "배가 고파 혼났다." 는 것이다.
일 때문에 가끔 한국에 들어가면 마침 회사를 찾아온 중국 손님들을 접대할 경우가 있다. 그럼 나는 중국 손님을 주로 뷔페 식당에 데리고 간다. 중국 사람에게 뷔페는 가장 멋진 자리 가운데 하나다. 접시 몇 개를 겹칠 만큼 많은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하고 고마워한다. 한국에서 중국 손님을 접대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방법이다.
중국 사람과 좋은 꽌시를 맺기 위해서는 그들이 하늘처럼 여기는 음식 문화를 잘 알고 효과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인의 음식 문화를 잘 이용할 줄 알면, 이미 시작 전에 반은 좋은 꽌시를 조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선물은 꽌시의 척도
상대가 나를 얼마나 중요시하고, 나와 맺은 꽌시를 얼마나 존중하는가가 그들에겐 늘 첫째이다. 선물은 그런 점에서 가격보다도 정성이 담긴 게 중요하다.
식당 문화에서처럼 꽌시와 연결되어 발달한 것이 바로 선물 문화다. 어디를 가거나 처음 꽌시를 맺어야 할 때 중국 사람은 꼭 선물을 준비한다. 바빠서 깜빡 잊어버리고 미처 준비를 못했다는 것은 적어도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다. 제일 먼저 선물 챙기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사람은 가장 간편한 선물로 술이나 담배를 준비해 오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선물 받을 사람을 신중히 배려해 준비해 온다기보다, 오는 길에 공항 면세점에 들러서 사오는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오고가는 선물 속에 익어 가는 꽌시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이런 무성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비싸든 싸든지 간에 상대가 얼마나 정성 들여 준비했는가부터 살핀다. 그들의 의식에는 상대가 나를 얼마나 중요시하고, 나와의 꽌시를 얼마나 존중하는가 하는 문제가 늘 첫째다. 이렇게 선물을 꽌시의 척도로 삼으려 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사소한 선물 하나라도 중국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93년 말 중국 정부에서 선물에 대한 규정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얼마 이상의 선물은 받아서는 안되며, 얼마 미만의 것은 받아도 좋다는 규정을 국영 기업체에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 발표는 얼마 안 가서 곧 유명무실해져 사람들 사이에서도 우스갯소리로 끝나고 말았다. 중국에서 얼마나 선물이 많이 오가는가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예이다.
한 번은 내가 만났던 거래처 담당자에게 답례로 선물을 하고 싶은데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마누라에게 줄 금 목걸이를 해달라"고 하지 않은가. 이 정도쯤 되면 선물의 도를 넘어서 곧 뇌물이나 다름없어진다. 사실 많은 종류의 뇌물이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왔다갔다하기도 한다.
공짜라면 카탈로그도 띵하오!
선물을 많이 하는 만큼 그들은 선물 받기를 또한 좋아한다. 이 점에는 공짜를 좋아하는 중국인의 특성과 일맥 상통하는 게 있다. 우리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공짜를 마다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우리보다도 훨씬 더 심한 듯하다.
중국에서 박람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행사 참관자들을 위해 조그만 선물도 준비하고 회사를 소개하는 카탈로그도 책상 위에 놓아 한 부씩 가져가도록 하였다. 그런데 몇 번 하다 보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많은 수량을 준비해도 남아나질 않는 것이다. 3일치 선물을 가지고 가도 보통 반나절이면 없어진다. 한 번 가져간 사람이 몇 번씩, 심할 경우에는 수십 번씩 가져가고 또 소문이 퍼져서 삽시간에 없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선물을 빼고 카탈로그만 준비해 놓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관심있는 사람들만 한 부씩 가져가는 게 아니라 수십 부씩 가져가는 게 아닌가.
또 저녁과 함께 회사를 소개하는 리셉션에 중국 사람을 초대하면 밥만 먹고 그냥 가버리기가 일쑤다. 그래서 정작 본격적인 행사가 진행될 때는 자리가 텅 비어서 꼴사납게 보이는 경우가 적잖았다. 그래서 순서를 바꿔서 제일 마지막에 경품 순서를 마련했더니 자리를 뜨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선물은 무조건 다다익선
중국 사람에게 선물은 일상 생활이다. 크고 작은 것 관계없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한다. 우리는 선물을 주면서 대단히 어색해 하지만 중국 사람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도리어 선물을 주지 못하는 걸 대단히 어색해 한다.
선물에는 직위에 따라 급이 정해져 있다. 따라서 중국 사람과 사업상 만날 때 중요한 한두 사람에게는 약간 값이 나가는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나 비록 값이 비싸지 않은 것이라 해도 가능하면 많은 선물을 준비하는 게 좋다.
될 수 있으면 선물은 많이 준비하여 모든 사람에게 다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꽌시를 위해 대단히 좋다. 모두를 친구로 만들 수 있고 모두와 꽌시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세계의 중심은 중국
중국 인민들의 마음속에는 징그러우리만치 많은 12억이라는 인구도 자존심이고, 엄청나게 큰 땅도 그들의 자존심이며, 유구한 역사도 그들의 자존심이다.
중국인들은 공식 국명에다 '중화'라고 갖다 붙일 정도로,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데 서슴이 없다.
중국 사람 누구에게나 중화 사상이 뭐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중국이 세계의 중심임을 밝히는 사상이라고 이야기한다. 중국이 왜 세계의 중심이냐고 물으면,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중국 사람은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중국과 중국 인민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은 그들 모두의 의식 속에 항상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지역적인 의미뿐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에서도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다' 라는 자부심이 대단히 강하다.
세계화는 중국화(?)
중국인들은 세계 정세의 흐름에 따라가려 하지 않는다. 거꾸로 세계를 자기 중심으로 몰아오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세계적인 흐름이 어떠하니 우리도 그 추세에 맞추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매사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우리 입장에 동조하고, 찾아와서 공감을 표한다'는 식이다.
자기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심리는 어떠할까? 이것이 중국에서 내가 주로 관심을 갖고 지켜본 것 가운데 하나였다. 나라 전체가 대체로 자기 중심적이다. 이런 현상은 정치에서, 외교에서, 경제에서, 그리고 모든 개개인의 사고 방식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중국 정부는 일본과 한국을 자기 나라로 불러들여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이처럼 중요한 사안은 불러들여 해결하려 한다.
외래어가 들어오기만 하면 중국식 발음과 글자로 금방 둔갑시켜 사용한다. 햄버그를 '한바빠오', 맥도날드를 '마이땅라우', 켄터키 치킨을 '컨터지 찌아향찌', 팝콘은 '버우미후아', 샌드위치는 '산밍치', 코카콜라는 '커코우커러', 펩시콜라는 '빠이스커러'라 부른다.
심지어 나라 이름마저 자기 멋대로다. 프랑스는 '화구어', 즉 음대로 하여 '화란스'의 '화'와 나라 '국'자를 합해 부른다. 독일을 '더구어'(덕국, 즉 더이치의 더와 나라 국자가 합해졌다), 브라질을 '바시'(파서)라 한다. 그리고 이런 것을 조금도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눈에는 재미있으면서도 황당할지 모르나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이며, 중국식으로 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할 테면 해라. 우리는 우리식대로 한다.
장사에서도 이런 현상을 쉽게 볼 수 있다.
국제 시세가 어떠하니 그에 맞춰 가격을 정해야 한다는 논리는 중국에서 잘 통하지 않을 때가 많다. 국제 시세가 어떻든지 간에 자기들 사정에 따라 우리는 이렇게 해야겠다는 억지인 것이다.
중국의 곡물과 사료는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이 높아 수출의 1, 2위를 다툰다. 그런데 곡물과 사료는 국제 시세에 따라 변화가 많은 물건이다. 한국은 곡물 중에서도 옥수수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구매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자연히 우리는 국제 시세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94년 말쯤에 옥수수의 국제 가격이 한 번 떨어진 적이 있었다. 당연히 중국 측에게 국제 시세에 따라 가격을 결정하자고 했다. 그러나 옥수수를 공급하기로 되어 있는 공급하기로 되어 있는 공급자가 도대체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 공급자는 옥수수만 취급하는 '중국옥수수 수출연영공사'라는 국영 기업이었는데도, 내가 말하는 국제 시세에 대해선 코방귀조차도 뀌려 하지 않았다.
자기들 사정이 이러한데 국제 시세가 다르면 안 팔면 그만이다는 억지였다. 94년 9월경부터 연 5억 달러 가량 중국에서 한국으로 수출되던 것이 연말까지 전면 중단되다시피 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소 비싼 값 주고서 미국으로부터 옥수수를 살수밖에 없었다.
94년도 초에 인권 문제를 들어 미국이 최혜국 대우 철회를 위협했을 때에도 중국의 입장은 일관되게 변함이 없었다. 너희들이 도대체 뭐냐, 우리는 우리가 중심이 되어 모든 걸 결정한다. 그것에 맞추지 않겠다면 너희들과도 상대하지 않겠다, 이것이 중국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는 중국 정부만의 입장은 아니었다. 당시 모든 중국 인민들도 마찬가지로 이에 동조했다. 할 테면 하라는 식이었는데, 결국은 미국이 포기하고 말았다.
만일 그때 미국이 최혜국 대우도 철회하고, 또 여러 가지로 압력을 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중국은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막무가내였으리라. 미국도 중국의 이러한 입장을 잘 알았기에 슬그머니 발을 빼고 최혜국 대우를 연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닌지.
12억 인구도 우리의 자존심
자기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자연히 자존심도 대단하다. 자존심 세울 게 뭐 그리 많나 하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중국 인민들의 마음속에는 징그러우리 만치 많은 12억이라는 인구도 자존심이고, 엄청나게 큰 땅도 그들의 자존심이며, 유구한 역사도 그들의 자존심이다. 그들은 자기들 나라를 신주(션찌오: 신의 나라)라고 할 정도다.
우리는 중국을 경제력이라는 잣대로 평가하려 한다. 중국인과 상대할 때에도 같은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물론 최근 개방의 영향으로 잘사는 게 중국인에게도 중요한 삶의 목표와 가치관이 돼가고 있다. 그러나 원래 중국에서는 경제력이 한 나라의 힘을 결정하는 잣대가 아니었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 전체 인민의 복리 등이 복합적으로 평가되고 비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지 못산다는 선입견을 갖고 중국인과 상대하고자 하면 자칫 비웃음을 살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12억 인구도 우리의 자존심
중국인은 가난한 것에 대해 절대로 주눅 들지 않는다. 굉장히 떳떳하다. 여름에 런닝만 걸치든 겨울에 냄새 나는 옷을 껴입든 고급 양복을 입은 외국인과 상담해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는다.
중국을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라면, 중국인들 스스로 세계 최고의 국민이라는 자부심과는 전혀 거리가 먼 '뙤놈'들에 불과하다는 선입관을 금방 갖게 된다. 중국에 오래 살다 보면 그런 선입관은 점차 약해지지만, 그래도 중국인 하면 잘 씻지 않는다는 인상이 먼저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인들은 머리에는 비듬이 허옇고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많다. 빨래도 마찬가지다. 소매가 새까매진 와이셔츠를 입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엘리베이터라도 같이 타면 냄새 날 때도 많고, 비행기를 탈 만큼 되는 사람도 여름에는 옆에 앉은 사람에게 코를 어디다 둘지 모르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상담을 하는 데 양복에 운동화를 신고도 아무렇지도 않고, 손님을 만나는 데 추리닝 바람으로 나오질 않나, 여름에는 속옷 바람으로 남의 회사를 찾아오는 적도 있다. 이럴 정도니 도대체 예의라고는 약에 쓸려 해도 없는 더러운 사람들이라고 할 만도 하다.
나는 내몽고에도 출장을 자주 다녀온다. 그런데 그곳 도시에서 제일 큰 호텔에도 겨울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운물이 나오질 않았다. 기온은 벌써 영하 4-5도 정도인데, 샤워를 못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머리조차도 감을 수가 없었다.
얼굴만 매일 아침 고양이 세수를 하고 식사는 주로 양고기, 말젖등으로 해결했다. 이렇게 4-5일을 지내다가 북경으로 돌아오니 마침 어머님이 와 계셨다. 그런데 나를 보자 어머니께서 "중국 사람의 얼굴은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네 얼굴도 영락없이 중국 사람이냐"라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샤워도 못하고, 더운물에 비누칠 세수도 못했으니 자연히 머리가 푸석푸석해지고 얼굴이 거무튀튀해져 중국 사람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중국의 일반 가정은 샤워 시설이 없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여러 가족이 같이 화장실을 쓰며, 조그만 세숫대야 하나로 여럿이 쓰기 때문에 머리를 자주 감을 수 없다. 그러니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냄새는 머리나 얼굴보다도 옷에서 더 난다. 옷을 제대로 못 빨아 입기 때문이다. 냄새 나는 옷을 왜 있는 대로 다 끼어 입고 다니는지, 겨울에 북방의 추운 곳을 가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또 양자강 이남의 따듯한 남방을 가보아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흑용강성, 길림성, 요령성, 내몽고 등 북방의 겨울은 그야말로 혹독하게 춥다. 영하 20-3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거의 상상하지 못하리라. 난방은 되어 있으나 대부분 시원찮다.
이런 추운 지방에서도 자전거가 가장 대중적인 교통 수단이다. 자연히 옷을 잔뜩 끼어 입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잠을 잘 때도 난방이 신통치 않으니 옷을 그대로 입고 자야 했다. 그러니 옷에서 냄새가 안 날 수 없는 것이다.
양자강 이남의 남방을 가보자. 이 지역은 법으로 아예 스팀을 주지 않게 되어 있다. 북방보다 온도는 높지만 0도에서 영상5도 정도의 날씨에 난방 없이 지내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겨울의 무한(우한)은 하얼빈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솔직히 추워서 상담이고 뭐고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이런 환경 조건에 어떻게 자주 빨래를 할 수 있겠는가?
세탁기가 보급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거의 대부분 손으로 물빨래를 해야 한다. 그러니 중국인을 더럽고, 냄새 난다고 멸시해서는 안된다. 그런 환경이 되면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중국인들은 좀 환경이 나아져도 씻지 않고 옷도 빨아 입지 않는 게 다소는 습관처럼 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륙 본토만 그런 것이 아니고 중국보다 잘 산다는 홍콩이나 대만도 '챠부뚜어'(큰 차이가 나지 않음)라는 것이다.
중국을 이해해야 좋은 장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중국인은 못 입고 가난해도 그런 것에 절대로 주눅들지 않는다. 굉장히 떳떳하다. 여름에 런님만 걸치든 겨울에 냄새나는 옷을 겹겹이 껴입든 고급 양복에 멋있는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입은 사람과 상담해도 조금도 주눅들지 않는다.
어쩌면 가난이란 우리 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화된 생각과 자본화된 양심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중국인은 장사가 잘되었거나 하면 먼 곳까지도 일부러 찾아와 고맙다는 표시로 선물을 준다. 여러 번 느낀 것이지만 선물의 금전적인 가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거기에 담긴 마음의 정성이 소중하다.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한 어느 한국 사람은 지방에 가서 싼 선물을 받고서는 북경에 와서 그 선물을 팽개치고 가버렸다고 한다. "기가 막혀서, 우리는 얼마나 비싼 선물을 주었는데 고작 이런 것을 선물이라고 내놓다니"라는 것이다.
중국인의 마음을 모르면 정말로 교감도 할 수 없고 장사도 할 수 없다. 그것을 위해선 그들의 자존심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은 당신들과 한 문화권이다. 우리 문화는 당신들로부터 전래된 게 많다. 지금의 작은 차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서 보면 현재의 한국은 한 걸음 정도 겨우 앞서 있는 것에 불과하다. 반면에 당신들은 엄청난 잠재력과 힘을 내부에 지니고 있다.
이렇게 솔직하게 그들의 자존심을 부추기는 이야기를 하면, 굉장히 좋아하고 또 감명 깊어 한다. 아양을 떨 필요는 없으나 그들의 자존심을 깔아뭉갤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의 실수로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그들과는 어떤 조그마한 거래라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현채인은 우리편이 아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중국인은 결코 외국인편을 들지 않는다. 게다가 한국 회사에서 녹을 먹고사는 현채인도 마찬가지다. 그렇다, 그 사람들은 절대 우리편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볼 때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라 해도 그들 식으로 생각하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은 자기식대로 판단해서 옳다고 하면 자기가 다니는 한국 회사 사람 앞에서도 서슴지 않고 중국측 편에 선다.
그런데 절대 이를 탓하면 안된다. 중국인은 아직은 비록 가난하지만 금전적인 것이나 경제적인 잣대로 잴 수 없는, 그들 나름대로의 기준과 세계 최고의 민족이라는 자존심이 있다.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들과의 관계를 청산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오히려 그러한 자존심과 기준을 활용한다는 자세가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빨리 하면 손해, 무조건 천천히
쉽게 자기를 드러내거나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한 번 재고 또 재고 그리고 또 판단을 유보하여 다시 한 번 더 재본다.
중국사람들은 모든 일에 만만디다. 모든 일을 될 수 있으면 천천히 여유 있게 처리하려는 기질이 몸에 배어 있다. 일을 조급하게 빨리 하려 하면 결국에는 손해 본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는 뜻도 있다. 최대한의 이익이 생길 때까지 끈기 있게 뜸을 들이며 기다리는 것이 중국인의 스타일이다.
남미에서 3년 동안 일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들도 중국인만큼 느리기로 유명하다. 남미에서도 중국의 만만디와 유사한 '아스타 마냐나'(Hasta Manana)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그대로 번역하면 '내일까지' (즉 영어의 'Till Tomorrow') 라는 뜻이다. 그런데 '내일까지 해주겠다. 내일까지 답을 주겠다'라고 약속하고 나면, 그 내일이 짧게는 이틀 내지 사흘, 보통은 1주일, 길게는 2-3주일도 좋다. 그래서 까맣게 잊어버릴 만하면 한달 뒤라도 불쑥 나타나 또 내일까지 해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사람의 만만디는 이와는 종류가 좀 다른 듯하다. 느린 것은 분명하지만 전혀 연락이 없는 것은 아니다. 꾸준히 연락을 취하고, 꾸준히 만나고, 꾸준히 움직인다. 그렇지만 이렇다 할 결정이 없고 느리기만 하다.
이런 행동의 이면에는 빨리 하면 손해 본다는 의식이 깔려있다. 빨리 하고 서둘러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돌다리를 두드리고도 건너지 않는 사람들이다. 만사를 재고 또 재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결정을 다했다가도 상황이 변하면 다시 결론을 번복한다. 그러다 보니 끊임없이 그 일에 관여하면서도 결론이 없다.
성질 급한 한국 사람이 중국 사람과 협상을 하게 되면 몹시 답답해진다. 정말 '진'이 다 빠져서 될 대로되라는 기분으로 포기하고 싶어진다. 그러면 그제야 그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중국 사람과 무슨 협상을 하든지 간에 이런 점을 충분히 참작해서 대처하지 않으면,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이런 기질은 원래 중국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유유자적한 성미에다가, 근현대사의 파란만장한 정치적인 역경이 가미되어 형성된 것같다. 불과 이삼십 년 전만 해도 중국 사람은 내일을 알지 못하는 불안한 세월을 살아야 했다.
오늘은 파란색(우익)이 옳았는데 내일은 빨간색(좌익)세상이 된 것이다. 파란색(우익)이 옳다고 주장했던 사람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그러니 쉽게 자기를 드러내거나 판단을 내려서는 안되었다. 한 번 재고 또 재고 그리고 또 판단을 유보하여 또 한 번 더 재보아야 한다. 끈기를 갖고 확신이 생길 때까지 정세를 관찰해야만 했던 것이다.
협상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절대 자기 독단적인 판단을 안한다. 협상이 이뤄져도 그 담당자는 돌아가서 자기가 속한 조직의 장에게 확인을 받아야 한다. 만일 조직의 장이 동의하지 않으면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다시 진 빠지는 줄다리기가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조직의 장이 직접 협상에 나선다 해도 돌아가서 다시 토론과 협의를 거쳐야 한다. 협상 결과에 대해 전체적인 컨센서스, 즉 일체감을 형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빨리 진행하고 빨리 결정해야 할 이유가 없다. 빨리 진행한다고 해서 칭찬 받거나 대우받는 게 아니다. 오히려 빨리 진행한다고 해서 칭찬 받거나 대우받는 게 아니다. 오히려 빨리 해서 실수를 저지르는 것보다는 천천히 하더라도 실수 없이 변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처세인 것이다.
그러나 바쁠 때는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만만디 기질에는 급한 성격도 있다는 점이다. 자기는 꼭 필요한데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갈 때는 결코 만만디로만 있지 않는다. 만일 빨리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손해 볼 우려가 있거나, 원래 계획했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면, 그야말로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앞 뒤 가리지 않고 서두른다.
이렇게 되면 느릿느릿한 만만디는 온데간데없다. 이런 점이 남미의 '아스타 마냐나'(Hasta Manana)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순진하다 고나 할까, 어리석다 고나 할까, 남미 사람들은 본인들이 손해 볼 상황에 처해서도 느리기만 하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순진하지도 어리석지도 않다. 중국 사람들의 만만디는 상당히 의도적이고 계산된 측면이 많다. 네가 바쁘면 나는 더욱 천천히 하지만, 내가 급하면 나는 더욱 서둘러야 한다는 이중적이고 실리적인 측면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와 상관없으면 나서지 마라
박수도 치고 하라는 대로했건만 이튿날이면 자기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판받아야 했다. 이렇게 수난을 겪으면서 결국 자기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없으면 나서지 않으려는 처세술이 몸에 밴 것이다.
나는 중국에 있으면서도 지방 출장을 많이 간다. 출장을 가면 주로 비행기를 이용하는데, 보통 한 시간 전에는 공항에 도착해서 수속을 밟아야 한다. 늦게 가면 이미 구입한 좌석도 없어질 때가 종종 있다.
중국의 국내선 공항은 항상 대단히 혼잡하다. 한편에 늘어선 줄이 반대편에 늘어선 줄과 서로 겹치기도 하고 옆의 줄과 겹치기도 한다. 비행기를 처음 이용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공항은 그야말로 도떼기 시장판이 되고 만다.
새치기는 뻔뻔스럽게
그런데 공항에는 꼭 새치기하는 사람이 있다. 복잡한 줄을 비집고 들어와서는 카운터에 무엇을 물어보는 척하다가 그냥 그 자리가 자기 자리인 양 서있는다. 그런데 더 이해 못할 일은 아무도 이를 제지하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새치기할 사람이란 것을 눈치 채고도 전혀 막으려 하질 않는 것이다.
몇 번을 그런 광경을 목격하다 결국 외국 사람인 내가 나섰다. "뒤로 가라, 여기 있는 사람들도 오래 전부터 기다렸다. 새치기를 하면 되겠느냐"고 따졌다. 그런데 제지를 받은 사람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어깨를 건드려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더 답답한 것은 외국인이 나서서 새치기를 못하게 하는 광경을 보고서도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것이었다. 모두가 큰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럼 그냥 열심히 구경하고 쳐다만 볼뿐이었다. 한두 번 그러다가 나도 싱거워져서 내 좌석을 확보하는 데 별 지장만 주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두기로 하였다.
우리 나라 같으면 어땠을까?
올해 초 공항에 나가 탑승 수속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어떤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줄 맨 앞의 사람에게 가서 탑승 시간이 20분밖에 안 남았다고 먼저 수속을 하게 양보 좀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앞에 있던 사람이 멋쩍게 양보해 주려 하자 뒤에 기다리던 몇몇 사람이 강력히 제지하고 나섰다.
"당신만 바쁘냐,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힘들게 줄 서있는데 당신은 무슨 빽이라도 있는 거냐. 보딩패스를 받은 사람 중에 한 명이라도 탑승 못한 사람이 있으면 비행기는 뜨지 않으니 잠자코 순서를 기다리고 있어라."
한국에서는 새치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기도 하지만 설사 누가 새치기라도 할라치면 눈뜨고 그냥 못 보는 사람들이 꼭 있다. 한 사람 정도 먼저 보낸다고 비행기를 못 타는 것도 아닐텐데, 아무리 조그만 것이라도 자기 권리를 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근성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구경은 예스(Yes), 참견은 노(No)!
이와 유사한 광경은 중국의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중국의 차도에는 좌회전 신호가 잇는 사거리가 별로 없다. 우리 한국에도 비보호 좌회전이 있지만, 여기는 사거리라도 거의가 비보호 좌회전으로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파란 신호가 떨어지면 좌회전하려는 차와 직진하려는 차가 경쟁적으로 달려든다. 먼저 머리를 디민 차가 우선 이다. 교통 순경이 없는 사거리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들 차들이 서로 뒤엉키게 된다. 차들이 서로 뒤엉켜 한참 동안 꼼짝하지 않아도 아무도 내려서 정리하거나 조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있는 사무실 앞에는 약1미터 높이의 쇠로 된 중앙 분리대가 있다. 그 길도 우리 건물을 드나드는 차와 직진하는 차로 비교적 복잡하다. 그런데 이 얇은 중앙 분리대는 한 달에 한두 번은 차들에 받쳐서 구부러지거나 부러져서 옆으로 튀어나와 직진하는 차들에게 장애물이 되곤 한다. 그것을 똑바로 펴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나와서 바로잡으려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하다못해 신고라도 하면 금방 처리될 텐데 신고하는 사람조차 없다. 가만히 놔두면 그냥 그 상태로 한 달도 간다. 몇 번을 외국인인 우리가 신고하거나 근처의 경비에 요청해야 겨우 바로잡혀진다.
길거리에 사람이 다쳐 쓰러져 있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발생하면 구경꾼들은 구름처럼 모여들지만 단지 구경꾼일 따름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도 비슷하긴 하지만, 그래도 용감한 시민이 나타나 자기 일처럼 달려드는 사람도 가끔 있다. 그러나 자기와 직접 관련이 없으면 절대로 참견하지 않으려는 것이 중국인이다. 책임 없는 말이나 한마디씩 하면 끝이다.
이것은 중국인에게 일반화된 의식의 한 단면임에 틀림없다. 여러 번 내가 아는 중국 사람에게 왜 그런지, 중국인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 보았지만 아무도 명확한 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본인에게 직접적으로 손해될 일이 아니면 굳이 나설 필요 없지 않느냐, 잘못하다가는 자기만 피해 입을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대답뿐이었다.
왜 그런지 내가 볼 때는 지난 시절, 즉 파란만장했던 중국 현대사 속에서 숱한 수난을 겪어오면서 몸에 밴 나름대로의 처세술이 아닐까. 특히 문화대혁명 때 자기와 상관도 없는 일에 동원되어 박수도 치고 찬성을 강요당하던 쓰라린 과거의 유산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요에 못 이겨 박수도 치고 하라는 대로했건만 이튿날이면 자기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판받아야 했다. 이렇게 수난을 겪으면서 결국 자기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없으면 나서지 않으려는 처세술이 몸에 밴 것이다.
바로 지금의 오륙 십대 중국인들이 이런 쓰라린 경험과 아픔을 갖고 있는 세대다. 보호 본능으로 고착된 이들의 의식은 자식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전해지면서, 그들 의식에 뿌리를 내린 것은 아닌지.
절대로 나는 잘못 없다
그건 내 실수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건 내 잘못이다라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면 상당히 경이롭고 놀라워한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특질 등을 금방 알 수 있다. 이것은 다른 어떤 나라의 국민성을 파악하는 데에도 비슷한 것 같다. 사람에 따라 다소 다르겠지만, 실수가 발생했을 때 일본 사람은 우리가 보면 비굴할 정도로 인장을 잘한다. 인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싹싹 빌면서 사죄하는 모습까지도 자주 볼 수 있다.
우리 한국 사람은 어떤가, 일단 뻗댄다. 그러다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생각되면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그러나 인정한다고 해서 사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 다 내가 책임지면 될 거 아냐." 이렇게 오히려 큰소리 치면서 절대로 기는 죽지 않는다.
중국인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들은 명백한 실수를 저질러 놓고도 절대로 인정하러 들지 않는다. 특히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잘못은 날씨 탓이다(?)
어느 회사의 중국 지사를 막론하고 보통 중국인을 현채인(현지 채용인)으로 많이 고용하게 된다.
지금 우리 사무실에만 약 30여 명의 중국인이 일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과 일하다 보면 어떤 잘못된 일이 발생해도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없다.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그 원인이 제3자에게 혹은 제3의 무엇에게 있지, 결코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열심히 둘러댄다. 하다 못해 제도나 날씨 탓이라고 핑계를 대지, 본인에게 원인이 있다고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잘못을 인정한다고 해서 불이익을 당하는 게 아니라,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불신을 만들어 더 큰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고 다음부터는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하면, 과거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가 대단히 힘들다. 아마 내 경험을 보면 1-2년 이상은 족히 걸린 것 같다.
이런 문제는 시골이나 내륙으로 가면 더 심하다. 계약을 못 지키면 전부 제3의 그 무엇에 원인이 있다고 강변한다. 말하자면 불가항력이었다든지 혹은 몰판법(메이빤파), 즉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변명들만을 너저분하게 늘어놓는다.
우리 사무실에 근무하는 중국인들은 대부분 일류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들이다. 개중에는 대학원 졸업자, 대학 강사 및 학교 선생님 출신도 있다. 소위 중국의 엘리트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엘리트들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식은 마찬가지다.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인 데다, 우리와 함께 생활해 보았기 때문에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들인데도 그렇지가 못하다. 그들도 종국인들 마음속에 깊숙이 박혀 있는 피해 의식은 마찬가지다. 그러니 일반 인민인 라오빠이싱(노백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버티고 보자, 밑져야 본전!
고쳐야 할 점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아직도 의식의 밑바닥에는 인정했다가는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남아 있는 듯하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자기 잘못을 선뜻 인정하는 사람을 보면 상당히 의외라고 생각한다. 그건 내 실수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라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면 상당히 경이롭고 놀라워한다.
뒤집어 얘기하자면, 중국 사람과 거래를 할 때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을 끝까지 자백이나 항복을 받아내려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하면 그 관계는 십중팔구 깨진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우리식대로 일단 잘못을 인정하게 하고 그 다음에 관용을 베푼 다든지, 다른 방법을 찾는다는 것은 적어도 중국인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
앉은자리에서 잘못을 인정받으려 했다가는 인정은커녕 물어보는 태도가 마치 신문하는 것 같다 하여 발끈한다. 그러고는 사표 내고 회사를 나가는 사람도 종종 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서다.
고의가 아니라 하더라도 잘못된 일을 인정하기 싫고, 그로 인해 발생할지 모를 문책이 두려운 것이다. 잘못을 인정했다고 해서 전혀 문책하거나 책임 소재를 따질 의사가 없는데, 월급이나 퇴직금도 마다하고 갑자기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사람조차 있다.
이와 같이 중국인이 자기의 잘못을 인장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자기와 상관없으면 나서지 마라'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차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식이 형성된 배경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이유 때문인 것이라고 생각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괜히 남의 일에 나섰다가 피해를 볼 필요가 없는 것처럼, 먼저 잘못을 인정해서 손해를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을 인정하라고 결정적인 증거를 댈 때까지 인정하지 않는 것도 살아 남을 수 있는 처세술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다 해도 어쨌든 처음부터 인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으로 생각한다. 어떻게 잘못이 밝혀진다 해도 '밑져야 본전인 셈'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인정해서 밝혀지나 그렇지 않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체면이 밥 먹여 준다
체면 차리는 일은 그야말로 형식주의에 불과하다. 실리를 차리는 게 더 중요하지 않느냐는 태도로 중국 사람에게 접근했다가는, 자칫 실리마저도 취하기 어려울 수 있다.
고대 중국 사회에서는 죄인의 얼굴에 문신처럼 먹물을 박아 넣는 형벌이 있었다 한다. 얼굴에 먹물이 박힌 죄인은 평생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살아야 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얼굴에 먹칠을 당하는 일, 즉 체면(미엔쯔) 깎이는 일은 형벌과 맞먹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중국 사람들은 부부 싸움을 하다 감정이 극에 달하면, 동네 사람들 앞에서 험담을 늘어놓아 상대방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리는 이상한 풍습이 있다고 한다. 우리 같으면 자기 얼굴에 침뱉기라고 하겠지만, 그만큼 체면을 중요시하는 중국 사람들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얘기다.
비단 중국뿐 아니라 같은 유교 문화권인 한국이나 일본도 체면을 중히 여기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중국 사람들의 그것은 다른 나라와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다.
체면치레는 일의 시작이다
그 정도와 깊이에 따라 체면을 차리는 말도 다양하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당신을 만나서 대단히 기쁘다. 당신과 이런 일을 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다"라는 것부터 시작하여, '많이 도와 달라, 생각해 달라'는 등 인사치레와 체면 차리는 말로 5분에서 10분은 소요된다. 처음에는 나도 이런 체면 차리는 말에 익숙하지 못해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처럼 인사치레를 하지 못하면 예의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거나, 외국인이면 중국을 잘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특히 술좌석에 앉으면 먼저 제일 급이 높은 사람부터 꼭 체면 차리는 말이 시작된다. 우선 거창하게 한마디하면서 전체적으로 건배를 하고 그에 대해 답례 받기를 원한다. 제일 급이 높은 사람의 체면치레가 끝나면 그 다음 급으로, 또 그 다음 급으로, 이런 식으로 웬만한 급까지 내려가야 직성이 풀린다. 겉치레 같지만 이를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한다.
건배할 때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마시는 시늉이라도 하든지, 아니면 찻잔이라도 들어서 잔을 부딪치고 체면치레에 도움을 주지 않으면 대단히 섭섭하게 생각한다. 아무리 여자들이라도 상대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오륙십도 짜리 독한 배갈 몇 잔은 두 눈 질끈 감고 마셔 주어야 한다.
무슨 문제가 생겨 중국 사람과 서로 좋지 않은 말이 오갈 때라도 상대의 체면은 세워 주면서 대화를 풀어갈 수 있어야 한다. 감정이 상했다고 해서 상대의 체면을 무시한다던가, 특히 여러 사람 있는 곳에서 큰소리를 내서는 안된다. 그랬다가는 일보다도 체면이 손상 당해 몹시 원망스러워 한다. 그리고 주의의 다른 중국 사람들이 보기에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닌가 오해하기도 쉽다.
경조사는 체면을 최대한 차릴 수 있는 기회다. 중국 사람은 집안의 경조사, 특히 경사로운 일일 때 많은 사람이 모이는 점을 이용하여 최대로 체면치레를 하려고 한다. 그때까지 없던 텔레비전을 사놓기도 하고, 여러 가지 가구나 집기들을 바꾸기도 하며, 그림을 사는 등 단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많은 투자도 서슴지 않는다.
또 사회적으로 저명한 사람을 가능한 많이 초대하려고 굉장히 노력한다. 자기가 알고 있는 꽌시를 있는 대로 동원해서 실제 그 경조사에 관계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참석해 주기를 원한다. 저명한 사람이 최소한 몇 명이라도 와야 체면을 유지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유명 인사가 참석하는 게 행사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되기도 한다.
연말 연시 때에는 연하장이나 카드를 보내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 체면을 유지하느라 부산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중국인들도 체면 깎이는 일을 맡기면 꽤 주저한다.
통역을 하는 사람조차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한쪽이 들어서 체면 상하는 말은 통역을 안한다. 한번은 어떤 한국 사람이 통역을 데리고 나가 중국 측과 무슨 문제로 상담하다가 하도 짜증이 나서 감정대로 말을 마구 해댔다. 그리고는 통역하는 사람에게 "내가 하는 말을 한 글자도 빠뜨리거나 추가하지도 말고 그대로 통역하라"고 했다. 그런데 중국인 통역은 절대 그가 말한 대로 통역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기 일도 아니고 자기는 통역만 담당할 뿐인데도, 차마 상대방이 체면 상하는 말은 통역을 못하겠더라 는 것이다. 이는 중국인들의 의식 속에 체면 의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몰라도 체면은 차려야
중국인의 회사 이름이나 직함을 보면, 긴 것은 열 글자가 넘는 것이 많다. 예를 들면 '흑룡강성 대외경제무역 발전공사', '연태개발구 수출입공사', '00연구 자문위원회 겸 00기관'등 이런 식이다. 또 그렇게 긴 회사의 이름에다 직위에는 '총경리'(쫑징리: 사장급)나 '경리'(징리: 과,부장급)라고 쓰고, 그 밑에 '공정사'라든지 무슨 '기술사'라든지 가능한 있는 대로 모든 명칭을 다 기입해 넣으려 한다. 모두가 체면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면 때로는 별로 체면을 차릴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대단히 체면을 차린다.
그 체면 의식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다. 중국에서 길을 물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두 번씩 피해를 당해 보았을 것이다. 요행히 길을 잘 아는 사람을 만나면 제대로 알려 주면 다행인데, 길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절대로 길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법이 없다. 엉터리로라도 가르쳐 주려 한다. 나도 처음 중국에 와서 이런 엉터리 안내로 고생을 많이 했다. 전혀 엉뚱한 데로 가기 일쑤었다.
나중에 잘 아는 중국 사람에게, 모른다고 하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고 찾아갈 텐데 왜 엉터리로 가르쳐 주는지 모르겠다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대답은 간단했다.
"외국인이 길을 물어 보는데 중국 사람이 모른다고 하면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중국 사람으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중국인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체면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중국을 알기 위한 필수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체면 차리는 일은 그야말로 형식주의에 불과하다. 실리를 차리는 게 더 중요하지 않느냐는 태도로 중국 사람에게 접근했다가는, 자칫 실리마저도 취하기 어려울 수 있다.
과시는 필수 겸손은 선택
중국인들에게 이동 전화기는 과시욕의 한 상징이다. 마치 작전하는 군 지휘관이 무전기를 휴대하고 다니듯 허리춤에 차고 식당에선 무슨 전리품처럼 탁자 위에 '탁' 놓는 게 유행이다시피 하다.
중국에 오면 거리에서, 식당에서, 유원지에서, 심지어 가라오케에서까지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중국인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시간과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시끄러운 사람들 틈에서도 전화를 해댄다. 북경, 상해, 천진 등 대도시에서뿐만 아니라 웬만한 상업 도시에 가도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가끔 한국에 가보면 아직 중국만큼은 핸드폰이 대중화된 것 같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이동 통신이 이천 년대 최고 이권 사업 중의 하나로 부각되고 있으니, 아마 그때 가야 한국도 중국만큼(?) 핸드폰이 대중화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은 교통이 혼잡할 뿐만 아니라 갈수록 바쁜 도시 생활로 인해 중국보다 핸드폰이 더 절실한 환경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보다 중국에서 핸드폰이 더 성행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쉽게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재미난 일이다.
핸드폰은 크고 묵직한 게 좋아(?)
가격 문제만 보더라도 중국에서 이동 전화기는 누구나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닐 뿐 아니라 회선조차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일반 전화 보급률조차 중국의 대도시라 해도 아직 백여 세대에 한 대가 될까말까 한 실정인데, 이동 전화기만은 마치 사업하는 사람들의 필수품인 양 너도나도 다투어 구입하고 있는 것이다.
북경에서는 실내에만 들어가면 어디서건 핸드폰 벨 소리로 요란하다. 그들이 선호하는 모양도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소형 모델이 아니라 굵고 묵직한 것들이다. 그것을 마치 작전하는 군 지휘관이 무전기를 휴대하고 다니듯 허리춤에 차고 다니다가. 식당에 들어가면 무슨 전리품처럼 탁자 위에 '탁'하고 전화기부터 올려놓는 게 유행이다시피 한다.
이 비싸고 귀한 이동 전화기를 차고 다니는 중국인의 사무실을 방문해 보면, 이동 전화기와 사무실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게 또한 재미난 광경이다. 사무실의 전화기라고 해야 고작 우리 나라 70년대에 쓰던 것과 비슷한 전화기 몇 대 정도뿐이다. 전화선도 하나밖에 없어 여러 명이 사영하려면 거의 교환을 통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이동 전화기를 갖고 다니면서 전화를 해야 할 정도로 바쁘거나 열심히 전화하는 것도 아니다.
이동 전화기를 도저히 구입할 형편이 안되는 중국 사람들이 그 다음 많이 사용하는 게 호출기다. 이 역시 도시의 어디를 가건 '삐삐'하는 소리로 요란하다.
중국사람들이 이동 전화기나 삐삐를 구입하는 심리는 한마디로 과시욕의 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인들에게 이 이동 전화기는 실용적인 목적보다 과시욕의 한 상징인 것이다.
체면을 중히 여기는 중국인에게 이동 전화기는 갈수록 체면 유지상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품이 돼가고 있다. 이동전화기가 없으면 삐삐라도 하나 차고 다녀야만 한다. 중국의 기성 세대에게 텔레비전이나 세탁기 등이 실용적인 목적 이상으로 체면 유지와 과시욕의 한 표현으로 사용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동 전화기는 젊은 세대에게 과시욕의 한 표현 방법으로 없어서는 안될 것이 되고 잇다.
집세는 내지 못해도 핸드폰은 있어야
어느 아파트에 사는 한국인에게 들은 재미난 얘기가 있다.
중국인에게는 상당히 부담이 되는 그 아파트에 세 들어 살면서도, 핸드폰은 들고 다니던 한 중국인이 있었다. 그런데 비싼 전화료를 제때 납부하지 못하니 까딱하면 연체 고지서가 날아오곤 했다. 자주 전화 좀 빌려 달라고 왔다갔다하더니 결국은 전화도 끊기고 비싼 임대료도 감당해 내지 못하여 이내 이사가고 말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면 또 영락없이 허리춤에 핸드폰을 찬 다른 중국 사람이 입주해 들어오고, 다시 그 집 앞에는 연체 고지서가 쌓인다고 하는 웃지 못 할 얘기였다.
또 재미난 풍경이 있다.
서로 다른 회사에 다니는 중국인 친구들끼리 만나면 별일도 없으면서 몇 시 몇 분쯤에 서로 핸드폰으로 전화하기로 약속을 한다. 나한테도 삐삐로 자기를 호출 좀 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전화 통화를 하면 영어로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일종의 과시욕의 표현인 것이다.
출퇴근할 때 반차(빤처)라고 하여 회사에서 운행하는 통근 버스가 있다. 이 반차는 중국인에게는 편리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나는 반차까지 제공하는 회사에 다닌다. 혹은 내가 다니는 회사는 반차까지 제공해 주는 대단히 크고 편한 회사라는 것을 과시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 회사의 중국인 사원들은 중국 회사를 만나 상담할 때 보면, 은근히 우리는 반차가 있다는 것을 과시하곤 한다. 지난해 우리 회사가 달성한 매출액이라든가 거래할 상품의 뛰어난 품질을 내세우기보다 그 반차의 존재로 우리 회사를 과시하려는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는 할 수 없이 입고 다니는 사내 유니폼도 중국에서는 회사 바깥에 나가서까지도 자랑스럽게 입고 다닌다. 유니폼까지 맞춰 주는 회사란 걸 과시하려는 것이다. 무언가 과시하고 싶어하는 중국인의 심리를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얘기다.
이런 류의 과시욕을 무조건 비웃고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다. 우리도 한때는 그런 적이 있었지 않았는가. 그리고 수준은 달라졌다 해도 우리 사회에도 과시 사치 풍조 등 불건전한 풍토가 아직도 있음을 시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중국인의 이런 과시욕은 그들 의식의 한 단면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집단 속에 나를 감춘다
집단의 이름으로는 괜찮지만 개인으로는 불안해한다. 개인이란 아무것도 아니고 약하니까. 그러나 집단이 되면 무섭게 변하는 게 중국인들이다.
중국에 진출한 대기업 지사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중국인 직원을 관리하는 일이다. 중국인을 어떻게 잘 관리하느냐 하는 문제는 중국 비즈니스의 성패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을 정도다.
93년 초쯤에 우리 회사 현채인들이 일종의 연명부 같은 것을 작성하여 집단으로 봉급 인상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당시 관리자의 입장에 있던 우리 한국인들은 대단히 당황하였다. 그런 집단 행동은 무언지 도발적이고 전투적이며 고용자에 대한 피고용자의 선전포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의 의도는 우리가 생각한 만큼 그렇게 과격한 게 아니었다. 단지 '모든 사람이 원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외에는 다른 뜻이 없었다고 한다. 즉 봉급을 올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든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봉급 인상을 관철하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자기 얘기 안해
북경에 있는 한국의 상사들은 한 달에 한번씩 조찬 회의를 한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중국인 관리에 관한 문제라든지, 여러 가지 서로 알아대 할 정보나 협조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곤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 회사에 있었던 중국인의 집단 행동은 다른 회사에서도 한번 이상은 다 발생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의 노사 투쟁처럼 심각하고, 회사의 존폐 위기로까지 몰고가는 심각한 것은 아니라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 말을 듣고 우리는 다음날, "집단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애로 사항을 호소해 온다면 관대히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찾아온 사람은 여태껏 아무도 없었다. 집단의 이름으로는 괜찮지만 개인으로는 불안해하는 듯했다.
중국인들에게 어떤 규정을 만들어 지키라고 하면 그것에 불만이 있어도 대부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잘 지킨다. 정 불만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말하지 않고 전체의 이름으로 했을 때만 말하려 한다.
한국에서는 술자리라도 마련하여 고쳐야 될 점을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라 하면 다들 털어놓는 편이다. 때로는 부서의 잘못된 점만이 아니라 부장의 개인적인 문제점까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인 직원을 술집으로 데리고 가서 부담 갖지 말고 털어놓고 말해 보라고 하면, 나올 만한 얘기도 절대 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너희들끼리 토론하여 문제점을 모아 가져와 봐라 하면 많은 것들이 나올 수 있다.
하라고 하면 하고, 말라고 하면 안한다
중국에서는 법이나 인민들이 지켜야 할 규정 등이 공청회 같은 충분한 대중적인 토론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공포되곤 한다. 전에 없던 새로 지켜야 할 사항들이 많이 생겼는데도, 개인이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싫어도 묵묵히 잘 지키는 것 같았다.
12억의 인구와 거대한 땅을 통치해 나가기 위해선 개인적인 불만이나 욕구를 무시하고라도 법이나 규정을 강력하게 시행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중국 인민들은 이미 그런 관습에 길들여져 있는 것 같았다.
애를 하나만 낳는데도 중국의 인구는 12억을 넘는다. 만일 낳고 싶은 대로 낳는다면 중국은 어떻게 될까? 식량과 교통, 주택난 등등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생길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중국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야 말로 세계의 문제가 될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불합리한 방법으로 정부에서 개인에게 불편을 주는 정책을 내리면 금방 반발하고 나선다. 언론부터 시끌벅적 난리를 떨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다르다.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한다. 이유도 잘 물어보지 않는다.
93년에 2000년 올림픽 유치를 놓고 호주의 멜버른과 북경이 경합을 벌일 때 올림픽 준비 상황을 본다고 사마린치 위원장이 북경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기간에 북경은 상당히 추운 날씨였다.
그런데 우리 회사의 중국 직원 중에 연탄불을 때는 사람이 3-4일간 얼굴이 파랗게 얼어서 출근한 적이 있다. 이유를 물어보니, 사마린치가 북경에 머물러 있는 동안 연탄을 때지 못하게 해서 추운 방에서 자고 나와야 했다는 것이다. 사마린치에게 연탄 그을음조차 보이지 않으려 했던 조치였다. 그런데 북경시 당국을 욕하거나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그들에게 나는 농담 삼아 물어 보았다.
"올림픽은 누구를 위해서 여는 건가? 인민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열어야 하는 것인가?"
그랬더니 "우리도 불만이 있다. 아니 대부분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불만을 말하지 않겠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개인이란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약하니까, 도 전체를 위한 일 아니냐." 이것이 중국인의 대답이었다.
그러나 개인이 아니라 집단 의사를 표출할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아마 우리 이상으로 반발하고 거친 행동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집단으로 뭉치면 무섭게 변한다
지난 88년에 발생한 천안문 사태의 경우 나는, 탱크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선량한 인민들을 무력으로 강제 진압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중국에 와서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았다.
중국 정부가 발간한 홍보 책자에는 집단화된 인민들이 군인과 공안들을 잡아서 목을 매달고 내장을 꺼내는 사진들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정부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처럼 묵묵한 인민들이 집단을 이루면 무섭게 변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일하다 보면 대개 중국인 현채인을 쓰게 된다. 그럴 때 중국인의 집단 의식을 반드시 명심해 둘 필요가 있다.
자율은 불편하다
자유와 자율에 대해 무관심해 하는 것, 차라리 뒷전에서 규정만을 따르며 사는 것. 그것은 '앞장 선 사람들'이 늘 피해를 입곤 했던 중국인들의 역사적 경험이 준 교훈이며, 생존을 위한 처세술인 것이다.
언젠가 한국에서 날아온 신문의 '옷' 광고에 '자유! 그것은 편한 것이다'라는 문구가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중국 사람에게 들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말로도 중국 사람들은 하나의 파격을 느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차 강조해 왔지만 중국인들과 우리는 사고 방식에서 무척이나 다르다. 우리에겐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도 그들에겐 다를 수 있다. 자유나 자율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에서 중국인들과 같이 생활할 사람이라면, 그들이 아직 자유나 자율을 불편하게 느낀다는 점에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유에 익숙하지 않아서
우리 지사에는 출퇴근 시간을 기록하는 타이머가 있어 모두가 다 기록하도록 되어 있다. 외출시 가는 곳, 외출 목적, 돌아올 예정 시간 등을 기록하는 외출 대장도 있고, 어떤 차량을 이용하는지도 적도록 되어 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이 생활하기 때문에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이 더 정확하게 기록하려고 한다. 그런데 우리끼리 모여 이에 관해 이야기하면 다들 푸념들이 많다. 할 수 없이 한다고는 하지만 군대도 아니고, 국민학생도 아니고,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어른들이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 서울에 있는 본사만 해도 이같은 출퇴근 기록이나 외출 기록은 없어진 지 오래다. 오히려 없앤 후로는 전보다 모든 것이 훨씬 잘 지켜지고 사람들도 더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었다.
사정이 있으면 늦을 수 있고, 일찍 퇴근할 수도 있는 일이다.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되, 간혹 전날에 과음을 했다면 슬쩍 나가서 목욕이라도 하고 올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다 경험이 있어 이 정도는 자율에 맡기고 모른 척하기도 한다. 본사에 있을 때 나도 두세 시간 목욕탕에 가서 쉬고 돌아오면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그 사이 걸려온 전화 메모라도 있으면 마음이 다급해져 더 열심히 일하곤 했다. 그래서 내가 책임자가 되고 나서는, 아침까지 술 냄새를 풍기는 직원이 있으면 빨리 어디 가서 사우나를 하든지 해서 정신 차린 다음에 다시 근무하라고 쫓아 내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전혀 경우가 다르다.
자율을 주면 금새 엉망이 돼버린다. 무엇보다 어떻게 할지를 몰라 불안해한다. 스스로 움직이기보다는 나름대로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 대충 넘어가려고 한다. 회사가 급해도 자기는 별로 급할 게 없다는 식이다. 일에 능률이 오르지 않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책임감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러나 규정과 제도를 만들면 사정은 달라진다. 규정대로 지키면 이익이 생기고, 규정을 어기면 불이익을 감수하게끔 만들면, 특별한 사정이 생기지 않는 한 아주 잘 지킨다. 자율보다도 제도 내에서 움직이고 규정을 지키는 것을 편안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좀 치사한 방법이지만 지각하면 늦은 시간만큼을 계산하고, 조퇴나 결근 때에도 역시 시간을 계산해서 급여에서 공제한다. 대신 퇴근시간 후에도 근무할 경우가 생기면 역시 그만큼의 시간을 계산하여 돈을 더 주는 인센티브를 부여하니까 모두들 열심이었다. 금전적으로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아주 열심히 규정을 지키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창의적으로 일을 진행시킬 수가 없다. 일일이 기획을 잡아주고 계획을 짜서 역할을 나눠줘야 비로소 움직인다. 요컨대 미주알 고주알 간섭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왜? 자유와 자율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것은 앞서서 창의적으로 열심히 일을 하면 지목 당해 피해를 보곤 했던 중국의 오랜 역사적 경험이 사람들에게 심어 놓은 상처와도 같다. 차라리 뒷전에서 규정만을 따르며 사는 것, 그게 그들의 경험이 준 교훈이자 생존을 위한 처세술인 것이다.
획일은 아름다운 것(?)
중국의 국민학교 어린이들은 목에 빨간 머플러를 매듭 지어 매고 다닌다. 보기 싫고 좋고를 떠나 어릴 때부터 획일화된 복장이나 규정에 매우 익숙해 있다. 어린이들이 경례를 할 때는 획일적으로 오른손을 번쩍 쳐들어 윗사람에게 인사를 대신한다.
국민학교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문제 풀어 볼 사람?" 하고 물어보면, 우리 애들처럼 "저요, 저요!" 하는 게 아니라 말없이 오른손을 약간 세워 들고는 왼손을 오른손 팔꿈치 밑에 바친다.
중국 합창단을 유심히 보면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른 합창단이나 어린이 합창단이나 웃을 때와 심각할 때의 표정이 모두 똑같다. 웃음마저도 같은 표정으로, 오른손을 비스듬히 올리면서 눈을 45도 각도 위로 지그시 응시한다. 또 슬픈 장면 등 어느 것 할 것 없이 획일적이다. 그들은 그러한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이 스스로 그렇게 느끼게 된 것도 아니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저절로 생각하게 된 것도 아니리라.
사회주의 정부가 정책적으로 개인의 개성보다 전체를 위한 교육을 시켜온 데다, 또 오랜 세월이 흘러 그것이 습관화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제 그러한 것이 그들 정신 문화의 하나로 고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회 전체적으로 자유와 자율에 익숙하지 않고 어색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자유 분방하게 뛰노는 우리 어린이들만 보다가 처음 이런 모습을 보면 오히려 내가 더 어색하고 낯설었다. 뭔가 좀 소름끼치는 듯한 느낌까지 들곤 했다.
반면 중국 사람에게 우리 나라 사람이 노래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보여주면 대단히 신기해한다. 저렇게 무질서해도 괜찮으냐, 적어도 대중 앞에서는 것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규칙이 있어야 되는 게 아니냐고 물어온다. 어릴 때부터 획일적인 것이 좋은 것이라고 배우며 성장해 온 중국 사람들은 의식 자체도 상당 부분이 획일화되어 있어, 자유나 자율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이런 중국인들에게 섣부르게 자유나 자율을 주려다가는 혼란만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애매모호하게 대충, 그러면 길이 열린다
무슨 일을 하든 일단 애매 모호한 태도를 취해 놓고 본다. 그리고 나서 상황 변화를 보아가면서 대응책을 다시 만든다. 일이 잘못되어 책임을 져야 할 일이 있어도 자기가 빠질 수 있는 여지는 만들어 놓는다.
무슨 일이든지 간에 중국 사람으로부터 사전에 확실한 보장을 얻어내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곧'이라는 뜻을 가진 중국어의 '마샹'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곧'이 시간적으로 어느 정도를 나타내는지를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중국인은, 아마 내 생각으로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냥 '곧'인 것이다. 몇 분 안에라는 뜻이 될 수도 있고, 또 몇 달씩 끌던 일도 '마샹'이라고 하면 하로 내지 이틀이 될 수도 있다.
또 '챠부뚜어'라는 말도 중국인의 대충성을 나타내는 좋은 예다. 챠부뚜어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차이가 그리 많지 않다"라는 뜻으로, '그 정도면 된다', '대충 맞다' 등 여러 가지 애매모호한 긍정을 나타낼 때 즐겨 쓰는 단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중국어를 보면 모호성과 대충성을 표현하는 단어가 많다. 그만큼 중국인의 심리에는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대충 넘어가려는 경향이 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필요하면 자기 편리에 따라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어떤 중국 사람을 만나더라도 '흑이냐 백이냐'를 확실히 정해 달라는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대단히 드물다.
상대방에게 확답을 줄 수 있는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도 혹시라도 생길 일에 대비해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면서 답변을 한다. 그럴 때 쓰는 말이 '커능'(가능, 아마)이나 '챠부뚜어'다.
이러한 애매모호성, 대충성 때문에 확실한 것을 좋아하고 성격이 급한 한국 사람들은 피해 볼 경우가 많다. 속으로 확신을 가지고 있어도 중국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의견으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불분명한 태도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편리한 삶의 한 방법이다. 어떨 때는 지혜롭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장사를 할 때도 "우리는 이 가격이면 하겠다." 혹은 "이 가격이 아니면 안되겠다"는 식으로 입장을 확실히 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좀더 확실한 의견을 끊임없이 타진해도 그들로부터 들을 수 있는 최상의 답변은 고작해야 '아마' 또는 '가능'하다는 정도다. 이 말도 확실한 방침이 아닌 하나의 의견에 불과해서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
무슨 일을 하든 일단 애매 모호한 태도를 취해 놓고 본다. 그리고 나서 상황의 변화를 보고 상대의 태도도 보아가면서 대응책을 다시 만든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 책임을 져야 할 것에 대비해 빠져나갈 수 있는 여지는 만들어 놓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 가운데 그처럼 애매모호한 입장을 시종 일관 견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열이면 열 모두 따돌림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은 대부분이 그러하니 어쩔 것인가? 좋게 해석하여 극단적인 것을 싫어하고 상황 논리에 유연하게 대처한다고도 여길 수 있겠다.
우리의 정서에는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그런 행동 속에는 많은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다. 예를 들면 주위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 그에 맞는 여러 가지 안을 준비해 든다. '높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사도 타진해 보고, 잘되었다고 할 때 나한테 돌아오는 이익은 어느 정도 될지, 잘못된다면 어떤 결과가 될지, 상황이 변하면 그때는 이렇게 대처하자. 일단 대충 동의도 되고, 부정도 될 수 있게끔 이야기를 끝맺어 놓자'는 식으로 아주 복잡하게 준비를 해 놓는다.
중용과 조화는 미덕
이러한 중국인의 의식 속에는 오랜 중국의 역사에서부터 형성되어온 전통적인 요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근세의 어두운 역사를 헤치고 나오면서 더욱 강해지고 굳어져 중국인의 의식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오랜 옛날부터 중국 사람들은 중용이나 조화를 덕으로 알고 매우 중시해 왔다. 알다시피 조화와 중용은 극단을 배격한다. 그래서 중국인민들은 만사를 흑백으로 나누는 논리는 기본적으로 싫어했던 것 같다.
중국의 근현대사는 권력의 주인이 숱하게 바뀌어 오는 과정이기도 했다. 권력자와 세상이 하도 자주 바뀌다 보니 자신의 의지를 확실하게 개진하는 것은, 자칫하면 자기 목숨을 건 바보 같은 짓일 수 있었다. 그것이 아무리 객관적으로 확실한 근거를 가진 진리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경험을 쌓아 오면서 중국의 인민들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잘 감지하게 되었고, 이제는 아주 보편적인 처세술의 하나로 굳어져 있는 것 같다.
중국인들과 무슨 일을 하더라도 흑백 논리로 대하지 않는 게 좋다. 그리고 '커능', '챠부뚜어', '카오루-' 등의 단어를 잘 기억해 두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가 배울 점도 잇다. 일종의 느긋함이랄까, 일종의 여유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메이꽌시 속에 숨어 있는 옥
그들은 메이꽌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넘어서는 안될 금기인 것이다. 그러니 평소에 꽌시가 없는 사람이나 꽌시가 없는 조건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옥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된다.
중국에서는 많은 중요한 일들이 공식적인 경로보다 청탁을 통해 해결된다. 청탁이나 로비는 대개가 인맥 관계, 곧 꽌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꽌시가 있기 때문에 모든 일이 기름친 듯 잘 돌아가는 것이다. 거래나 인사 문제, 그리고 살면서 벌어지는 온갖 번잡스러운 일들이 꽌시를 통해 해결되고 중재되고 조정되는 것이다.
메이꽌시면 나 몰라라 한다.
그런데 중국에서 꽌시가 중요하면 할수록 그것의 역작용 또한 커진다. 바로 꽌시가 없는 상태, 즉 메이꽌시가 중국의 고질적인 사회 문제로 대두된다.
중국인들은 무슨 문제가 생겨도 자기와의 관련 여부를 먼저 따진다. 관련이 없으면 애써 외면하고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중국 어디를 가나 자전거를 타고 가다 차에 부딪쳐 사람이 쓰러져 있는 끔직한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뺑소니차에라도 치였다면 다친 사람은 그 자리에 마냥 쓰러져 있어야 한다. 메이꽌시의 일이기 때문에 누구 하나 그를 병원에 데려다 주는 사람이 없는 탓이다. 더 큰 문제는 여기에 대해 아무도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고 사회 문제로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 나라도 이와 유사한 비정한 일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 번이라도 생기면, 신문 지상에 우려하는 목소리가 실리고 여기저지서 자성의 소리가 들리다.
그러나 중국 사회에서는 메이꽌시의 일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또 당연시되고 있다. 그만큼 꽌시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생기는 병폐라 할 수 있다. 무슨 일을 당하면 그 일을 우선 처리하려고 하지 않고, 주변에 꽌시를 갖고 있는 사람부터 찾는다.
외국에 나갈 사람이 서류가 부족하거나 잘못되어 비자를 받지 못하면, 먼저 서류를 고치거나 보완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 외국 대사관에 꽌시 있는 사람이 없는 지부터 살핀다. 그래서 나도 한국에 나가려는 중국 사람으로부터 대사관에 부탁 좀 해달라는 전화 요청을 여러 번 받았다. 꽌시가 최고라는 중국적 발상이 빚은 현상들이다.
꽌시가 없으면 못 믿는 게 약점이다.
중국 사람들은 새로운 거래 상대가 생기면 일단 조심스럽게 탐색한다. 그 사람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다. 그 사람이 활동하는 곳에 꽌시 있는 사람을 찾아 조사해 보고 조사할 수 있는 꽌시가 없으면 거래를 맺으려고 하지 않는 다. 설사 거래가 성립되어 계약을 맺는다 해도 대단히 까다롭게 군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기 난망하다는 뜻이다.
나도 참신한 상품이나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만나, 거래를 새로 맺으려 했다가 꽌시가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을 성사시키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꽌시가 없기 때문에 나를 쉽게 믿을 수 없고 , 일이 잘못되면 자지만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노파심을 갖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경우만 있었던 건 아니다. 서로 꽌시가 없어도 조건 자체를 검토하고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경험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신뢰가 생겨 지금까지 오랜 동안 믿고 거래하는 곳도 있다.
오히려 이런 대상일수록 마음도 편하고 부담 없이 일할 수 있다. 큰 거래일수록 전혀 모르는 사람과 거래하는 것이 편하기도 하다. 오히려 꽌시로 맺어진 것일수록 부담스러울 때도 많다는 것을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납득할 수 있으리라. 잘 아는 사람이라고 기껏 소개를 받아 거래했다가, 문제라고 발생하면 해결하기가 더 어렵게 되고 소개해 준 사람과의 관계까지도 어색하게 되고 만다.
꽌시에만 묶여 있는 중국인은 이런 점을 놓치고 있다.
전혀 꽌시가 없는 사람과도 좋은 거래를 맺을 수 있무는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꽌시가 있는 사람보다 대하기 편할 수 있다. 슨 일이 든지 꽌시로 일을 추진하려다 보니 일의 범위 역시 확대되기가 힘들다. 문제는 꽌시와는 상관없이 일 자체에서도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걸 중국인들은 무시한다는 사실이다.
일의 성과보다도 꽌시를, 또한 일의 내용과 성질, 그리고 조건보다도 꽌시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그들을 이해하고 설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중국 사람이 갖고 있는 최대의 약점은 바로 이 메이꽌시에 있다. 그들은 메이꽌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넘어서는 안될 금기인 것이다. 그러니 평소에 관계가 없는 사람이나 관계가 없는 조건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옥이 숨겨져 잇다는 것을 모르게 된다.
중국 사람은 이런 점을 모를 뿐만 아니라 알아도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사회의 구조와 정신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국인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약점을 잘 안다면 메이꽌시 속에 숨어 있어 옥으로서 대접받지 못하는 진짜 옥을 발견하고 가려낼 수도 있으며, 훌륭히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우마차 타고 핸드폰 든 중국
우마차 타고 핸드폰 든 중국
개방은 중국을 이렇게 변화시켰다
그러나 개방의 역풍이 불고 있다.
변화하는 중국인의 성 보랄
알 수 없는 중국인의 수입
거리의 여자
근현대사를 알면 중국이 보인다
조선족 중국인?
가짜와 위조가 판치고 있다
세상에서 대가 제일 센 여자들
제일 재미있는 오락은 떠드는 일
우마차 타고 핸드폰 든 중국
말하자면 현재의 중국은 우마차와 핸드폰이 병존하는 아주 회귀한 특성을 지닌 극단적인 과도기 사회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잘 대처해 나가야 한다.
'곤륜(쿤룬) 호텔의 2층 디스코텍에 특히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가보라. 그곳에 가면 중국의 젊은이들이 어는 정도로 빨리 변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귀를 찢는 듯한 음악소리에 맞추어 능숙하게 디스코를 추는 젊은 아가씨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디스코 클럽 입장료가 자그마치 80콰이(노동자 월급이 200-300콰이)나 되는데도 중국 젊은이들로 늘 만원이다.
그리고 또 '량마'호텔 옆에 위치하고 있는 하드 록(Hard Rock)이라는 카페에 가보라. 서구식으로 멋들어지게 실내 장식을 꾸며 놓고 있는데, 낮에는 커피와 식사를 팔고 밤에는 맥주를 판다. 그런데 이곳도 외국인보다는 음악에 따라 몸을 흔들어대면서 춤추는 중국손님들로 붐빈 다.
쇠락하는 전통 문화, 번져 가는 향락 문화
젊은이들만 변하는 것은 아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중국전통의 차 문화도 바뀌고 잇다. 그리고 소위 배갈(빠이쮜오)로 상징되는 중국의 술 문화도 바뀌어 가고 있다.
얼마 점만 해도 중국의 어느 회사를 가든지 일단 자리에만 앉으면 상대방에게 물어 보지도 않고 무조건 차를 따라 주었다. 그리고 찻물이 식거나 하면 계속해서 뜨거운 물을 부어 주는 게 당연한 손님 접대 방식이었다. 중국에 사는 사람뿐 아니라 자주 중국 출장을 다닌 사람이면 이런 문화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차를 따르기 전에 '차 드릴까요, 커피 드릴까요' 하고 묻는 모습들이 쪼금씩 생겨나고 있다.
중국에서 양주는 없어서 못 팔 정도다. 양주 대리점을 운영하고 잇는 중국인 친구에 따르면, 공급이 딸려서 그렇지 수요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코냑 같은 경우 들어오기가 무섭게 팔린다고 한다. 소비자는 중국에 사는 외국인이 아니라, 중국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처럼 지금 중국 사회에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서구식의 향락 문화가 하루가 다르게 퍼져가고 있는 것이다.
중국 진출하는 한국의 어깨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년 전쯤에 덩치가 크고 다소 험상궂게 생긴 한국 사람 세 명이 사무실로 찾아왔었다. 보아하니 시쳇말로 '어깨' 출신인 이들은 대전에서 룸 살롱 체인을 경영하는 사람들이었다.
중국에 고급 술집을 차리기 위해 왔다고 한 이들은 왜 중국에 진출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자기들의 제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국만 해도 이미 룸 살롱이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는 형편이어서 아주 고급으로 차리든지, 아니면 아예 다른 업종으로 전업을 하든지 결단을 내려야 할 기로에 서있습니다. 그러자니 비용 부담과 위험이 너무 큽니다. 서울, 부산 등으로 장소를 옮기자니 우리들 터가 아니어서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결국 자체 구수 회의 끝에 이곳 중국으로 진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중국에 진출해서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회사와 같이 동업하고 싶은데 할 의사는 없는지, 아니면 호텔에 나이트 클럽 자리를 제공해 줄 수 없는지, 그 여부를 타진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종합 상사와 고급 술집을 같이 경영하자는 기발한(?) 착상에 속으로 고소가 나왔다. 우리는 우리의 입장이 있어 도저히 술집을 같이할 수는 없다. 호텔 장소도 마땅한 게 없다고 적당히 거절했다. 그리고 주변에 조선족 가라오케도 많으니 한번 찾아가 보라고 권유했는데. 그들의 반론이 예상 밖이었다.
"중국도 가라오케는 이미 지나간 술 문화입니다. 당분간 호황이 더 지속은 되겠지만 4, 5년 뒤를 바라본다면, 이미 낡은 생각이죠. 중국의 젊은 층과 신문화를 보십시오 이제는 가라오케가 아닙니다. 필리핀 가수라도 좋고, 태국 가수라도 좋습니다. 가수들이 기타와 탬버린을 흔들면서 연주를 하고, 거기에 맞추어 디스코와 블루스를 추는 술집을 해야 장래성이 있습니다. 그것도 반드시 고급으로 해야 합니다. 이제 멀지 않았습니다. 1, 2년이면 생겨나기 시작할 텐데 우리가 먼저 기선을 잡고 싶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 말처럼 1년이 지난 지금 신장 개업 하는 고급 술집이 눈에 뛸 만큼 늘어나고 있다. 얼마나 사람들이 밀려드는지 미리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다. 이럴 정도면 여자가 시중 드는 한국식 룸 살롱도 생기고 또 늘어날 전망이다.
이 예는 룸 살롱을 운영하는 '어깨'들까지 중국에 진출할 만큼 한국의 중국 열기가 대단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보다 중국사회에 향락 문하가 얼마나 빠르게 번져 가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재미있는 일화라 하겠다.
아직 대다수 중국인의 사고와 행동은 오랜 전통 문화에 묶여 있다. 하지만 전통적 사고가 느슨한 젊은 층들은 서구식 문화를 빠르게 흡수하여 새로운 바람을 퍼뜨리는 주역이 되고 있다.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차와 배갈은 물러가고 그 빈자리를 커피와 양주가 차지하고 있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바뀔지, 얼마만큼 광범위하게 퍼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우리가 중국을 바라볼 때 반드시 명심할 것이 있다. 중국이 아직도 구닥다리로 낡고 보수적인 사회는 아니다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사회 전체가 현대화된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현재의 중국은 우마차와 핸드폰이 병존하는 아주 희귀한 특성을 지닌 극단적인 과도기 사회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잘 대처해 나가야 한다.
개방은 중국을 이렇게 변화시켰다
중국에 살면서 개방의 변화를 겪다 보면 온몸으로 느낄 만큼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다. 93년 한 해의 변화는 그 이전 10년의 변화를 앞질러 가고 있고, 94년의 변화는 또 그 이전 10년의 변화를 훨씬 앞질러 가고 잇다.
내가 느끼기에 중국의 개방이 몰고 오는 변화는 질풍노도와 같다. 우리 한국인도 그 동안 세계에서 가장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그런 한국인의 눈에도 중국의 변화는 역사상 유례없는 것으로 비춰진다.
가까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91년만 해도 어디를 가든지 제일 많이 듣는 소리 가운데 하나가 '메이요우', 즉 '없다'는 소리였다. 상점에 가도 '메이요우'였고, 백화점에 가도 '메이요우'였다. 이것은 실제로 물건이 없어서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있는데도 찾기 귀찮아서 그냥 툭 내뱉는 투로 자주 쓰이는 데 문제가 있었다. 한 개를 팔거나 열 개를 팔거나 어차피 받는 봉급은 똑같으니까 열심히 팔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백화점 종업원과의 선문답
백화점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진열대에 마음에 드는 구두가 있어 크기가 맞는 걸 보여 달라 했더니, 종업원 입에서 즉각 나오는 말이 "메이요우"였다. 종업원이 뭔가 잘못 알아들었는가 싶어 서툰 중국어로 다시 한번 요청하였다. "그렇다면 선반 위에 있는 저 구두 좀 보여 주시오" 이번에도 대답은 퉁명스럽게 "메이요우"였다.
그렇다고 뻔히 보이는 구두를 놔두고 포기할 한국놈이 어디 있겠는가?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선반 위를 가리키면서 "저기 저 구두 말이요" 하고 강조해 보았다. 그렇지만 종업원은 뒤도 안 돌아보고 마냥 "메이요우"다. 뻔히 보이는 구두를 놓고 중국인과 이방인이 선문답을 한 셈이었다.
무조건 "메이요우"라고만 염불을 외길래 나도 "왜 저기 있는데 무조건 없다고만 하느냐. 내 눈에 보이는 저것은 그럼 도대체 구두가 아니란 말이냐"고 화를 내며 따졌다. 그러니까 "그것은 팔지 않는 견본품이예요"라고 쌀쌀맞게 잘라 말하고는 딴 일 보러 가버렸다.
이러다 보니 아주 간단한 물건을 구하는 데도 반나절씩 걸리기가 일쑤였다. 어떤 경우에는 백화점 종업원에게 사정하다시피 찾아달라고 매달려야 했고, 그래도 안되면 포기하고 홍콩에다 주문해야 했다.
그러던 것이 불과 3, 4년 전의 일이다. 이제는 각 백화점마다 기본급에다 실적 비율대로 보너스를 지급하는 인센티브 제도가 도입되면서 사정은 완전히 180도 달라졌다. 찾는 물건이 없으면 다른 물건을 내밀면서 '성능은 비슷한데 이것은 어떠냐, 지금은 없지만 주문을 하면 이삼일 내에 준비해 놓겠다'는 등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로 변했다. 그리고 전세계 물건이 모두 준비되어 있을 정도로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에는 없는 물건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
변화는 가속도를 불러온다
중국이 개방한 지 어언 10년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개방은 90년도 들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90년 이후 개방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매년 한해 동안의 변화는 그 이전의 10년 동안 변화보다도 더 클 지경이라 한다.
중국에 살면서 이 개방의 변화를 직접 겪다 보면 정말 온몸으로 느낄 만큼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다. 93년 한 해의 변화는 그 이전 10년의 변화를 앞질러 가고 있고, 94년의 변화는 또 그 이전 10년의 변화를 훨씬 앞질러 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방이 진척될수록 변화에 엄청난 가속도가 붙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농촌의 변화가 대표적인 예이다.
80년대만 해도 농민이 농사를 지으면 정부는 백조(바이티아오)라는 종이 쪽지를 주고 다 걷어갔다. 하지만 이 쪽지가 언제 돈으로 바뀌어서 돌아올지는 요원하기만 했다. 그러던 것이 개혁, 개방이 시작되면서 농민들에게 미리 그 해에 걷어갈 수량을 정해주고 남는 수량에 대해선 본인이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또 90년에 들어와서는 세금을 제외한 농산물을 걷어갈 때는 현찰을 지급하는 것으로 다시 바뀌었다. 이는 80년대와 비교해 보면 엄청난 변화다. 이러한 농촌 변화에 힘입어 중국은 비로소 12억이라는 엄청난 인구의 먹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공장에 나가 있는 공산당 세포 조직의 활동 내용도 개혁 개방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잇다. 그들이 주도하는 공장 내 집회도 과거처럼 더 이상 정치적이거나 선동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집회는 생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토론장으로 바뀌어 가고 잇다.
'동지 밥 주시오'
개방에 따른 생활의 변화도 엄청나다.
90년대 초까지도 웬만한 시골에 가면 우리가 70년대에 열심히 부르던 '새벽종이 울렸네...'의 '새마을 노래' 같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새벽 구호'(아침에 일어나서 일하라거나, 중화인민공화국과 모택동 찬양 노래 등)도 이제는 사라졌다.
91년만 해도 거리에 차가 밀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북경(베이징)의 삼환로(산후안루) 거리에는 하루의 반이 차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는 한국의 대우, 현대, 기아의 차까지 포함해서 각종 수입 차와 중국에서 생산한 차들로 북적대고 있다.
변화의 바람은 호칭까지 바꾸고 있다.
과거에는 식당 여종업원에게 우리 식으로 '샤오지에'(소저), 즉 아가씨라고 부르면 주위의 중국인들이 다들 킥킥대고 웃었다 한다. 사화주의 중국에선 여종업원도 당당한 '통즈'(동지)라고 불러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식으로 자연스럽게 '샤오지에'라고 부르고 있다. 술집에 가면 그런 '샤오지에'들이 고막이 찢어질 듯한 음악 소리에 따라 마돈나의 육감적인 율동처럼 엉덩이를 마구 흔들어대는 광경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잇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이고 엄청난 개방의 속도다.
그러나 개방의 역풍이 불고 있다
중국 사회 곳곳에는 개방의 역풍을 일으킬 만한 요소들이 많이 도사리고 있다. 도시의 빈부격차가 심해져 생기는 소외 계층뿐 아니라 대다수 농민의 빈곤, 관료의 부패, 부조리도 개방의 역풍을 일으킬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런 바람을 몰고 온 개방의 이면에는 그 변화의 폭만큼이나 부정적인 역풍도 일고 있다. 개방으로 인해 소외되고 있는 불만세력이 날로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상회에서나 지도 계층이라 할 수 있는 대학 교수나 의사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별로 개방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오히려 개방이 그들의 상대적인 박탈감을 더욱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아이 쇼핑에나 만족해야 할 교수와 의사
그들은 자전거 타고 다니던 옆집 장사꾼이 어느 날부터인가 택시를 타고 다니는 걸 보게 된다. 그러는가 싶더니 어느 날 갑자기 자가용으로 바뀐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주위의 그런 변화를 보는 대학 교수나 되는 사람들의 눈이 고울 리 없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일지 모른다. 아이쇼핑 정도로만 만족해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몇 달치 봉급에 달하는 유명 브랜드 핸드백을 희희낙락하는 표정으로 선뜻 사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 그 심정이 어찌 편할 리 있겠는가.
후문(뒷거래, under table money)으로 생기는 것도 없고 월급도 많지 않은 공장 노동자들과 '라오빠이싱'(노백성, 인민을 이렇게도 부른다)은 날로 치솟는 물가에 불만이 높아진다. 개방과 경제 성장으로 발생하는 인플레이션이 그들의 가계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농민들도 마찬가지다. 개방 정책은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를 심화시켰고, 그 속도는 더해만 간다. 농촌에선 17가구에 한 대 정도에 불과한 텔레비전이 도시에는 라디오만큼이나 흔하며, 비디오와 오디오를 장만하는 가정도 날로 늘어가고 있다.
변방의 소수 민족도 그들이 사는 변두리만큼이나 개방의 끝에 버려져 있다. 중국 정부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그들은 겨우 관광객에게 물건이나 팔면서 절대적 빈곤을 면치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보수파의 동향이 변수
등소평의 영향으로 그 동안 큰소리 한번 제대로 내지 못했던 보수파들도 개방에 대해 불만을 갖는 세력 가운데 하나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개방의 부작용을 떠벌리면서 이 거대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선 보수주의 이념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아마 등소평 사후 중국의 방향 문제가 공론화된다면, 이 목소리는 더욱 커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개방이 중국에 부를 가져다 준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에 그 동안 이런 불만들이 표출되지는 않았다. 그럼 등소평이 사망하여 위에서 열거한 개방의 부정적인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표출된다면 중국 사회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물론 개방의 속도에 제동이 가해지고,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제도나 이념도 상당하지 않겠느냐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현재 중국지도 세력은 이 문제에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개방의 대세는 막지 못할 것이다. 개방의 속도가 느려질 수는 있더라도...
나는 개방 정책이 중국뿐 아니라 세계를 위해서도 필요하며, 지금과 같은 속도로 개방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바람과는 다르게 중국 사회 곳곳에는 개방의 역풍을 일으킬 만한 요소들이 많이 도사리고 있다. 도시의 빈부 격차가 심해져 생기는 소외 계층뿐 아니라 대다수 농민의 빈곤, 관료의 부패, 부조리도 개방의 역풍을 일으킬 요소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개방 정책의 걸림돌들을 중국 정부가 어떻게 슬기롭게 돌파해 나갈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 중국과 밀접하게 관계를 가져야 할 우리로서는 결코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가만히 팔짱만 끼고 있을 수는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변화하는 중국인의 성 모랄
허벅지가 보이도록 찢어진 치파오는 그 생김새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야릇한 기분이 들도록 한다. 몸에 착 달라붙도록 해서 입기 때문에 허리를 구부린다거나 움직이면 몸의 곡선이 그대로 다 드러난다.
주위의 잘 아는 중국인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중국의 젊은 남녀간의 성적인 관계, 특히 혼전 성 관계는 어떠하냐. 만일 혼전 관계가 있다면 주로 어떤 장소에서 이뤄지느냐? 그랬더니 그 사람의 대답은 생각보다는 의외로 아주 간단히 튀어나왔다. "많을 것입니다." 즉, 아주 대단히 많다라는 것이었다.
허벅지가 보이는 치파오
호텔은 하루에 최소 40-50달러 이상으로 비싸기 때문에 적합한 장소가 못된다. 부모들이 다 직장에 출근하고 난 후에 집이 빈 시간을 이용하기도 한다. 중국은 직장에 따라 일요일 외에 평일의 하루를 자신이 선택해 쉬는 회사도 많기 때문에, 두 사람이 같은 날을 쉬는 날로 정해서 만나기도 한다. 여름에는 한적한 공원이나 숲속이 은밀한 장소가 되기도 하며, 잠시 머물 수 있는 장소로 초대소를 이용하기도 한다는 답이었다.
중국도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성에 대해 개방적이다. 그리고 또 젊은 부부일수록 성 문제로 인한 다툼과 이혼도 많다.
그러나 나이가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중국인들의 성에 대한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대단히 자유롭다.
우리에게 중국은 수십 년 동안 중공으로 불려 온 폐쇄적인 사회였다. 또 수천 년 동안 유교 전통을 고수해 온 사회이며, 현재는 사회주의 국가인만큼 성에 대해서는 대단히 엄격하고 보수적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리라.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게 중국사회다.
중국 여자들이 입는 전통적인 옷인 치파오를 한번 살펴보자.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길게 찢어 놓은 이 옷을 처음 보았을 때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치파오 중에 한쪽만 찢어 놓은 것과 양쪽 다 찢어 놓은 것이 있는데, 또 무릎과 허벅지 사이까지 찢어 놓은 것부터 거의 엉덩이까지 찢어 놓은 것도 있다.
치파오는 호텔에서 근무하는 아가씨들이 많이 입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찢어진 치마 사이의 허벅지를 감상하느라 눈알을 굴리는 사람은 외국인들뿐이다. 중국 사람은 찢어진 치마에 대해 특별히 신경을 쓰거나 눈을 굴리는 사람이 거의 없다.
자주 보니 익숙해져서 여자의 허벅지가 보여도 어떤 묘한 기분을 느끼지 않거나, 새삼스런 광경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의 허벅지는 치파오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여름에 자전거를 타고다니는 여자들은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치마를 들쳐 그 속으로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한다. 그런데 그 광경을 처음 보는 남자들에겐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들친 치마 사이로 하얀 허벅지와 때로는 가지가지 색깔의 팬티까지 보일 때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눈알을 굴리는 사람은 외국인들뿐이다.
치파오는 허벅지가 보이게 찢어져 묘한 느낌도 들지만, 그 생김새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야릇한 기분이 들도록 한다. 치파오는 맞춰 입기 때문에 대부분 몸에 잘 맞는다. 맞는 정도가 아니라 몸에 착 달라붙어야 잘된 옷이다. 그러므로 치파오를 입고 구부리거나 움직이면 그 여자의 곡선이 거의 알몸 그대로 다 드러난다.
이중적인 중국인의 성 의식
중국은 생각보다 성에 대해 자유롭다. 여자들도 성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거나 숨기려고 하기보다는 남자들과 동등하고 떳떳하게 행동한다. 다만 중국 사람들 특유의 체면 문제로 남자나 여자나 성에 관한 문제를 입에 올리기를 꺼려할 뿐이다.
또한 중국 사람들은 대체로 한 집에 두세 가구 사는 곳이 많다. 한집에 한 가족이 살더라도 방이 작고 비좁으며, 많은 경우 여러 집이 연립식으로 한 건물 안에 살기 때문에 아직 환경적으로는 성에 관해 자유로울 수가 없다.
정부도 영화의 심한 노출이나 남녀의 베드신은 물론 키스신조차 금하고 있다. '플레이보이'나 '펜트하우스' 같은 음란 잡지가 들어오는 것도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아직은 즐기는 것으로서 성 개념은 강하지 않다. 그러나 절대로 숨겨야 되거나 부끄러운 것이라는 개념도 아니다. 점차 성도 개방되고 섹스도 즐기려는 경향이 늘고 있으나 대중적이고 공통적인 사회 의식은 아니다. 성도 즐기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고가 형성되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특히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의 성에 대한 개방이나 언론, 잡지, 영화 등의 자유로운 활동이 필요한데 그것이 따라줄 시기가 언제쯤일지는 미지수다.
가라오케 등에서 노래가 나올 때 화면에 나오는 남녀들의 키스나 포옹 장면, 약 30분 간격으로 디스코 타임이라 하여 서너 곡의 디스코 곡을 틀어줄 때에 나오는 서양 무용수들의 야한 포즈나 춤은 누구나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고 중국 정부도 허락하는 것 같다.
한 마디로 중국 사람들에게 성이란 이중적인 구조를 갖는다. 즉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즐길 수도 있는 것이나 대중적이고, 공공연한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도 여자나, 성에 관한 이야기는 대화의 주제로 잘 거론하지 않는다. 중국 사람과 대단히 친한 사이가 아니면 성, 혹은 여자에 관해 묻는 것은 실례다.
대답을 듣기도 어렵거니와 무례하다고까지 생각하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중국인의 수입
꽌시와 뒷거래가 횡행하는 것이 그들의 과다 소비 지출과 무관하지 않다. 월 40-50달러 봉급 생활자가 실제 40-50달러는 용돈으로 여기지도 않는 것을 그리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중국 직장인들의 월 평균 수입은 50에서 60달러 정도다.
그런데 1인당 50-60달러 정도 있어야 갈 수 있는 유명한 고급 중국 식당을 가보면, 좌석의 거의 반 이상이 중국 사람들로 가득하다. 뿐만 아니라 한국이나 일본 식당, 서양 식당 등 어디를 가도 고급스럽고 유명한 곳은 중국인들로 가득 차 있음을 누구나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더구나 그들은 우리도 선뜻 주문하지 못하는 상어 지느러미, 가재, 전갈 요리 등을 주저하지 않고 시키고 마오우타이나 우량이에 등 고급 술로 반주를 곁들인다. 비싼 음식을 접시와 접시를 겹쳐서 먹을 만큼 주머니가 든든한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어느 회사의 회식 모임이나 거래처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온 손님들만 있는 게 아니다. 아내와 애들과 함께 온 가족들, 친척들까지 여러 명이 함께 하는 외식 모임은 고급 음식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뿐만 아니다.
백화점엘 가면 1,400콰이(160-170달러)짜리 핸드백과 2,000콰이(약240달러)짜리 옷을 주저하지 않고 사는 중국 아주머니들을 역시 쉽게 볼 수 있다.
아직은 자전거가 대중 교통 수단이지만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택시를 잡아탄다. 외국인을 위한 백화점에도 항상 중국인이 더 많고, 피자점, 아이스크림점에는 중국인 손님들로 매번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연봉 300-400달러, 월 급여 50-60달러 정도의 수입으로 어떻게 이런 소비 생활이 가능할까?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 문제를 알기 위해선 중국에서 그들과 함께 오래 생활하면서 그들과 자주 어울리고 그들의 생활을 옆에서 직접 보아야만 가능하다.
돈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되어 있는데 그 중의 일부만 살펴보자.
첫째, 지금 중국 전체에 만연되어 있는 큰 중병 가운데 하나인 부패를 지적할 수 있다.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사회가 현재 중국의 모습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되는 게 없다. 그러나 꽌시(관계)를 이용해서 수를 쓰면 안되는 게 없다.
꽌시를 이용한 후문 거래는 아주 일반화되어 있다. 그러니 어떤 큰 거래를 처음 시도할 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뚫고 들어가기가 대단히 어렵다. 꽌시를 이용한 경쟁자에게는 아무리 내 물건이 가격 경쟁에서 앞선다 해도 이길 수가 없다. 또한 중국에는 각종 인허가 사항이 대단히 많다. 무엇 하나 하려면 관계되는 기관이 왜 그리도 많은지. 그러나 이것 역시 꽌시를 이용하면 쉽게 빨리 처리할 수 있다.
이렇게 꽌시와 후문 거래가 횡행하는 것이 중국인들의 과다 소비 지출과 무관하지 않다. 월 40-50달러 봉굽 생활자가 실제 40-50달러는 용돈으로조차 여기지 않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두번째 이유를 찾아보자.
중국인들은 친척을 방문하거나 일 때문에 먼 지방을 오갈 때는 많은 물건을 싸들고 다닌다. 자기가 사는 곳에는 없거나 귀한 물건인데 지방에는 흔하고 싼게 있으면 평소에 보아 두었다가 방문시 한꺼번에 많은 것을 사와서 경제적인 실리를 취한다.
어떻게 보면 보따리 장사에 불과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렇게 유통되는 물건은 중국 전체로 보면 엄청난 양이다. 싼 물건을 갖고 가서 올 때는 비싸고 귀한 물건을 사온다. 국가가 부여한 직업 외에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자기들 나름대로의 귀중한 노하우인 것이다. 여기서 벌어들이는 돈이 일반 '라오빠이싱'(노백성)에게는 중요한 과외 수입원이라 한다.
세번째 이유는 이렇다.
중국인은 집집마다 금고가 하나씩 다 있다는 말이 있다. 은행에 저축하지 않고 돈을 집에 보관해 두는 것이다. 그리고 부부가 버는 것은 거의 다 차곡차곡 모아둔다.
외식할 때는 공사(꽁스), 즉 회사 돈으로 한다. 업무적인 일로 초청을 받았는데도 처자식을 데리고 나오기도 한다. 심한 경우에는 부모, 고모, 이모까지 다 데리고 나올 때도 있다. 또한 접대 명목으로 손님을 초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공사 접대비로 외식을 즐기는 것은 대단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특정 계급이나 간부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현재 중국 정부는 인구 정책으로 자녀를 하나만 낳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나밖에 없다 보니 자녀들이 버릇이 없다고 여러 차례 신문에 문제가 제기될 정도로 자식들이 요구하는 것은 다 해주는 경향이 있다. 10원씩 하는 아이스크림, 피자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2-3원으로 매끼니를 때우는 사람도 자녀에게는 아이스크림과 햄버거를 서슴없이 사주는 게 오늘의 중국 풍속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녀에게 쓰는 돈이나 꽌시를 위해 쓰는 돈이 아닌 다음에는 철저히 모아서 집안 어딘가의 구석에 있음직한 금고에 넣어두는게 중국인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최근의 풍속도를 보자. 일부 국영 기업에서는 총경리(쫑징리 : 사장급)를 비롯해 모든 직원들이 회사와 계약 관계를 맺고 일한다. 수익이 생기면 최소한의 금액만 회사에 바치고 나머지를 직원들끼리 분배하는 것이다.
큰 회사의 사장이 월급을 500-600콰이(60-70달러) 정도밖에 못 가져간 시절도 이제 옛날이 돼가고 있다. 많이 가져가는 사람은 한달에 10,000콰이(1,200달러) 이상 가져가는 사람도 있고, 연말 결산하면 보너스를 1,000% 이상 주는 기업도 있다. 그리고 이런 기업은 점차 늘어가는 추세라 한다.
'거리의 여자'
무엇보다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중국 공안은 알려고 하면 다 알 수 있고, 잡으려고 하면 다 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중국에서 가장 죄악시하는 것이 매춘이라는 것이다.
94년 초 한국에서 출장을 온 사람들이 중국 여자와 호텔 방에 같이 있다가 공안에게 적발되어 끌려간 사건이 있었다. 북경에 있는 국제 무역 중심지에 위치한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 '거리의 여자'와 밤을 보내다가 봉변을 당한 모양이었다.
'옷 벗고 맥주만 한잔했다'
중국에선 여자도 사회 활동을 하기 때문에 호텔 방에서 남녀가 얼마든지 상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공안에 적발되었을 때는 짙은 화장을 한 여자와 잠옷 바람으로 걸렸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단체로 함께 여행 온 다섯 명이 모두 각 방에 여자를 한 명씩 데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 날 끌려간 중국 여자들은 절대로 성 관계는 갖지 않고 방에서 그냥 맥주만 마셨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했다고 한다. 실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매춘을 했다는 게 밝혀지면 징역형이나 강제 노동형에 처해질 게 뻔하니, 본인들은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부인해야 했던 것이다.
외국인이 중국에서 매춘부와 자다 들키면 여권에다가 '호색한'이라고 찍어서 추방한다는 말도 있었다. 홍콩에서 여권을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은 다 중국에서 여자와 그렇고 그런 짓을 하다가 공안에 들켜 쫓겨난 사람들이라는 말도 있었다. 이런 소문은 대부분 왜곡되어 와전된 말들이다. 호색한이라고 찍지는 않지만 현장을 발각 당하면 벌금을 물리고 강제로 출국시키는 일은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 그러니 이 한국 사람들은 객지에 와서 한번 재미 보려 하다가 크게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이다.
이 날 발각된 다섯 명의 한국 사람은 밤늦게 공안에 끌려가 새벽까지 심문을 받았다. 그런데 밤중에 끌려간지라 연락할 데도 마땅치 않고 어떻게 손써 볼 수도 없는 처지인 데다 말까지 통하지 않으니 눈앞이 캄캄했다. 더구나 이 사람들은 모두 공무원 신분이었다 하니 노랗게 변한 하늘만 아른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구원의 손길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뻗쳐 왔다.
구사일생의 우문우답
말이 통하지 않아 중국 공안국에서 조선족 통역을 불렀는데, 이 사람이 그들의 구세주가 된 것이다. 이 통역하는 조선족 사람은 재치가 있었다.
중국 공안에서는 "바른 대로 말하라, 그러면 당신들은 외국인이니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거짓말을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당신들과 같이 있었던 여자들이 이미 당신들과 관계를 했다고 다 불었다. 그러니 바른 대로 대라"고 권유 반, 공갈 반의 취조를 받아야 했다. 그런 데다가 약점을 집힌 처지에 밤늦게 이런 협박조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대개는 실토(?)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족 통역은 "자백하라고 합니다만 사실이라 해도 절대 바른 대로 말하면 안됩니다. 여자들이 다 불었다는 것도 거짓말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런 일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가 만일 무슨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냐"고 한국 사람들이 걱정을 하니까, 이 통역은 그 걱정을 절묘하게 통역을 하였다.
"절대 그런 일이 없었다. 술집에서 같이 놀다가 아쉽기도 하고, 중국에 관해 알고 싶은 것도 많고 하여 방에 가서 잠시 술 한잔 더하자고 해서 맥주 한잔 마시고 있었다"고 중국 공안에 통역해 주었다.
이런 우문우답이 밤새도록 계속되자, 결국 공안도 별 방법이 없었다. "밤에 여자를 데리고 호텔 방에 있던 것만 해도 풍기문란에 해당되는 만큼 벌금형으로 끝내겠다"고 하여 벌금으로 2천 달러를 지불하고 나올 수 있었다. 심증은 가나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만일 그때 이 조선족 통역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공무원 신분이니 아마 크게 문제가 되었을 건 뻔한 일일 뿐만 아니라, 한국인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개방에 묻어 들어온 자본주의의 병폐
중국 정부는 공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92년만 해도 소위 몸을 파는'거리의 여자'는 남쪽의 큰 도시 외에는 없었다. 최근에는 해안 도시뿐 아니라 동북 지방 등 내륙지방에도 생기기 시작했다.
북경은 정치의 중심지이며 중국의 얼굴이어서 매춘 단속이 심해 94년 초까지만 해도 북경에는 '거리의 여자'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금요일, 토요일이 되면 일부 별 다섯 개짜리 호텔까지 눈웃음을 짓는 꾸냥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중국의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은 지하에 각 층을 비추는 모니터가 장치되어 있다. 이 모니터는 계속해서 각 층을2-3초 간격으로 비춘다. 여자가 아무리 에스컬레이터나 비상 계단을 이용해도 다 모니터에 잡힌다.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는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이 아니라도 공안에서는 알고자 하면 다 알 수 있다. 단지 구태여 문제 삼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모른 척할 뿐이다. 만일 필요하면 출국 전 언제든지 문제 삼고 중국의 법에 따라 처리할 수도 있다.
중국법에 의하면 미성년자 매춘 알선은 사형, 매춘 당사자는 몇 년 이상 강제 노동형에 처해지게 되어 있다. 중국은 매춘을 이토록 엄하게 다스리고 있다. 현재 모든 것이 개방과 연결되어 있고, 아직 큰 문제가 되는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알고도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게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개방의 여파라고나 할까. 개방이 되어 가속도가 붙으니 중국으로 봐서는 반갑지 않은 자본주의 병폐가 먼저 상륙하는 것이다. 비단 거리의 여자뿐이 아니고 거지도 생기고 깡패도 생긴다. 그러나 큰 것을 보고 작은 것은 필요한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좀 심하다 싶으면 한번씩 대규모 소탕을 벌인다. 자본주의 병폐 가운데서도 중국이 가장 경계하고 또 가장 심하게 다루는 것이 매춘이다.
중국에는 통계 자료가 없다. 내부적으로는 있을지 모르나 필요한 당사자 외에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길거리의 벽이나 전봇대에는 매독, 임질, 기타 성병 치료에 관한 선전 문구를 자주 볼 수 있다. 이 만큼 중국에도 많은 성병이 퍼져있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직 나에게는 여자를 요구하는 고객은 없었으나, 그런 요구를 해오는 사람이 있으면 여자를 붙여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참으로 곤혹스러울 것이다. 굳이 꼭 하겠다고 하면 여자를 소개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잡을 수 있는 공안의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으니, 한번 실수로 평생을 망칠지 모르는 데가 중국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아주 최근의 일인데, 한국의 한 작은 회사에서 두 사람이 출장 와서 개성 식당이란 데서 식사를 하고, 어떻게 알게 된 중국 소저들과 방에 있다가 적발되었다. 처음에 5천 콰이의 벌금을 부과 당하자 너무 비싸다고 거부했다가, 정식으로 조서를 쓴 다음에 벌금 5천 콰이를 물고 일주일 동안 구류까지 살았다. 중국에 출장 온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회사(본사)나 한국의 집에는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그야말로 망신살이 뻗치고 말았다.
상해 같은 곳은 호텔 부근에 좋은 술집과 예쁜 아가씨들이 있으니 잠시 들러서 구경이나 하라고 호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청도의 호텔에도 윙크하는 '거리의 여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을 따라갔다가는 대부분 엄청난 바가지와 예상 못할 피해를 입으며, 열에서 아홉은 크게 후회하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
무엇보다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중국 공안은 알려고 하면 다 알 수 있고, 잡으려고 하면 다 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중국에서 가장 죄악시하는 것이 매춘이라는 것이다.
근현대사를 알면 중국이 보인다.
문화대혁명은 중국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대재앙이었다. 문혁 과정에서 홍위병들은 몰라서 저지른 실수는 용서해 주었으나, 스스로 인정하는 실수는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도대체 한심한 작자들이다."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등등의 말은 중국에 살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듣게 되는 중국에 대한 비난들이다. 외국인 가운데서도 특히 한국인들이 이런 비난을 심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상황도 그저 '중국이니까' 하고 넘어가려는 경향도 많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아직도 중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많을 뿐 아니라, 그런 상황에 접하면 버릇처럼 '중국이니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기도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중국의 역사, 특히 근현대사를 알게 되면서부터는 조금씩 생각이 달라졌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그렇게 하는 게 중국인으로서 당연할지 모르겠다', '특히 그 사람 나이가 50대라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같다'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또 이런 이해(?)는 중국에 살면서 장사하는 데 대단히 큰 도움이 되었다.
남에게 떠넘기든 오리발을 내밀든 해야 한다
중국인을 상대하다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것들, 그래서 어떨 때는 울화가 치미게 하는 것들이 많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가장 문제가 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절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개인적으로는 자기 의사를 절대 표현하지 않으려 한다.'
'자기와 상관없으면 모른 척한다.'
'항상 애매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이런 그들의 비합리적인 의식은 나로 하여금 가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를 곰곰이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아주 부정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런 의식 구조에는 극도의 피해 의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괜히 남의 일에 혼자 나서서 잘난 체하거나 성급하게 자기 의견을 내세원서는 안된다','그러다 실수라도 생기면 자칫 나만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점 때문에 항상 나쁜 감정만 갖고 있게 되면, 그들과 상대한다는 것은 큰 고역일 뿐만 아니라 제대로 비즈니스를 성사시키기도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앞에서처럼 '중국인이니까' 하고 넘어가는 것은 아주 소극적인 태도에 불과하다. 그들을 비즈니스 파트너로 삼든 경쟁자로 삼든지 간에 더욱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가 있어야 활용도 할 수 있고 경쟁에서 이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어떻게 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우선 중국의 근현대사 공부를 권하고 싶다.
그럼 중국의 근현대사는 어떤 역사였는가? 한마디로 그것은 격변의 세월이었고 내일을 점칠 수 없는 시대였다. 외세와 군벌, 국민당과 공산당, 49년 사회주의 혁명과 60년대 문화혁명으로 이어진 중국의 근현대사는 아마 그야말로 이름 없는 평민, 바로 인민들을 가장 큰 피해자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엄청난 격변의 세월은 무수히 많은 지배자들이 판을 치고 또 뒤바뀐 시대였다. 중국의 인민들은 외세가 지배할 때는 외세에게, 군벌이 지배할 때는 군벌에게, 국민당 시절에는 국민당에게, 공산당 시절에는 공산당에게, 문화 혁명 때는 홍위병에게 맞춰야 했다. 이처럼 세상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상황에서 경솔하게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는, 설령 오늘은 인정을 받아도 내일이 되면 죽을 죄로 뒤바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설사 죄를 저질러도 남에게 떠넘기든 오리발을 내밀든 해서 그 위기를 넘겨야 했다. 잘못을 솔직히 인정한다고 해서 정상 참작이 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가 하지 않은 잘못도 덤터기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그 속에서 정당하게 양심적으로 처신하는 방법이란 있을 수 없었고 있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했다간 자기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이었다.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곧 죽음이다.
특히 30여 년 전에 있었던 문화대혁명은 중국 역사에서 보기 드문 대재앙이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박해를 받아 죽어 갔고, 일반인들의 희생 또한 매우 컸다. 그런데 이 문혁의 수행 과정에서 홍위병들은 몰라서 저지른 실수는 용서해 주었으나 스스로 인정하는 실수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 사상에 물든 주자파로 몰려 비난을 받으면 나는 잘 몰랐다, 딴 사람이 시켜서 한 것이다라고 해야 겨우 용서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곧이곧대로 자기 실수를 인정하게 되면 언제 어떻게 죽게 될지도 몰랐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상영되지 않아 얘기로만 들었지만, 세계적인 명작으로 평가받은 첸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에도 이러한 문혁 시대의 비극이 잘 그려져 있는 것 같다.
패왕역을 해오던 경극 배우 샬로(장풍의 분)와 우희역의 데이(장국영 분), 그리고 샬로의 애인인 쥬산(공리 분)은 애증이 얽혀 있으나 서로가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홍위병의 인민 재판에서 퇴폐한 자본주의파(주자파)라는 비판을 받게 되자, 샬로는 이 모든 잘못은 다 데이 때문이라고 영화 속의 장국영을 비난하게 된다. 샬로로부터 배신당한 데이는 당연히 패왕 샬로를 극구 비난할 것 같았으나, 또다시 이 모든 잘못은 홍등가의 여자였던 쥬산 때문이라면서 그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두 남자로부터 버림받고 더 이상 책임을 전가할 데도 없어진 공리는 목을 매달고 죽음으로써 사랑의 배신을 고발한다.
우리로 봐서는 참으로 비겁한 행동이었으나 그렇게 해서라도 생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이 중국인들의 시각인 것 같다. 그래서 중국의 가정에서는 문혁 세대라고 할 수 있는 50대 이상의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이렇게 열심히 신신당부한다고 한다. 똑똑한 체하지 말아라, 절대로 잘못을 인정하지 말아라, 나서기보다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낫다, 윗사람이 틀렸다 하면 무조건 틀린 줄로 알아라, 윗사람 말대로 하는 것이 안전하다 등등.
지금 중국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 예를 들면 공사의 장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문혁 세대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우리 식의 날카로운 책임 추궁은 오히려 일하는 데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둥글둥글하면서도 상대를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 편의 영화라도 생각하면서 보자
중국의 전체 역사와 문화를 빠른 시간 안에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시간적으로 그렇고 따로 노력을 들이는 것에도 제약이 있다. 하지만 최소한 중국 근현대사의 배경만이라도 이해한다면 중국 사람을 상대로 일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중국 근현대사를 다룬 딱딱한 역사책이 아니라도 좋다. 소설로 보는 중국 현대사 책이 쉽게 빨리 머리에 들어올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작년에 읽어 본 것 중에는 [대륙의 딸들]이란 소설이 피부에 와 닿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전족을 하고 군별의 첩이었던 외할머니, 헌신적이고 청렴 결백한 당관료였던 아버지, 힘에 겨운 공산당 활동을 나름대로 열심히 했던 어머니, 이들은 모두 문혁 과정에서 자본주의 부르주아파로 낙인찍혀 인민 재판과 감옥을 밥먹듯이 들락날락거렸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청렴했지만 과거의 출신 성분이 문제가 되어 권모술수가의 희생양으로 수난과 고통을 받아야 했고, 가족과 아이들은 항상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대신 팔아 넘기지는 않았고, 또 있지도 않은 죄를 결코 시인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 대부분은 이 사람들처럼 자기 심지를 끝까지 지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기가 살기 위해선 누군가 애꿏은 사람을 불어야 했고, 끝까지 자기 잘못을 인정해선 안되었다.
요즘 많이 상영되는 중국 영화를 통해 중국을 공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영화 [패왕별희] 얘기도 했지만 영화는 중국인들의 역사적인 체험과 사고 방식을 파악할 수 있어 훌륭한 중국 공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중국 근현대사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게 있다. 지금 50-60대의 중국인들은 격변기를 지나오면서 제대로 공부했던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상당히 고루하고 보수적인 것 같다. 이런 현상은 그들과 상담하다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반면 젊은 세대 가운데는 지금까지의 고루한 방법과는 달리 몸으로 뛰고, 적극적으로 대처하고자 하는 층도 생기고 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극소수이며, 사회 제도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받쳐 주지 않고 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이런 젊은 장사꾼이 발견되면 잘 키워주고 도와주는 것이 좋은 투자가 될 성싶다. 남보다 앞서가는 중국인으로서 가까운 장래에 우리 일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유용하게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족 중국인?
중국에 처음 와서 만난 조선족 사람들이 '우리나라'라는 말을 하길래 한국을 가리키는 줄 알았다가, 한참 지나서 그 말이 중국을 두고 하는 말이란 것을 알고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한국 사람이 중국에 진출하는 데 가장 유리한 점 가운데 하나는 약200만 정도의 한국말(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조선말이다)을 할 줄 아는 조선족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일본인이나 미국, 유럽 사람들보다 절대적으로 유리한 점이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말을 하고 생긴 모습도 똑같고 같은 조상을 가졌다고 해서 조선족이 중국인이라는 점을 잊어 버렸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그들은 한족을 제외한 중국의 55개 소수 민족중의 하나인 중국 사람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이 하는 사고도, 그들이 누리는 문화며 생활과 느낌도 모두 중국인의 그것이다. 필자가 중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조선족 사람들이 '우리나라'라는 말을 하길래 대한민국을 가리키는 것인 줄 알았다가, 한참 지나서야 그 말이 중화 인민 공화국을 두고 하는 말이란 것을 알고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 점을 반드시 명심하고 조선족을 대하라. 물론 그들의 부모 또는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가 우리의 선대와 같은 형제고 친구였다는 점은 간과하지 말고 따뜻하게 대하라. 더 나아가 그 중에서 비즈니스마인드를 가진 똑똑한 조선족을 발굴하면, 그 어떤 한족을 이용하는 것보다 편하고 효과 있는 중국 비즈니스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족은 중국인이다.
조선족이 한국 사람에게 갖는 감정은 어떠할까?
2년 반 전 한중 수교가 발표되었을 때 대부분의 조선족들은 몹시 기뻐했다고 한다. 그 전까지 부모의 조국으로 강요되던 북조선은 대부분 가난했던 조선족을 포용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하기만 했다. 그런데 어렴풋이 들어 알고 있는 발달된 반쪽의 조국이 중국과 수교하게 되니 자연히 본인들 입지도 넓어지고, 같은 동족이 중국보다 더 잘산다니 한족들 대하기가 떳떳하고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 사람과 똑같은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자신은 중국의 법에 따라 살고 있지만 소수 민족으로 무시받는 처지이니, 적어도 같은 민족으로서 한국 사람에게만큼은 동동한 자격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감정과 기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은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의 평등 사상을 배우고 사회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돈 좀 있다고 피고용인으로 부리려고만 하니 기분 좋을 리 없는 것이다. 사고도 행동도 전혀 다른 데다가 동등하게 대하려 하지 않으니 금방 열등감과 원망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한국 사람도 나름대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같은 동포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문제가 있으면 중국 사람편을 드는 게 대부분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식으로 일을 다 맡겨 놓았다가 소위 '당한 경험이 많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92년 봄에 한국인 두 명이 나를 찾아왔었다. 나의 먼 친척 소개를 받고 관광도 할 겸, 중국에 기계를 팔기 위해 시장 조사차 온 사람들이었다. 5박 6일 코스로 북경에서 서안(시안), 중경 등 여러 도시를 다닐 예정인데 통역 겸 안내할 사람을 부탁하길래, 당시 북경대 연구원(대학원생)인 조선족을 임시로 통역 겸 가이드로 쓰도록 소개해 주었다.
그런데 일정을 마치고 북경에 돌아오자, 두 사람의 한국인과 안내를 맡았던 조선족은 돈 계산을 끝내고는 서로 '잘 가라, 수고했다'는 인사도 없이 등을 돌리고 가는 게 아닌가. 마치 격한 싸움이나 한 사람들 같았다. 그리고는 조선족이 돌아가자마자 한국 사람들은 신랄하게 그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의 얘기는 한마디로 그 조선족은 건방지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었다. 마치 상전 모시고 다니는 듯하여 출장 가서 돌아올 때까지 내내 기분이 나빴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제쳐두고 나이 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불손할 뿐 아니라, 엄연히 돈을 주고 썼는데도 도무지 서비스라고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공항에 나가서 짐을 부칠 때도 낑낑거리며 화물 탁송 카운터까지 가는 두 사람을 보고도 그 조선족 청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게다가 50살이 넘은 어른들 앞에서 수시로 담배를 피워대질 않나, 가이드가 있는데 우리가 타국의 공항에서 촌놈처럼 이리저리 물어보며 헤매고 다녀야 하는가. 비행기 출발은 지연되고 있는데 한마디 항의는커녕 왜 그런지 원인을 알아볼 생각도 않고 설명도 제대로 해주지 않더라는 것이다.
서안이나 중경에서는 어땠을까?
아침부터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아 사람을 기다리게 한 것은 봐주고 넘어갔다. 택시를 대절해서 돌아다니는 데 약속된 시간보다 좀더 걸렸다고 하여 추가 요금을 요구하는 택시 운전수편을 드는 것은 가이드로서, 또 같은 동포로서 그럴 수 있는 것인가.
볼 일이 있어 손님과 식사할 때도, 심지어 술집에 가서조차 같이 '놀려고'하니 이건 돈주고 상전 모시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라는 거였다.
얼마 후'다시는 한국 사람의 통역이나 가이드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전화로 알려온 조선족의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통역과 가이드로 임시 고용된 것이지 그들의 노예로 고용된 것이 아니다. 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가 하면, 비행기가 연발되었다고 짜증을 내서 되겠는가. 원인을 알아보라는 둥, 아니면 언제 출발할 지 알아보고 오라고 명령조로 막 시킬 수 있는 것인가. 국가가 하는 일(즉 비행기 연발)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는 법이 어디 있는가?
서안과 중경을 가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거지냐. 다른 곳에서 식사하고 오라고 거지 동냥 주듯이 중국돈 몇 푼 던져주니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리고 잠을 잘 때도 자기들 숙소와 다른 싸구려 초대소 같은 곳에서 자고, 아침에 오라고 하니 돈 좀 있다고 사람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
중국의 제도나 법을 잘 모르면서 그것을 설명해 주면 중국 사람편을 든다고 화를 낸다. 밤에 술집을 안내하라는 것까지는 좋다. 더 나쁜 것은 술집에서 여자를 찾으니 그게 말이 될 소리인가. 여기는 중화 인민 공화국이다. 법에 의해 금지된 것을 돈주고 부린 가이드라고 그런 것까지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상담이 잘 안된다고 돈으로 해결하려 하고, 그래서 뒷거래를 위해 따로 만날 것을 주선하라는 요청까지 하니, 한국 사람들은 다 이러한가?
대충 이런 불만들이었다. 나는 그 불만들을 듣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 왔다. 누가 틀렸고 누가 맞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자본주의하에서 훈련받은 멘탈리티(mentality)와 사회주의 멘탈리티의 차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루 30달러씩 일당을 주는 사람을 80여 달러 하는 호텔에서 같이 재울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또 돈 겨우 몇 푼 받아 허름한 초대소에 가서 자야 하는 입장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거래를 이루고 싶어하는 심정이나, 객지에 나와 여자가 따라 주는 술을 먹고 싶어하는 심정도 어찌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엄격한 법률을 어길 수 없다는 중국 인민의 입장도 당연한 것이다. 조선족도 엄연히 중국 시민이기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우리측보다 중국측에 따라야 한다는 것도 이해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이나 조선족 중국인 모두에게 충고하고 싶은 이야기는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기대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조선족은 꽌시에 약하다.
조선족은 많게는 옛 만주국인 동북 3성(길림, 흑룡강, 요령)을 위시하여 산동성, 하북성뿐 아니라 내몽고, 신장 등 내륙 변방까지 널리흩어져 살고 있다. 그런데 92년 수교가 수립된 후로 조선족의 활동은 눈부시게 활발해졌다. 한국의 중국 진출에 따라 이들의 역할도 확대되면서 북경과 천진 등에는 그 수가 꽤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중국은 그들을 동화시키기 위해 한족을 소수 민족과 6 : 4 비율로 소수 민족 지역에 이주시켜 왔다. 그런데 최근 조선족 자치구인 연변의 경우에 이 비율마저 무너질 정도로 젊은 사람이 도시로 빠져나오고 있다 한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어 불법으로 대도시에서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늘어나는 한국 기업들로 이들에 대한 수요가 계속 증대되고 있어, 기회를 찾아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조선족에게는 몇 가지의 특징이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우리말을 북한말을 닮았다. 조선족 국민학교에서 북한에서 공급한 교과서로 우리말과 글을 배웠기 때문이다.
대학을 나온 사람이 할 수 있는 외국어는 조선말 외에 일본말을 조금씩 할 수 있는 정도다. 영어를 하는 조선족은 거의 보지 못했다. 옛날부터 일본어만 배우다보니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을 가르칠 영어선생이 없게 된 것이다.
여하튼 북경이나 상해 등지에서 대학교를 졸업한 조선족은 아주 우수한 사람들이라 보아도 틀리지 않다. 그들이 사는 도시에도 대도시로 나와 공부를 하려면 고중(고등학교) 전체에서 적어도 1등내지 2등은 해야 한다. 그리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해야만 대도시로 직장을 배당 받을 수 있고 호구(그 도시에 살 수 있는 권리로서 우리의 주민등록증과 비슷하다)도 얻을 수 있다.
조선족은 대부분이 가난하다. 일제 시대에 만주나, 상해, 중경, 등으로 온 독립 운동가의 자손들을 비롯해 대부분은 국내에서 살기 힘들어 중국으로 흘러들어 온 사람들이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지난날 중국인들도 어려웠던 시기에 하물며 소수 민족인 조선족이 돈을 번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우리가 중국으로 진출하는 데 조선족은 매우 긴요한 존재다. 이런 우리의 필요는 또한 잘살고 싶어하는 그들의 오랜 숙원과 맞아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꽌시(관계)를 이용해야 할 경우에 조선족은 대부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한족과 조선족이 인간적인 꽌시를 맺고 있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중국 인구에서 한족이 92%나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족을 통해 꽌시를 찾겠다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은 짓인지도 모른다.
한국인과 조선족은 오랜 기간 다른 환경에서 떨어져 살아오면서 다른 문화와 사고를 갖고 있기에 금방 융화되기는 어렵다. 한국인과 중국인, 조선족이 섞여서 생활하는 한국 회사들을 보면 오히려 한족과 한국인은 잘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잘 지낼 것 같은 한국인과 조선족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오래 견디지 못하는 조선족이 많다.
조선족은 중국인과 상담할 때 그들의 심리를 읽고 그에 대한 대응 방안을 찾기 위해 통역하는 데 써야 한다. 물론 그들을 친절하고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 그러나 중국인이라는 인식으로 그들을 대하는게 합리적이며, 비즈니스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가짜와 위조가 판치고 있다
중국 사람들 손재주가 좋다고 해야 할지, 모방을 잘한다고 해야 할지, 또 가짜를 파는 데 죄의식이 없다고나 해야 할지, 여하튼 중국에서는 항상 가짜에 조심해야 한다.
중국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 기본적으로 자기 나라에 나쁜 인상을 줄 만한 소식들은 웬만해서는 잘 보도하지 않는다.
뉴스가 시작하면 제일 먼저 중국 지도자들의 동정부터 다룬다. 다음에는 지방 성의 어느 회사가 외국의 유명 회사와 합영한 이야기, 어느 생산 기관의 경제 지표와 목표 달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외국의 동정을 다룬다. 어떻게 보면 오래 전 우리 국장에서 방영하던 대한뉴스 같은 느낌을 들게 하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가짜를 만들다 잡힌 사건, 가짜 생산 시설, 가짜 상품 이야기 등이 심심찮게 나온다. 될 수 있으면 좋은 얘기만을 다루려는 뉴스에서 심심찮게 '가짜' 사건을 다룰 정도면, 얼마나 가짜가 판을 치는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작년(94년) 여름 휴가 때 중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황산(황샨)에 가보았다. 깊은 산 한가운데에 있는 상점에 우리나라산 '커피껌' 이 있어, 하도 반갑기도 하여 그 껌을 샀는데, 입에 넣는 순간 대번에 가짜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껌이 뭉쳐지지도 않고 순식간에 흩어질 뿐 아니라 입 안에 싸구려 설탕맛이 그대로 확 퍼졌다. 껍질을 다시 자세히 보니 색깔 자체가 조잡하여 가짜란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5콰이짜리 껌도 가짜가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서안의 진시황능을 가보면 능터라는 언덕이 있다. 언덕 주위에는 마치 남의 눈을 피해서 속삭이듯이 손짓을 하며 물건을 파는 장사꾼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들은 진시황능에서 나온 골동품이라면서 파란색의 동전을 파는데, 그야말로 완전 100% 가짜라고 한다. 동전에 똥을 묻혀 몇 개월 동안 땅에 묻어두면 꼭 오래된 색과 질감을 느낄 수 있게 변한다고 한다.
꽌시를 통하면 가짜도 진짜다.
무역 거래를 할 때 중국인들은 정부 기관의 검사증으로 상품의 중량과 품질을 증명하려 한다. 그 외의 검사 방법에 대해서는 보통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정부 기관에서 구매하는 경우에는 달리 증명 방법이 없어 이 서류를 요청은 하지만 별로 믿지는 않는다.
실제 이 증명서에 쓰여진 것을 믿고 수천 톤 내지 수만 톤의 사료 곡물을 수입했다가, 도착지에서 다시 검사하니 엄청난 중량 부족 사고가 생긴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 정부 기관이 발급한 증명서에 따른 중량이니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만일 부족하거나 품질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운송 도중에 선박에서 발생한 문제이거나, 도착지에서 발생한 문제인만큼 자기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기네들 임의대로 제 증명을 발급 받아 공급하는 경우를 여러 차례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이런 현상은 시골이나 작은 성에 내려갈수록 더 용이하고 비일비재하다.
꽌시를 통하면 40%인 단백질도 45%로 변할 수 있으며, 14%의 수분도 필요하다면 12%로 고쳐질 수 있다. 물론 쉽게 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약간의 수고와 경비, 그리고 꽌시만 있다면 검사증은 실제물건의 내용과 관계없이 공급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발급 받을 수 있다. 구매자는 이런 점을 알아야 된다. 중국의 검사 방법이나 검사증을 참고는 하되 100% 믿어서는 안된다.
중국에서 가장 명주라는 술 '마오우타이'나 '우량이에'는 생산량보다 소비량이 훨씬 더 많다는 오묘한 통계를 가지고 있다. 얼마나 가짜가 많으면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는 방법이 공식적으로 나왔겠는가. 가짜를 만들다 잡힌 사람들을 사형시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가짜가 판친다. 중국에서 가장 좋다는 이 술을 마시고 난 다음날이면, 종일 머리가 깨지는 것 같은 두통을 느낄 때가 많다. 진짜 마오우타이나 우량이에를 마셨을 경우에는 절대 다음날 머리가 아프거나 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마오우타이나 우량이에뿐만 아니고 산동성에서 가장 이름 있다는 '공푸찌아쮜오'도 가짜가 있다고 한다. 중국의 막소주 같은 것을 마시고 눈이 먼 사람까지 있다고 한다. 메틸 알코올을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은 유명 음식점에 가서 마셔야지 길거리 같은 데서 절대 고급술을 사거나 마시지 말아야 한다.
한때 한국 사람이 오기만 오면 싹쓸이해 가서 동인당의 약이 동이날 지경이었다는 편자환은, 언젠가 시중에서 1,000여 개를 수거하여 조사해 보니 대부분이 함량 미달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 세계적인 브랜드의 각종 의류들, 웅담이라고 속여 파는 뱀쓸개, 한 갑에 2,000여 콰이나 하는 약까지 중국에서는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 기호품 등 거의 모든 상품에서 진짜와 가짜가 친밀하게 지내고 있다고 봐도 된다.
중국 사람들 손재주가 좋다고 해야 할지, 모방을 잘한다고 해야 할지, 또 가짜를 파는 데 죄의식이 없다고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중국에는 항상 가짜가 판치고 있다.
여행객들이 중국에 와서 가짜를 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솔직히 중국에 사는 우리들도 100% 확실한 방법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약과 술 등은 될 수 있는 한 큰 도시라 하더라도 국가가 지정한 우의(요우이) 상점 등 외국인 쇼핑 백화점에서 사는 게 좋다. 좀 싸다고 해서 싸구려 상점이나 길거리에서 사는 것은 가짜를 살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일 뿐이다.
중국은 담뱃값조차 동네마다 다르다. 약값도 동네나 상점마다 틀리며, 같은 약이지만 사고 파는 장소에 따라 값과 품질이 차이가 난다.
'꽌시가 좋으니 당신은 아무 염려마라'
황당했던 경험을 한 가지 더 소개해 보자.
어느 날 대련의 한 회사로부터 물건과 함께 지금 '수출 허가증'을 보유하고 있으니 가격 상담을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상담할 상품의 '수출 허가증'은 당시 '양유진출구 총공사'만 발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여러 가지 꽌시와 방법은 동원하면 그야말로 되는 일도 안되는 일도 없는 나라(정상적으로는 되는 일도 없고 비정상적으로 안되는 일도 없다)라는 말을 믿고 '양유진출구 총공사'는 아니지만 내려가서 상담을 했다.
가격도 마음에 들고 다른 조건도 좋아 수출권 확인을 요청했다. 그러자 호텔 커피숍 안에서 저만큼 떨어진 자리로 가더니 그곳에 앉아있는 어떤 사람에게서 수출 허가증을 받아오는 게 아닌가. 그렇게 가지고 온 허가증은 그때까지 협상하던 2만 톤짜리 물량이 아닌 1만 5천 톤짜리 수출권이었다. "이것은 1만 5천 톤인데 그러면 나머지 5천 톤은 어떻게 수출 허가를 받습니까?"라고 하니, 다시 그 사람에게 가서 2만 톤짜리 수출권으로 바꿔왔다. 그러면서 "실수로 1만 5천 톤짜리를 가져왔다"고 하는 게 아닌가.
수출권을 준 사람쪽을 보니 그는 손에 족히 20여 장은 돼 보이는 뭉치를 들고 있었다. 2만 톤이 아니라 10만 톤 정도의 구매도 가능한가라고 물으니 즉시 '커이'(좋다)란다. 수출권을 보자고 하니 1만 5천 톤에서 2만 톤짜리 수출권을 모아 10만 톤을 만들어 가지고 왔다. 전부 가짜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가짜가 아니냐는 의문을 슬그머니 비치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알아서 해결할 수 있다. 세관과 꽌시도 좋고, 대외 무역부나 상품 검사국, 항만청과도 꽌시가 좋으니 당신은 아무런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것으로 상담은 끝나고 그 날로 비행기를 앞당겨 타고 돌아왔는데,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 그 가짜 허가증으로 수출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뻔히 가짜인 줄 알고 거래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세상에서 대가 제일 센 여자들
예쁘장한 20-30대의 여자가 매니큐어를 바른 손가락으로 살아 있는 전갈을 집어먹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가 보기에는 좀 끔직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어떻게........'라는 말을 했다가는 거래가 깨지기 십상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중국에서 쓰는 현채인(현지 채용인) 가운데 똑똑한 사람은 공교롭게도 다 여자들이다. 이제는 우리 나라에서도 상식이 되다시피 했지만 중국의 여자들은 대가 세기로 유명하다.
중국은 사회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아 남녀 평등 사상이 철저히 지배하고 있다. 여성은 하늘의 절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중국 혁명기 여성들의 활약 또한 대단했다고 한다. 따라서 아프거나 다른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은 집에 있거나, 즉 직장 없이 가사만 돌보는 여자는 없다고 봐도 된다. 남녀 평등에다 100% 고용이 원칙인 사회주의의 오랜 영향도 있겠고, 또 두 사람이 벌어야 먹고살 수 있었던 경제적 배경도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부부 가운데 누구든 일찍 귀가하는 사람이 탁아소나 유치원, 학교에 가서 애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밥짓고 설것이하고 빨래도 한다. 일이 있거나 손님 접대가 있는데, 여자라고 해서 빨리 집에 가서 애를 봐야 한다든지, 남편 밥상을 차려야 한다든지 하는 일은 없다.
여자가 어떻게.....
여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배갈(빠이쮜오)도 한 두 잔씩은 한다. 돼지고기, 개고기, 뱀고기도 잘먹는다. 하남 지방에 갔을 때는 살아 있는 전갈을 독이 있는 꼬리 부분은 가위로 자르고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맛있게 먹는 여자도 보았다. 예쁘장하게 생긴 20-30대의 여자가 매니큐어를 바른 손가락으로 살아 있는 전갈을 집어먹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가 보기에는 좀 끔직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어떻게.....'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거래가 깨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내가 알고 있는 어느 나라에서보다 여자의 사회 활동이 활발하며, 모든 면에서 남자와 조금의 차이도 두지 않는다.
요즘 중국의 연속극을 보면 이혼을 주제로 하거나 이혼 후 자녀 문제, 이혼 후 재혼해서 각각 살다가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나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소재로 한 연속극이 아주 많다. 연속극은 그 사회의 풍속도를 나타내는 하나의 거울이기도 하기 때문에 중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지금 중국에선 젊은 사람들의 이혼이 사회 문제가 될 만큼 심각하다. 이혼의 많은 원인 중의 하나가 배우자의 부정 때문이라고 한다. 여자의 단 한번의 부정을 용서할 수 없다는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자들의 단 한번의 부정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중국 여자들의 일반 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여자는 중간 관리자
중국 회사를 방문하여 사무실 안에 들어가 보면, 우리의 과장이나 부장급 자리에 여자가 앉아서 앞에 남자들을 거느리고 업무를 보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리고 남자들이 여자 경리(징리:우리의 부장 혹은 큰 회사인 경우에는 과장급)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일하는 광경은 그리 어색한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영도자(링다오 : 중국에서는 정치적인 지도자를 보통 이렇게 부른다)급에는 여자가 많지 않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공사, 즉 회사 조직에도 총경리나 부총경리(후쫑징리 : 부사장급) 자리에는 여자가 많지 않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여자가 남자와 똑같은 조건에서 사회 활동을 하되, 여성의 자리는 중간 관리자 혹은 행정 분야로 한정시켜서 역할을 분담해 놓은 것은 아닐까? 여가가 남자와 동등하다 해도 그 선천적인 신체 구조상 적당한 자리 및 역할이 있음을 중국 정부는 인위적으로 인정하고 결정해 놓은 것이 아닐까? 섬세하지만 물리적으로 강하지는 못하고, 중간 관리에는 능하지만 정치와 외교를 하는 데는 적합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는지?
길거리를 가면서 유심히 살펴본 사람은 중국에는 트럭 운전사나 버스 운전사에 여자가 상당히 많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는지, 혹은 인위적으로 조정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하겠으나 참 조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중하게 움직이는 큰 트럭과 많은 사람을 운반하고 자주 멈춰야 되는 버스는, 투박한 남자보다 차라리 섬세한 여자가 훨씬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국은 요소요소에 여자가 있으며 이 여자들의 사회 활동상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파트너로서 대우하라
여자가 많은 회사나 또는 여자가 중간 관리자나 책임자로 있는 회사와 상담할 때는, 남자가 책임자로 있을 경우와는 그 작전을 달리 취해야 한다. 대체로 자기 의견을 잘 굽히지 않고 더 보수적이고 더 교과서적인 반면, 일단 계약이 완료되고 나면 꼼꼼히 그 계약을 지키려 한다는 것이 내 경험으로 본 여자 관리자나 책임자들이다.
단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임기 웅변이라든지, 상황에 대처하여 유연성을 발휘하는 데는 남자들보다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논리상이나 계산상으로 틀린다 해도 술 한잔 마시고 다음을 위해 양보하고 손해 보는 과감성 등은 아무래도 부족한 듯 싶었다.
중국에서 사회 활동을 하는 여자, 특히 자기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여자를 만났을 때는 여자로서보다 꼼꼼한 상대로서 대해야 할 것이다.
재일 재미있는 오락은 떠드는 일
먹고 마시며 떠드는 일, 이것은 중국 사람에게는 업무상 사람을 사귀고 꽌시를 맺는데 대단히 중요하고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중국에 사는 주재원들의 가장 큰 애로 사항 중 하나는 한국에서처럼 레크리에이션이나 여가를 즐길 마땅한 게 별로 없다는 것이다.
중국이 개방은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저녁 시간을 보낼 레크리에이션은 우리 기준으로 볼 때 대단히 부족한 상태며, 또 우리와 잘 맞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저녁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즐기고 있을까? 그들의 레크리에이션이 어떤 것임을 아는 것은 장사를 위해서, 또 그들과 함께 어울리기 위해선 대단히 중요하다.
그들의 레크리에이션을 알기 위해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근현대사 과정에서 이루어진 국민 의식이나 정서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인들도 지금의 북한처럼 정치 학습이 있어 각 단위별로 상부에 보고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저녁 시간 대부분을 회의와 토론으로 보냈다고 한다.
중국인 누구를 만나든 말 못하는 사람은 없다. 오래전에 우리는 말 잘하고 말 많은 사람을 보면 농담으로 '빨갱이' 같은 놈이라고 비아냥 거리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빨갱이'가 말 잘한다는 것을 중국에 와서 보면 진짜 실감할 수 있다.
중국 현대사를 살펴보면 집회나 토론, 자아 비판, 타인에 대한 비판 등 이들은 오래전부터 단순히 '살기' 위해서라도 말 잘하는 연습을 해야 했다. 또 항상 구호나 말로써 무언가를 이루려 했던 과거가 전통이 돼버린 측면도 있을 것이다.
입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국민적 오락
그러다 보니 말을 주고받으며 보내는 시간, 즉 노가리(?) 푸는 시간이 대단히 많다. 이것이 중국인들의 중요한 레크리에이션이다.
어딜 가나 자기 입에 지퍼를 달고 있는 중국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두세 사람만 모이면 주위가 어떻든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지치지도 않고 떠든다. 이렇게 '떠드는' 일은 돈 드는 일도 아니고 특별한 장소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입'만 있으면 된다. 무슨 중요한 결론이 나와야 되는 것도 아니다. '입'으로 하는 오락은 그래서 지극히 중국다운, 중국인다운 국민적인 레크리에이션이 돼버렸다.
중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그들과 혹시 저녁 식사라도 하게 되면 정신없이 떠들고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태도에 상당히 곤혹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장사 이야기부터 상에 올라오는 음식 이야기, 자기가 먹어본 각 지방의 별미 이야기 등등 그야말로 끝없이 지껄인다. 그렇게 떠들면서 자기만이 아니라 상대방도 똑같이 떠들고 이야기해야 좋아한다.
우리나라의 경상도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화면 마치 싸우는 것 같다고 하는데, 중국 사람들에 비하면 상대도 안된다. 중국 사람들은 지껄이는 게 절정에 이르면 진짜로 티격태격 싸우는 것 같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중국 정부가 권장하는 춤추기
여름에 어둑어둑 해질 무렵 중국의 거리나 새벽에 공원 같은 데를 지나노라면 구식 축음기를 틀어 놓고 나이에 관계없이 많은 남녀가 서로 붙들고 춤추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삼사십대 아줌마 아저씨로부터, 오륙십대 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춘다. 어슴푸레한 저녁 시간만이 아니라 이른 아침 6-7시경부터 길거리에서 아침 운동 대신 남녀가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광경도 볼 수 있다. 이렇게 함께 춤을 추는 사람들은 대개 한동네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처음엔 대단히 신기해 보였다. 뭔가 딱딱할 것 같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인민 남녀들이 길거리에서 서로 붙들고 돌아가는 것을 보니 신기하다 못해 경이스럽기까지 했다.
중국 텔레비전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프로 중 하나가 '춤 대회'다. 프로급 춤 실력 보유자가 나와 포크 댄스부터 정열적인 플라멩코나 삼바까지 춘다. 춤을 추는 도중에 해설자는 해설까지 곁들이고 끝나면 순위를 매겨 상도 준다. 거리에는 '무도장'이라고 쓰여 있는, 춤을 가르치는 곳도 쉽게 볼 수 있다.
춤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관습이면서 또한 중국인들에게 전국민적인 오락이요, 운동이다. 이처럼 춤 문화가 발달한 것은 중국 정부가 인민들에게 춤을 적극 장려하고 지도한 요인도 있다. 춤은 돈을 들여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몸과 몸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건전한 레크리에이션으로 만들어 인민 대중이 즐기게 하려는 것이 중국 정부의 의도인 것 같다.
우리 신문에 보면 중산복 입은 중국 인민이 자전거 타고 일하러 가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중국인의 모습은 그것만 있는 게 아니다. 중국의 무도장에 가보라. 화려한 옷차림으로 서로 붙들고 돌아 가면서 춤을 추는 아줌마 아저씨들을 보라. 붉은 조명이 켜졌다 꺼졌다 하는 모습이 우리의 청계천이나 영동에 많이 있는 댄스홀을 연상케 하는 이런 곳에서는, 어디에도 사회주의의 딱딱한 분위기를 찾아 볼 수 없다.
예외적인 것은 이런 무도장에는 10대나 20대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은 호텔의 디스코장이나 가라오케에서 청바지 차림으로 디스코 추기를 더 좋아하며, 사교춤보다는 블루스를 더 좋아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먹고 마시는 일이 레크리에이션이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본능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 사람에게 먹고 마시는 일은 가히 일종의 취미나 레크레이션이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성싶다.
물론 중국은 아직도 식량 문제가 100% 다 해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지방에 가면 먹고살기가 쉽지 않은 시골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도시에서 그들의 소비 생활을 보면 먹고 마시는 것은 이미 생존의 차원을 넘어 또 다른 레크리에이션이라 할 만하다.
중국식이든 외국식이든 좀 소문난 음식점에는 매일밤 중국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상에 더 이상 접시를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음식을 시키고 배갈을 마신다. 이렇듯 중국 사람들에게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시는 일은 한달에 한두 번씩은 가져야 직성이 풀릴 만큼 상당히 즐거운 행사다.
월 300-400콰이를 받는 저소득층의 사람들이 가는 음식점들도 마찬가지다. 비록 이빨이 빠진 접시 위에 놓인 싼 기름으로 튀긴 음식들을 먹어도 그들은 마냥 즐겁다. 젓가락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했는지, 어떤 것은 노란색의 젓가락이 거무튀튀한 노란색으로 변한 것도 있다. 술은 5-6콰이(우리돈으로 500-600원)밖에 하지 않는 '알꾸어토우'라는 50도가 넘는 술을 먹지만, 역시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먹고 마시고 떠들면서 즐기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일, 이것은 중국에서는 업무상 사람을 사귀고 꽌시(관계)를 맺는 데 대단히 중요하고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어느 나라나 비슷하겠지만 젊은이들에게는 우아하고 서구풍 장식을 한 음식점은 선망의 대상이 되는 장소다. 우리끼리 농담으로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중국 여자를 꼬시려면 우선 우아한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하고 그 다음엔 가라오케 가서 춤 한번 추면 그것으로 끝이다. 더 이상 수고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현세의 부귀영화를 제일로 치는 중국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고 떠들며 춤추는 '일'은, 신체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유지하는 일을 넘어서 하나의 레크리에이션으로 발전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3. 중국 장사 결코 만만치 않다
계획경제를 잘 활용하라
시야를 넓혀라, 12억 인구는 실제 시장이다
중국 장사 쉽게 보았다간 큰코다친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언제나 윗사람이 있다
허풍도 능력이다, PR을 적극적으로 하라
중화민족의 자존심을 이용하라
'커이'(좋다)라고 말할 때 조심하라
같이 만만디로 대하라
반드시 현장 확인을 해라
가르치면서 장사해라
서비스도 상품이란 것을 모른다
한국에 초청하여 상담하면 의외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자기 할 일을 다하게 하라, 뇌물은 그 다음이다
속 얘기는 하지 마라, 약점 잡히면 크게 당한다
잊지 말 것, 계약서에는 모든 것을 명기하라
다 알고 있다, 다만 때를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끝까지 안심하지 마라
중국인과 분쟁이 생기면 조기에 수습하라
미련은 미련한 것이다
계획경제를 잘 활용하라
중국 같은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이윤을 추구보다 우선되는 것이 있다. 인민의 필요가 계산되고 예측되고 그것이 계획되어 경제 활동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공식적인 측면에서는 그렇다는 얘기다.
한국 사람이 중국에 가서 사업을 하거나 유학을 하면서 끝까지 벗어버리지 못하는 고정 관념이 있다. 그것은 중국이 아직 사회주의와 계획경제를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때로는 완전히 망각하고 자기식의 고정 관념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에 오는 사람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의 장사와 공부에까지 철저히 적용시키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수출도 허가를 받는다니
몇 해 전의 일이다. 수입할 물건이 있어 북경에 있는 여러 회사로부터 오퍼를 받았다. 그 중에서 가장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 회사를 골라 계약을 체결하기로 하였다. 물론 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되는 가격과 품질, 납기에 관해서는 완벽하게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막상 계약을 맺자고 하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며칠만, 며칠만 하면서 자꾸 미루는 것이었다. 본사로부터는 자꾸 독촉이 오고, 납기일 은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연락은 없고,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따르릉 전화가 왔다.
"미안하지만 이번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아니, 이제 와서 무슨 말이오. 도대체 이유나 좀 압시다."
"사실 물건은 준비가 다 되었는데, 수출권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뭐라고요? 수출권이요?"
여태껏 무역업에 종사해 왔지만 수입하는 데 필요한 수입권이라는 얘기를 들어봤어도 수출권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던 것이다. '그래, 여기는 사회주의고 계획경제인 것이다.' 그때서야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중국에서는 미리 그 해의 생산을 계획하고, 그 생산량 가운데 인민이 먼저 소비하고 남는 것을 수출하며, 수출도 가격이 좋다고 마구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계획에 따라 수출한다. 따라서 수출량을 통제하는 수출권이 필요하게 된다.
모든 상품은 1류 상품, 2류 상품, 3류 상품으로 분류된다. 1류 상품의 수출은 중앙 정부의 엄격한 통제 사항이고 계약권자까지 지정되어 있다(석탄, 석유, 쌀, 옥수수 등). 2류 상품도 통제 상품이지만 정부의 위임을 받은 여러 회사가 '수출권'을 소유하고 있다. 3류 상품만이 수출 허가를 가진 회사가 재량껏 수출할 수 있는 것들이다.
애초에 이런 중국식 계획경제를 염두에 두고 접촉할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수입할 상품이 몇 등급 상품인지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우리 식으로만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고정 관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인이 되도록 살아온 사람은 떨쳐버리기 어려운 본능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동전을 들고 구멍가게를 드나들며 자본주의 속성에 대해서 배운다. 그리하여 물건과 서비스의 유통에는 단지 이윤 추구라는 인간의 욕구가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득해 왔다.
이윤이 아니라 계획이 우선
그러나 계획경제라면 얘기가 틀려진다. 그런 사회에선 이윤의 추구보다 우선되는 것이 있다. 인민의 필요가 계산되고 예측되고 그것이 계획되어 경제 활동의 전제가 된다. 실제로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공식적인 측면에서는 그렇다는 얘기다.
어떤 국가 기관에다 무엇을 사겠다고 오퍼를 하는 경우를 보자.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꿈쩍하지 않는 때가 있다. 뒤로 알아보면 그 기관이 그 해의 목표를 다 달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표를 다 달성했는데 더 팔 필요가 있냐는 것이 그들의 사고 방식이다. 그래서 때로는 받아들이지 못할 가격을 제시하던가, 아니면 내년에 사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를 하기도 한다.
이렇듯 중국에서는 큰 회사나 국가 기관의 기업은 아직까지 모든게 국가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국가 계획 위원회란 것이 있어 국가의 모든 정책들을 계획적으로 주관한다. 따라서 국가 기업의 최우선 과제는 계획 목표의 달성이며, 이를 위해 때로는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를 알면 대단히 유리한 때도 있다. 중국의 각 공사(꽁스)나 기관은 매년 수출입, 매출과 이익 등에 대해 중앙으로부터 계획을 하달 받는다. 따라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기업은 안달을 하게 마련이다. 우리가 수입할 경우 평소에는 받아들이지도 않던 매우 싼 가격으로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때이다.
중국이 이처럼 아직도 계획경제 사회임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이를 잘 활용하면 대단히 효과적이다.
물류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최근 한국의 기업들이 한국과 가까운 산동(산뚱), 요령(야오닝), 발해, 상해 등의 연안을 벗어나 내륙 깊숙이 진출하는 경우가 늘어가고 있다. 이렇게 멀리까지 진출하기 위해선 운송 문제가 필수적인 사항이 된다.
수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해바라기가 제일 많이 나는 곳은 '신강'(신찌앙) 자치구인데, 이곳은 중국의 서북단 끝이다. 해바라기 씨로 기름을 짜고 남는 것은 사료로 쓰는데, 우리 나라에서도 해마다 많은 양을 수입한다. 메밀은 내몽고에서 많이 나는데, 내몽고산 메밀은 우리의 것과 모양과 맛이 비슷하여 국내 수요가 많다. 또 사천성에서 나는 과일 등도 운송 문제만 해결되면 경제력이 좋은 상품들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항상 항구까지 싣고 나오는 운송이 문제가 된다. 또 운송에는 국가의 계획이 개입되어 있어 운송 배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내륙 운송에선 철도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트럭과 같은 차량 운송은 아직까지 단거리 위주이고, 있어도 비용이 꽤 비싸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철도가 중국에서 가장 큰 운송 수단이다.
철도에 대한 국가의 운행 계획을 파악하지 못하면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잘못하면 원하는 적절한 시기에 물건을 인수받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특히 과일 같은 상품은 시기를 놓치면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 물론 많은 경우, 운송 문제는 공급자에 의해 해결되기 때문에 구매자는 중국 내부의 운송 계획에 관여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그러나 물동량이 클 경우는 꼭 신경을 써야 한다. 문제가 벌어진 이후에 이의를 제기해도 국가 계획 위원회의 계획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변명을 듣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그 계획을 파악해야 할뿐만 아니라 계획 단계에서부터 개입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경우라면 철도가 안되면 트럭, 그것도 안되면 정 급할 경우에는 비행기를 동원해서라도 물건을 실어 나를 수가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패를 하나만 쥐고 포커 게임에 임하는 경우와 같으니 늘 국가의 운송 계획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이외에 가격 통제에 국가가 개입하는 경우도 많다. 가격 통제는 수시로 변하는데, 94년 초에는 느슨했다가 최근 다시 강해지고 있다.
계획경제를 잘 활용하라
계획 경제적 요소는 지방의 작은 성으로 갈수록 심해진다. 이런 작은 성의 겨우, 경제 기관은 관과 항상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장사를 할 상대방이 바로 정부 관리인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에 이들은 우리같이 자본주의에서 장사만 해 먹고 살아온 장돌뱅이보다 장사에 대한 마인드가 부족하고 서툴다.
이 관리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보통 그 해 총 정부 지표가 어떻고, 성의 지표가 어떻고, 자기 기관의 지표가 어떠하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완고하게 설명한다. 자본주의에서 커 온 장사꾼처럼 유연하게 흥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직 시장의 움직임에 제대로 적응하고 있지 못하는 반면, 지방 정부와 당국의 계획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무언가 해보려는 의욕만은 대단하다. 이런 점을 역으로 이용하면 대단히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대부분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대한 경험이 없으며,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잣대로만 생각하고 우리 식으로만 상담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계획경제 체제를 속속들이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본인의 장사와 관계된 부분에 대해선 항상 이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필수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가격 통제, 운송 문제, 그 해 해당 기관의 목표, 외환 수지 등이다. 좀더 좋은 가격에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물건을 사고 팔기 위해서는 항상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시야를 넓혀라, 12억 인구는 실제 시장이다.
벌써 많은 장사꾼이나 기업의 눈에 중국인들은 매력적인 고객이다. 그것은 먼 미래도 아닌 가까운 장래의 일이다. 그래서 다들 중국인들의 생활이 향상되었을 때의 수요를 겨냥해 아이디어를 집중 연구하고 투자를 하고 있다.
이런 말이 있다. 중국인들이 요즘 한국인들이나 일본인들이 하듯 해외 여행을 하게 되면 세계는 중국인들로 넘쳐나게 될 것이다. 또 중국 인구의 10%만 동남아로 여행하게 되더라도 동남아의 호텔은 모두 중국인으로 꽉 차서 다른 나라 사람이 잘 방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중국인에게 사탕 한 알씩만 먹여도 12억 개가 필요하다. 그리고 중국인들에게 우리가 잘 먹는 120g짜리 봉지 라면 하나씩만 먹이려 해도 이 라면을 운반하기 위한 컨테이너만 약 36,000대가 필요할 정도다. 보통 중국에 오는 3,000-4,000톤급 컨테이너 선박 200척 정도가 한꺼번에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항공모함 같은 배로 날라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황당한 말장난만은 아니다. 중국의 거대한 인구와 엄청난 자원은 이제 더 이상 잠자고 있는 시장이 아니다. 12억의 소비자라는 어마어마한 시장은 전세계 장사꾼들이 주목하는 실제적인 시장으로 빠르게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생산 기지에서 현실적인 시장으로
불과 2-3년 전만 해도 중국은 낮은 임금으로 주목받았다. 이 때는 엄청난 인구가 지닌 노동력과 넓은 땅을 배경으로 한 생산 기지로서의 의미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각으로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중국의 현상황에 대처할 수 없다.
중국 시장의 위력을 실감케 하는 예를 찾아보자. 93년과 94년에 한국과 중국의 거래 관계에서 누구든지 참고해야 할 사건들이 벌어졌다. 소위 이야기하는 '터졌다', 즉 중국 특수가 생긴 것이다. 이 특수는 한국의 산업 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자동차가 그랬고, 철강이 그랬다. 한국의 자동차업계는 몇 달씩 쌓아 놓았던 재고가 순식간에 바닥이 났고, 차종에 관계없이 생산되기가 무섭게 중국으로 팔려 나갔다. 중국을 여행하는 사람은 중국의 어느 지방, 어느 성을 막론하고 한국산 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그 당시 수출되었던 차들이다.
철강은 어떠했는가? 각 회사의 철강 담당자는 매일 철강 생산 업체인 포항제철 등에 물건을 보내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90년대 이전에 누리던 소위 3저 시대가 끝나고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불황에 허덕이던 한국 경제가, 중국 시장이 터지면서 그 덕을 보아 호황을 지속해 나갔다고 보는 견해도 상당수 있다.
12억 2발은?
한번은 중경(총칭)에 가본 적이 있다. 중경의 중심지 시장에 들렀는데, 사람들끼리 서로 어깨나 몸을 부대끼면서 겨우 오갈 수 있었다. 1억 명에 불과한(?) 사천성 인구의 위력을 생생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디 사천성뿐이랴. 상해를 가도 그렇고, 북경의 전문(치엔먼) 시장에 가보아도 언제나 사람들의 물결 속을 떠다녀야 할 지경이다.
벌써 많은 장사꾼들이나 기업의 눈에 그들은 매력적인 고객이다. 그것도 먼 미래도 아닌 가까운 장래의 일이다. 그래서 다들 중국인들의 생활이 향상되었을 때 그 수요를 겨냥한 아이디어를 집중 연구하고 투자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의 국민차 같은 차를 공급하려는 연구도 진행중이다. 또 고급스러운 연필 하나씩만 우리 것을 쓰도록 해보면 어떨까, 지우개는 어떤가, 종이는, 12억 인구의 두 발에 신발이나 구두를 신기면, 이것을 생산할 공장은 어는 정도 있어야 할까? 등등.
좋은 제품, 고급 상품이라는 소문만 나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찾아가서 구해야 직성이 풀리는 게 또 중국인들이다. 이런 중국인들의 소비 열기가 그 동안의 금기를 뚫고 표출되는 이 시점을 잘 활용하면, 상품 판매뿐 아닌 다른 여러 가지 장사도 누구나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여행, 관광업, 운수업도 매우 가능성이 있는 시장이다. 중국에서는 어느 지방을 막론하고 비행기 예약을 1주일 전에 미리 하지 않으면 여행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북경역에 가보면 표를 구하기 위해 서너 시간씩 줄을 길게 늘어서서 기다리는 사람, 아예 이불이나 두터운 외투 등을 몸에 칭칭 감고 표가 나올 때까지 며칠씩 자며 기다리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기차 말고는 우리처럼 고속버스나 시외버스가 잘 발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차 외에, 운수업을 하려는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중이다.
시야를 크게 가지자
무엇보다 시야를 크고 넓게 가질 필요가 있다. 내가 하는 일 중에는 러시아에서 생선을 사다 중국에 파는 일도 있는데, 일단 시장성만 있다면 그 물량은 몇 천 톤이 기본이고, 많을 경우는 몇 만 톤까지도 한번에 가능할 수 있다. 몇 천 톤이나 몇 만 톤이 기본 단위가 될 때와 몇 백 톤이 기본이 될 때는 모든 계산과 방법이 틀려지게 된다. 운임이 틀리고, 하역비 계산 단위가 틀려진다. 당연히 이익의 산출 방법도 달라지게 된다.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 보자. 중국 인구 가운데 소비 계층을 최소한 5-10%만 잡아도 6천만 내지 1억 2천만 명이 된다. 또 한 성을 대상으로 삼아도 인구가 우리 나라 전체 인구보다 많은 경우가 역시 상당수다. 우리가 익숙해 있는 4천만을 기본으로 한 경제, 무역, 소비 형태의 사고 방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중국이 현재 우리 정도의 소비 수준이 될 날이 멀었다고 만 볼 수는 없다.
아무튼 중국은 이미 잠재 시장이 아니며, 실제 시장임을 알고 적극적인 자세로 접근할 것을 권하고 싶다.
중국 장사 쉽게 보았다간 큰코다친다
누구나 중국 장사에 대해 많은 기대를 걸고 있고, 그걸 아이디어화하려 한다. 그러나 조금더 중국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그 아이디어를 실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니 충고하건대 쉽게 봐서는 절대 안된다.
중국에서 장사를 해보고 싶은데 어떤 것이 좋을까?
중국에서 좀 살다 보면 '아하, 이런 것을 하면 돈을 벌겠구나' 하는 아이디어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조금만 장사를 해본 사람이면 중국의 거리나 아니면 도시와 시골을 서너 번 정도만 왔다갔다하며 자세히 관찰해 보면 무엇인가 번뜩 장사가 될 만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이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중국의 특성을 이해하고 우리의 발전에서 일반적인 소비 패턴을 뽑아낸다면, 12억의 소비자를 충분히 공략할 수 있을 것이다.
할 만한 장사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보자.
중국에서 유통 사업을 해보라. 할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돈을 벌 것이다. 중국에서 옷이나 옷에 딸린 액세서리 장사를 해보라. 중국에서 서양식 패스트 푸드(Fast food) 장사를 해보라. 실제로 이런 아이템은 중국에서 엄청난 각광을 받고 있지만 그러나 모두 맘먹은 것처럼 쉽게 되지는 않는다.
유통 사업을 보자.
북경에 있는 백화점만 열거해 봐도 외국인 전용 우의(요우이) 백화점, 중국인 전용 람도(란따오) 백화점, 연사(옌샤) 백화점, 새특(사이터) 백화점 등 대형 고급 백화점들이 많이 생겨났다. 중국인을 상대하는 곳이든 외국인을 상대하는 곳이든 이런 백화점들은 문을 닫을 때까지 북적거린다. 사실 요즘에 와서는 외국인을 위한 백화점이란 의미가 없다. 외국인이 쓰는 외환권(FEC)도 94년 3월부터 없어졌다. 그리고 외국인 전용 우의 상점이 있기는 하지만, 중국인이 훨씬 많아서 실제 외국인을 위한 백화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백화점들은 특히 일요일이나 공휴일 같은 때에는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들에게 백화점이란 물건을 구매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냉난방을 즐기면서 애들을 데리고 놀러 가거나 연인들이 데이트하는 그런 문화 공간이기도 하다. 이렇게 아이(eye) 쇼핑을 하거나 그냥 놀러 왔던 사람들이라도 물건을 보면 구매력이 충동되어, 그 다음주에라도 와서 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만큼 이제 중국인들의 구매력이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한 개의 1,400-1,500콰이 하는 프랑스제 가방을 비롯해, 피에르 가르뎅, 라코스테 등 세계 유명 브랜드의 고급 제품도 날개 돋친 듯이 잘 팔린다. 또한 노동자 월급이 200-300콰이 정도인데도 500-1,000콰이(약60-120달러)짜리 물건들을 쉽게 사곤 한다.
백화점만이 아니라 유통업 역시 매우 빠르게 번창하고 있다.
그래서 누구나 뛰어들기만 하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지만 아직은 사정이 그렇지를 못하다. 외국인에겐 유통 참여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백화점 내에 조그만 점포 하나라도 원칙적으로 개업할 수가 없다. 방법이 있다면 중국인 명의를 빌려서 하는 것밖엔 없지만, 중국인을 어떻게 믿고 그 명의를 빌려 투자한단 말인가?
옷장사, 액세서리 장사의 예를 보자.
중국의 도시 특히 대도시의 경우 '먹는 문제'는 일단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먹는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그 다음은 입는 문제인데, 이것도 이제는 패션을 찾는 시대가 왔다. 옛날처럼 1년 내내 그저 추위를 막으려고 푸르거나 거무튀튀한 인민복을 입는 시기는 지났다.
텔레비전에서 패션 프로는 중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프로 중 하나다. 북경이나 상해 같은 대도시는 옷에서 더 발전하여 옷의 액세서리와 벨트, 구두 등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북경, 상해, 천진(티엔진)뿐 아니다. 청도(칭다오), 대련(따리엔), 심양등의 도시에서도 서울 압구정동 멋쟁이들을 뺨칠 정도로 중국의 멋쟁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외국인에겐 너무 힘들어
그런데 역시 의류업도 외국인에게는 벽이 너무 높다.
의류를 수출할 경우에도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관세가 보통 80% 정도에서 120%에 달한다. 이런 비싼 관세를 물고 운송료, 금리 등 제반 경비와 중국 도매상의 마진을 계산해 보면 중국의 고급 제품과 도저히 경쟁이 될 수가 없다. 설혹 직접 작은 가게를 운영하여 직영한다 할지라도 임대료가 워낙 비싸 이것도 가능성이 없다.
한번은 한국에서 유행이 2-3년 지난 브랜드 제품들을 가져다 팔려고 시장 조사를 해본 적도 있지만 그 역시 쉽지가 않았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체형이 틀리다는 점은 제쳐두고라도, 우선 이런 재고의 경우 중국에서도 고급 제품으로는 팔 수가 없었다. 중국인들도 그만한 안목은 갖고 있으며, 그렇다고 중저가 제품으로 팔기엔 가격이 또 맞지를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라도 중국 사람이라면 충분히 할 수가 있다. 그들은 꽌시를 이용하려 관세 포션(Portion)을 60% 이하로 낮추기도 하고 전문 관세 브로커를 통해 세금을 적게 내는 방법을 알고 있기도 하다.
결국 여러 가게를 가지고 있거나 또는 여러 가게에 공급하는 1차 도매상과 합작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이것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외국인에겐 참 어려운 나라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서양식 패스트 푸드(Fast food) 장사를 알아보자.
북경에는 피자 하우스인 필승객(삐승키)이라는 피자집이 있는데, 어느 시간대를 막론하고 바로 피자를 먹을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문앞 입구의 대기실에서 번호표를 받고 기다리다가 자기 번호를 불러야 겨우 자리를 찾아가서 앉을 수 있다. 최근 본점보다 저 큰 지점을 냈는데 그곳 역시 마찬가지다. '마이땅라우'라고 중국식 이름을 붙인 맥도널드는 가장 번화가인 왕부정(왕후징) 입구에 본점이, 동대교(똥다치아오)에 지점이 있다. 그런데 본점이나 지점이나 할 것 없이 햄버거와 콜라를 쟁반에 든 채 먹고 있는 손님들 자리 앞에서 다 먹고 나갈 때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왕부정에 있는 맥도널드는 곧 헐리고 그 자리에 백화점이 들어선다고 한다).
싼 가격에 간단히 먹을 수 있다는 맥도널드 햄버거의 의미가 중국에서는 통하질 않는다. 햄버거를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간 5-15여 분, 음식을 탄 후에 자리 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5-10여 분, 앉아서 먹는 시간 5-10여 분, 결국 햄버거 하나를 먹기 위해 평균 30여 분이나 소요해야 할만큼 사람이 많다.
한국의 유명한 유통업체가 패스트 푸드를 하려고 시장 조사를 의뢰해 온 적도 있지만 그것 역시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첫째, 이미 다른 기업들이 진출해 있는 업종은 안된다.
둘째, 받아야 할 허가 도장이 30여 개이며 언제 허가될지 허가 기준 기간도 없다.
셋째, 엄청난 땅값(20-50년 사용료)에 비해 위험 부담이 높다.
도대체 맥도널드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가 궁금해 조사해 보았다. 알고 보니 허가를 얻는 데에만 장장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결국 그 유통업체는 다른 지방을 찾아가서 그곳의 꽌시(관계)를 이용하여 시도해 보겠노라고 하고는 북경은 포기하고 돌아갔다. 5년이란 이야기에 그만 질려 버린 것이다.
그 외에도 이런 예들은 수도 없이 많다. 수출이나 수입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 비슷하리라 본다.
누구나 중국을 조금 안다면 중국 장사에 대해 많은 기대를 갖게 되고 그걸 아이디어화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중국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그 아이디어를 실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니 충고하건대 쉽게 봐서는 절대 안된다. 길거리에 돈이 깔려 있고 돈들이 마구 돌아다니고 있다고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꽌시도 없고 중국인들의 그 끈덕진 만만디 기질도 없이 무원칙한 중국의 법이나 각종 규제,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들을 쉽게 보다가는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오죽하면 경제 동물이라는 소리를 듣는 일본인들도 중국에서 10여년 이상 총력을 기울였다가 결국 물러 나왔겠는가. 최근에 다시 들어오고는 있으나 이전에 비해 매우 조심스럽다. 그런 상황이니만큼 미국, 일본, 서구에서는 겁없이 뛰어들고 있는 한국을 주시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을 노리는 많은 비즈니스들이 있으리라. 일발 수출입 무역, 투자 등등. 쉽게 보이는 것도 많으리라. 그러나 실행하여 이루기는 대단히 어렵다는 점을 다시 이야기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나는 결코 중국인은 외국인이 자기 나라에서 쉽게 돈을 벌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 같은 느낌까지도 받은 적이 적지 않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언제나 윗사람이 있다.
공식적인 계통과 채널을 밟다간 1년에 한 건의 비즈니스도 성사시키기가 어렵다. 우선 윗사람을 공략하라, 그런 후에 담당자를 만나라. 이것이 중국 비즈니스의 순서다.
역시 중국 장사 초보 시절의 이야기다.
중국 국제 신탁투자 공사(CITIC)라는 중국에서 비교적 큰 회사의 직원과 우리 제품을 팔기 위해 상담을 한 적이 있다. 상대 직원의 직책은 평사원으로 낮았으나 업무를 추진하는 태도는 성실한 편이었다. 나는 우리 회사의 대표임에도 상대 회사는 중국에서도 내노라 하는 큰 회사이기 때문에, 아무리 상담자가 평사원이지만 상대 회사의 대표로 생각하고 임했다. 그런 입장으로 열심히 상담을 끌어 나간 결과 약 두 달만에 계약을 할 수 있을 만큼 거의 모든 합의가 마무리될 수 있었다. 특히 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가격과 납기 문제도 어느 정도 의견 일치를 보았기 때문에 상당히 성공적인 상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때까지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상대 담당 직원의 상관이라는 경리(징리 : 과.부장급)가 결론을 맺을 상담에 같이 배석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팔짱을 끼고서 지켜보다가 상담이 거의 막판에 이르게 되자, 갑자기 "지금까지 담당자와 이야기한 것은 전부 무효다" 라고 딱 잘라 말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 사람이 경험이 없고 회사 사정을 잘 몰라 실수한 것 같다. 또한 상황도 많이 바뀌어서 담당자가 잘 몰랐다." 그러고는 가격을 비롯한 모든 조건을 다시 토론하자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을 무로 돌리고 전혀 다른 각도에서 다시 상담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기가 막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옆에 앉아 있는 담당직원은 그저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공식적인 조직을 갖고 있는 회사라면 그 일을 맡고 있는 담당자와 상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담당자는 윗사람에게 사업의 타당성과 계약 성사의 필요성에 관해 보고하여 결재를 받은 다음에 일을 추진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이런 공식적인 체계성은 적어도 중국에서만은 통하지 않는다.
이런 계통과 채널을 밟다간 1년에 한 건의 비즈니스도 성사시키기가 어렵다. 우선 윗사람을 공략하라. 그런 후에 담당자를 만나라. 이것이 중국 비즈니스의 순서다.
담당자와 아무리 얘기가 잘돼도 소용없어
비즈니스를 위한 첫 상담의 대상은 최소한 경리 또는 부경리 정도는 되어야 한다. 경리나 부경리(후징리)를 모를 땐 어떻게 하나? 그때는 꽌시를 동원하여 그 이상의 선을 찾아야 한다. 아니면 담당자에게 정중히 윗사람을 소개시켜 주도록 요청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러나 일단 담당자와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면 담당자를 전혀 무시하거나 중도에 '제껴서는' 안된다. 이런 경우 담당자와 경리를 같이 만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러나 담당자만 만난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어쩌다 담당과 이야기가 잘된다 하더라도 업무 진행이 무지하게 느리다. 결재를 받아야 되는데 '경리가 출장 갔다, 경리가 집안에 일이 생겨 일찍 들어갔다, 총경리(쫑징리)가 없다, 현재 경리가 검토중이다' 등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기가 일쑤다.
시골이나 작은 규모의 회사로 갈수록 더 심하다. 큰 회사 같으면 좀 덜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최근에 생긴 큰 주식회사나 큰 도시의 체계가 잡힌 회사일 경우이다. 이런 회사들은 비교적 합리적 경영을 할만큼 다소라도 활성화된 회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된 국영 회사일 경우는 큰 회사나 작은 회사나 다 마찬가지로 그렇지가 못하다. 사장에 해당하는 총경리는 일반적으로 업무의 자세한 내역은 모른다. 그는 술자리에서 회사의 간판 노릇을 하거나 전체적인 방향을 잡아주며 주로 정부 기관 등을 상대로 로비를 한다. 그렇지만 최종 결정(특히 큰 비즈니스 경우)은 경리나 부총경리의 보고를 받아 총경리가 하게 된다.
총경리 밑에는 보통 부문별로 나누어진 3-4명의 부총경리가 있는데, 총경리가 없을 경우 대신 자기가 맡은 분야에 관해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는 자기가 원하는 바를 총경리에게 보고하여 결재를 받는다. 부총경리는 대부분 업무 내역을 잘 파악하고 있다.
문제는 경리다. 업무 내역도 잘 파악하고 있으며 권리도 다소 갖고 있다. 큰 문제가 없는 한 총경리나 부총경리는 경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스스로 결정하여 진행하기는 어렵다. 한국의 부장급이라고나 할까.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경리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 10년이 넘게 걸린다. 자기가 맡은 분야에 관해 가장 잘 아는 직책이 이들이라 할 수 있다.
큰 회사의 경리는 상당한 권한도 갖는다. 경리가 없을 경우 부경리가 일을 맡기도 하는데, 어쨌든 최소한 경리 혹은 부경리와 상담을 시작해야 한다. 처음 시작은 담당자와 했더라도 어느 정도 진행만 되면 반드시 경리를 대동하고 상담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경리에게 인사 좀 하자는 식으로 기분 나쁘지 않게 요구하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여 자연스럽게 소개받고 같이 상담에 임할 수 있다.
총경리와는 업무의 자세한 부분까지는 이야기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잘 모를 테니까. 그러나 어쨌든 최소한 경리 이상의 윗사람을 공략하는 것이 상담을 빨리 진행시킬 뿐만 아니라, 상담을 성공으로 이끄는 한 비결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허풍도 능력이다, PR을 적극적으로 하라
중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회사라도 적극적으로 자기 회사를 소개하고 무언가 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와 같은 중국인의 샘리는 상대방 회사도 최소한 어느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한다는 기대 심리로 나타난다.
"저는 조그만 중소 기업을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견실한 중소 기업의 전무로서..."
"저희 회사는 이제 창업한 지 1년밖에 안되었습니다만..."
우리 경우라면 이처럼 보통 어느 회사와 처음 거래를 하기 위해 자기 회사를 소개할 때는 '노력과 최선을 다하여 귀사와 거래를 추진하겠습니다, 그러니 한번 믿어 보십시오'라고 자신감에 차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다.
그러나 이러한 소개는 적어도 중국에서는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중국에서 자기 소개나 자기 회사 소개를 할 때는 반대되는 방법을 써야 한다. 여기서는 아직 잘 모르지만 우리 회사는 이 분야에서 한국에서도 알아주는 회사다, 이 분야만은 그 어느 회사에도 지지 않는다, 이 거래는 처음이니까 이 정도에서 그치지만 잘되면 향후 10-20년 내에 이러이러한 일을 할 계획이다. 이런 식으로 사업 구상을 크게 이야기하고 좀 허풍을 떨 필요도 있다. 10-20년 이후의 일이란 사실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긴 세월이지만 중국인에게는 그렇게 긴 세월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역이용한 발상이다.
중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회사라도 대개는 홍보 책자는 갖고 있다. 그만큼 적극적으로 자기 회사를 소개하고 무언가 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와 같은 중국인의 심리는 상대방 회사도 최소한 어느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한다는 기대 심리로 나타난다.
자동차를 잘 만들면 바늘과 손톱깎이도 잘 만드는 줄 안다
사실 자동차나, 전자, 기계 등의 큼직큼직한 일들에서 남보다 앞서고 발달된 종합 상사라 해도 개별적인 하나의 아이템(상품)으로 들어가면 전문적인 중소 기업보다 못할 때가 많다. 자금력과 기획력까지 구비한 건실한 중소 기업이라면 종합 상사를 앞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그걸 모를 뿐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지도 못한다. 그들은 작은 회사는 큰 회사에 비해 모든 게 작다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동차를 많이 판매하면 문방구류도 많이 판매하는 줄 알고, 철강제품을 많이 취급하면 바늘과 손톱깎이 같은 것도 많이 취급하고 경쟁력이 있는 줄 안다. 수입도 마찬가지다. 수출이 많으니 수입도 많으리라 생각하고 그저 큰 회사만 찾는다.
그러므로 자기PR을 스스로 적극적으로 해나가는 게 좋다. 좀 허풍이 섞여도 어쩌랴. 확인해 볼 것도 아니고 일만 잘 이루어지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거꾸로 중국측 상대가 우리 회사는 어쩌고저쩌고 선전을 할 때는 50% 정도만 믿으면 된다. 상대의 실력은 일을 해나가면서 자연히 알 수가 있다. 종업원이 많고,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랜 회사일수록 능률이 떨어지고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국영회사일 경우는 큰 회사일수록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경험담 또 한 가지.
연태(옌타이)에 물건을 구매하러 간 적이 있었다. 연태시 '대외 무역 위원회'의 소개를 받아 그 방면에서는 연태에서 제일 큰 회사라는 곳과 상담을 했다. 결국 약 200톤의 구매 계약을 맺어서 역시 신용장까지 열었다.
계약 상대는 부총경리였는데, 계약 후 총경리 이하 경리 등과 술까지 거나하게 마셨다. 앞으로 거래를 키워 나가자느니, 투자까지 연구해 달라느니, 미래에 대한 여러 전망까지 이야기하고 몇 번씩 물건 공급에 차질이 없음을 확인 받기도 했다.
선적 기일이 다 되어 다시 현장을 찾아갔을 때 만들어진 제품은 겨우 20톤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규격도 맞지 않고 여러 가지로 계약 조건과 틀린 상태였다. 부총경리는 해외 출장중이고 총경리는 부재중, 경리는 말도 안되는 변명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되니 문제를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무서운 아이들
낙담을 하고 호텔에 돌아와 있는데 누군가 찾아왔다. "자기에게 한번 맡겨 달라. 자기는 옛날에 일본과 중국의 합영 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 일본 회사나 일본 사람에 대해 좀 알고 있다. 한국 사람도 비슷하지 않겠는가. 자기는 따로 공장도 없고 큰 회사도 아니지만 일을 주면 열심히 해 보이겠다. 이런 말은 중국 사람이나 중국 회사에는 통하지 않겠지만 일본이나 한국 회사에는 통하리라 믿고 찾아왔다. 그러니 그 회사에서 못한 것을 자기에게 시켜주면 열심히 하여 자기들 실력을 보여주겠다" 대충 이런 이야기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처음의 큰 국영회사에 직원으로 근무하는 여자 한 명이 자기 부인이어서 내용을 알게 되어 찾아온 것이었다.
달리 방도도 없고 물건 미공급(Non Delivery)이 발생할 게 뻔하니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 일을 맡겨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큰 회사도 못해냈던 오더를 거뜬히 해치웠다. 아직 많지는 않지만 최근 이런 젊은 회사들이 꽤 생겨나고 있다.
마치 우리 60-70년대의 '무서운 아이들'이라 하여 한때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가 사라진 젊은 주인공들을 생각나게 하는 회사들이다.
'내 회사도 아닌데 그저 만만디가 최고지' 하는 타성 속에서도 이렇게 능력 있는 젊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판매처도 없고 팔 노력도 안해 창고에서 자고 있는 물건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스스로 부를 만들고 있다.
지금도 나는 이 회사와 계속 거래를 하고 있는데, 이처럼 중국은 그 덩치만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고 실제 일을 통해 판단해야 한다.
처음 시작할 때 덩치가 큰 회사인 양 자기 PR을 하는 것이 중국 장사를 하는 데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다.
중화민족의 자존심을 이용하라
자신의 능력만으로 '꽌시의 나라' 중국에서 성공할 수 없다. 중국에서 장사를 하려면 먼저 믿을 만한 중국인을 구하라. 그러면 낮은 인건비와 관리비로 중국 사장을 파고들며 문제를 해결하고 장사를 확대해 나갈 수 있다.
91년도에 섬유를 중국에 수출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다.
한국의 본사로부터 오퍼를 받아 일체의 수수료 등을 붙이지 않고 차이나 텍스라는 유명한 중국 국영 기업에 오퍼를 냈다. 그런데 그 즈음 본사에서도 내게 제시한 같은 가격으로 홍콩에 오퍼를 냈다. 그러고 그 홍콩의 브로커(Broker)는 우리 본사에서 받은 것에 구전을 더하여 역시 같은 중국의 차이나 텍스에 오퍼 하였다. 결국 같은 한국회사의 물건이 같은 중국 회사에 두 가지 경로로 오퍼된 것이다.
값이 비싸도 같은 중국인의 것을 산다
물론 홍콩의 것은 구전을 부쳤기 때문에 나의 것보다 비쌌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이 차이나 텍스라는 회사는 똑같은 우리 물건을 구전이 붙여져서 5%이상 비싼 가격인데도 홍콩 브로커에게서 사는 게 아닌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당시엔 나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한번은 반대로 수입을 하려는데 같은 식의 문제가 벌어졌다.
중국의 한 지방 성에 있는 양유 공사로부터 팥을 구매하려고 오퍼를 받았다. 그런데 또 본사도 홍콩을 통해 나에게 오퍼를 준 바로 그 회사로부터 오퍼를 받았다. 마찬가지로 홍콩으로부터 받은 오퍼는 구전이 들어갔기 때문에 당연히 나보다 비싸야 했다. 그런데 또 내 상식은 통하지 않았다. 홍콩으로부터 받은 물건이 나보다 가격도 훨씬 싸고 조건도 좋은 게 아닌가. 앞의 중국 회사가 홍콩 브로커에게 구전을 포함하고도 나보다 훨씬 싸게 공급해 준 것이다.
중국에 살면서 중국인들과 매일같이 접촉하는 우리끼리 중국 장사에 관해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중국의 장사는 중국인에게 맡겨야 한다. 즉 현채인(현지 채용인)을 얼마나 잘 쓰고 잘 이용하는가에 따라 성패가 갈라진다'는 것이다. 외국인이 아무리 대표나 또는 경리라는 직함을 내민다 해도, 자기 밑에 일하는 평사원인 현채인이 받아 오는 오퍼가 대부분의 경우 훨씬 싸고 조건도 좋다.
왜 그럴까?
중국은 꽌시의 사회라는 점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또 중국 인민이 세계의 중심이고 세계에서 제일이며, 자기들끼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중국 특유의 자존심과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특히 홍콩이 있는 광동성에선 홍콩인들의 활동이 매우 활발한 편이다. 홍콩인과 중국인과의 거래에는 우리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친인척, 지연, 학연, 커미션, 오랫동안 쌓인 우정 등이 거미줄처럼 깔린 공생의 관계가 존재한다. 또 대만과 가까운 복건성과 대만 화교의 관계도 광동성과 홍콩 상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특히 2-3년 동안 홍콩인의 역할을 배제하고 중국인들이 스스로 맡아서 하는 경향이 많아져, 이로 인한 갈등도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아직 모든 기능과 멘탈리티(Mentality)가 홍콩을 따라가지는 못하지만 언젠가는 이런 부분까지 중국인이 모두 대신할 날이 머지않았다.
믿을 만한 중국인을 구하라
중국인들은 한국이나 일본인에게 여간해서 속마음을 비치지 않는다. 중국인들이 한국이나 일본인에게 '우리는 친구다'하는 의미와 그들끼리 혹은 홍콩인(광동인)에게 '친구다'라고 할 때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내가 볼 때는 우리와 중국인은 말 그대로의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중국인이고 우리는 한국인이니까. 하다 못해 중국인은 여간해서 우리에게 직접 뇌물을 받지 않는다. 뇌물을 무척 좋아하지만 가급적 중국인이 건네주는 것만 받는다.
그에 비해 우리 한국 사람들은 때로는 너무나 단순하고 남을 믿기 좋아한다. 중국인과 만나 60도짜리 배갈을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서로의 심정과 의견을 토로하고 2차로 가라오케를 가서 놀고 난 다음날이면, 마치 십년 지기가 된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중국인은 3배요, 5배요, 열렬 환영이요, 오늘은 새 친구 내일은 옛 친구 등등 미사여구를 많이 늘어놓지만 결코 속을 내보이지는 않는다. 결국 자기 혼자 착각에 빠져 다음날 거래에 임하다가 씁쓸한 기분을 느낀 한국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고 나서 중국인 전체를 싸잡아 '형편없고 의리 없는...등등'으로 욕을 한들 다 쓸데없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중국에서 장사를 할 경우에 관계가 좋고 똑똑한 중국인을 앞장세우는 게 좋다. 지역에 따라서는 아예 대부분의 일을 홍콩인 에게 맡기는 경우도 있다. 나중에 계산을 해보면 훨씬 유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중국인을 앞세워 장사를 하게 되면 상대의 의도를 금방 눈치 채고 설명해 주기도 하며,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쉽게 알 수도 있다. 또한 여러 가지 뒷거래도 가능하다. 단 뒷거래가 필요할 때에는 중국인을 100% 믿을 수 있을 때에만 해야 한다. 또한 복잡하고 조령모개식으로 자주 변하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해석이 가능한 중국의 각종 관습이나 법규 등을 이용하거나 대처해 나가는 데어도 중국인이 꼭 필요하다.
내노라 하는 대기업에 근무하다가 직장을 그만두고 본인이 직접 중국 장사를 시작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본사는 서울에 두되 상해와 청도에 지사 형식으로 중국 사람을 채용해 중국 실정에 맞는 회사 조직과 경에 체계를 잡아 나갔다. 그러면서 외국인의 약점을 극복하고 하나하나 성과를 만들어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이처럼 믿을 만한 중국 사람을 구한다면 낮은 인건비와 관리비로 중국 시장을 파고들어 문제를 해결하고 장사를 확대해 나갈 수 있다.
중국에서 주재원으로 3-4년 이상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독립하여 중국에서 사업을 벌일 때, 반 이상의 사람이 위와 같은 방법을 쓰는 것 같았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중국 장사는 결국 중국인을 내세워야 한다는 현실을 경험으로부터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까지라도 함께 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이런 경우 무엇보다 주의해야 할 점은 중국인이 영원히 한국인 밑에서 단순 월급쟁이로만 있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인은 기다릴 줄 알고 참을 줄 안다. 오랜 기간 그 나름대로 배우고 갈고 닦고 언젠가는 자기가 하던 일로 독립하려고 한다. 그러니 미리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계획을 세우는 것도 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즉 처음 3년은 월급을 얼마 혹은 매년 얼마씩 인상해 준다든지, 3년부터 6년까지는 이익금의 몇 퍼센트, 6년부터 10년까지는 이익금의 몇 퍼센트, 혹은 일부 주식 등으로 지분을 준다든지, 이런 방법으로 회사에 대한 보람과 긍지를 갖게 해주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건 명심해야 할 것은, 비록 한국인과 관계를 맺고 한국인의 이익을 위해 일을 하지만, 월급이나 보너스 혹은 배당의 방법으로 마음으로부터 존경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오랜 역사와 공산당 이념하의 평등, 중국인 스스로 가지고 있는 자존심과 중화 사상 등의 영향을 인정하고 일대일의 유능한 독립체로서,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 같은 태도가 아니라 같이 협력하는 파트너라는 인상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커이'(좋다)라고 말할 때 조심하라
그럼 당신이 말한 '커이'(좋다)라는 말의 뜻은 무엇이냐고 따졌다. 그가 하는 말, 당신이 제시하는 조건이 좋으니 일이 되도록 노력해 보자, 혹은 같이 노력해 보자는 뜻이지 당신의 요구를 다 받아들이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 장사 초보 시절, 필자가 저지른 실수 한 토막. 장사를 하건, 관광을 하건, 유학을 하건, 한국 사람은 누구나 한번씩 당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꼭 기억하시도록.
중국인과 중요한 상담을 하는데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흔쾌히 '커이'(좋다)라고 승락하는 것이 아닌가. '커이' 정도는 중국에 도착하는 날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듣는 말이었기 때문에 대충 그 뜻은 알고 있었다. 또 옆에 있던 조선족 통역에게 확인하니 '된답니다'라고 통역해 주었다.
중국 장사 별것 아니네, 그러나...
'야, 드디어 한 건 했구나'라는 기쁨과 '중국 장사 별것 아니네' 하는 안도감이 한꺼번에 밀려와 중국에 와서 고생했던 일들이 한꺼번에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다음 번에 만나 계약서 작성까지 마무리 짓기로 다짐하고 헤어졌다.
사무실에 돌아와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서 사전을 찾아보니 역시 가장 많이 쓰이는 뜻이 '할 수 있다', '좋다'라는 뜻이고 중영 사전에도 첫 번째 뜻이 'Can'으로 적혀 있었다. 이 정도의 표현이면 상대방이 수락한(Accept)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하여 본사에 거래 성사를 통보하고 계약서 초안 작성에 들어갔다.
그런데 다음 번에 만나 계약서 서명을 위한 절차에 들어가려고 하니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면서, 이전에 없던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들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분명 수락하지 않았느냐, 이제 와서 다른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하느냐, 우리 고객에게는 벌써 약속을 다해 놓았는데 이제 와서 오리발을 내밀면 어떻게 하느냐, 구두 약속도 약속이 아니냐' 하고 따졌다. 상대방은 천하태평이었다. 언제 내가 오케이를 했느냐 하는 태도였다.
그럼 당신이 말한 '커이'(좋다)라는 말의 뜻은 무엇이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중국 친구가 하는 말, 당신이 제시하는 조건이 좋으니 일이 되도록 노력해 보겠다, 혹은 같이 노력해 보자는 뜻이지 당신이 요구하는 대로 다 받아들이겠다는 뜻은 아니라고 했다. 요컨대 '커이'라는 말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말 뒤에 숨은 뜻을 헤아려, 그 전후 문맥과 내용을 종합하여 판단했어야 하는데, 너무 '커이'라는 말뜻에만 매달린 것이 속단이었다.
중국식 과장법에 현혹되지 말라
중국어에는 이처럼 말뜻(특히 속뜻)이 불분명한 말들이 많다. 또 그런 말일수록 자주 쓰인다. 이 '커이'라는 말만 해도 중국에 도착하여 떠날 때까지 가장 많이 듣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 뜻은 문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정확한 통역과 상황 판단이 있어야만 '커이'의 속뜻이 전달될 수 있다.
다행히 중국에는 '조선족'이라는 동포들이 있어 우리말 통역을 구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런데 경험에 의하면 조선족 통역 100명이면 99명이 '커이'라고 중국인이 말하면 '된답니다', 혹은 '가능하답니다'라고 통역해 버린다. 우리말에는 그 '커이'에 해당하는 말이 없기 때문일까.
여기에 오해의 씨앗이 있는 것이다. 그 동안의 비즈니스 경험을 토대로 정리해 보면, 중국인이 상담에 임하여 '커이'라고 얘기할 때 그 의도는 여러가지이다. '할 수 잇다'(그러니 귀사와 일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 보자). '수락할 수 있다'(그러니 수락되도록 노력해 보겠다). '가능하다'(그러나 여러 관계 기관의 동의와 협조가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다). '될 수 있다'(그러나 별도의 조건들이 해결되어야 한다). 이처럼 괄호 뒤의 내용들이 생략된 것으로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괄호 안의 내용이 더욱 중요한 것은 물론이다.
'커이'는 상담이 가능한 상태이니 시작해 보자는, 즉 이제 출발선에 섰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커이'라고 했지만 실제 계약서를 작성할 때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때로는 계약서의 문구를 전혀 반대의 의미로 해석해야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중국인이 '커이'라고 말했을 경우에 각오해야 할 일이다.
이외에 한국인과 중국인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말을 몇 가지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카오루-'(고려) : 말은 글자 그대로 고려하겠다는 의미인데, 중국 장사꾼의 입에서 '카오루-'하겠다는 말이 나오면 안된다는 의미가 강하다. 약 50% 미만의 가능성이라고 받아들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헌'(한) : 중국인이 많이 쓰는 말들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이 '헌'인데 그 뜻은 '대단히, 매우'라는 뜻이다. 그런데 중국인이 '대단히(헌) 반갑다.', '매우(헌) 고맙다'라고 했을 때, 우리 식으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그냥 반갑다, 고맙다라는 표현을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습관적으로 쓰는 표현에 불과할 뿐이지 '대단히'라는 뜻은 별로 없는 것이다. 실제로 '대단히, 매우'라는 표현을 쓸 때는 '터비에'(특별)나 '훼이창'(비상)이라고 쓴다.
'따'(대), '타이'(턔), '부타이따'(불태대) :'따'는 물론 크다는 의미인데 그냥 '따'라고 하면 좀 크다는 뜻 정도이다. '따'보다 강하게 표현하고자 할 때, 즉 '아주 크다'라고 표현할 때는 '특별히 크다'(특별대), '비정상적으로 크다'(비상대)라고 쓴다. '타이'(태)는 '너무' 또는 '지나치게'라는 뜻이다. '작다'라는 표현을 하고자 할 때, 직역하면 '너무 큰 것은 아니다', 혹은 '지나치게 큰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인 '부타이따'(불태대)라는 말로 그 말을 대신한다.
새삼스럽게 중국어 공부를 하자는 말이 아니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과장하는 경향이 강하고, 모호한 표현을 일상적으로 즐겨 쓴다. 이것은 표현뿐 아니라 중국인들의 특질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장사나 관광을 할 때, 중국식의 이러한 과장법을 늘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장사할 때는 '커이'를 조심해야 한다. 무엇이든지 일단 '커이'로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 일은 '커이'라는 말리 나오고부터이다. 물론 '커이'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으면 일은 더욱 어렵다. '카오루-'란 말이 나오면 다른 방향에서 다시 접근하는 게 좋다.
같이 만만디(만만적)로 대하라
중국인과 상담할 때는 화가 나도 상대의 입장을 잘 이해하는 듯이 이야기하라. 우리도 참 어려운 입장임을 이야기하면서, 도움을 청하듯이 해야 한다. 만일 화를 내게 되면 중국에서 장사는 끝이라고 생각해야 된다.
중국인과 장사하다 보면 억장 무너지는 일도 많이 생기고, 화를 내야 될 일도 많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그들에게 절대로 화를 내서는 안된다. 중국인과 장사하려면 그야말로 '간, 쓸개 다 빼놓고 임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웃으면서 대하라. 정녕 참지 못할 지경이면 그날은 상담을 중지하고 다음날 다시 시작하라. 만만디란 말이 있듯이 다음날 다시 이야기하자는 것에 반대할 중국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급할수록 중국인은 신이 나서 더 천천히 한다.
만약 무심코 한번 화를 내면, 특히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릴 정도로 화를 내면 당면한 문제의 해결은커녕 아예 관계 자체가 끝장이 나고 만다. 어느 나라의 어떤 사람과 협상하더라도 급하거나 초조해 해서 좋을 것은 없겠지만, 특히 특유의 만만디를 부리는 중국인에 대해서는 조급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한국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좀 급한 것 같다. 여기서 급하다는 것은 단순히 성질이 급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상담을 할 때 무엇이든 빨리 이야기를 끝내서 합의하고 계약서에 서명하고, 그리고 물건도 가능한 빨리 선적해서 한 건 끝내고자 하는 조급함이다. 곧 주어진 시간 내에 주어진 경비로 가능한 많은 일을 하고자 하는 욕심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과 상담할 때 이러한 급한 마음은 금물이다. 우리측에서 급할수록 상대방은 천천히 나온다. 그야말로 만만디로...
그들과 협정이 잘 안되면 다른 공급자 또는 구매자를 찾든지, 다음에 와서 다시 상담하든지, 아니면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매매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현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상담이 안되면 그냥 돌아가라. 더 연구해 보자고 여운만 남기고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중국은 비행기도 만만디
94년 12월 22일부터 드디어 한중간에 직항로가 개설되었다. 중국측과의 항공 협정은 아주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가까운 거리를 놔두고 중국 남쪽을 경유하여 천진 까지 와서, 다시 차로 두 시간 가량 와야 북경에 도착하기 때문에 많은 주재원들과 중국을 자주 드나드는 장사꾼들은 이 항공 회담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다.
협상의 내용을 좀 아는 사람의 이야기에 의하면, 애초에 항공 관제권 문제로 논의할 때도 그들이 우리의 영공을 내놓으라는 듯한 억지 주장을 고집 하는 바람에 오랜 동안 타결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결국 자기들의 주장을 일부 거두어 정부간의 원칙적인 문제로 타결이 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실무 당사자들 협상에서 또 떼를 써서 협상을 지연시켰다.
처음에 그들은 국제 민간 항공국(ICAO)이 정한 관제 이양점인 124도를 인정치 않고 옹진 반도 일부와 신의주가 걸리는 125도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 문제는 결국 북경과 서울간의 선을 그어 124도와 만나는 점을 관제 이양 점으로 하기로 하여 한 . 중 정부간 항공 협정은 겨우 타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민간인끼리의 상업 협정에서 또 억지 주장을 펴 문제가 되었다. 우선 중국은 국영 항공사가 하나밖에 없으니 너희도 대한항공이든 아시아나든 한 항공사만 취항하라고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또 중국 민항보다 한국의 비행기가 서비스가 좋기 때문에 손님이 한국의 비행사에만 몰릴 테니 중국측은 별 이익이 없다. 그러므로 한 . 중 탑승 손님을 수적으로 비교해 초과 승객의 15%에 해당되는 이익금을 달라는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렸다는 것이다.
이에 한국의 각 언론사까지 가세하여 중국측을 설득하는 지루한 협상을 계속하다가, 국제 관례인 이익금의 4%만 지불하기로 하여 겨우 타결되었다. 또한 이후 여러 조건이 개선되어 중국 민항에 손님이 더 많을 경우엔 역으로 우리가 이익금의 4%를 받기로 했다.
사실 중국측으로 보아서는 직항로가 그리 급한 것도 아니었다. 한국으로 보낼 비행기가 충분하지도 않은 그들로서는 급할 게 하나도 없는 협상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늘어나는 중국행 손님들을 직접 북경에 실어 나르기 위해 급한 입장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지루하게 오래 끄는 협상에서는 '마지막으로, 조금만 양보하면 될 것 같은데...' 등의 생각을 하기 마련인데 적어도 중국 장사에서만큼은 그게 통하지를 않는다. 한번 양보하기 시작하면 계속 양보를 요구하니, 아예 우리도 만만디로 나가야 한다.
보통 그들이 협상하는 자리에서 양보나 설득에 동의해 자기의 의견을 고치는 경우란 드물다. 만일 그 자리에서 그들이 '귀사의 이야기가 맞는 것 같다. 우리의 생각이 틀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상담 전부터 이미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고 동의할 준비까지도 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때로 원칙론은 이미 합의되었으나 실무적으로 논리에 맞지 않는 요구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다된 줄 알고 '그러면 계약서를 만들까요' 하고 물으면, '좋다, 그런데 아주 조그마한 문제가 아직 하나 남아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들이 기대하던 것이 충족될 때까지 끄는 경우도 많다.
우리도 만만디로 나가야 한다
중국 상인의 90% 이상이 월급쟁이이다. 요즘은 소규모의 개인 장사를 허용하여 작은 회사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대부분의 회사는 엄밀한 의미에서 국가 소유다. 국가 소유라 그런지 그렇게 책임감이나 애사심이 뛰어나지도 않다. 그러므로 꼭 해야겠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거래를 성사시켜야겠다는 의욕이 강하지 못하고 만만디일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절대로 외국인의 주장을 듣지 않는다. '우리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 이런 식으로 따져봐야 '아, 그런가요, 네 그렇겠군요'라고 해놓고는 뒤로는 일이 안되게 몰아가고 골탕만 먹인다.
그럴 때 화가 나도 상대의 입장을 잘 이해하는 듯이 이야기하라. 우리도 참 어려운 입장임을 이야기하면서 도움을 청하듯이 해야 한다. 만일 화를 내게 되면 중국에서 장사는 끝이라고 생각해야 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장사다. 다시는 안 만나고, 다시는 이 상대방과 거래를 안할 것으로 생각하여 욕이나 실컷 해주고, 스트레스나 풀자는 식으로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다시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을 뿐더러, 직접 그 당사자를 만나지 않더라도 그 당사자와 꽌시가 있는 다른 상대방을 만나는 경우도 많다. 꽌시로 연결되어 있는 중국 사회에서 이런 일이 한번 생기면 다른 장사에도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그들은 절대로 한번 화를 낸 상대에게 유리한 비지니스나 행동은 하지 않는다. 또한 외국인 상대방에게 소위 '당했다'는 느낌을 가져도 절대 그 앞에서는 화를 내지 않는다. 이야기를 하다가 안되면 조용히 물러난 후에 끊임없이 팩스나 텔렉스, 전화로 일을 못할 정도로 상대방을 괴롭히면서도 결코 화는 내지 않는다. 오히려 정중할 정도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중국장사에서는 여러 가지 품목을 갖춘 복합적인 장사가 필요하다. 이 장사가 안되면 다른 장사를 생각하고, 이 상품 수입이 안되면 다른 유사한 상품을 수입하거나 유사한 여러 상품을 가지고 여러 상대와 접하는 게 좋다. 여유를 가지고 여러 군데를 접하고 초조해 하지 않기 위해서다. 한 가지 상품만을 가지고 상담을 성사시키려면 어렵기도 어렵거니와 무한한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 중도에 상담에 지쳐 버리고 상대의 뜻대로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특히 상대에게 초조함을 보이거나 약점을 보이면 맘먹은 대로 일을 성사시킬 수가 없다.
한번은 나도 같은 상품을 갖고 세 번이나 밀고 당기다가 결국 "도저히 안 맞는군요. 아깝지만 다음 기회를 보겠습니다." 하고 포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음에 꽌시가 있
[출처] 우마차 타고 손에 핸드폰 든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