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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일으킨 진정한 영웅 박정희 대통령
이름 : 배도영
2007-03-05
[펌] 박정희 그는 과연 친일파인가? 먼저 노사모를 위시해서 국내외 진보 좌익세력들이 인터넷에 유포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행적을 다룬 글들은 별 근거도 없이, “아님 말고”“~~카더라”란 유언비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글들임을 먼저 밝힙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박 대통령에 대하여 친일파에 해당되는지 여부에 관한 상반된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친일파의 정의 즉 어디까지를 친일파로 분류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대선에 따른 정략적 관점(박근혜의 아버지)에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친일 인사 논쟁을 크게 분류해보면... 1. 적극적 친일 행위자만 해당된다. : 을사오적 등 대표적 친일파들로서 이부분에 대하여서는 진보좌익과 보수우익 이견이 없습니다. 2. 일제시대 공직에 있었던 자도 포함된다. 3. 창씨개명한 자도 포함된다. :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가외에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해당되는바, 창씨개명 자체로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게 좌,우의 공통적 입장 위의 세 가지 분류를 본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2번에 해당됨에 따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과연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없었던 사람들의 시대를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고 심판할 수 있을까요? 많은 국민으로부터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시절 좌파를 제외한 항일 독립 운동가들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고 본보기로 삼아 기리며 추모했다는 것은 두말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진보 좌파진영에서 박정희는 자발적으로 군인이 되어 식민지 지배 세력에 충성했으므로 당연히 친일파이며 반민족 행위자이다란 논리를 강하게 내세우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일제시대 다른 나라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하거나 숨어서 항일 지하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군인이란 직업뿐만 아니라 그 시대 조선땅에서 자발적으로 경찰이나 공무원 및 언론인 법조인 사업가나 예술인이 된 사람들도 모두 친일파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일제가 철도를 통해 조선에서 수탈을 많이 해갔다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인데, 그럼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은 친일파 중에서도 악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일본과 조선은 하나다"란 사회 문화적 캠페인에 동원되었던 문화 예술인들이나 일제가 필요한 물품을 생산했던 사업가들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진보 좌파진영은 박정희를 의식해서 특히 군인이란 직업을 많이 안 좋게 선전하는데,  여러분 친일파를 따지는 데 있어서 과연 직업으로 구분해... 교사는 친일파가 아니고 군인은 친일파라는 식으로 판단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일제는 식민지를 지배함에 있어 군인만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식민지 통치를 위해 정치, 경제, 문화, 치안, 교육, 의료 기타 등등... 다른 모든 분야를 다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에게 충성을 한 게 나쁘다고 하는데 충성이란 단어는 정신적인 자세를 말하는 것으로 진정에서 우러난 행동인지 아닌지는 박정희 본인이 아니면 절대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시는 초등학교 교육만을 받으려고 해도 전부 아침 조회시간에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불러야 했으며 조선말을 학교에서 쓰면 퇴학을 당해야 했습니다. 사회의 어느 곳 하나 충성 안한 곳이 없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은 사회를 떠나선 살기 힘든 사회적 동물이고 그 사회는 정치권력이 지배하는데... 내심 싫어도 일제가 점령한 그때 조선 땅에서 태어나고 살아야 했던 그 시대 사람들은 나중에 일제가 패망 할 거란 생각은 별로 하지 못했을 테고... 면 서기나 경찰서 급사로만 일해도 모두 일본인들에게 굽실굽실 거리며 좋건 나쁘건 그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충성했을 텐데... 대체 친일이란 소릴 안 들으려면 뭘 해야 할까요?  그 당시 반체제 지하활동을 빼고 식민지 지배 권력에 대한 대립과 반목으로 그 어떤 사회생활을 조선에서 공개적으로 할 수가 있습니까? 진보 좌파진영에서 말하듯이 자발적으로 무엇이 되어 일제에 충성했음으로 그러니 친일파이다란 그런 소리를 아예 듣지 않으려면 조선인들은 마땅히 어느 시골이나 산골에서 머슴 아니면 농사나 짓고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후세에게 떳떳한 게 아니겠습니까? 민생을 팽개친 노 정권의 과거사 타령에 반감을 가진 많은 국민들은 친일이냐를 따지자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들의 부의 축적 및 자기 일신의 영달과 출세를 목적으로 그 시대 일제의 힘을 이용해 주도적으로 같은 민족을 수탈하고 탄압하거나 속이는 데 앞장섰느냐 아니냐를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따져야 한다는 것이 반론으로 제기하는 것입니다. 박정희가 친일파라면 과연 식민지 시대 우리민족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를 설명하는 명백한 친일과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규명 없이 막연하게 훌륭한 독립투사의 모델들을 제시하고 ‘보라 박정희는 이렇게 살지 않고 만주군이 됐으니깐 친일파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렇게 비난하는 당사자들이  박정희와 같은 시기에 태어났다면 모두 마땅히 목숨을 내걸고 독립투사로 나서 일제와 싸웠을까? 하는 의문을 낳을 뿐입니다. 독립투사가 아닌 만주군이 되었다고 해서 어떻게 바로 친일파라고 규정할 수가 있습니까? 싫다고 무턱대고 함부로 말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친일파로 규정하자면 만주군으로서 어떤 친일행각을 하였는가에 대한 사실규명과 그것이 친일파로 규정 짓을 만한 것인지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진짜 친일분자라면 조선의 독립과 훌륭한 삶을 살았던 독립 운동가들에 대해 못 마땅하게 생각하며 악의적으로 그 업적을 숨기거나 모함하지 않았겠습니까? 박 대통령은 국가유공자 훈,포장을 추서하여 독립 운동가들을 위인으로 모셨고 후세가 마땅히 본 받아야 된다며 사당을 짓고 기념관을 건립하여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하도록 각종 기념사업을 펼쳤습니다. 언제 그런 분들을 홀대하고 푸대접한 적이 있습니까? 또한 최고 권력자로서 북괴 김일성이나 김정일처럼 자신의 과거경력을 미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김승곤(92)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비밀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 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 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세계일보 발췌-) 노무현 정부가 지원한 민족문제 연구소와 진보 좌파진영은 박정희를 대표적 친일 인사로 규정하고 일제시대에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자로 활동한 사람들도 일제와 대립한 활동 경력이 있으면 일단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과연 그들이 박 대통령이 무시한 대한민국의 진짜 독립투사일까요? (진보 좌익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둘 다 생산 수단 공공화 및 중앙 집중적 계획체제에 바탕을 두고 사용을 위해 물건을 생산하는 체제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바로 성장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회의 첫 번째 형태이며. 공산주의는 여기서 더 발전된 더 높은 단계의 사회주의라 규정함.) 역사적으로 볼 때 일제는 사상적으로 공산주의를 철저히 배격했으며 군사적으론 공산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세력이기 때문에 진보 좌익들과는 원래부터 철천지 원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들이 못 마땅할지라도 공산주의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일제와 대립한 사람들은 대한민국 입장에선 진짜 독립 운동가들이 아닙니다. 여운형을 비롯해 권오설, 조동호, 김재봉, 구연흠 등 54명의 공산사회주의 계열들에게 독립운동가라고 훈. 포장을 준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 우리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으론 절대 이해할 수가 없는 인물입니다. 왜냐면 우리 대한민국의 헌법은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이어받는다."라고 명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임시정부는 절대 공산주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상해 임시 정부는 수립 당시부터 공산주의자 집단의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조선의 독립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제일의 목적이 한반도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이념화 되어 민족이란 이름으로 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김구 선생님과 상해 임시정부는 공산주의자는 물론이고 그 활동을 돕는 자는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간주하고, 임정에서 축출하였으며, 대화의 상대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역사적 사실 중에 한 가지를 말씀드리면... 상해 임시정부에는 성재 이동휘란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임정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내신 분입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군자금이 부족하여 활동 반경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이동휘는 이들에게 몰래 임정의 자금을 지원 하였습니다. 그 사실이 밝혀지자 임시정부는 이동휘 국무총리를 해임 조치 하였습니다. 일제시대 그 당시에 박정희가 군인이 된 표면적 형상에 집착하여 무조건 친일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계신데요. 우선 청년 박정희가 왜 교사직을 그만두고 만주 군관학교에 들어갔는지 그 이유에 대해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박정희의 어린 시절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바로 나폴레옹 전기였다고 합니다. 동기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소년 박정희는 여러 사람들이 쓴 나폴레옹 전기를 죄다 읽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삼국지'에 빠진 소년들이 처음에는 되풀이하여 읽다가 나중에는 저자를 바꾸어 가면서 읽는 것처럼 말이죠. 청소년시절부터 군사학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본다면 당시에 일선 소학교 교사로서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 가며 어린 제자들에게 한글을 교육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등 평소 일제의 황민화 정책과 일본인들에 대하여 자꾸 반항적인 성향과 행동을 보이는 요주의 인물 박정희에 대하여 경찰, 행정, 학교를 장악한 일본인들의 집요한 괴롭힘과 심한 탄압이 직업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관련증언 : "어느 핸가 시학관이 학교로 시학을 온다고 연락이 와서 3학년 여학생들이 옷을 잘 차려입고 정류소 앞에 도열해 기다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박 선생님은 학교에서 평소 좋아하던 나팔을 불고 있었는데 급사가 가서 내려오시라고 해도 듣지 않자 일본인 교사들이 가서 박 선생님을 집단 구타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박 선생님은 '내가 꼭 복수해 주겠다. 조선에는 사관학교가 없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간다!'고 얘기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뒤에 들으니 박 선생님께서 졸업한 제자에게 돈을 빌려 김천서 하룻밤을 자고 만주로 갔다고 들었습니다." -제자 이순희 씨의 증언- ] 가까운 거리에서 박대통령을 지켜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인 김종신 비서관의 말에 의하면 박 대통령이 교사직을 그만 두고 만주 군관학교로 간 이유에 대해서 묻자 "왜놈들 하도 심하게 굴어 긴 칼 차고 싶어서 갔지."라고 답했습니다. [관련증언 :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군도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모두 그 장면을 보고 통쾌해 했습니다” -제자 이순희씨 증언· (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 78쪽)-] 애초에 일본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과는 상관없이 청소년시절부터 가졌던 나폴레옹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군사학에 대한 호기심과 계속 교사직을 갖고 일하기를 포기할 정도로 점점 심해지는 일본인들의 지긋지긋한 괴롭힘과 탄압, 그로 인한 반발심과 복수심에서 무상 교육기관인 만주 군관학교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몇 년 후 군인이 된 박정희는 고향으로 돌아와 교사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일본인들의 사죄를 받으며 복수를 합니다. 그들을 향한 분노와 함께 얼마나 가슴에 사무친 게 많았으면 군인이 될 생각까지 했겠습니까? 그리고 조선이 앞으로 독립을 하면 신생 독립국으로써 가장 필요한 것이 군대란 판단도 타당한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참고자료 : 그는 교사로서 의무복무를 마치고 만주 군관학교 2기로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도 식민지 민족으로써 민족주의 신념을 키워 나갔다. 만주 군관학교 역시 사범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족차별이 심해서 박정희의 민족감정은 부추겨질 수밖에 없었다. 만주 군관학교 시절 1기생 이기건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박정희에게 '자네는 왜 여기 왔는가?'라고 물었을 때, 박정희는 "왜놈 보기 싫어 왔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일제는 곧 망합니다. 우리는 독립하고야 말 것입니다"라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섭준에 의하면, 박정희는 특히 2.26사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배울 것은 군사학뿐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고 했으며, 독립은 "혼자 사는 것이다. 남의 간섭 안 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권장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발췌―] [참고자료 : -교사시절에 관한 제자들의 증언 자료- 문경 공립 보통학교에서 3년간(1937-1940) 교사로 근무 이영태씨의 증언입니다. -"수업 시간에 우리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음악시간에는 황성옛터, 심청의 노래 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 주셨습니다. 민족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망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는 남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평소 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 앞으로 노력해야 한다.'라고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인 야나자와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 던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 중에 오가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후에 박 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긴 칼)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 순사가 박 선생님 한테 뭐라고 했는데 박 선생님이 오가와 순사를 크게 혼낸 적이 있었습니다."- 정순옥씨의 증언입니다. -"어느 일요일,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박정희)의 하숙집을 찾아갔습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생님의 방을 살펴봤더니 책상 위에 커다란 사진액자가 걸려 있는데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죽 달려 있는 사람인데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영웅 나폴레옹이라고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언젠가 박 선생님과 일본인 교사 두 분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일본인 선생 한분이 조선여성은 예의가 없다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양동이를 이고 다니느니 하며 우리나라 여자의 흉을 보았습니다. 이에 박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 저 말을 잘 새겨들어라 가난하고 무지하면 남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절대로 일본말을 쓰지 말고 조선말을 쓰자.´고 했을 때 우리는 철없이´조선말 쓰면 퇴학당하는데 왜 그러세요?´라고 반박한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 주영배씨의 증언입니다. -"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를 가르치며 박 선생님께서는 ´이글을 잘 배워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박 선생님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가정실습 때는 문경에서 12킬로나 떨어진 산골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그 뒷모습이 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습니다." - 전도인씨의 증언입니다. -"하루는 박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습니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 와 '오이 ! 교장 계신가?'하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개 그런 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등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 해도 무례하기 그지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사람이라면 나는 너 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 어서 나가봐!'라고 내몰았습니다."- 황광실씨의 증언입니다. -"박 선생님이 우리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조선어를 가르치셨습니다. 역사 시조도 가르치고 학생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위인전을 많이 읽도록 하셨습니다. 박 선생님이 일제 치하에서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것은 분명합니다. 학생 한사람을 복도에 세워 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습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천황의 사진에다 장난을 하고 교무실로 불려 가 혼이 난 일이 있었습니다.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 따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게 한 것은 박 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별명은 호랑이 선생님이었으나 자주 부르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졸업 때 앨범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 (제자들의) 증언으로 미뤄 볼 때 박정희는 일본인에게 지지 않으려는 오기와 배짱이 대단했던 것 같다. 이런 그의 성향은 대구사범 학생, 문경 보통학교 교사 시절 일제의 지나친 황민화 정책에 대한 반발심과 연결된다. 교사 박정희가 황민화 정책에 반발하며 조선인 학생들에게 나름대로 민족혼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제자들 증언에서 확인된다. ** -세계일보 "만주군 박정희를 보는 시각" 발췌-] 지난번 민족문제 연구소가 자행한 친일파 인사 3090명의 명단발표는 어느 직책에 특정 직위 이상이면 무조건 반민족 친일파란 논리인데... 군인은 소위 이상, 경찰은 경사 이상, 사법부는 판검사 이상, 관료는 고등문관 이상으로 대상을 제한했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좌익들과 열린 우리당 인사들의 선친들을 뺀 친일파 명단발표를 위한 것이며 박정희 대통령(소위)을 정치적 목적으로 넣기 위한 술책이라 보이기 때문에 우리 국민들로부터 많은 멸시와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독립군 색출 만주 특무경찰, 독립운동가들 검거해 고문한 헌병 오장, 식민지 착취 상징 식산은행의 금융조합 서기, 황국신민 의식화 및 수탈의 선봉 훈도야말로 식민지 지배와 수탈의 최일선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 일제의 주구들이라는 점을 먼저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 지금부터 인터넷상에 유포하는 박대통령의 친일행적에 관한 글들의 내용을 검토 해 보겠습니다. *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의 태동 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혈서작성? : 박정희의 혈서 설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박정희의 문경 보통학교 동료교사인 유증선(전 안동 교육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이라는 사람이 입학연한에 걸린 박정희가 군관학교 당국을 감동시키기 위해 혈서를 쓰도록 했다는 근거불명의 루머가 마치 진실인 양 되풀이 전해지고 있는데, 유증선의 말은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근거 없는 혈서론은 박정희를 죽이기 위한 날조된 음모입니다. 박정희의 군관학교 졸업식은 당시의 경성의 극장에서 뉴스로 보도될 정도로 다 알려진 사실이고 만주일보(1942년 3월 24일)에도 보도되었습니다. 친일파의 출세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선인이 1등을 했다는 것에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박정희가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답사를 했다는 헛소문도 나게 됩니다. 실제론 일본인 오까미 쇼히꼬(岡見尙彦) 고야마 시게요시(小山重嘉) 두사람이 답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진짜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면 조선인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이란 혈서를 썼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의 출처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진보 좌익들은 만주신문(滿洲新聞)에 박정희가 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편지를 썼는데, 그게 보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혈서사진'을 보도한 신문기사가 있던지 적어도 '혈서를 썼다'는 신문기사가 있어야 하는데... 박정희의 혈서는 모든 만주국 신문이나 일본신문 어디에도 실려 있지 않습니다. 완전히 날조된 거짓말입니다. 기록 잘 챙기기로 유명한 일본이나 중국의 모든 도서관과 문헌 사료를 북한과 남한의 친북 좌경세력 특히 친노 방송과 언론들이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에도 혈서사진이나 혈서기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럴듯한 말로 지어내 둘러대는 것이 바로 연변학계, 연변자료 어쩌고 하면서 공갈치는 것입니다. 말이 학계이지 그들은 완전 북한 김정일 정권의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② 만주 군관학교에서 수석 졸업장과 금시계 상품을 받은 박정희는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하였다? ③ 우등생에 주어진 관례에 따라 편입한 일본육사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내며 상장을 받은 박정희는 완전한 일본인 이였다? : 이런 글은 쉽게 말해 한번 미운 사람 끝까지 밉다고 극히 주관적인 판단과 감정이 개입된 평가들로 객관적인 평가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글들도 엄청 많습니다. (예들 들면 지난 cbs방송에서 박 대통령의 제자들이 증언한 박 대통령이 소학교 교사로 근무할 당시에 신념을 가지고 한 민족교육 및 의병정신 선양회 사무총장 방송인 이기청씨가 밝힌 만주군 시절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몰래 빼돌린 일화 등...) 군사학교에서 일본인 생도들과 떳떳이 경쟁하여 우등생이 되었으면 뛰어난 조선인이지 그게 어떻게 해서 완전한 일본인이란 증거가 된답니까? 그럼 공부 못하고 상을 못 받았으면 완전한 조선인입니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상식적으로 사관학교에서 성적이 우수한 생도를 뽑아 상을 주고 칭찬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게 바로 완전한 일본인이라는 증거는 될 수가 없습니다. 박정희 본인이 완전한 일본인으로서 칭찬과 상장을 달라 하여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일본인들보다 잘하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평소 열심히 배우고 익힌 결과 수석졸업도 하고 전교 3등도 하니깐 일본인들이 '박정희 생도는 정말 대단하다'라고 평가한 것이지 완전한 일본인이기 때문에 포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육, 해. 공군 사관학교에서 생도들에게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목숨 받쳐 충성해야 된다고 가르치듯이 일왕이 세운 사관학교에서 상 주면서‘천황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고 능력이 뛰어난 생도다'고 평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박 대통령을 맹목적으로 싫어하는 분들은 그를 극히 나쁘게 평가할 것이며, 그 반대편은 아주 좋게 평가를 할 것입니다. ② ③과 같이 이러한 주관적인 감정적 판단을 인용하여 평가하는 것은 '맹인모상' 즉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아전인수 격입니다. 따라서 한사람에 대한 평가는 오직 객관적이며 실증적인 자료를 통해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비판과 비난이라면 더욱 더 신중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④ 항일세력 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 이 주장 역시 허위 날조된 글입니다. 이런 글에서는 박정희가 "요시"하며 독립군 토벌을 신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박정희가 만주군으로 근무할 그 당시 소속부대의 작전지역에는 독립군이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1944년 3월부터 1년 5개월간 만주군 제8단(단장은 중국인 唐際榮)소속으로 근무지는 중국 열하 요즈음의 이름은 청더 (承德,승덕)지방 이였습니다. 이 지역은 독립군이 활동하던 지역까지 지금도 기차로 24시간이나 걸리는 곳입니다. 또한 박정희가 만주군에 복무했던 1944년 당시의 만주 독립군 투쟁 항일기록을 보면 독립군은 1931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내륙지방의 도시인 중경(중국 표현으로 "충칭")으로 본부를 옮긴 뒤 거기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즉 1944년 당시에 만주에는 독립군이나 광복군이 없었습니다. - 반 박정희의 대표적인 지식인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의 기회주의자 청년 박정희란 글을 보면... (한홍구는 박정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욕을 할 정도의 사람입니다. 지금 노무현이 만든 과거사위에서 맹렬히 활동 중.) ... 중략... 사범학교에선 꼴찌, 군관학교에선 1등 박정희에 대한 미화가 시작되고 급기야 기념관 건립 움직임까지 일자, 민족민주운동 진영에서는 박정희의 친일경력을 비판했다. 독립군 장준하와 친일파‘황군’ 장교 박정희, 그들 각각의 비극적 죽음처럼 우리 현대사의 역설을 보여주는 대목은 없을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이 문제되는 것은 해방 전의 그의 경력 때문만은 아니다. <해방 전 박정희의 친일경력이란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것이다. 박정희가 관동군 정보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생략... **결국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나 참여 하였다는 것은 허위 날조 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덧붙여 국내외 진보 좌익세력들이 현재 박정희를 공격하기 위해 항일세력 및 항일군대 운운하며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이 마치 조선의 독립투쟁과 관계있는 세력처럼 교묘히 속이는 조작에 관한 설명을 드립니다. 박정희가 만주군에서 근무할 1944년 당시에 만주에는 독립군이나 광복군이 같은 단체는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상황이 그들로썬 참 안타까운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팔로군을 마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항일 군대처럼 교묘히 속이기 시작합니다. 표면적으로 연변학계의 항일사료를 어쩌고 하면서 내세우지만 말이 학계이지 그쪽은 완전 친북학계입니다. 북한 김일성, 김정일 공산주의자들의 일방적 역사왜곡의 동반자들입니다. 여러분 팔로군이 뭘까요? 팔로군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한마디로 모택똥이의 팔로 빨갱이 공산군 이었습니다. 팔로군은 모택동이 장개석의 국민군에게 박살이 나자 마침 일어난 일본의 중국침략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국공합작을 이끌어 낸 중국 공산군의 또 다른 명칭입니다. (본래 명칭은 홍군이라 불림) 모택동의 팔로군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다고 주장하는 것은 소련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2차대전 막바지에 일본에 선전포고 했다는 논리와 똑같습니다, 더욱이 아시다시피 팔로군은 중국 공산통일 후에 인민 해방군으로 이름이 바뀌어서 6.25때 국군과 연합군을 공격한 바로 그 중공군입니다. 한국의 양민들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바로 그 중공군입니다. 팔로군이 독립군이라면 모택동은 독립투사입니다. 이젠 고구려역사를 갖다 바치는 것도 모자라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하더니 중국 공산군이 대한민국의 독립군이라고 주장합니다. 더욱이 팔로군은 우리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 독립투사들조차 공격해서 상당수를 죽여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조선의 해방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공산화된 세계를 지향하는 그들만의 공산주의 혁명을 추구했을 뿐입니다. 일제시대 박정희가 만주군 으로서 팔로군과 상대한 게 우리 민족에게 피해를 준 것이고 명백한 친일과거가 된다면? 해방 후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켜서 남한을 침략했는데 그당시 북괴 공산군과 중공군에 맞서 엄청난 희생을 치루며 대한민국을 지켜 낸 국군과 연합군, 우리 조상들은 모두 만주군 박정희와 같은 친일파이며 반민족 행위자가 될 것입니다.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했다 - 간도특설대 활동? : 이것 역시 허위 날조된 글로써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 장교의 명단(出典 : 중국측 조사자료-"特設部隊", 1960, 66 - 84쪽.)은 아래와 같습니다. 박정희의 이름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간도특설대(총79명) - 姜在浩 李元衡 朴鳳祚 金燦奎(金白一) 金錫範 金洪俊 宋錫夏 石希峯 崔南根 崔在恒 신현준 최경만 윤춘근 문이정 趙某(豊田) 김용기 태용범 백선엽 윤수현 이재기 김묵 豊田義雄 吳文剛 李淸甲 申奉均 海原明哲 白川** 金松壯明 伊原久 鶴原** 朴東春 李鶴汶 崔忠義 朴鳳朝許樹屛 金大植 方得官 洪淸波 金龍虎 金致斑 具東旭 朴春植 方太旭 孫炳日 劉仁煥 尹秀鉉 李德振 李龍昊 李東俊 李龍星 李準龍 李逢春 太溶範 崔在範崔炳革 李龍 金忠南 車虎聲 金忠九 柳益祚 朴春範 朴春權 曺昌大 洪性台 李東郁 廉鳳生 吳南洙 金萬玉 金鍾洙 李東和 朴蒼岩 朴泰元 李白日 金龍周 申然植李龍星 任忠植,, 馬東嶽, 桂炳輅, 全南奎 - 2004. 06. MBC에서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만주군의 친일파 내용 중 간도 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의 명단에도 박정희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MBC 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현재 박 대통령의 유족인 박근영씨가 중국 공민이며 연변의 인민대표인 류연산이 “박정희는 간도 특설대였다”주장해 쓴 ‘일송정 푸른 물에 선구자는 없었다’(일송정)을 펴낸 저자와 출판사를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여 재판중입니다.) [관련자료 - 간도특설대 1기생 이용씨 증언 "박정희는 간도특설대가 아니다" - (세계일보 2006-08-08 07:12) 그런 인물이 강원도 정선의 외진 곳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는 것은 뜻밖이었다. 육군 소장, 강원도지사, 교통부 차관, 철도청장, 인천제철 사장…. 화려한 이력을 뒤로하고 그는 산골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은둔’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용(李龍·85), 해방 전엔 이집용(李集龍)이었다.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이력’이 있었다. 해방 전 이력, 구체적으로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1932∼45년)에서의 행적이었다. ‘간도특설대’(1938∼45년). 바로 일제가 만주에서 “조선인 항일세력은 조선인의 손으로 잡는다.”는 목표 아래 친일파를 앞세워 만든 조선인 부대로,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 부대 1기생으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복무했다. 1938년 지원 당시 그의 나이 17세. 그는 “군인이 되고 싶었는데, 조선인 부대라고 하기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동기는 ‘순수’했는지 몰라도 군인이 된 그는 항일독립군과 싸우며 일제 침략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인물이 됐다. 그렇게 만주에서 일제 식민통치의 틀 속에서 출세를 도모했던 이들은 많다. 육참총장, 합참의장, 교통장관을 지낸 백선엽(87·간도특설대 출신)씨도 그 중 한 명이다.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육사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도 간도특설대 근무설에 휩싸여 있다. (중략) “그 시대를 평가해 달라”는 요청에 그는 “어려운 질문은 하지 말라”며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면서도 “공은 공대로 평가하고 과는 과대로 밝히는 것이 역사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겠느냐”는 말에 “사실대로 밝히고 후세에 전해야지”라고 답했다. 이 같은 관점이 고백의 배경인 듯했다. 그는 다만 재중동포(조선족) 사회에서 간도특설대의 만행으로 전해지는 부녀자 성폭행,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군기가 엄한 부대로, 민폐는 커녕 오히려 도와준 일이 많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의 간도특설대 근무설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분은 만주 보병 8단(團)”이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의 비밀광복군 활동설에 대해서도 “그건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간도특설대에 있었나? : “아니다. 없었다.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1944년쯤 베이징 부근에서다. 각각 팔로군 토벌작전 중이었다.” ―박 대통령이 당시 안투 명월구에 있던 간도특설대에 자주 왔다는 증언이 있는데? : “그분은 만주군 제8단 소속으로 활동영역이 달랐다. 간도특설대는 열하로 옮기기 전 백두산 밑 안투현에서 토벌을 했다. 토벌 대상은 김일성 부대였다.” ―박정희·신현준이 광복군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당한 시기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1945년 7월에 베이징에서 다시 철석부대로 돌아오는 등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얘기도 있던데? : “그건 거짓말이다.” ―그걸 어떻게 아나? : “그런 일이 없었으니까. 그때 내가 그 부근(베이징)에 있었으니까.” ―간도특설대 창설 목적은 알았나? : “몰랐다. 한국 사람들로 이뤄진 군대라고 해서 갔다.” ―간도특설대에 죽 있었나? : “1938년 이등병으로 들어갔다가 42년 봉천(지금의 선양) 육군훈련학교에 들어가 44년 졸업하고 소대장(소위)으로 진급했다.” ―육군훈련학교에 다니는 동안 간도특설대를 떠나 있었던 건데, 그 기간에 박정희가 왔으면 몰랐을 것 아닌가? : “그럴 수도 있지만 그분은 8단에 있었다.” ―해방 후 행로는? : “해방되자마자 남한으로 왔다가 46년 4월쯤 다시 만주로 갔다. (왜 돌아갔나) 뭐, 고향이 거기니까. 모친도 거기 있었다. 그러다 남한 갔다 왔다고 해서 붙잡혀 옌지감옥에 갇혔다. 4개월쯤 살다가 노역장에 장작 패러 불려나갔을 때 탈출했다. 튀어본 사람이나 알지, 담을 넘어서 한 100m까지가 아주 무섭다.” -기사끝-] ⑥ 변신의 달인 박정희는 한때 빨갱이였다? : 박정희 대통령은 평소에 과거 남로당 사건에 연루된 것에 대해 잘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 70년 7월에 김종신씨 한테 말하죠.‘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 되는 분(이재복)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면서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하려다 그분이 자꾸 청하기에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 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 여순반란사건 때(48.10월), 박정희 소령은 반란군 진압차 광주에 갔다 왔으며, 11월 남로당 혐의로 체포됩니다. 그리고 위내용의 자술서를 쓰고, 당시 그 이재복과 같이 간 장소에서 본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작성해 제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좌익 활동이라는 것에는 하나같이 명백한 증거가 없습니다. 활동은 커녕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도, 도장도 없고, 당적조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이재복의 가진 명단 속에 박정희란 이름인데, 이것으로 빨갱이라 몰아붙일 수 있을까요? 능력이 뛰어나서 포섭 물망에 오른 것이 죄라면 죄라고 할 수 있겠죠. 설사 활동을 했다고 해도, 공산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노선을 바꾼 사람을 진보 좌파진영에서 비난하는 것처럼 배신자, 기회주의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럼 저들 말대로 기회주의자란 소리를 안 들으려면 그냥 남로당의 포섭에 넘어가서 공산당 활동을 계속 했었어야 한다는 얘기인데... 기회주의자 배신자는 신의를 저버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도대체 저들은 어디 소속들 이길래?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지금도 북한의 지령에 따라 활동하는 간첩이나 내통하는 친북 좌경세력을 보면 마땅히 대공기관에 신고하여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는 게 올바른 행동일 것입니다. 진보 좌파진영 특히 강만길 같은 사람들은 무슨 신이라도 된답니까?  박정희 본인의 증언도 무시하고 저들은 박정희를 수사한 수사관이 빨갱이 같다고 했다는 겁니다. 생각해 봅시다 수사관의 입장에선 당연히 도둑이라고 해서 잡아왔는데 그럼 도둑으로 의심하지 변호사처럼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하겠습니까? 진짜 골수 빨갱이였다면 어떻게 살아 남았겠습니까? 빨갱이 명단 정도는 고문을 해서 얼마든지 받았을 것입니다. 진보 좌익들은 형인 박상희가 빨갱이로 죽었으니 동생 박정희가 복수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빨갱이가 됐다고 합니다. 형은 형이고 동생은 동생이지 저들이 어떻게 해서 당사자 보다 더 잘 안다는 건지? 실소만 나올 뿐입니다.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또한 박정희를 평가한 일본인들의 발언으로 보아 박정희는 일제에 충성을 다한 친일파가 확실하다? : 김대중 대통령 시절 박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고 가기 위하여 박 대통령의 창씨개명인 다카키 마사오를 들고 나왔으나, 김대중 대통령의 창씨개명 명이 도요다 다이쥬 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없었던 일로 흐지부지 되었는데... 아직도 써먹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오카모토미노루의 창씨개명을 운운하는데 어쨌든 창씨개명으로는 친일파의 기준에도 포함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진보 좌익세력들이 박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아가기 위해 주로 써먹는 수법중에 하나로... "일본인 누구와 누구가 말하길 박정희는 천황과 일본에 대한 충성심이 뛰어나고 진정한 사무라이라고 하는데 이를 보아 박정희는 친일파가 확실하다"는 식으로 좀 황당하고 어이없는 비방을 하는 것이 있는데요. 여러분 일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 입니까? 이들은 원래부터 자기들 입장으로 멋대로 말하는데 탁월한 선수들입니다. 황당한 임나 일본부설을 주장하여 "4세기 중엽부터 일본이 한반도에 임나 지역을 정벌해 6세기 중엽까지 200년 동안 가야를 비롯해 백제 신라를 지배하였다" 하고 을사 보호조약에서 한일 합방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약은 조선이 원해서 합법적으로 체결했으며 심지어 동해는 일본해로, 우리땅 독도를 '다케시마'로 자기들 땅이라 우기며 일본이 일으킨 대동아 전쟁의 책임은 근본적으로 서구 열강들에게 있다고 합니다. 그런 자들이 일제 식민지 시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한국의 대통령인 박정희란 인물에 대해 자기들 끼리 마음대로 떠든 것을 왜? 어떻게 해서 박정희 한 개인 한테 책임을 돌릴 수가 있습니까? 박정희가 그런 일본 인사들의 발언을 막을 수가 있습니까? 아님 바라었습니까? 박 대통령을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사석에서 일본인을 칭할때 주로 '왜놈'이란 단어를 사용하였고 우리나라의 경제와 과학을 부흥시키기 위해 카이스트를 만들면서 해외에서 활동하는 과학자들의 참여를 요청할 적에... " 과거 식민지 시대의 불행한 역사를 진정으로 청산하는 길은 우리 대한민국을 일본보다 더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길이다. 같이 조국에서 열심히 일하자" 고 애국심에 호소했으며, 스포츠에서도 우리나라의 대표팀이 일본 대표팀을 이기면 매우 기뻐하여 선수단을 청와대로 초청해 노고를 치하했습니다. 심지어 가수 심수봉씨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 미소라 히바리의 '슬픈 술'(가나시이 사케)을 첫곡으로 불렀는데 박 대통령은 버럭 '어디서 왜년을 데리고 왔느냐'며 화를 내었서 그러자 내가 '눈물젖은 두만강'과 '황성옛터'를 불렀더니 그제서야 한국가수인줄 알고 미안함과 아울러 좋아했다"고 증언 하였습니다. 이렇듯 진보 좌익들이 선전하는 친일의 증거란 것이 억지와 거짓을 믿도록 하는 궤변인 것입니다. ⑧ 과거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박정희의 진한 향수로 보아 친일파이다? : 이것 역시 ② ③번과 같이 완전 아전인수 격입니다. 진보 좌파진영에서는 주로 강창성 씨가 1991년도 12월에 말한 내용을 잘 이용하는데, 우리는 먼저 강창성이란 인물에 대한 이력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분은 박 대통령 밑에서 보안사령관까지 하다 군내 사조직 하나회 수사문제 때문에 결국 박 대통령과 사이가 틀어져 좌천당하고 예편한 분입니다. 12.12를 통해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80년 봄 권력을 잡았는데, 강씨의 주장으론 하나회의 보복으로 뇌물수수 혐의로 2년 동안 징역을 살며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내용은 이런 겁니다. 1971년 10월 17일 계엄선포 한 달 전쯤에 대통령이 강씨 자신을 불러서 집무실에 가보니 박 대통령이 가죽장화를 신고 점퍼차림에 말채찍을 들고 있더라. 흡사 일본군 장교 복장이더라. 자기가 보기에 가끔 이런 복장을 하는 것은 만주군 장교로서 말달리던 시절을 생각하며 좋은 기분을 내려는 것 같았다란 그런 내용인데, 박 대통령은 가끔 운동삼아 승마를 하곤 했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엔... 강씨가 어찌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그리 잘 아는지 의문이고 일단 가죽장화를 신고 점퍼입고 말채찍을 들면 바로 일본군 복장인가요? 아무래도 승마복장 같은데... 진보 좌파들은 말 타는 것도 친일의 증거라 할 것입니다. 의심스러운 건 이런 말을 한 연후 강씨의 행적입니다. 92년에 바로 박 대통령의 정적 이었던 김대중 씨의 품으로 들어가서 14대 전국구의원(민주당)을 지냈고 당내 12.12 진상 조사위와 5공 6공 부정부패 조사위를 이끌었습니다. 97년에는 민주당에서 한나라당으로 옮겨 이회창 후보 선거를 돕기도 했는데 생전에 전두환과 노태우가 주도한 하나회와 자신을 좌천시킨 박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컸다고 합니다. 앞의 ② ③번 사항에서도 말했듯이 한번 미운 사람 끝까지 밉다고 이런 자료들은 주관적인 판단과 감정이 개입된 평가로 특정 인물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첨언하자면 박정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러 창군 멤버들이 만주군이나 일본군에서의 군 경력이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군대 지휘관 이라 함은 전문적인 훈련과 경험이 없다면 임무를 잘 수행해 내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를 가진 모둔 나라는 군 지휘관 양성 전문 군사학교를 건립 운영하는 겁니다. 전쟁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선 잘 훈련된 지휘관의 적절한 판단 하나가 전 부대원의 생명을 좌지우지함으로 광복 후 일본군대나 만주군대 출신들이 국군에 들어간 것을 무조건 비판만 할 수 없습니다. 독립군 출신들이 그 자리를 전부 채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당시 현실은 제대로 배운 사람들을 구하기 힘든 어려운 시절 이였습니다. 간과해선 안 될 것은 6.25때 다름 아닌 그들이 북괴 공산당의 침략에 맞서 싸워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지켜낸 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친일파 숙청을 자랑하는 북한도 만찬가지 입니다. 일본군 고급장교 출신들이 고위층 장성 중에 여럿 있고 특히 공군의 태반이 일본군대 출신입니다. 북괴가 민족정기를 위해 친일파를 다 숙청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관동군의 밀정이었던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한때 김일성의 후계자로까지 부각되었던 사실과 김일성의 내연녀였던 무용수 최승희가 일본군 위문공연을 숱하게 다녔으면서도 그의 남편과 함께 오랫동안 요직에 중용되었던 사실, 그리고 6.25 때 지식인이었던 이광수가 친일논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숙청하지 않고 납북해 간 일 등은 무엇으로 설명합니까? 북한이 친일파를 완전히 숙청했고 프랑스가 나찌 부역자들을 깨끗이 청산했다는 일부 진보 좌익학자들의 그럴싸한 감언이설에 우리 젊은이들이 너무 혹해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5년간 나라를 빼앗긴 프랑스와 36년간 식민지로 있었던 조선을 동일 선상에서 보는 것도 무리한 시각입니다. [- 북한 김일성 금정일 정권이 자랑하는 친일청산의 진실은? - 초대 인민군 공군사령관 이화를 비롯하여 허민국, 강치우, 김기옥, 김한욱 등 20여명이 모두 일본군장교 출신들로 인민군 고위직을 지낸 사람들입니다. 김일성한테 꺼림칙하면 친일파라 숙청하고 필요하면 그냥 넘어가고 그게 북한이 자랑하는 친일파 숙청입니다. -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 북한 고위 군부 중요 명단 - *부주석 김영주 -관동군 밀정 및 통역 (김일성 동생, 김정일 작은아버지) *북조선 공군 총사령관 이활 -나고야 항공병학교출신 /전투시간 2000이상의 제국군 에이스 *허민군 9사단장 *강치우 기술부사단장 *김기옥 제1연대장 *김한욱 제2연대장 *북한공군간부 20명은대부분 일본제국군출신, 10명 만군(만주군) 출신 - 친일경력 북한 고위 간부 - *장헌근 사법부장 :일제 중추원 참의 *강양욱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일제하 도의원 *이승엽 남로당 2인자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정군은 문화선정성 부부상 :일본군 밀정 *김정제 보위성 :일제 시대 관료 *조일명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 북한이 처단한 친일파 명단 - (북한이 주장하는 친일파 청산 작업은 공작이며 음모였다.) 1)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및 그 추종자들: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의 간디 조만식> 선생을 처형시킨 죄목은 "친일 반민족주의자" 이다. 2)현준혁; 일제에 저항하던 사회주의 문학자, 김일성 보다 월등 뛰어난 지식으로 자신을 압도하자 "친일 분자" 로 몰아 처형 3)오산학교 출신들; 오산학교는 3.1 운동 때 기독교 대표이신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하신 학교다. 남강 이승훈선생 역시 말이 필요 없는 항일운동가. 항시 학생들에게 "공부 열심히 해서 일본놈을 앞지르라 그래서 독립을 쟁취하라"하신 애국자이시고, 수차례 옥고를 치르신 분이다. 김일성이 붙인 죄명은 "친일파 학교" 4)대성학교 출신들; 평양의 대성학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하신 학교이다. 이 학교 출신들이 김일성 보다 명망이 크자 모조리 처형하면서 붙인 이름이 역시 "반민족주의 학교" 5)숭실학교 출신들; 오산학교나 대성학교와 같이 이 학교 출신들을 무수히 사형시키고. 뒤집어씌운 죄가 "반민족 친미주의" 6)박헌영, 이강국, 임화 등; 잘 알다시피 남로당 이다. 모두 사형시키면서 뒤집어 씌운 죄가 "친일파. 섹터주의자. 회색분자." 7)허가이 일파; 김일성보다 좀 유식하다.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한 정통 이론가 이다. 하여간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 꼴을 못 보는 김일성이 사형시키면서 씌운 죄가 가당치 않게 스리 "미국 간첩" 모스크바 유학간 놈이 미국 간첩이라니 김일성도 참... 8)윤공흠 일파: 사건이 크다. "당은 인민을 위해 한것이 무엇인가?" 하고 과감하게 김일성에게 대든 당시 "경공업 상(장관)"이다. 사형시키면서 뒤집어씌운 죄가 "친일파" 9)김무정 일파: 중국 팔로군 포병 사령관이었던 무정을 죽이면서 뒤집어씌운 죄가 "미국 간첩, 친일파" 일본군과 만주에서 죽어라고 전투한 사람에게 붙인 죄가 친일파입니다. ―김일성 권력 핵심에 친일파 등용 ―(프로존 뉴스) 친일파 처단을 주장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북한의 김일성은 일제시대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 했으며 그가 북한에서 정권을 잡은 후 친일파를 숙청했다며 오히려 북한에 대해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과 김정일이 한국 근현대사를 자신들 가족의 혁명역사로 모두 왜곡해 버린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례로 1871년 신미양요의 발단이 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북한은 김일성의 증조부인 김응우가 주도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조선력사 3권 93~94쪽) 북한은 김일성이 1932년~1941년까지 만주에 산재해 있는 중국인과 한국인의 혼합부대인 ‘동북항일연군’(사령관, 양청우)에서 일본군과 싸웠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마적대 역할에 불과했다. 김일성은 자신의 경력을 조작하여 북한 인민공화국의 창건을 합법화 하고 스스로 수상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대한민국 정권을 가리켜 “친일 부역 배들인 한민당과 이승만이 결탁하여 세운 미제의 괴뢰정부이므로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고 주장해 한반도에 있어서 민족사적 정통성은 북한에 있고 그 근거는 항일 빨치산 투쟁을 했던 김일성 자신을 구심점으로 삼고 있다. 1941년 이후 김일성은 소련군에 입대해 대위가 됐으며 해방 후 평양으로 돌아와 모든 권력을 혼자서 독식하는 스탈린식의 독재체제를 이룩했다. 실제로 그는 스탈린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북한이 제대로 된 군대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부탁하여 10,000여명의 젊은이를 뽑아 소련의 군사학교에 위탁교육 시켜 미래의 장교들을 양성했으며, 병사들을 징집했다. 특히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의 입국환영 평양 군중대회에서 사진을 보면 그의 뒤에는 여러 명의 소련군 고위 장교들이 소련기 아래 서 있다. 이것은 김일성이 소련군의 영향력 하에 움직이고 있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북한의 공식간행물에 나오는 바로 이 동일한 사진에는 당시 소련군 장교들과 소련기를 지워 놓고 있다. 김일성은 권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하다면 친일파를 등용했다. 김일성의 동생이자 현재까지 북한의 실력자인 김영주(金英柱)는 과거 일본 관동군 소속이었으며 국가부주석을 지낸 김일성의 외척 강양욱(康良煜)도 종교*문화부문의 친일파였다. 한편 과거 남로당의 실력자며 6.25 전쟁기간 중 서울시 인민 위원장이었던 이승엽(李承燁)의 경우 일제시대 인천양곡조합 간부였으며 남로당 간부였던 정백(鄭栢)등도 친일파였다. 김필재 기자 - freezonenews.com -참고자료: 대한민국 건국 초대 내각, 李 대통령 포함 대부분 항일운동가- *부통령-이시영(李始榮*임정내무총장) *무임소장관-이윤영(李允榮*국내항일) *외무장관-장택상(張澤相*청구구락부사건) *내무장관-윤치영(尹致映*홍업구락부사건) *법무장관-이 인(李仁*항일변호사, 한글학회사건) *채무장관-김도연(金度演*2.8독립사건) *문교장관-안호상(安浩相*항일교육) *사회장관-전진한(錢鎭漢*국내항일) *체신장관-윤석구(국내항일) *교통장관-민희식(재미항일) *총무처장-김병연(국내항일) ] ⑨ 박정희 그는 대통령으로써 친일적 언동을 했다? : 대통령이 국가이익을 위해서 일본을 방문 및 우리나라가 필요한 협조를 받은 것이 친일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면 그때 일본과 외교관계를 끊어야 합니까? 또한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외교적 수사법으로 한 발언이 친일파의 기준이 될 수 있는지요? 못 먹고 사는 국민들을 먹이기 위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일본의 자본과 기술에 대해 가난한 나라로서 손을 좀 벌려야 하는 상황인데 지도자면 국민들을 위해 그보다 더한 것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공적, 사적 영역을 가리지 않고 외교석상에서 노 대통령처럼 나오는 데로 말을 하면 그것이 대통령으로서 해야 할 언행일까요? 진보 좌파세력들은 반일감정을 이용해서  친일적 외교 행태를 보였다며 맹비난을 하는데... 역대 대통령 치고 이러한 외교적 수사법과 처세술을 사용하지 않는 대통령이 별로 없습니다. 저들이 좋아하는 김대중 대통령을 봐도 히로히토 일왕이 죽었을 때 일본대사관에 마련된 빈소에 찾아가서 참배하였고, 전두환이 격하한 일왕 칭호를 천황으로 격상하였습니다. 하물며 '반미면 어떻냐?'는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후에 정작 미국 가서는 "미국이 없었다면 나는 수용소에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고 일본총리를 만나서는 우리땅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동해 바다를 앞으로 평화의 바다로 부르자고 하였습니다. ⑩ 박정희 대통령으로서 친일적이며 굴욕적인 한일협정 체결했다~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대일 청구권 문제의 타결을 위해 7차례나 회담, 우리가 요구하는 8억 달러와 일본이 제시하는 최고액 7000만 달러 중 무상으로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 상업차관으로 3억 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타결합니다. 한일회담 당시 일본의 국고는 14억 달러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위 조건은 작은 돈이 아닙니다. 즉 80억 달러 주겠다는데 박 대통령이 이렇게 받았겠습니까?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돈 주는 쪽이 일본인데... 우리가 많이 달라고 해서 일본이 그렇게 주겠습니까? 더욱이 애석하게도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승전국의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배상금이라는 것은 패전국이 승전국에게 주는 겁니다. 일본은 협상하는 동안 시종일관 배상금이라는 이름보다는 경제협력금, 독립 축하금이라는 이름으로 수교하길 원했습니다. 그들은 미국한텐 패전국이지 어부지리로 독립 얻은 한국에겐 패전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협상의 출발부터 우리나라에게 유리한 협상카드는 별로 없었습니다. 한일협정 성사 배경에는 사실상 미국의 압력이 주효했다는 지적입니다.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통합 군사전략의 일환으로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서둘렀다는 것이죠. 그들은 우리나라한테 일본에서 자꾸만 시비를 거는 독도에 대한 고유영토권을 포기하라고까지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노할 정도로 미국의 조속한 한일수교 협정체결 압력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참고자료-韓日 독도 공동소유 美제안, 박정희가 거부" 1965년 박 전 대통령이 일축 , 미 국무부 외교문서 확인 (신용일 기자) 한일협정 당시 독도 문제로 한국과 일본이 팽팽히 맞서자 미국이 협정 체결을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한일 공동운영 등대를 독도에 설치하는 안을 제시했다가 단호하게 거절당한 사실이 최근 비밀 해제된 미 국무부 외교문서에서 드러났다. 국무부 문서 ‘1964~68 미국의 외교관계 29편’은 363호에서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방미중인 박정희 대통령을 1965년 5월17일 만나 한일협정 진척을 축하했다. 이튿날 딘 러스크 국무장관이 한일 양국이 독도를 공유하며 천천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공동 운영 등대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가 박 대통령으로부터 있을 수 없는 일(Just would not work)’이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미국은 주한미군 유지비가 한일협정 타결로 줄어들기를 기대했으나 독도문제가 협정 타결에 장애물로 대두하자 독도에 이 같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는 로버트 W. 코머 미 국가안보위원이 1964년 5월19일 존슨 대통령과 특별보좌관 등에게 보낸 메모에서도 엿볼 수 있다. 코머는 “우리는 한국민 2,000만 명을 위해 연 3억 달러를 지출하고 있지만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어떡하든 한일협정을 타결시켜 일본 돈이 한국으로 유입돼 주한미군 주둔경비가 감소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협정이 성사되도록 밀어붙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 존슨 행정부가 독도문제에 대해 한국에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그러나 워싱턴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독도문제를 한일협정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박 전 대통령의 단호한 입장은 1965년 6월15일 윈트롭 브라운 주한 미 대사가 국무부에 보낸 364호 문건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브라운 대사는 문건 364호에서“독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가질 것을 제안하자 박 대통령이 ‘만일 일본이 독도에 대해 계속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하면 장관급 회담은 무의미하다. 만일 일본이 우리의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김동조 대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권을 갖고 있기에 그 같은 회담은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다. 일본과의 협정 그 어느 곳에라도 독도가 언급되는 것에 반대한다는 한국의 입장은 명백하다”고 재확인했다.―] 돈 몇 푼에 우리 땅 독도를 폭파하려고 했다 삼국조정 어쩌고 하면서 독도를 넘기려고 했다며 국내 진보 좌파세력들이 끊임없이 인터넷을 통해 온갖 음해와 모함을 자행해왔지만 역사의 진실은 이렇게 미국과 일본의 큰 압력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독도를 끝까지 배타적 경제수역 (EEZ) 우리 땅으로 지켰던 것입니다. 단지 국제 분쟁화 지역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술책에 직접적이고 감정적 대응을 자제한 정책기조를 선택했습니다. 독도 영유권에 정작 큰 문제를 야기한 것은 신한일 어업협정을 맺은 김대중 정권 그것을 계속 연장해준 노 정권입니다 60년대 그 당시 냉전시대의 강대국의 논리가 없었다면 과연 일본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한테 돈을 주면서까지 수교를 하려고 했을까요? 미국의 압력이 컸다는 것은 이미 뉴스에 보도되어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우리가 많이 달라고 해서 되는 문제의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약소국의 비애라 하겠지요. 진보 좌파들에 의해 박정희 정권이 독단적으로 식민지 피해에 대한 개인청구권을 포기했다고 유포된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받아내기 힘든 개인청구권 대신 국가가 대신 받는 정책으로 선회한 것은 이미 5.16혁명전의 이승만 정부 장면 정부부터 있었던 겁니다. 개인청구권이란 개인이 일본정부와 재판을 해서 배상받는 것인데 실제로 배상받은 사례는 거의 잘 없습니다. 일본이 주장했던 것은, 서류로 증빙할 수 있을 경우나 객관적 사실 확인이 가능한 경우에만 보상을 하겠다는 것이고, 하지만 우리는 6.25같은 전쟁 문제도 있고, 모든 부분을 세세히 증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정부는 그런 개인 보상도 포함해서 국가가 조선총독부의 대일채권이라든가 하는, 국가와 개인을 포함해 포괄적으로 청구권을 행사하겠다는 태도를 견제했던 것입니다, 결코 일본 정부가 인심 좋게 식민지 지배로부터 피해를 본 조선국민 개개인에게 넉넉한 피해보상을 하겠다는 것을 국가가 가로챈 것이 아닙니다. 이런 어려운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야 할 기술도입과 경제개발 종자돈을 배팅할 시기를 놓쳐야 한다니... 그 당시 아사자 동사자 전염병자 비일비재 하는 최빈민 국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을까요? 회담이 성사된 후 박정희 정권은 민족의 자존심을 팔았다'는 비난과 반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종자돈을 받아 투명하고 충실하게 모범적으로 사용하여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지금 보면 긍정적 평가가 국민적인 대세입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금액은 보는 관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수십억 달러를 요구만 하고 받지 못하면 괜찮고 그것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아 냈으면 친일파라니? 논리적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캐기 위해 만든 한. 일 외교문서 공개심사단의 민간위원으로 조사에 참여한 이원덕 국민대 교수의 글 인용합니다.― "세간에 의혹과 억측이 난무했던 한.일회담 관련 한국 정부 외교문서가 한 장도 빠짐없이 그 전모를 드러냈다. 한.일회담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기본조건이 비로소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한.일 외교문서 공개심사단의 민간위원 자격으로 3만5000여 장에 이르는 외교문서의 공개 검토 작업에 참여했던 필자는 한.일회담을 '대일 굴욕 협상' '매국외교'라고 단죄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오히려 필자는 악조건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난적 일본을 상대로 당시의 박정희 정부가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 결과로 최선은 아니라도 차선의 결실은 거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 노 정권이 위촉한 학자로 조사하러 들어간 사람이 이런 평을 한 것은 박 대통령이 역사 앞에 당당한 승리자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 - 위 사항은 정책결정사항이며 이러한 정책결정 사항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한다면 누가 진짜 친일분자인가? : 현대적 개념의 국토는 땅 하늘, 바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땅 독도는 현재 신한일 어업협정에 의거해 한일공동 어로수역의 중간에 들어가 있습니다. 독도수역에 대한 일본의 관할권에 법적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즉 우리의 국토인 독도를 국제법상 분쟁지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일본이 독도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위탁하려고 혈안이죠. 이 협정은 1998년 11월 28일. 김대중 정권(노무현 대통령은 DJ 정권의 해수부 장관출신입니다.)당시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럼 김대중 대통령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고 일본 대중문화를 완전 개방하고 신한일 어업협정을 연장한 현재의 노무현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친일파로 치자면 누가 진짜 친일분자인지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진보 좌파들은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에게 보상 못 받는 이유가 위의 대일청구권자금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았기 때문에 현재 못 받는 것일까요? :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정신대 문제와 관련하여 대일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발표하였으며, 11월 국제법률가협회에서 일본의 배상의무가 있으며, 19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에 불법 인권침해와 위안부 개인의 권리침해에 관한 청구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한국, 타이완, 일본, 필리핀, 타이, 홍콩 등 아시아 6개국 여성단체에서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즉 일본으로부터 위안부 문제로 보상받은 나라는 현재까지 없습니다. 참고로 각 단체들이 선정한 박 대통령의 친일파 여부는 아래와 같습니다. - 반민특위 : 해방이후 최초의 친일청산을 위하여 7000명을 조사 이 중 690명을 친일파로 선정하였습니다만 박 대통령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독립 운동가들의 총본산인 광복회(친일반민족행위자 692명)에서도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역사광복운동본부(친일파99명) : 이 단체는 박 대통령을 그들의 역사적 상상과 가정에 따라 신친일파로 분류했습니다. (내용: 이 단체는 만주에서의 박정희의 행적과 관련, 그가 독립 운동에 참여한 주장에 대한 비판과 만일 일본이 계속 득세하고 있다면 독립 운동가를 학살했으리라는 가정 그리고 해방이후 공산주의 활동 및 정권 잡은 이후 경제개발 등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친일파가 아닌 신친일파로 분류하였습니다. 이 단체의 역사적 상상과 가정에 의한 설정에도 간도특설대 이니 독립군 토벌과 같은 언급은 없음.)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한일역사문제 연구소 : 박정희, 장면 해당 없음 - 민족문제 연구소 : 박정희를 전형적 친일파로 주장함. 박정희 생애에 대한 왜곡된 만화를 편찬하고 좌익들과 열린 우리당 의원 선친을 뺀 친일인사 명단발표를 함으로써 박 대통령을 대표적 친일파라 규정함 그러나 친일파로서 어떤 구체적 반민족 행위를 했는지? 객관적 근거나 사실규명을 내놓고 있지 않습니다. [참고자료:- 민족문제 연구소의 실체 (노무현 정부 예산에서 8억원 지원) ― <노무현 정부와 민족문제 연구소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고발> 일제 패망과 함께 김일성은 소련군을 등에 업고 소련군 대위로 평양에 입성하여 38선 이북을 장악하였다. 곧바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감행한 김일성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명을 앗아 갔으며 골 깊은 민족 간의 갈등을 유발하였다. 전후 김일성은 중공군의 참전 댓가로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절반을 중국에게 헌납하였다. 노무현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일성, 김정일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고 있으며 얼빠진 인간들은 보란 듯이 북한 혁명열사 능을 참배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여운형은 일제 말(1943년) 수차에 걸쳐 일제의 학병지원을 독려한 당시의 신문기사가 발견되었다. 또한 일제에 전향서를 제출하고 황국식민서사를 한 명백한 친일파이자 남한 내 공산주의의 거두였다. 이런 여운형에게 노무현 정부는 특별법까지 제정하여 2005년 3월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김지태는 일제시대에 가장 악명 높은 수탈기관인 동양척식회사로부터 불하받은 2만평의 땅을 바탕으로 기업을 일으킨 대표적인 친일 기업인이다. 동양척식회사로부터 특혜를 받았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일본의 주구노릇에 충실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제 말에는 군수공장을 운영하여 일제에 협력하였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 부일장학회의 부일이라는 뜻은 일본을 부강하게 하자는 설도 있다. 노무현대통령은 중. 고등학교 시절에 김지태가 만든 부일장학금을 받았고 변호사 시절에는 당시 100억 원이 넘는 김지태의 상속세 관련 변호를 맡아 승소.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이후 노무현은 조세전문 변호사로 승승장구하며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민족문제 연구소는 친일인사명단에서 친일파의 거두 김지태를 왜 제외시켰는지 궁금하다. 또 민족문제연구소의 논리대로라면 민족의 재산과 노동력을 착취하여 긁어모은 친일파의 더러운 돈으로 공부하고 친일파를 변호하여 재산을 축적한 노무현 대통령도 마땅히 친일인사 명단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열우당 의원 부친들의 일제시대 행적- 1. 김근태 의장의 부친은 일제시대에 훈도였다.(당시 훈도는 군수 월급과 맞먹었으며 권한도 대단하였다) 2. 김희선 의원의 부친 김일련(가나이 에이이치)은 만주경찰 특무로 독립군을 수도 없이 색출하여 잔인하게 처형하였다. 3. 이미경의원의 부친 이봉권은 일본군의 핵심 사찰요원인 황군 헌병오장으로 최고의 호사를 누렸다. 4. 신기남 전 의장의 부친 신상묵(시게미쓰 구니오)도 헌병 오장으로 군림하며 독립군 색출과 잔인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다. 5. 정동영 전 의장의 부친은 착취와 수탈의 최 일선 기관인 조선식산은행 산하 금융조합 서기로 5년간 근무하였으며 6.25동란 당시의 행적도 불분명하다. 6. 유시민장관의 백부는 면장이었고 부친은 훈도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열린 우리당 의원들과 좌파들은 사실적 자료와 명백한 친일근거에도 불구하고 친일인사 명단에서 모두 제외되었다. 지난 8월9일자 북한의 로동신문에서는 남조선 민족 문제연구소의 김진호라는 사람이 김정일의 선군정치를 극구 찬양했다는 내용을 인용 보도하였다. 민족문제 연구소는 친북좌파라는 사실적 표현이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 하여 지난 3월3일 애국인사 8인을 민형사상으로 고소하여 재판이 진행 중에 있다. 대한민국의 공안당국은 민족문제 연구소 김진호라는 사람의 실체를 밝히고 이적행위에 대하여 당장 수사를 착수해야 될 것이다. 민족문제 연구소는 북한 로동신문의 기사에 대하여 왜 한마디 반박도 못하는지 의문이 아닐 수가 없다. 지난 2000년 11월5일에 민족문제 연구소, 민주 노동당, 서총련, 인터넷 대자보, 홍익대 민주동문회가 주동이 되어 문래공원 내 박정희 대통령 흉상을 끌어내린바 있다. 민족문제 연구소의 방학진은 박정희 대통령이 청산과 극복의 대상이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 했고 이날의 광란을 주도한 곽태영은 2005년 4월19일 4.19묘지에서 박근혜 대표의 화환을 짓밟은 장본인이다. 곽태영은 일제시대 자신의 창씨개명 사실을 아직까지도 숨기며 민족주의자 행세를 하는 파렴치한 위선자이다. 민족문제 연구소는 강만길, 이영희, 강정구 등 친북인사들의 소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 대한 친북좌파라는 표현이 명예훼손이라는 억측으로 코메디를 연출하고 있다. 눈만 뜨면 역사청산과 민족공조를 부르짖는 노무현 정부와 민족문제 연구소가 김일성, 여운형 등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해서는 궁색한 변명으로 면죄부를 주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공교롭게도 노무현 정부와 민족문제 연구소 그리고 북한정권이 부르짖는 역사청산과 현재의 한반도 정세를 바라보는 시각은 거의 일치한다. 이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이란 말인가? 우리는 노무현 정부와 민족문제 연구소 그리고 북한의 김정일이 왜 그토록 집요하게 박정희 죽이기에 골몰하는지 그 깊은 속내를 알아야 할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통치기간동안 북한의 김일성의 적화야욕을 제압하고 감언이설에 능한 친북 진보 좌파들의 망상을 보기 좋게 깨부쉈으며 북한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강한 대한민국을 건설하셨다. 지금 북한의 김정일과 친북좌파들이 대한민국을 장악하지 못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과 미국이다. 그들에게 박정희 대통령과 미국은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민족문제 연구소는 북한 김정일의 논리를 가장 충실하게 이행하는 전위대에 불과할 뿐이다. -박정희 바로 알리기 국민모임-] 결론 : 현재까지 밝혀진 박 대통령의 친일논란은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하급장교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 내근직에 정보장교로 근무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 외 사항은 전부 허위, 날조, 과장된 것들입니다. (일본육사와 인연을 맺은 한국인은 188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114명에 이른다. 여기에 만주국 군관학교 예과 졸업자로서 이 학교 본과에 편입, 졸업한 27명을 추가하면 141명이 된다. ) 조선인 중에 박정희 혼자만 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역사를 극단적인 흑백논리로만 따진다면 일본군 중위까지 하다 망명한 지청천 장군이나 중국의 장개석도 일본육사를 다녔는데, 그렇다면 이 사람들도 자연히 친일파가 되는 것인가요? 중국 사람들은 장개석을 두고 친일파라 얘기하지 않습니다. 진보 좌파세력들은 박정희가 출세를 위해 자발적으로 군인이 되었다고 맹비난을 하지만 그것은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일제시대 교사 박정희를 만주군 소위로 만들었던 것은... '일본에 대한 충성심' 이나 '출세욕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괴롭히고 멸시하며 집단구타한 일본인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울분 그리고 복수심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민족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과연 교사 박정희가 군인이 되었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우리 조상들이 뼈아프게 격어야 했던 식민지 시대가 낳은 아픔인 것입니다. 조선의 독립투사들을 잡아 죽였던 모택동의 군대 팔로군은 공산혁명을 위해 만주군과 전쟁을 한 것이지 조선의 독립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조선반도는 팔로군에게 점령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만약 만주군으로 팔로군과 상대한 게 명백한 친일 과거가 된다면 6.25전쟁을 일으켜 남한을 침략한 북괴 공산당과 중공군에 맞서 대한민국을 지켜낸 우리의 조상들은 뭐가 됩니까? 박정희 그의 평생을 전체적으로 조감해 본다면 힘없고 가난한 자신의 조국을 일본보다 더 부강한 나라로 만들려 했던 진정한 극일파였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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