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은 정말 평범하지 않은 한 해였다.
전세계의 화약고나 다름 없었던 발칸반도에서는 세르비아 군이 알바니아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종족간 충돌이 일어나 150만을 헤아리는 알바니아인들이 고향을 떠났다.
코소보 75개 도시와 마을에서 대규모 난민학살이 자행됐으며 당시 집단 처형된 알바니아인은
5천 명이상에 달한다고 밝혀졌다.
당시 세르이아 대통령이었던 밀로셰비치의 만행은 전세계를 들끓게 만들었지만
중국에서만은 언론 통제로 이 사건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며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유엔은 군사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 등 나토 회원국은 인도주의의 입장에서
출발, 3월 24일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공습을 개시했다.
1. 분노를 삭이는 외교
나토군이 공습을 시작한 시기는 중국 전인대가 막을 내린지 두 주일 지난 때였다.
주룽지 총리는 전인대 기자회견에서 미국 방문과 관련하여 “미국이 화가 났다면
나는 이번에 그 화를 풀어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때 미국과 WTO 가맹
문제를 가지고 담판한다면 중국은 많은 방면에서 엄청난 양보를 해야 했다. 이렇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슬슬 머리를 들기 시작한 국내의 민족 감정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렇다고 미국에 가지 않는다면 중국은 또 좋은 기회를 놓칠 것 같았다.
그리하여 정치국에서는 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집중 토론했다. 리펑과 첸치천(錢其琛)은
‘미국의 화를 풀어주는 것’은 도움을 청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동시에 나약함을
나타내는 것이라며 주룽지의 미국방문을 반대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달랐다.
그는 회담이 성공하면 공로가 자연히 총서기인 자신에게 돌아와 집권 기간에 그럴듯한
성과가 있게 될 것이나, 설사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자신보다 위망있는 주룽지의
인기를 한풀 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장쩌민과 막료들 사이에 오간 이야기를
들어보면 장쩌민은 주룽지가 실패하고 돌아오길 더 원했다.
자신이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경제 국면을 수습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장쩌민은
절대 주룽지를 등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하이에서 부터 장쩌민은 줄곧 주룽지의
인기를 질투했다. 매번 기자 회견이나 회의에서 주룽지는 언제나 성의 있고 감동적인
발언을 했으며 바르고 인정미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이는 진실하지 않은 장쩌민과
더욱 비교가 되었다. 홍콩과 대만의 아름다운 여기자들마저도 주룽지에게 존경하는
눈길을 보냈다.
주룽지의 태도는 명확했다. 그는 WTO에 가입하면 중국의 농업, 전신(電信)과 금융업이
충격을 받을 것이고 저효율적인 국영기업은 공평한 경쟁 속에서 대량 부도사태를
맞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너무 많은 양보는 피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주룽지에게 “중미 간 농산물협정 외, 전신, 금융 분야에서 모두 미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번에 미국에 가면 즉시 농산물협정에 조인하고
다른 것도 점차 대답할 것이라고 클린턴과 ‘구두협정’을 멋지게 맺어보세요”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주룽지의 ‘분노 삭이기 외교’는 큰 좌절을 당했다. 중국측은 장쩌민의
요구대로 많은 양보를 했지만 미국은 중국을 시장경제체재라고 승인하지 않았으며
또 기타 부가조건을 많이 제출했다. 결국 주룽지는 WTO 협정을 체결하지 못한
채 귀국하고 말았다. 한편 중공 원로들은 주룽지의 일방적인 양보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당시 은퇴하고 있었던 차오스(喬石)는, 이번 일이 장쩌민의 꿍꿍이라는 것을 알아
채고는 매우 분개하면서 “국가 이익이 언제 어디서나 제1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완리, 쑹핑(宋平) 등 원로들은 이를 새 ‘21개조약(역주 -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뒤, 중국에 있던 독일의 권익을
계승할 것을 요구하는 21개 조항을 위안스카이 정부와 체결했다)’이라고 장쩌민을
질책했다. 장쩌민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주룽지가 자신의 지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교활하게도 모든 책임을 주룽지에게 가볍게 떠밀어 버렸다.
4월 21일, 주룽지가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자 장쩌민은 그를 피해 중앙사무실
사람들을 거느리고 후베이성으로 회의하러 갔으며 국무원 부총리 리란칭(李嵐淸)도
랴오닝성으로 가도록 시켰다. 그리하여 주룽지가 비행기에서 내리자 맞아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중에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장쩌민은 마치 전과 다른 사람처럼
주룽지에게 왜 정치국의 결정을 어겼냐고 따졌고, 일부러 주룽지와 함께 출국했던
우의(吳儀)를 “끝까지 원칙을 지켰다”며 칭찬해 주룽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주룽지의 체면이 형편없이 된 것을 보자 장쩌민은 속이 시원했다.
2. 중공은 파룬궁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정권을 잡은 후 ‘9자’만 만나면 반드시 일이 생겼다. 1949년에
정권을 잡았고, 1959년에는 티베트 ‘반란’을 진압했으며, 인도와 전쟁이 일어났으며,
1969년에는 러시아와 전쟁했고, 1979년에는 베트남과 전쟁이 있었으며, 1989년에는
티베트의 ‘반란’을 진압한 뒤 잇따라 6.4 민주운동을 탄압했고, 1999년에는 파룬궁(法輪功) 박해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장쩌민과 중공 고위층이 탄압 전에 파룬궁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 그렇지 않다. 또 탄압과 박해가 1999년에 시작되었고 그 전에는
중공이 파룬궁과 평화적으로 지냈다고 여기고 있는데 이것도 사실과 어긋난다.
사실 중공 고위층은 일찍부터 파룬궁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 좋지 않은 심보를 품은 사람들 때문에 줄곧 많은 풍파가 있었다.
리훙쯔(李洪志) 선생은 1992년 5월에 법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베이징 쯔주위안(紫竹院)
공원에도 매우 큰 연공장이 있었다. 쯔주위안 근처에는 퇴직 간부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모두 군부나 국무원, 중앙기관에서 퇴직한 고위층 간부들이었다. 그들은 장쩌민,
주룽지, 뤄간, 리란칭 등의 선배였으며 중공이 말하는 진정한 ‘선배 무산계급
혁명가’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심지어는 2만 5천리 장정에 참가한 이들도 있었으므로
15차 당대표대회 상무위원들은 모두 그들의 부하였거나 훨씬 후배들이었다.
국무원에 주(周)씨 성을 가진 한 퇴직간부는 전에 주룽지의 상급이었으며 주룽지를
보면 샤오주(小朱 역주 - 중국에서는 자기보다 나이어린 사람[성년]을 친절하게
부를 때, 성씨 앞에 샤오[小]자를 붙임)라고 불렀다. 이런 퇴직 간부들은 한가했기에
기공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그들은 서로 자주 만났으므로 소문이 빨리
퍼졌으며 연공을 하게 된 후, 현재 고위층에 있는 후배들에게 파룬궁을 소개했다.
1996년 이전에, 쯔주위안에서 파룬궁을 수련했던 한 사람은 직접 장쩌민 저택에
가서 왕예핑(역주 - 장쩌민의 부인)에게 연공동작을 가르쳐 주기까지 했다.
대외 경제무역부 부장직을 맡았었던 리란칭에게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부하가 있었는데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다. 그 수련생은 1995년에 리란칭에게 파룬궁을 소개하면서
파룬궁이 국가와 민족에 유익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전법륜(轉法輪 역주 - 파룬궁
수련서적)’을 한 권을 주었다.
리펑도 그가 일했던 전력공업부 한 부부장의 소개로 ‘전법륜’을 읽었다. 중난하이에서
장쩌민은 리펑과 이웃에서 살았으므로 리펑은 또 장쩌민에게 ‘전법륜’ 한 권을
주었다.
장쩌민이 우한(武漢) 열역학기계연구소에서 일했을 당시 그의 상사였던 사람도
파룬궁을 수련했다. 그러므로 그는 회사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 장쩌민에게 파룬궁을
소개했다. 또 1996년, 장쩌민은 CCTV방송국을 시찰하다 한 직원 테이블 위에 ‘전법륜’이
놓여 있는 것을 보자 그 직원에게 “전법륜은 괜찮은 책입니다”라고까지 했다. 때문에
장쩌민이 1999년 4월 24일에 처음 파룬궁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뤄간도 전에 근무했던 기계과학원의 상사과 동료들의 소개로 1995년에 파룬궁을
알게 되었다.
또 후진타오는 1998년에 파룬궁을 접했다. 후진타오의 칭화대 동창생 장멍예(張孟業)는
간경화 복수에 걸려 얼굴색이 검푸르고 온 몸에 부종이 생겼다. 병원에서는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그는 파룬궁을 수련해 기적적으로 생명을 되찾았다. 1998년과
1999년, 장멍예는 두 번이나 베이징에서 있었던 칭화대 동창생 모임에 참석해 후진타오에게
직접 그가 겪은 일을 들려주고 또 후진타오 부인에게 파룬궁 서적을 우편으로 보내주면서
그들도 파룬궁 수련을 해서 건강하게 되길 바란다고 했다. 이에 후진타오 부인도
우편엽서를 보내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1999년 모임은 마침 ‘4.25사건(1만 여 명
파룬궁수련생들이 베이징 국가 청원사무실 앞에서 평화적으로 청원한 사건)’이
있었던 날이었다. 후진타오 부부는 동창모임이 끝나고 중난하이로 돌아오다 그 현장을
목격하고 즉시 베이징에 있는 동창에게 부탁해 남행 열차에 오른 장멍예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1992년부터 중공 각 부서, 위원회에는 모두 파룬궁을 연공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갈수록 많아졌는데 심지어 부부장 자리에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부장, 부총리에서
인대위원장, 정치협상회 주석에 이르기까지 거의 누구나 ‘전법륜’을 읽어 보았다.
또 정치국 7명 상무위원의 부인들도 모두 파룬궁을 수련했다. 당시 파룬궁은 사람들의
신체와 도덕에 큰 변화를 일으켰으므로 사람마다 다른 사람에게 전했는데 전파속도가
놀랄 지경이었다. 1999년까지 중국에서 ‘전법륜’을 읽어 본 사람은 1억을 초과했다.
3. 폭풍우 전야의 거센 바람
리훙쯔 대사(大師)에게는 수련생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배신자가 생기는 것도
피하기 어려웠다. 법을 전한 초기에 창춘(長春)에 있는 몇몇 책임자들이 파룬궁 규정을
거듭 어기고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상황에서 돈을 탐오, 유용했으며 공법을 멋대로
고치는 등 문제가 많았다. 리훙쯔 대사는 그들에게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누차 주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나중에 파룬궁을 반대하는 길로 나아갔다. 1994년부터 그들은
중공 13개 부서, 위원회에 파룬궁을 모함하는 편지를 썼는데 몇 십 만자에 달해 두툼한
책으로 3권이나 되었다. 그들은 편지에 12가지 죄를 열거했으나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할 때, 중공은 모두 이 편지 내용을 이용했다.
1995년 2월 9일, 중국 파룬궁연구회는 중국 기공과학 연구회와 기타 관련 부문에
상세한 설명 자료 3개를 보냈다. 이 자료는 창춘의 8명 수련자가 고발한 자료에 비추어 전문적으로
한 조목 한 조목 진상을 해명한 자료였다. 당시 많은 지도자들은 진상을 알고 모두
매우 놀라면서 “파룬궁이 이렇게 좋은데 왜 우리에게 통보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여태 이런 공법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나중에 자주 연락합시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되어 1994년 말 파룬궁 모함 사건이 해결되었다.
중공의 전임 총서기 후야오방은 기공에 대해 내린 지시로도 유명하다. 1980년
2월, ‘네이처’지는 상하이에서 처음으로 인체 특이공능 연구회를 열고 일부 초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초대해 현장에서 테스트를 진행했다. 후야오방 서기도 비서를 파견해
감정에 참여하도록 했다. 후야오방은 베이징에서 자신이 쓴 쪽지를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용기 안에 넣은 채 밀봉한 다음 비서에게 주면서 무슨 글자가 있는지 알아 오게
했다. 나중에 후야오방은 비서가 투시(透視)공능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알아온
내용을 들은 후 인체에 초능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믿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야오방은 중앙 선전부에 기공과 인체 특이공능에 대해 “선전하지 않고 논쟁하지
않으며 비판하지 않는다”는 지시를 내렸으며 소규모 기공 연구를 허락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3불(不)’정책이다.
1996년 중앙선전부 부부장 쉬광춘(徐光春)은, 기공을 책임진 부부장이 1개월 동안
출국한 틈을 타서 10개 큰 관영신문 총편집국장들을 불러 회의를 소집하고 ‘광명일보(光明日報)’에
파룬궁을 비판하는 문장을 실을 것을 요구했으며 기타 신문사에서도 전재하도록 했다.
뒤이어, 중앙선전부 산하의 언론출판부서에서도 전국의 언론출판부문에 ‘미신을
선전한다’는 이유로 ‘전법륜’, ‘중국파룬궁’ 등 파룬궁 서적 출판 발행을 금지하라는
내부 비밀문서를 하달했다. 쉬광춘의 이런 행위는 사실 후야오방이 제정한 ‘3불’정책을
위반한 것이며 파룬궁을 ‘형편없는 사교’라고 모함함으로써 정치 자본을 얻으려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각 신문사는 물론, 실질적인 탄압 기구인 공안부에도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 많았다. 전 공안부장 왕팡(王芳)이 바로 기공 매니아였으며 부인 역시 경건한
불교 신도였다. 왕팡은 퇴직 후 ‘불의와 용감하게 싸우는 사람들을 위한 재단’에서
일했다. 왕부장의 영향을 받아 공안부에는 기공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공안부 고위층 관리와 지방의 공안 관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파룬궁연구회 관계자
예호(葉浩)와 리창(李昌)도 원래 공안부 부국장과 처장이었다.
정부는 1996년, 탄압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미 파룬궁 진상을 해명할 것을 요구하는
몇 십만 군중들의 편지를 받았으나 나중에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뤄간은 1997년과
1998년에 벌써 파룬궁을 ‘사이비종교’라 정해놓고 탄압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했던 것은 파룬궁이 무슨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시 법률위원회 서기로
있었던 그가 더 위로 올라가는데 디딤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군인이 전쟁시기에
특별히 주목받을 수 있는 것처럼, 뤄간은 법률위원회 서기였던 자신이 각광을 받을
수 있는 사건이 필요했다.
뤄간이 당시 하달한 문서에는 파룬궁을 모함하는 내용이 명확히 드러나 있었다.
우선, 파룬궁을 ‘사이비종교’로 정해 놓고 지방 공안에 증거를 수집하게 했는데
이것은 먼저 죄를 정해 놓고 수사를 벌이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당시 공안부,
통일전선부 직원들과 첩보원들이 각 지역 파루궁 수련생들의 연공장에 찾아가 공법을
배우고 수련생들과 함께 ‘전법륜’을 읽었는데 모두 증거를 찾으려고 잠입한 것이었다.
사실 파룬궁수련생들의 활동은 모두 공개적이고 비강제적이었으며 명단 등록이나
회비도 없었다. 그리하여 잠입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파룬궁과 인연을 맺었는데 그들은
파룬궁에 대한 깊은 이해를 거친 후 진정한 수련생이 되었다.
그러나 뤄간이 발동한 두 차례 ‘조사’는 역시 일부 지역에 악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랴오닝성 차오양(朝陽)시 공안국에서는 각 지국에 37호 내부문서인 ‘파룬궁
불법활동 금지 지시’를 내려, 일부 수련생들은 수차례에 거쳐 벌금을 4000여 위안까지
부과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영수증도 발급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이 때문에
40여명 수련생들이 1천여 명 수련생들이 공동 서명하여 차오양시 공안이 국민의 합법적인
권리를 침해한 불법 행위를 고발하는 청원 편지를 가지고 공안부에 청원하러 갔다.
신장(新疆), 헤이룽장, 허베이, 푸젠 등 지역에서도 공안이 연공 중인 수련생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불법으로 재산을 몰수하며 민가에 뛰어들어 사유재산을 몰수하는
등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했다.
뤄간은 자료들을 수집하지 못하자 매우 조급해 졌다. 알고 보니 공안부에서 증거
수집을 책임진 사람들은 기공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으며 직접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는 사람 또한 적지 않았다. 때문에 뤄간이 탄압명령을 내렸지만 관계자들은 명령을
집행하기는커녕 아예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뤄간은 작전을 바꾸어 1996년부터
공안부를 개편하기 시작했으며 편제를 고쳤을 뿐만 아니라 원래 증거 수집을 책임졌던
사람과 기공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전부 물갈이 해버렸다.
이 일을 알게 된 주룽지는 뤄간을 불러다 한바탕 훈계했다. 그는 “중요한 일들을
다 제쳐 놓고 국민들과 첩보전을 벌이다니 이게 될 말인가!”라고 호통을 쳤으며 뤄간은
머리도 들지 못했다. 그러나 장쩌민과 사이가 좋았던 뤄간은 장쩌민만 믿고 파룬궁에
유리한 주룽지의 지시를 억류하고 전달하지 않았다.
4. 과학계 망나니 허쭤슈(何祚庥)
1998년 5월, 뤄간과 동서 지간인 허쭤슈가 베이징 TV방송국 사건을 일으켰다.
사건 원인은 허쭤슈가 베이징 TV방송국 ‘베이징속보’ 프로그램 기자에게 중국과학원의 쑨(孫)씨 성을 가진 석사과정 대학원생이 파룬궁을 수련하다 정신병에 걸렸다고
거짓 증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허쭤슈가 TV에 나오기 전에 그 대학원생과 한
침실에 있는 학생들이 여러 번 허쭤슈에게 그의 병이 파룬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설명해 주었다. 방송이 나간 뒤, 수련을 통해 이익을 얻은 많은 파룬궁수련생들은
자발적으로 베이징 TV방송국에 찾아가 진상을 설명했다. 베이징 TV방송국의 한 부사장은
파룬궁수련생들이 하나같이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자 즉시 착오를 시정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겠다고 해, 사건이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양원원사(兩院院士 역주 - 중국과학원과 중국공정원 과학자)’라고 자처한 허쭤슈는
사실 정치계를 파고드는 기회주의자였다. 그는 과학자들 앞에서는 정치가로 자처하고
정치가들 앞에서는 과학자로 자처했으며 특히 진정한 과학자들을 비판하는데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가 자연과학에도 정치적 계급성이 있다는 사상을 떠벌렸기 때문에 중앙선전부
과학부 부장의 마음에 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학 졸업 후 중앙선전부에서 일하게
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제한된 지식을 이용해 과학계에서 몽둥이를 휘둘렀다.
예를 들면, 지난 세기 초, 케쿨레가 벤졸 고리 구조를 밝혀냈지만 그 뒤로 몇
십 년 동안 화학자들은 더 이상 정확한 구조에 대해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노벨
화학상을 수여받은 폴링이 ‘공명론’으로 케쿨레의 가설을 이론적으로 해석했으며
이때부터 양자역학이 화학 구조학에 이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쭤슈는 이미 입증된
케쿨러 모형을 ‘자산계급 조화(調和)론’이라고 질책했다. 그리하여 많은 화학 전문가들이
여기에 연루되어 반성해야 했으며 중국 양자역학연구는 이 때문에 심각한 충격을
받고 장시간 중단되었다.
인공두뇌학(cybernetics) 이론으로 유명한 미국의 천재 수학자 노버트 위너는
허쭤슈가 졸업한 칭화대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1948년, 그는 연구 과정에 매가
토끼를 사냥할 때 매번 거의 실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원인을 밝혔다. 그는 매가
뇌 속에 있는 닫힌 피드백 컨트롤(Close loop) 시스템으로 토끼의 위치와 속도에 근거해
부단히 비행노선을 조절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위너는 또 만약 이런 제어 시스템을
고사포에 적용한다면 명중률이 대폭 제고될 것이라고 하면서 컨트롤과 커뮤니케이션은
동물과 기계에 공통한 영역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허쭤슈는 계급 지간에도 서로
용납할 수 없는데 하물며 동물과 기계가 어찌 공성이 있을 수 있냐며 또 다시 ‘계급조화론’의
몽둥이를 휘둘러 위너의 이론을 지지하는 여러명의 과학자들에게 타격을 가했다.
허쭤슈는 또 모건의 유전자설을 계급이론으로, 노벨상을
받은 겔만의 ‘쿼크가설’을 마르크스 레닌주의로 비판했으며 만년에 이르러서는 기공을 ‘비과학적’이라며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허쭤슈를 ‘사람은 늙었으나 공산주의 전사의
풍채는 여전하며, 몽둥이 휘두르기는 갈수록 능란하다’고 평가했다.
허쭤슈가 과학을 타격하고 중공 사상을 수호하는 공로가 있었으므로 ‘홍기(紅旗
역주 - 중공 당간지)’잡지는 그를 중국과학원 원사로 적극 추천했다. 이렇게 중국과학원
원사로 된 허쭤슈는 그 이름을 이용해 중공 관리들, 특히 장쩌민에게 아첨했다. 장쩌민의
‘3개 대표’ 이론이 언론에서 크게 선전되고 있을 때, 허쭤슈는 중국과학원 원내에서
열린 양자역학 세미나에서 “양자역학 운동 법칙은 장쩌민의 3개대표 이론에 부합된다”는
황당한 발언을 해 비웃음을 샀다. 솔직한 몇몇 학자들은 듣다 못해 즉시 자리를 떠났으나
대부분 학자들은 감히 그러지 못했다.
뤄간이 파룬궁 탄압을 이용해 장쩌민의 환심을 사려했으므로 동서인 허쭤슈도
있는 힘을 다해 과학의 탈을 쓰고 파룬궁 비방에 나섰다. 베이징의 한 부시장은, 허쭤슈가 원래부터 악명 높은
학자임을 알고 베이징시 언론들에게 파룬궁에 대한 그의 거짓
증언을 싣지 못하게 했으며 기공에 대해 “간섭 하지 않고, 선전하지 않으며, 타격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그대로 집행하도록 했다.
5. 정부의 조사 결과
국가체육총국에서도 1998년 5월 파룬궁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에 나섰다. 같은
해 9월, 의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사팀은 광둥성의 12,553명 파룬궁수련생을 상대로
표본 조사를 진행했는데 병을 제거하고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효과가 97.9%에
달했다. 또 10월 20일, 국가체육총국에서 창춘과 하얼빈에 파견한 조사팀 팀장은
“파룬궁이 건강에 매우 도움이 되는 공법이며, 사회 안정과 정신문명 건설에 매우
유리한 공법이라는 것은 확실한 듯하다”고 말했다. 다롄, 베이징 등 각지에서
동시에 진행된 민간 조사에서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왔다.
같은 시기, 차오스 등 전인대 퇴직 간부들도 공안이 불법으로 파룬궁수련생들을
대한다는 군중들의 제보로 파룬궁에 대해 조사를 진행했는데 “국가와 국민에게 백가지
이로운 점만 있고 한 가지 해로운 점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그해 말, 장쩌민과
정치국에 조사 보고를 제출했다.
한편, 파룬궁은 계속 급속도로 전파되어 1999년 초 국내의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수련자가 1억에 달했다. 또 ‘전법륜’은 각국 언어로 번역되어 전세계
30여개 국가와 지역에 전해졌다. 적지 않은 서양인들은 중국 수련자들처럼 중국어
원문으로 된 ‘전법륜’을 읽기 위해 만리 길도 마다하고 중국에 가서 중국어를 배웠다.
1999년 2월, 미국의 유명 시사주간지 ‘유에스뉴스&월드리포트’(US News and World Report)에서는 “파룬궁과
기타 기공은 1인당 해마다 의료비 1천 위안을 절약하게 하는데 만약 수련자가 1억명이
있다면 1천억 위안을 절약할 수 있다”, “주룽지 총리는 이 돈을 더
필요한 곳에 쓸 수 있게 되었다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 중국 국가체육총국 국장의
말을 빌려 파룬궁을 보도했다.
6. ‘4.25사건’
허쭤슈는 베이징에서 파룬궁을 비방하는 문장을 발표하지 못하자 톈진(天津)
교육부문에서 운영하는 작은 잡지에 ‘나는 청소년들이 기공을 연마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발표해 파룬궁을 모함하고 독자들에게 파룬궁을 수련하면 큰
문제가 생기며 심지어는 국가를 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 망언을 했다. 이 글을 본 많은
파룬궁수련자들은 만약 사실을 해명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합법적인 권리가 위협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객들에 의해 더러운 정치 투쟁에 휘말려 들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수천 명 파룬궁 수련자들이 자발적으로 편집부를 찾아가
진상을 해명했다. 수련생들의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교류를 통해 출판사측은 정정문을 발표하겠다고
태도를 표명했다. 그런데 갑자기 특수부대가 현장에 도착해 수련자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구타했으며 그 중 45명을 체포했다. 해외 언론들은 이번 폭력 사건을 뤄간이 직접
지휘했다고 지적했다. 톈진시 정부에서도 파룬궁 수련자들에게 특수부대를 동원한
것은 베이징의 명령이었다며 베이징에 가서 자세한 정황을 알아보라고 위안했다.
소식이 베이징에 전해지자 베이징 파룬궁연구회 책임자 리창, 왕즈원(王治文),
지례우(紀烈武) 등은 상의 끝에 4월 25일 베이징 청원사무실에 가서 청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알게 된 파룬궁수련생들이 서로 연락하여 소식을 알린 결과 그날
중난하이(中南海) 국가청원 사무실 밖에 집결한 군중이 1만여 명에 달했다. 이것이 바로
전세계를 놀라게 한 ‘4.25사건’이다.
당시 주룽지는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억울하게 우파로
몰린 적이 있는 주룽지는 민중들이 청원하는 것은 정부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특히 그는 지난해에 파룬궁 보호 명령을 하달한 적이
있었으므로 민간 청원 인원을 접촉하지 않고, 대화하지 않으며, 타협하지 않는 중공의
전통을 타파하고 직접 탄원하러 온 군중들을 만났다.
주룽지는 “당신들에게는 종교 신앙 자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많으니 할 말이
있다면 대표를 파견해 안에 들어가 이야기합시다”라고 말했다.
파룬궁수련생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모였기 때문에 서로 모르고 있었으며 대표도
없었다. 주룽지는 맨 처음으로 손을 든 세 사람과 함께 중난하이 서쪽 대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큰 소리고 물었다. “당신들이 반영한 정황과 관련해 이미 지시가 내려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세 사람은 놀라며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주룽지는 자신 내린 지시가 하달되지 못했음을 의식했는지 말머리를 돌려 “탄원실장이나
비서장을 찾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사무실 직원에게 그들을 찾아오도록 분부했다.
파룬궁수련생들의 요구는 간단했다. 즉 톈진에서 체포된 사람들을 석방할 것,
연공의 자유를 줄 것, 파룬궁 서적들을 합법적으로 출판하게 할 것, 이 세 가지였다.
주룽지는 즉시 톈진에 체포된 사람들을 석방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정부와 수련생들의 대화는 순조롭지 못했다. 법률위서기 뤄간, 중앙 사무실
부주임 왕강(王剛), 공안부장 자춘왕(賈春旺), 국무원 부비서장 추이잔푸(崔占福)
및 베이징시 부시장 멍쉐눙(孟學農) 등이 수련생들을 만났으나 장쩌민이 그들을 방임했으므로
파룬궁의 트집을 잡지 못해 안달인 뤄간은 수련생들이 제출한 요구를 한 가지도 들어
주지 않았다. 나중에 파룬궁연구회의 리창(공안부 관리), 왕유췬(감찰부 관리)등
5명이 중난하이에 들어가 대화했다.
저녁 8시까지 국무원 관리들과 파룬궁 대표들이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 1만여
명 수련생들은 밖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대화가 끝나고 톈진 수련생들이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은 청원자들은 즉시 해산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곳에 종이 조각 하나 버려지지 않고 깨끗했다는 점이다.
이 사건에 대해 해외 언론들은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파룬궁수련생들뿐만 아니라
이례적으로 개명함을 보인 정부에도 찬사를 보냈다. 이는 중공이 정권을 잡은 뒤
처음으로 국민들과 평화적이고 이성적으로 대화를 진행한 사건이었다.
일이 이로서 끝났다면 당연히 좋겠지만 이후 노발대발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장쩌민이었다.
7. 장쩌민의 질투
파룬궁 창시자에 대한 장쩌민의 질투는 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일찍 1993년부터
장쩌민은 자주 리훙쯔 선생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부인이 파룬궁을 수련했으므로 장쩌민은 파룬궁에 관한 소식을 적지 않게 알고
있었다. 왕예핑은 연공하고 돌아와서는 항상 장쩌민에게 누가 무슨 병에 걸렸는데
수련을 통해 건강을 회복했다는 둥, 또 누구는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걸어서 나왔다는
둥 이러한 일들을 들려주었고 가끔은 리(李) 대사가 어느 한 고위층 지도자의 전생(前生)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는 말도 들려주었다. 이 말을 들은 장쩌민은 자신의 전생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안달이 났다. 어느 하루, 장쩌민이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휴식하고
있었는데 부인이 연공하고 돌아왔다. 왕예핑이 방에 들어서자 장쩌민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다급히 물었다. “리 대사가 나에 대해 말한 것은 없어? 내가 전생에
누구라고 하던가?” 왕예핑이 말하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장쩌민의 얼굴은 실망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왕예핑은 1994년에 다른 사람에게서 파룬궁을 배웠다. 어느 날 저녁, 그녀가 연공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따라하는 기척이 들려 눈을 뜨고 보니 남편인 장쩌민이었다.
부인에게 들키자 장쩌민은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 왕예핑에게 다시는 연공하지
못한다고 호령했다. 그는 “마누라까지 리훙쯔를 믿으면 누가 나 이 총서기를 믿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당시 리 대사의 행동을 흉내내기를 매우 좋아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두 손을 교차해 아랫배에 놓는 자세였다. 원래 장쩌민은 연설할 때 두 손을
어디에 놓았으면 좋을지 몰라 그대로 드리우곤 했는데 나중에 리 대사가 두 손을
겹쳐 아랫배에 놓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따라하기 시작했다.
1995년 장쩌민은 ‘3강이론’을 선전하기 시작했는데 중앙에서 아무리 공력을
들여도 사람들은 시늉만 했을 뿐 진정으로 배우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와 비교되게
장쩌민은 도처에서 ‘전법륜’을 볼 수 있었으며 연공하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게다가 파룬궁을 수련하여 심신으로 좋아진 사람들은 리 대사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존경하고 감격해 하고 있었다. 더 장쩌민을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사람들이 장쩌민의 앞에서 자주 리 대사의 고상한 품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1998년 중국은 한 차례의 큰 수재를 겪었다. 당시 양쯔강 제방에서 시찰을 하던
장쩌민은 특별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보였으므로 흐뭇해하며 부하들에게 “저
사람들은 꼭 공산당원일 것이요”라고 하고 그 중 한 사람을 불러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신이 파룬궁수련생이라고 대답했다. 장쩌민은 질투의 불길이
타올라 얼굴을 찌푸리면서 자리를 떠났다.
이런 일들은 그나마 장쩌민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을 뿐이었지만 ‘4.25사건’은
장쩌민을 공포에 떨게 했다.
6.4천안문 대학살에 참여해 가장 큰 수혜자로 된 장쩌민은 마침 6.4사건 10주년을 맞기
전야인 그 때에 10년 전과 같은 겉잡을 수 없는 민중 항의 활동이 재연될까 봐 두렵기
그지없었다. 6.4는 장쩌민에게 최고 권력을 가져다 준 외, 위험 요소가 있는 사건을
초기에 진압하지 않는다면 보다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
그리하여 4.25사건 당일, 장쩌민은 즉시 베이징 경비부대에 전화를 걸어 만약
파룬궁이 저녁 늦게까지 해산하지 않는다면 베이징 부대를 출동해 중난하이 근처에
있는 파룬궁수련생들을 체포할 수 있는지 물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이 “베이징
주둔 부대는 장쩌민 주석의 지휘에 복종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장쩌민은 흡족해
했고
두근거리던 가슴도 안정을 되찾았다. 나중에 전화를 받았던 그 사람은 크게 진급했다.
오후가 되자 장쩌민은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경위국 국장 유시구이에게 전화를
걸어, “밖에 나가 ‘시찰’할 것이니 당장 계엄을 선포하라”고 말했다.
장쩌민은 방탄용 승용차를 타고 검정색 차창 뒤에 숨어서 ‘시찰’했고 파룬궁수련생들의 앞에는 장쩌민의 시찰을 위해 특별히 그어진 경계선이 있었다. 장쩌민에게
있어서 파룬궁수련자가 많은 것은 공산당과 민중을 쟁탈하고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조직이 엄밀하기 때문으로 보였으며, 중난하이에 온 것은
공개적으로 자신에게 도전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게다가 장쩌민은 사람들
무리 속에 몇 십 명의 장교들이 끼어 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이 자신이 아닌 파룬궁을
추종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또 해외 언론들의 찬사는 주룽지를 겨냥한 것이었으므로 장쩌민에 있어서는 설상가상이었다.
1994년 10월, 중공 4중 전회에서 제2세대와 제3세대의 권력교체가 완성되었다.
장쩌민은 쩡칭훙의 도움으로 천시퉁의 제거하고 군사권을 장악했으며 목을 죄고 있던
천윈, 덩샤오핑 등 원로들이 죽은데다 홍콩이 반환되는 대사까지 치르면서 점차 권력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하지만 장쩌민은 제아무리 노력해도 ‘천하에 따를 자 없다’던 마오쩌둥이나
‘말 한마디가 천금’인 덩샤오핑과 같은 위엄과 기세가 없어 큰일은 모두 정치국에서
토론하여 통과시켰다. 장쩌민은, 파룬궁이 누가 수련생들을 때리거나 욕해도 보복하지
않는 평화적인
수련단체인 것을 보고 그들을 누르기는 식은죽 먹기라고 생각했다. 장쩌민은 이번
기회를 이용해 누가 자신의 편에 서는지 알아보려고 했는데 이는 ‘사슴을 말이라고
시킨[指鹿爲馬]’ 조고(趙高 역주 - 진시황의 측근에 있던 내시로 시황제가 죽자 꼭두각시
불과했던 2세황제 뒤에서 실권을 장악)와 똑같았다.
장쩌민은 증거도 없으면서 파룬궁을 ‘해외 적대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는 ‘위험’한 정치단체라고 모함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파룬궁 탄압을
결정한 자신이
당을 위기에서 구한 큰 공로를 세운 것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며 다른 사람들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장쩌민은 또 3개월
안에 파룬궁을 소멸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과거 몇 십 년 동안의 정치
운동에서 이용해온 각종 수법을 통해 어느 누구든지 쉽게 다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쩌민은
파룬궁 탄압을, 힘을 들이지 않고 큰 정치 자본을 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다.
8. 고집
4월 25일 저녁, 장쩌민은 처음으로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은 채,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대자보를 썼던
마오쩌둥처럼(역주 - 1967년 8월에 개최된 제8기 11중전회에서 마오쩌둥은 이 대자보를 써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이 자본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정치국 전체 회원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 편지에서 그는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신앙하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 무신론이 설마 파룬궁이 선양하는 쓰레기들에게 밀린다는게
말이 되는가?”라고 했다.
상무위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는 또 편지에 “파룬궁이 서방 나라들과 관련이
있는지 여부, 막후에서 지휘하는 ‘고수’가 있는지 여부는 우리가 매우 중시해야할
문제이다. 위기가 이미 닥쳤으므로 반드시 빠른 시일 내에 유력한 조치를 취하여
재난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라고 썼으며 “파룬궁처럼 종교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단체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며, 관련 부문에서 반드시 방범 조치를 강화해야
한다. 파룬궁 총부가 해외에 있으므로 이번 사건 역시 해외세력이 배후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억측했다.
중앙사무실에서는 즉시 이 편지를 문서로 만들어 전국 각 지방 정부에 보냈으며
‘본 자료는 학습하고 관철하는 용도로만 쓰이며 의견청취, 토론, 연구용이 아니다’라는
특별 요구사항까지 추가했다.
4.25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뤄간, 자칭린과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회의를 열고
대처 방안을 상의했다. 장쩌민은 회의실에 들어설 때부터 얼굴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안고 온 자료들을 테이블위에 무섭게 던지며 “파룬궁수련생들이 중난하이에
모이자고 약속한 증거를 찾을 수 없긴 왜 없습니까? 인터넷에도 관련 공지가 있습니다.
이번에 각지에서 온 2만 여 명 파룬궁수련생들은 사전에 약속을 하고 분산되어 행동하는
방식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중난하이를 포위했습니다. 공안 부문에서는 사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뭘하고 있었습니까? 이런 직무 유기 행위가 다시 있어서는 안 됩니다!”하고
호통을 쳤다. 그리고 뤄간을 보며 “정권이 위협받고 있는데 안전 부문, 그리고
베이징시 정부는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이번 사건을 교훈으로
삼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비평했다.
이어 장쩌민은 시치미를 떼고 “파룬궁이라는 괴상한 이름을 가진 공법은 이번에
처음 들어보는데 어떤 단체이고 어떻게 설립 되었으며 우두머리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날 정치국 7명 상무위원 중 장쩌민을 제외한 기타 사람들은 모두 명확하게 진압을
반대했다. 주룽지는 “파룬궁수련생은 대부분 40대 이상이며 여성이 많습니다. 그들은
단지 신체를 건강하게 하려고 할 뿐입니다. 한 파룬궁수련생은 ‘지금 회사에서는
의료비를 지원해 주지 않는데 파룬궁을 연마해 신체를 건강하게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게다가 지금 실업자가 그렇게 많지만 파룬궁을 수련하여 마음을 닦았기에
폭동을 일으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범 인물보다 더 모범입니다. 이렇게 좋은 공법을
정부에서 왜 지지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이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제건설을 위해, 국제사회에서의 이미지를
위해 더 이상 정치 운동을 벌이는 과거의 방식으로 사상문제를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파룬궁에 정말 나쁜 사람이 있다면 개별적으로 처리하면 되니 일반 수련자들은 그냥
내버려 둡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손가락으로 주룽지를 가리키며 “당치
않는 소리! 당을 망치고 국가를 망치고 있네! 우리 동지들이 이처럼 앞을 내다보지
못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파룬궁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큰 착오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뤄간이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지 총서기께서 말씀해 보십시오”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히 없애야 합니다! 그럼요, 단호하게 없애야 합니다!” 장쩌민은 두 손을
내 흔들면서 “지금 급선무는 파룬궁수련자가 얼마나 되는지, 분포 상황은 어떠한지,
책임자가 누구인지, 전 사회를 동원해 찾아내게 하는 것입니다. 파룬궁이 우리와
민중을 쟁탈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꼭 정치적인 시각으로 당과 국가의 생사존망을
연결해 이 문제를 인식해야 합니다. 절대 방심하지 말고 철저하게 조사해야 합니다!”라고
고함을 질렀다.
이번 정치국 회의 기간 장쩌민은 내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지르며 히스테리에
가깝게 행동했다. 기타 위원들은 장쩌민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모두 침묵을 지켰다.
장쩌민이 이처럼 흥분해서 날뛴 것은 또 하나 말하지 못할 원인이 있었으니 바로
차오스가 파룬궁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차오스은 15차 대회에서 은퇴했지만 덩샤오핑이 후진타오를 제4세대 지도자 핵심으로
지정한 비밀을 공개했다. 때문에 장쩌민은 자리를 내놓기 싫어도, 또 자신의 측근을
대신 올려놓으려 해도 16차대회 때가 되면 후진타오에게 모든 권력을 넘겨 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장쩌민은 차오스가 지지하는 것이라면 무조선
반대했다. 이전에 양씨 형제가 선발한 100명 고위층 장령들은 전부 양씨 형제 세력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부 장령들은 단지 능력 때문에 선발되었지만 속 좁은 장쩌민은
명단에 오른 사람들은 무조건 강직시켰다. 예를 들면, 42세에 부총참모장으로 된
허치쭝(何其宗)은 양씨 형제에게 중용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나중에 권력을 잡은 장쩌민에
의해 난징부대 부사령관으로 내려간 채 다시는 승진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속 좁은 장쩌민은 차오스가 파룬궁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자 기어코
파룬궁을 탄압하려 했으며 극단적인 태도를 취했다.
차오스은 1998년 파룬궁에 대해 조사를 진행하고는, “국가와 국민에게 백가지
이로운 점만 있을 뿐, 한 가지 해로운 점도 없다”는 보고서를 썼으며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으나 민심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다”는 옛 사람들의 교훈을 부가적으로
강조했다. 이 보고서를 본 장쩌민은 불쾌해 하면서 즉시 뤄간에게 넘겨주면서 “뭘
썼는지 알 수 없어!”라고 했다. ‘총명’한 뤄간은 즉시 장쩌민의 뜻을 알아차리고
“파룬궁이 해외에 정치 세력이 있다”는 루머를 퍼뜨리는 동시에 부단히 사건을
허위조작하고는 파룬궁에게 죄를 덮어 씌웠다.
정협주석 리루이환(李瑞環)도 탄압을 반대했기에 여러 장소에서 장쩌민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아무런 실권이 없는 각 당파들을 이끄는 신분이었으므로
말해도 말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가장 한가한 4가지를
말하라면, 갑부의 마누라, 관리들의 돈, 실업자, 리루환이다”라는 우스개 소리가
나돌 지경이었다.
9. 탄압을 위해 가짜 증거 조작
장쩌민과 쩡칭훙은 정권을 탈취하고 공고히 하며 정적(政敵)을 타격하는데는
정보기관이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줄곧 국가 안전부를 손아귀에 단단히
틀어쥐려 했다.
장쩌민은 총서기로 당선된 후, 국가안전부를 통제하기 위해 ‘중앙정책연구소조’를
설립하여 국가 안전부를 지휘하게 했으며, 1997년에 정치국 후보위원, 조직부장으로
당선된 쩡칭훙은 측근을 국가 안전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장쩌민과 쩡칭훙은
국가안전부를 자신들의 정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기관으로 만들었다.
질투로 이지를 상실한 장쩌민은 어떻게든 파룬궁을 탄압하려 했으나 기타 6명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다며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쩌민과
쩡칭훙은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는데 바로 국가 안전부를 이용해 증거를 조작하는
방법이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에 있는 국가안전부 첩보원이 요구대로
“파룬궁 창시자의 배후에서 미 중앙정보국(CIA)이 수천만 달러의 경비를 제공하고
있다”는 등 가짜 정보를 보내왔고 이런 정보는 국가안전부를 통해 고위층에 전달되었으므로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정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기 어려웠다.
1992년 14차 대표대회 전야, 양씨 형제가 군사권을 탈취하려 하며 6.4사건에 명예를
회복해 주려고 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덩샤오핑을 속였던 장쩌민과 쩡칭훙은 이번에도
똑같은 수법을 되풀이 했다.
중공은 적대세력에 극히 민감하고 두려워하며 증오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장쩌민은 이를 이용해 ‘확실한 증거’들을 내놓으며 “당과 국가가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반드시 전력을 다해 파룬궁을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쩌민의 ‘노력’으로
이번 사건은 당과 국가의 운명과 관련되는 심각한 사건이 되었다. 중공은 당이 망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으며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죄를 감당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상무위원들은
장쩌민의 탄압을 감히 막지 못했다. 이렇게 되어 장쩌민은 고위층 관리들의
사상을 ‘통일’하는데 성공하고 중공 폭력기구를 이용하여 파룬궁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미 중앙정보국이 파룬궁을 지지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는 많은 중국인들을 속였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외국인들까지도 속였다. 예를 들면, 미국이 자본주의
국가의 리더로 되고 있는 것에 불복하는 프랑스는 늘 미국과 맞섰으므로 이번에 중공이
퍼뜨린 거짓말을 쉽게 믿었다. 그러나 나중에 자국 정보기관을 통해 조사한 결과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제야 파룬궁에 대한 경계를 느슨히 했다.
현재 국제사회는 파룬궁 배후에 그 어떤 정치 세력도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10. 겁쟁이 장쩌민
1999년 5월 8일, 나토와 유고슬라비아가 교전하는 과정에 중국대사관이 미사일
습격을 당해 기자 3명이 사망했다. 미국측은 실수라고 해명했지만 중국은 인정하지
않았다.
사건 발생 후, 중국 군부는 군사위 주석인 장쩌민에게 즉시 군복 차림으로 TV에
연설을 발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장을 입고 국가주석 신분으로 TV에서
항의하고 즉시 주중 미 대사를 만날 것을 제안하는 사람들도 있어 고위층에서는
의견 충돌이 심했다.
정작 큰일에 부딪히면 쥐처럼 담이 작은 장쩌민은 몹시 당황했으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쩡칭훙을 불러 상의한 끝에 장쩌민은 이 골치 아픈 일을
후진타오에게 맡겨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기로 결정했다. 일석이조의 효과라고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국가 부주석인 후진타오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처럼
중요한 일에 나설 이유가 없으므로 사람들은 국가주석 장쩌민 혹은 국무원 총리
주룽지가 나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만약 주룽지가 나서지 않는다면
분노한 사람들은 당연히 대사관 폭발 사건과 주룽지의 ‘분노를 삭이는 외교’를
연관시킬 것이며, 이렇게 되면 책임이 모두 주룽지에게 돌아가 주룽지가 계속 누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후진타오 방면에 있어서는, 그가 만약 연약하게
행동하면 분노한 국민들에게 실망을 줄 것이었으나 그렇다고 너무 강경하게 나오면
중미 양국 관계가 긴장해 질 것이었으므로 이번 사건이 16차 당대표대회에서 후진타오를
후계자 명단에서 제거할 수 있는 구실로 삼을수 있었다.
이런 타산을 한 장쩌민은 사건 발생 후 이틀 동안 줄곧 얼굴을 내밀지 않아 국민들의
불만을 샀다. 그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야 사람들은 TV에서 후진타오가 연설을 발표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3일이 지나도 장쩌민은 실종된 사람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중국인민대학에는 ‘장쩌민-겁쟁이’, ‘중앙 지도자들은 모두 죽었다’
등 표어들이 나타났으며 전 국민들은 사람마다 격분해 했다.
對중국 단파방송 - SOH 희망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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