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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대홍수에서 용맥(龍脈)을 사수하고 인명을 초개처럼 여겨

관리자  |  2005-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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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은 홍수, 큰 피해


1998년, 중국 양쯔강 유역에 보기 드문 큰 홍수가 발생했다.


중공 언론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번 홍수를 ‘백년 만에 발생한 대홍수’라고 보도했지만 수리 전문가들은 이번 홍수가 사실 그리 큰 홍수가 아니라고 말했다. 홍수의 크기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은 하천 수위가 최고치에 도달했을 때의 유량이다. 양쯔강 이창(宜昌) 관측소의 자료에 의하면 홍수가 발생한 기간인 8월 16일 최고 유량은 63,600㎥/초로, 평균 5년에 한 번 기록되는 최대 유량 60,300㎥/초를 조금 초과했을 뿐이며 평균 20년에 한 번 기록되는 최대 유량 72,300㎥/초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홍수는 의외로 큰 피해를 가져왔다. 정부의 내부 통계에 따르면, 약 두 달간의 홍수로 4억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직접적인 경제 손실은 3000억 위안에 달했다.


중국 내에서는 이번 홍수 피해 원인이 천재(天災)인지 인재(人災)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많은 전문가들은 인위적인 비중이 더 크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장쩌민이 바로 이번 홍수 피해를 가중시킨 주범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2. 용맥(龍脈)을 사수


1998년 8월 6일, 양쯔강 상류가 여름철에 들어서 4번째로 위험수위를 초과하여 후베이성 이창까지 곧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후베이 서기 자즈제(賈志杰)와 성장 장주핑(蔣祝平)은 양쯔강에 설치된 수문을 열어 징(荊)강으로 물을 빼는 방안을 중앙에서 비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정오가 되자 사시(沙市 역주 - 이창보다 양쯔강 아래쪽에 위치해 있음)의 수위가 44.68m에 도달해 1954년 특대형 홍수 때의 최고수위인 44.67m를 초과했고 징강 주변 주민들은 안전지대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16시간 이내에 33만 명 시민과 1만8천 마리 소가 대이동을 끝냈지만 양쯔강 수문은 열리지 않았다.


국무원이 제정한 양쯔강 홍수방지 계획서에는 “사시의 수위가 44.67m에 도달하면 반드시 수문을 열어 징강으로 물을 빼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징강 주변 주민들은 12일과 16일에도 모든 준비를 마치고 대피소로 이동했으나 수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17일 9시, 사시 수위가 사상 최고 수위인 45.22m에 도달해 1954년의 최고 수위를 0.55m를 초과했다.


그 전날인 8월 16일 22시 30분, 원자바오는 수문을 열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사시에서 현지 기상청과 수리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4시간 전인 18시 20분에 이미 양쯔강 연안에 주둔해 있는 군부에 “군민이 단결하여 양쯔강 제방을 사수(死守)하자”는 명령을 내려 양쯔강 수문을 여는 방안을 거절했다.


사실 장쩌민은 7월 21일에 벌써 양쯔강 제방을 사수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날 밤 12시, 장쩌민은 원자바오 부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양쯔강 연안 각 성에서는 홍수 대비를 잘하고..., 제방을 사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7월 28일, 세 번째 최고 수위가 우한(武漢) 삼진(三鎭)을 위협하고 있을 당시 신화사는 “장쩌민이 이번 일을 주목하고 있다”고 하면서 “원자바오에게 전화로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제방도 살아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8월 14일에도 장쩌민은 후베이성에 내려가 “반드시 목숨 걸고 양쯔강 제방을 지켜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양쯔강 수위가 위험수위를 초과해 계속 급격히 상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방을 사수하자’는 구호는 높아만 갔다. 양쯔강 연안 지역에서 여러 차례 징강으로 물을 빼자고 제안했지만 장쩌민은 허락하지 않았다.


사실 선진국들에서는,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사전에 협의를 거친 인근 하천으로 물을 빼는 것은 홍수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이는 사회, 경제, 생태 환경에 파괴가 가장 적으면서 돈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이다. 징강에 물을 빼는 수문은 1952년에 완공되었으며 1854년 특대형 홍수 때 세 번이나 개방돼 관건적인 시각에 양쯔강 수위를 0.96m 낮출 수 있었다. 전문가들은 1998년에 징강 수문을 열었더라면 마찬가지로 사시의 최고 수위 45.22m를 44.26m로 낮출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으며 양쯔강 제방도 그처럼 위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람들은 왜 장쩌민이 전문가들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장쩌민이 당시 중난하이에서 인기 있는 한 점쟁이가 “용맥(龍脈)을 보호해야 한다”고 한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쩌민은 징강에 물을 빼기 위해 제방 수문을 열면 스스로 ‘용맥’을 끊어 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랑이 해인 1998년은 마침 장쩌민이 정권을 잡은 뒤 처음 맞는 본명년(本命年 역주 - 중국인들은 자기 띠가 돌아온 해를 본명년이라 하며 고비를 넘겨야 하는 해로 생각한다)이었기에 장쩌민은 더욱 점쟁이의 말을 따르려고 했다.


중공은 ‘무신론’을 주장한다고 하지만 풍수를 믿고 점을 치는 고위층 당간부들은 부지기수이다. 마오쩌둥이 금위군(禁衛軍)을 ‘8341’로 명명한 것이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마오쩌둥이 베이징으로 들어가기 전, 한 도인이 그에게 ‘8341’ 네 숫자가 길하다고 알려주었다. 마오쩌둥은 무엇 때문인지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여전히 망설임 없이 금위군 이름을 그 숫자로 결정했다. 사람들은 마오쩌둥이 죽은 뒤에야 ‘8341’이란 숫자가 그가 83세까지 살 수 있고, 1935년 준의회의 때부터 1976년까지 최고 권력을 41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공 고위층 간부들은 장쩌민도 풍수를 믿고 음양과 운명을 믿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6.4천안문사건을 탄압한 후, 장쩌민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주 풍수를 보았고 베이징에서 세 가지 일을 했다. 첫째, 바이양뎬(白洋淀, 베이징 남부에 있는 호수)에 물을 추가로 부었다. 베이징은 6대 제왕의 수도로 동쪽, 서쪽, 북쪽 삼면이 산에 둘러 싸여있고 남쪽에 물이 있어 풍수로 보면 그야말로 보배 땅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중공 통치가 조성한 생태위기로 베이징의 남쪽에 위치한 바이양뎬이 말라버릴 위기에 처했다. 장쩌민은 ‘허베이 명주’로 불리는 바이양뎬을 되살린다며 물을 부었는데 사실은 베이징의 좋은 풍수를 유지해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둘째, 천안문 광장 국기 게양대의 높이를 높였다. 풍수 선생은 마오쩌둥 시신이 있는 마오쩌둥 기념당이 고궁 풍수에 영향을 주고 있는데다 국기 게양대의 높이가 기념당보다 낮아 음기가 너무 세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국위와 애국심을 내세워 게양대를 높였다. 셋째, 그는 천단(天壇) 공원의 토산(土山)을 없앴다. 이 토산은 마오쩌둥 시대에 비상식량을 저장하기 위해 땅굴을 파면서 생겨난 것으로 천단공원 서쪽에 있는 기년전(祈年殿)보다 더 높이 쌓여 있었다. 풍수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장쩌민은 토산을 없애고 그 자리에 측백나무를 심었다.


장쩌민은 미신적으로 좋지 않다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게 피했으므로 전국 어디를 가도 누를 진(鎭)자가 있는 전장(鎭江 역주 - 장[江]쩌민을 누른다는 의미)에는 절대 가지 않았다. 부하들도 대화 중에 그가 기피하는 단어를 썼다하면 즉시 관직에서 떨어지는 등 대가를 치러야 했는데 성급 간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前) 후난성 서기 왕마오린(王茂林)은 임직 기간 중에 시찰을 온 장쩌민을 맞으러 공항에 나간 적이 있었다. 왕마오린은 장쩌민 일행을 영접할 만반의 준비를 다해놓고 장쩌민을 만나자 매우 열정적으로 “베이징에 가면 당신의 말을 들어야 하고, 후난에 오면 저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중국에서는 이 말이 손님을 잘 모시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독재자 장쩌민의 귀에 이 말은 왕마오린이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선언으로 들렸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왕마오린을 베이징에 불러 아무런 실권이 없는 정신문명 지도소조 부조장을 맡게 했다. 왕마오린은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그 후부터 백방으로 장쩌민에게 충성심을 보였으므로 장쩌민은 나중에 그를 610사무실(역주 - 파룬궁 탄압 기구) 주임으로 임명했다. 그 결과 왕마오린은 2004년 말, 파룬궁수련생들에 의해 해외 법정에 피소되었고 파룬궁 박해를 반대하는 국제인권단체 ‘국제추적조사조직’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장쩌민은 또 이름이 길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중용했다. 텅원성(縢文生), 자팅안(贾廷安), 유시구이(由喜貴), 왕후닝(王滬寧), 리창춘(李長春) 등 사람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장쩌민이었기에 이번 대홍수에서도 ‘용맥’ 때문에 양쯔강 수문을 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주룽지, 원자바오 등은 마지못해 장쩌민의 지시를 집행하면서도 외신 기자들에게는 수문을 열면 경제 손실이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이번 홍수 기간, 징강 주민들은 모든 준비를 끝내고 세 번이나 안전지대로 이동해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이는 사실과 부합되지 않았다.


장쩌민에게 있어서 재해지역의 억만 민중들의 생사는 그의 ‘용맥’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3. 군대를 지휘해 군사권을 공고히 하다


장쩌민이 수문을 열지 못하게 한 다른 한 원인은, 이번 기회에 군부를 지휘해 군사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장쩌민은 군사위 주석이었지만 평생 총 한번 만져보지 못했고 노장군들처럼 전쟁터에서 싸운 경력은 더욱 없었으므로 군부에서 위신을 세울 기회가 없었다. 때문에 장쩌민은, 관건적인 시각에 군인들이 정말로 자신의 지휘에 무조건 복종할 것인지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덩샤오핑이 죽은 후, 장쩌민은 군부에서 덩샤오핑처럼 절대적인 권위를 세울 기회를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평화 시기에 대규모로 군인들을 이동하거나 훈련시키려면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주변국에서 불안해하고 항의할 것이며 심지어 국제적인 문제로 확대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1998년 여름에 들어서 양쯔강 전체 유역이 홍수 위협을 받자 장쩌민은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8월 7일, 주장(九江)의 양쯔강 제방이 터지자 그날 저녁 장쩌민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확대회의를 소집하고 해방군과 무장경찰부대를 제1선에 긴급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총 참모장 푸취안유(傅全有)는 즉시 현지 부대에 명령을 하달해 2시간 내에 현장에 출동할 것을 요구했다.


이번 행동에 장쩌민은 광저우, 지난(濟南), 난징, 베이징과 선양의 공군부대, 해군부대, 제2포병부대, 무장경찰 부대와 연안 지역 해방군대학, 전문대학 총 10여개 부대, 30만 군인을 동원했다. 또 114명 장령과 5천여 명 사단(師團)급 간부들이 장쩌민의 지시에 따라 직접 양쯔강 제방을 찾았으며 민병과 예비군인도 500만명 이상 참여했다. 그리하여 이번 행동에 참가한 총 군인수는 중공이 정권을 잡기 전야에 있었던 화이하이(淮海), 랴오선(遼沈), 핑진(平津) 3대 전역에 참가한 해방군 총수를 초과했다.


장쩌민은 제방을 막으러 온 부대에 ‘교환 지휘’ 훈련을 시켰다. 예를 들면, 광저우와 난징 부대에 서로 사령관을 교환해 지휘를 받게 했는데 이는 군사훈련에서나 있는 행동으로 홍수 방지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홍수 방지에 투입된 부대는 늘 명령을 받고 ‘진지’를 옮겨야 했다. 예를 들면, 한 전차부대는 우한에 긴급 공중투하 된 후, 다시 800리 밖에 있는 스서우(石首), 젠리(監利)로 강행군을 해야만 했다. 만약 단순히 홍수 때문이라면 직접 스서우와 젠리에 투하시키면 더 빠를 것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 베이징의 한 부대는 장시성 주장에 투입되었다가 명령을 받고 후베이 사시로 옮겨 갔고 나중에는 또 후난 웨양(岳陽)으로 급급히 이동했다.


사실 장쩌민은 ‘홍수 피해 방지’라는 구호를 내걸고 국민들 앞에 자신을 내세우려 한 것뿐이며, 평화 시기 군부에서 자신의 권위를 시험해봤을 뿐이었다. 만약 수문을 여는 방안을 채택했더라면 장쩌민은 이와 같이 대규모로 군부를 움직이거나 군사훈련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쩌민의 눈에 재해지구 억만 민중의 생명과 재산은 군부를 움직이는 구실로 이용되었으며, 몇 십만 군인들의 생명은 더더욱 초개같았다. 그러나 군인들은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면서도 자신과 국민들의 생명을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한 사람이 바로 군사위 주석인 장쩌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 기간 장쩌민은 군사위 주석으로서의 재미를 톡톡히 맛보았다.


8월 13일 오전, 장쩌민은 군사위 부주석 장완녠, 중앙 사무실 주임 쩡칭훙과 함께 후베이 사시 상공에서 헬기로 양쯔강 제방과 군인들을 돌아보았다. 헬기 안에서 장쩌민이 장완녠에게 현재 양쯔강 제방에 투입된 부대가 얼마나 되는지 묻자 장완녠은 해방군과 무장경찰 13만 명, 민병 200여만 명 된다고 했고 후베이에서 8만 명, 지난, 난징 부대에서 5개 사단의 병력이 대기하고 있어 수시로 투입시킬 수 있다고 대답했다. 장완녠은 또 “해방전쟁 도강(渡江)전역 이래, 아군이 양쯔강 연안에 투입시킨 병력이 이번이 가장 많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징강 제방에 도착하자 기자들이 몰려왔다. 장완녠은 카메라 앞에서 군용지도를 펼쳐놓고 장쩌민에게 홍수 피해 방지 부대의 이동과 배치 상황을 회보했다. 군복 차림을 한 장쩌민은 총지휘관마냥 장완녠에게 “지난(濟南) 부대의 위치가 어떻게 됩니까?”하고 물었고 장완녠은 지도를 가리키며 “우한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장쩌민이 또 “낙하산부대는?”하고 묻자 장완녠은 “훙후(洪湖)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이어 기타 상황을 장쩌민에게 보고했으며 보고가 끝나자 장쩌민이 연설을 했다.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우리의 부대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과 덩샤오핑 이론으로 무장한 부대이며 국민들과 떨어질 수 없는 혈육의 정을 맺고 있는 인민의 군대입니다. 계속 하는 말이지만, 군민은 한 몸과 같거늘 천하에 당할 자 어디 있으랴!”


장쩌민은 정말 흐뭇했다. 평화 시기에 사령관은 제멋대로 발언해도 큰 문제가 없었으므로 이런 식의 공연을 장쩌민은 몇 번이라도 반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전쟁이 터졌다면 장쩌민은 어떻게 행동할까?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어찌되었든 장쩌민은 양쯔강 홍수를 이용해 한국전쟁 이래 가장 큰 군사 행동을 조직했고, 양쯔강 연안에 도강(渡江)전역 이래 가장 많은 병력을 투입했으며 위험한 상황에서 오직 ‘핵심’인 자신에게만 복종하는 군인들의 ‘정치적 각오’에 크게 만족했다. 이번 군사 행동을 통해 장쩌민은 진정으로 군사권을 장악하면서 제2세대와 제3세대 사이의 실질적인 권력 교체를 했는데 이것이 바로 ‘제방을 사수한’ 두 번째 진실한 원인이었다.


4. 제방이 터지자 애처로운 비명 사방에서 들리다


홍수 기간, 장쩌민은 군대와 무장경찰을 추가 파견하도록 끊임없이 명령한 외, 또 지방 관리들에게 인력과 재력을 아끼지 말고 제방을 사수할 것을 요구했다. 수리 부문의 통계에 따르면, 양쯔강 연안 지역에서 동원된 군인과 군중은 7000만 이상, 투입된 자금은 100억 위안에 달했다.


양쯔강 수문을 열지 않고 ‘제방을 사수’, ‘인력과 물자를 무제한 공급한다’는 장쩌민의 요구대로 이번 홍수에 엄청난 인력과 자금이 투입되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8월 1일부터 5일사이, 자위(嘉魚)현 파이저우(排洲), 주장(九江), 장신저우(江心洲) 등 지역의 양쯔강 지류 제방이 잇달아 터졌고, 7일에는 양쯔강 간류 제방이 터졌다.


8월 1일, 가장 먼저 터진 자위현 외강(外江) 허전(合鎭) 제방에서는 군인과 군중들이 5일 동안 주야로 사투를 벌린 결과 간신히 터진 곳을 막았지만 5일에는 자위현 파이저우, 주장, 장신저우 제방이 잇달아 터졌다.


양쯔강 자위현 파이저우는 인구가 밀집되고 토지가 비옥하며 기후가 적당할 뿐만 아니라 공상업도 매우 발달해 공업단지와 광산이 즐비했다. 이번에 하천이 범람하자, 하류에 있는 20여개 촌의 젊은이들이 모두 제방을 막는데 나서 집집마다 노인, 여성과 어린이들만 남았다. 한 달 동안이나 물에 잠겨 있던 제방은 갈수록 높아가는 수위의 부하를 당해내지 못해 5일 새벽에 끝내 터지고 말았다. 강물은 50m나 되는 ‘출구’를 통해 사나운 기세로 마을, 공업단지와 광산, 학교, 농경지를 덮쳤다. 제방을 지키고 있었던 100여명 군인과 무장경찰들이 즉시 물살에 휘말려 들어갔고 마을에 남아있던 노인, 여성 및 어린이들은 잠도 깨지 못한 채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 당황한 사람들은 지붕 위나 큰 나무로 올라갔으나 집과 나무도 곧 물살의 충격으로 넘어졌다. 세세대대 부지런하게 일하여 일궈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졌으며 닭, 오리, 돼지, 소 등 가축들도 홍수에 떠내려갔다. 5일 새벽 3시부터 다음날 오후까지 짧은 시간에 반경 수십 킬로미터가 모두 물바다로 변하고 애처로운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부 관리들은 대형 트럭과 선박을 이용해 제방이 터진 곳을 막는 한편, 구조대를 보내 생존자를 찾게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제방이 터진 곳에 아무리 모래 자루, 폐차, 폭파한 선박 등을 집어넣어도 순식간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 구조대들도 사나운 물결 속에서 자신의 안전도 보장하기 어려웠으므로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자위현에서 8월 6일부터 7일까지 큰 나무나 빌딩에 올라간 소수 사람들만 구조 되었을 뿐, 1만1천 명이 실종되었다. 나중에 자위현 정부에서 통계한 내부 수치에 따르면, 두 차례 제방이 터진 기간 노인, 여성과 어린이 1만1천 명이 사망 혹은 실종되었고, 제방에 있던 군인 및 민중은 1천여 명이 사망했거나 실종되었다. 이번 홍수로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는데 한 가족이 전부 몰살한 사례도 많았으며 모두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8월 5일, 양쯔강 하류에 속하는 주장, 장신저우에서 제방이 동시에 터졌지만 다행히 모두 한낮이어서 인명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7일, 주장에서 또 다시 제방이 터지자 당황한 지휘관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물살을 막기 위해 자루에 담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던져 넣게 했다. 그리하여 당시 제방이 터진 곳에는 쌀, 벼, 콩 등 농작물 500만 톤, 대형 트럭 50여대, 선박 18척이 들어갔다. 나중에 장자커우(張家口)에서 온 200여 명 특수 부대 군인들이 터진 제방 주변에 말뚝을 박고 판자를 세운 뒤 다시 흙과 모래를 부어 넣는 방법으로 겨우 물살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입은 직접적인 경제손실은 총 82억 위안에 달했고 파이저우에서 1만 2천여 명이 사망한 외, 허전 제방, 주장 지류, 장신저우 및 주장 간류에서의 4차례 범람으로 총 6천여 명이 사망하고 500여억 위안에 달하는 경제손실을 입었다.


8월 중순까지 2억4천만 명이 홍수 피해로 고향을 떠났으며 남아있는 이재민들은 전염병에 시달리는 등 줄곧 여러 가지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렇다면 쿤이 “중국을 개변시켰다”고 하는 장쩌민은 그 때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쿤은 그의 책에서 “9월 초, 장쩌민이 유명한 영화계 인사 15명을 중난하이에 초대했다”라고 썼다. 장쩌민은 그들을 청해 자선 공연을 조직하려 한 것이었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장쩌민의 말을 빌린다면, 그 때가 장쩌민에게 있어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쿤의 장쩌민 평전에는 “쩡칭훙은 상사인 장쩌민이 기분이 아주 좋은 것을 보고 시 한 수 읊으라고 청했다. 이런 경우에 거절이라곤 모르는 장쩌민은 즉시 러시아어로 시를 읊었다.”, “예상대로 장쩌민은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쩡칭훙은 즉시 다른 사람들에게 노래를 따라 부르게 했다.”, “장쩌민이 연주한 것은 소련 가요 ‘모스크바 외곽의 밤’이었다. 그 때 한 젊은 여배우가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어 사람들은 또 당시 유행했던 노래 ‘바다여, 내 고향’을 불렀다. 모두 가사를 알고 있었기에 함께 불렀는데 장쩌민이 가장 신나게 불렀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양쯔강 연안 지역이 망망대해로 변해 억만 국민들의 생명이 위급한 시각, 장쩌민은 ‘바다여, 내 고향’을 불렀다. 자신에게 불리한 말들은 그토록 조심스레 피하면서도 아무 거리낌 없이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그에게 인민들의 질고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겠는가?


1998년에 열린 제7회 하천퇴적 국제학술포럼에서 전 수리부 부장이며 9차 전인대 상무위원인 양전화이(楊振懷)는 홍수 피해가 컸던 주요 원인은, 원래 계획에 따라 수문을 열지 않아 양쯔강 수위를 낮추지 못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큰 죄를 진 장쩌민은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관리들의 입을 단속하는 동시에 사망자와 재산 피해 통계 수치를 50배 이상 축소시켰다.


장쩌민은 이번 홍수에서 자연 법칙에 따라 양쯔강 부하를 줄이자는 수리 전문가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 큰 손실을 빚어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쿤은, “장쩌민은 사람들이 홍수 피해 방지에서 거둔 성적을 칭찬하면서 그들이 공산당과 사회주의 제도 및 인민해방군의 중요한 역할을 증명했다고 말했다”라고 썼다. 장쩌민은 또 중화민족까지 끌어내 자신의 죄를 덮어 감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이번 승리는 자강하고 간고 분투하는 중화민족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보여주었으며, 응집력이 매우 강한 위대한 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라고 말했다. 응집력이 강하다고 했는데 어디에 응집하는 것을 가리키는가? 바로 자신의 주변에 응집하는 것을 가리킨 것이었다.


중국공산당 언론이 “백년 만에 터진 대 홍수”라고 불어대는 바람에 인위적으로 조성된 큰 재난은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인 것처럼 알려졌으며 장쩌민의 죄도 따라서 덮어 감춰졌다.


이는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년 동안 있었던 대기근을 떠오르게 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3000여만 명이 기근으로 사망해 인류 역사에서 평화 시기에 굶주림으로 사망한 인구가 가장 많은 사례로 되었다. 이는 중국 항일전쟁 8년 동안 사망한 숫자의 1.5배에 달한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이 재난을 역시 ‘대 자연재해’라고 말한다.


나중에 학자들이 밝힌데 따르면, 그 3년 동안 중국에는 결코 심각한 자연재해가 발생하지 않았으며 단지 국부지역에 홍수 혹은 가뭄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처럼 사망자가 많았던 것은 바로 중국 공산당이 1958년부터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운동을 벌이면서 중국을 가난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며 태평성세를 꾸미기 위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국민들이 기근으로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사회주의 형제 국가’들에 대한 거액의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지금까지 3년 대기근의 진상을 백성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으므로 아직도 많은 중국인들은 인류 역사에 있어본 적 없는 인위적인 재난을 자연재해로 여기고 있다.


장쩌민이 빚어낸 이번 홍수의 참상을 눈앞에 두고도 쿤은 ‘장쩌민평전’에서 “대 홍수는 장쩌민이 전문가와 시인의 두 가지 재능을 모두 갖고 있음을 충분히 보여 주었다”라고 썼다. 객관적 법칙을 따르지 않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수문을 열지 않으며 억만 이재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초개같이 여기는 것이 ‘전문가와 시인’이라면 더이상 할말이 없다.


5. 장쩌민의 쇼


보기 드믄 홍수 피해는 오히려 장쩌민이 자신을 높이 치켜세우고 ‘현명’한 이미지를 내세우는 기회가 되었다. 나쁜 일도 ‘좋은 일’로 만들고 자신이 조성한 큰 재난을 공을 세우는 기회로 만드는 것이 장쩌민의 장기 중의 하나이다.


홍수가 물러간 뒤인 8월 13일, 장쩌민은 재해지구인 후베이성으로 갔다. 무장 경찰들의 보호하고 있는 가운데 그는 마이크를 손에 쥐고 수심에 찬 얼굴로 양쯔강 제방에서 ‘멋진’ 강연을 했다. 장쩌민은 “홍수 피해 방지는 현재 양쯔강 연안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양쯔강 제방을 사수하여 절대 무너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고 카메라를 향해 “결심 하고 끝까지 싸우자” 등 구호를 외쳤다.


신화사 징저우(荆州) 지국에서는 8월 13일 이런 보도를 했다. “중공중앙 총서기, 국가 주석, 중앙군사위 주석 장쩌민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위원, 국무원 부총리, 국가 자연재해 지휘부 총지휘 원자바오 등은 오늘 혹서를 무릅쓰고 후베이 양쯔강 재해 지구를 찾아 홍수 피해 방지 제1선에 있는 군인과 민중을 격려하고 지도했다.” 이런 경우에 장쩌민의 대변인인 신화사는 언제나 ‘눈치 있게’ 가장 주목을 받아야할 이재민과 기타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인민들을 이끌어 언제나 승리를 달성’하는 ‘당의 핵심’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돌렸다.  


홍수가 물러가자 선전부는 ‘수해 방지 투쟁에서 위대한 공로를 세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장쩌민이 ‘당의 핵심’이라는 선전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리하여 장쩌민 우상화 운동이 또 다시 시작되었다. 중공의 선전과 장쩌민의 연설은 모두 이번 홍수로 힘을 입게 되었다.


중국공산당 당보와 당지는 더더욱 가짜 외신을 이용해 계속 장쩌민을 치켜 올렸는데 과장된 문구로 제목을 달았고 적나라하게 장쩌민을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위대한 인물’ 취급을 했다.


6. 괴이한 홍수


1998년 홍수는 확실히 좀 괴이했다.


홍수가 졌을 때, 베이징에서는 “장[江]쩌민, 장쩌민, 강물이 사람을 빠져 죽인다”는 말이 떠돌았다. 이것은 장쩌민이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르면 수재가 생긴다는 말이었다.


이 말은 결코 전혀 출처 없는 것이 아니다. 1996년, 장쩌민은 남방에서 한 유명한 절을 지나게 되자 정원 들려 향을 피운 뒤 종루에 올라갔다. 뜻밖에 주지는 장쩌민에게 종을 울리지 못하게 말렸다. 불쾌해진 장쩌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끝내 종을 울렸다. 그러자 늙은 주지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그 주지는 장쩌민은 두꺼비왕이 환생한 것이기 때문에 종을 울리면 반드시 중원의 수족(水族)들을 건드려 해마다 홍수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중국대륙은 정말 예전보다 홍수 피해가 많았다. 1998년은 바로 장쩌민의 본명년이었기에 큰 수재가 났던 것이다.


두꺼비 왕과 종소리 이야기가 실제 있었는지 알기 어렵지만 장쩌민은 확실히 물을 좋아하기로 소문이 났다. 그는 평생 물을 떠나지 않았고 외국을 방문할 때도 시간 나는 대로 수영장에 몸을 담그는 것을 잊지 않았다. 국제 언론에서 가장 많이 전해지고 있는 것은 그가 하와이와 사해에서 수영할 때 찍은 사진이다. 입주할 호텔을 선택할 때도 장쩌민은 항상 수생 동물이 있는 곳을 선택했다. 또 장쩌민은 툭 불거진 눈, 큰 입, 얇은 입술 등 외모 특징이 두꺼비와 비슷하며 특히 두꺼비처럼 다섯 손가락을 벌리고 박수치는 것이 더 볼만하다.


해외에서 사람들이 최근 몇 년 동안 성경 ‘계시록’, 노스트라다무스의 ‘제세기(諸世紀 Le Sicles)’, 당나라의 ‘추배도(推背圖) 등 동서고금의 유명한 예언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장쩌민은 매우 특수한 배역을 맡고 있으며 중국과 전 세계에 모두 재난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장쩌민의 배경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프랑스의 유명한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는 일찍이 “호랑이해에 출생한 한 삼수지인(三水之人)이 동방에 큰 재난을 가져다준다”고 예언했다. 장쩌민은 1926년 호랑이해에 장쑤(江蘇)성에서 태어났고(1수), 상하이(上海)에서 출세했으며(2수), 베이징에서 3권을 틀어쥔 후 중난하이(中南海)를 차지했다(3수). 그가 출세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의 이름에도 모두 물과 관련된 글자가 있다. 예를 들면, 장쩌민은 장상칭(江上青)을 양아버지로 삶아 장아이핑(張愛萍)에게 발탁되었고, 상하이에서는 왕다오한(汪道涵)의 발탁을 받았으며, 보이보(薄一波)의 도움으로 베이징방을 제거했는데 이들의 이름에는 모두 물이 들어 있었다. 두꺼비는 물을 좋아하고 흙을 무서워하고 불을 싫어하기 때문에 자오쯔양(趙紫陽), 차오스(喬石) 등을 배척했다.


저장성 위야오(餘姚)시에 있는 ‘허무두(河姆渡) 유적(역주 - 양쯔강 하류에 있는 신석기 문화유적)박물관’이 1982년 국무원에 의해 전국 중점 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차오스가 기념하는 글을 써주었다. 장쩌민은 권력을 잡은 뒤인 1992년 9월, 그곳을 참관하다 차오스가 쓴 현판을 보고 매우 불쾌해 했다. 차오스(喬石)의 이름에 있는 토석(土石)은 장쩌민의 물을 다스리므로 장쩌민은 차오스를 용납하지 않았다(역주 - 오행학설에 따르면 토[土]는 수[水]를 억제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1993년 5월, 끝내 박물관을 정리한다는 이유로 박물관 문을 닫고 차오스가 쓴 글 대신 자신이 쓴 현판을 건 다음에야 문을 열게 했다.


놀라운 것은, 당나라 ‘추배도’ 제50화는 아주 명확하게 장쩌민이 이번 홍수와 관련이 있음을 예언했다는 점이다. 그림에는 수풀 속에서 음식을 찾고 있는 흉악한 호랑이가 당장이라도 사냥물을 덮칠 듯한 자세로 있는데 그 곁에 적혀있는 예언 중 “짐승은 귀하고 사람은 천하다”는 구절은 정말 틀림없는 것 같다.


제50화의 설명을 보면 “황제가 호랑이해를 만나니, 쌀이 창고에 가득해도 값어치가 없고, 늑대들이 떼를 지어 거리를 누비며, 먹구름이 지나가고 하늘이 보이네”라고 적혀 있다.


“황제가 호랑이해를 만나니, 쌀이 창고에 가득해도 값어치가 없다”는 것은 호랑이띠인 집권자 장쩌민이 1998년에 사적인 이익을 위해 합리하지 않은 방식으로 홍수를 처리한 결과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무너진 제방을 막는데 식량을 던져 넣어 많은 쌀 창고를 바닥냈다.  그리하여 평소에 가장 값지던 식량은 순식간에 한 푼의 가치도 없는 폐물이 되었다.


그리고 “늑대들이 떼를 지어 거리를 누비며, 먹구름이 지나가고 하늘이 보이네”는 정(正)과 사(邪)의 대결과 그 결과를 암시하며 장쩌민 집권 기간의 군대, 경찰, 사법 등 국가기구의 행위를 비유했다.


50화에서 진성탄(金聖嘆 역주 - 명말, 청초 문학비평가)은 “호랑이해에 대란이 일어날 것이며, 군주가 정치에 어둡고 대신들이 흉포해, 백성들이 살길이 없고 대란이 좀 가라앉으면 또 다시 일어나리라”라고 주해를 달았다.


앞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뒤에 있는 “대란이 좀 가라앉으면 또 다시 일어나리라”는 98년 홍수가 지난간지 얼마 되지 않아 1999년부터 파룬궁에 대한 진압이 시작된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하게 서술할 것이다.


7. 인도네시아 참극


이번 홍수는 장쩌민이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목숨을 잃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어떠한 천재인화든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이용할 수만 있다면 모두 서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1998년의 홍수는 그나마 자연적인 원인이라도 있었지만 같은 해 중국 화교들이 인도네시아에서 당한 재해는 100% 인위적으로 빚어낸 참극이었다.


1998년 5월 13일부터 16일 사이, 인도네시아에서 중국을 배척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현지 화교들은 대규모로 재산을 약탈당하거나 파괴당하고 2천여 명이 살해되었으며 수백 명 여성이 집단 강간당하거나 강간과 동시에 살해되었다.


전 세계가 이런 야만적인 행동에 놀라움과 분노를 표시했다. 미국 국회와 유엔인권위원회는 모두 성명을 발표해 질책했고, 각국 정계 지도자와 사회단체들도 잇따라 인도네시아 정부를 강렬히 비난했으며 언론들도 이 사건을 대량으로 폭로하고 보도했다. 흥분한 전 세계 해외 화교들은 중국 정부가 이 사건에 적극 나설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뜻밖에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사건은 인도네시아 내정이기에 언론에 보도하지 않을 것이며 정부도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당시 중국 국내 언론들은 이 소식을 봉쇄했고 사건 발생 보름 후에야 비로소 한 두 개의 작은 신문에서 조그맣게 보도하게 했다. 또한 인도네시아에 대한 중국의 거액의 원조 계획도 변함없이 실행되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자국에서 일어난 만행을 본체만체하면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장쩌민의 이런 애매한 태도 때문이었다. 만약 장쩌민이 중국 정부를 대표해 공개적인 성명을 발표하거나 경고를 했더라면 인도네시아 화교들의 상황은 그처럼 처참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게다가 중국 정부는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할 권리와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인도네시아와의 관계에 영향 주지 않기 위해 또 한번 국민의 생사를 초개같이 여기면서 뒷걸음 쳤다.


장쩌민의 처사는 전 세계 화교들에게 상처를 주었으며 그들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5천년 문명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국의 정부가 최소한의 의리도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염황 자손에 대한 잔인한 폭행에 대해 장쩌민은 후안무치하게도 “내정을 간섭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명을 초개같이 여기는 장쩌민의 잔인한 본성과 대범하지 못한 성격은 여기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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