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불경에서는 마음에 72상(相)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상(相)은 다른 사람이 보거나 느낄 수 있을끼?
이와 관련해 한 소사미(小沙彌 역주: 출가했지만 아직 20세 미만이라 정식 비구가 되지 못한 남자 승려를 말함)가 마음을 닦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노화상(老和尙)이 어린 사미(沙彌)를 데리고 행각했다. 이들은 끝없이 광활한 숲을 지나고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넜다.
노화상은 늘 자유롭게 앞에서 걸었지만 소사미는 무거운 짐을 지고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살펴주며 행각했다.
어느 날 소사미는 한참을 걷다가 생각했다.
‘사람 몸을 얻기 힘들다지만 얻어도 겨우 수십 년에 불과하고 또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겪어야 하며 육도윤회(六道輪廻)을 거쳐야 하니 사람이란 정말 고생스럽구나!
그러나 기왕 수행(修行)을 했으면 뜻을 세우고 자비심을 내어 중생을 구도해야 한다. 나는 나태해져선 안 되며 다그쳐서 정진해야 한다!’
막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앞에서 걷던 노화상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오너라, 내가 짐을 메마. 네가 앞장서서 걸어라.”
소사미는 비록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노화상의 지시에 따라 짐을 내려놓고 앞장서서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니 사미는 정말 가볍고 자유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불경에서는 중생을 구도하려면 각종 보시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건 정말로 너무나 고생스럽구나! 하물며 천하에 중생이 이렇게 많은 고생을 겪고 있으니 대체 언제나 구도를 끝낼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내 한 몸만 깨끗이 하면서 이렇게 자유롭게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막 이런 염두가 나오자마자 노화상은 매우 엄숙한 음성으로 말했다.
“멈춰라!”
소사미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니 노화상의 표정이 매우 엄숙해 깜짝 놀랐다.
노화상은 그에게 짐을 넘겨주면서 말했다.
“짐을 메고 뒤에서 따라오너라.”
소사미는 생각했다.
‘사람 노릇하기란 정말 고생스럽구나! 방금 그렇게 즐거웠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이렇게 힘들게 변하다니... 사람의 마음은 정말 불안정하구나!
범부(凡夫)의 마음은 이렇게 흔들리기 쉬우니 그래도 수행을 잘해야 한다. 최소한 고난에 처한 중생을 마주해 많은 사람들과 선(善)한 인연을 맺고 내가 할 수 있는 본래 일을 잘하도록 하자.’
막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노화상은 다시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소사미를 부르더니 또 자신이 짐을 메고 그더러 앞서 가게 했다.
소사미는 이렇게 반복적으로 마음을 냈다가 마음을 거뒀는데, 3번째 다시 마음을 거둘 때 노화상이 다시 엄한 태도로 그를 대했다.
소사미는 마침내 더는 참지 못하고 마음 속 의혹을 물어보았다.
“사부님, 오늘 왜 저더러 잠시 앞서 가라고 하셨다가 또 잠시 후 뒤에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러자 노화상이 말했다.
“너는 비록 수행하려는 마음은 있지만 아직은 도심(道心)이 견고하지 못하다. 마음에 감동을 받을 때면 곧 큰 서원(誓願)을 발하지만 그러고는 또 곧 도심이 움츠러든다. 이렇게 나아가고 물러남을 반복해서야 언제 성취할 수 있단 말이냐?”
노화상의 가르침에 소사미는 자신의 마음가짐에 대해 깊이 반성했다. 그가 다시 보리심(菩提心)을 내었을 때 노화상은 그에게 앞에서 가라고 했지만 이번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소사미는 말했다.
“사부님, 이번에 저는 진정으로 마음을 냈으니 만장(萬丈) 높은 건물이 평지 위에 우뚝 선 것처럼 마음에 큰 소원을 내어 도의 기틀로 삼고 착실히 정진하며 나태하지 않겠습니다.”
노화상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두 사람은 이렇게 줄곧 대화하고 웃으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갔다.
심상(心相)의 기복이 안정되지 않으면 정념을 지켜내기 어렵다. 고험은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연마(磨鍊)의 실질은 마음에 있는 것으로, 마음이 움직이면 주위 사람이나 사물 역시 상응해서 변화가 발생한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신선을 부러워하지만 마음을 비우면 사람 역시 홀가분해질 수 있다. 인생은 짧고 고달프니 도심(道心)이야말로 가장 소중하다 할 수 있다.
착실하게 매 한 걸음을 걷기 위해서는 마음의 점검이 필요한데, 조금이라도 나태해지면 곧 방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유기 제24회에서 손오공은 당승이 목적지인 뇌음사(雷音寺)가 얼마나 먼가를 묻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오직 스승님께서 견성(見性 성불)하려는 정성이 있으시면 생각을 돌리는 곳이 바로 영산(靈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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