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바둑은 일찍이 중국 고대 요임금 시기에 기원했다.
진나라 문헌 《박물지(博物志)》에 “요임금이 바둑을 만들어 아들 단주(丹朱)에게 가르쳤다"고 기재되어 있다.
요임금의 적자(嫡子) 단주는 빈둥거리며 놀기 좋아했고 마음을 조용히 할 줄 몰랐으며 허위적인 말을 하고 쟁론을 즐겼다.
요임금은 어느 하루 강가에서 두 명의 신선이 푸른 측백나무 아래에 마주 앉아 모래에 금을 긋고 흑백의 돌로 전술도를 펼치는 것을 보게 됐다.
요임금은 그들에게 다가가 아들에 대한 고민을 말하며 어떻게 교육하면 좋을지 자문을 구했다.
한 신선이 대답했다. “그는 쟁투심이 강하고 우매한 면이 있으니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면 그 정(情)도 한가해질 수 있을 것이오."
그러면서 모래 격자에 놓인 돌을 가리키며 “이것은 혁평(奕枰)이라 하며 바둑이라고도 하오. 네모난 바둑판은 정(靜)이고 둥근 바둑알은 동(动)이라, 하늘과 땅의 이치를 본받은 것이라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단주는 바둑을 배운 후 과연 진보했다고 한다.
이로 보아 고대인이 바둑을 만든 목적은 승부를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서함양으로 심성을 닦고 교양을 쌓으며 지혜를 더하고 정서를 고취하기 위함이었다.
바둑은 천상의 역경(易經)과도 관련되는데, 바둑판은 우주가 360개 천체로 구성된 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바둑판에는 총 361(19×19)개의 바둑점이 있는데, 남은 하나는 중심의 한 점으로 천원(天元), 즉 태극이며 우주의 중심을 대표한다.
360이라는 숫자는 과거 역서(曆書)에서 일 년의 수였고, 그것을 사등분해 춘하추동으로 정하고 흑백의 바둑돌은 각각 밤과 낮을 대표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바둑판은 《낙서(洛書)》를 모방했다고 한다.
간쑤성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에서 발견한 남북조 시기의 《기경(棋經)》에는 ‘바둑판의 361개 도는 주천의 도수를 모방한 것', ‘흑백 바둑돌은 음양을 상징한다’고 기재됐다.
춘추삼전(春秋三傳) 중 하나인 《좌전(左傳)》에 따르면 바둑은 춘추전국시기에 널리 유행했다.
당나라 시기에도 전례없이 유행했는데, 당 현종은 특히 바둑 기사에게 '기대조(棋待詔)'라는 9품 관직까지 내렸다. 이들은 '화대조(畵待詔)', '서대조(書待詔)'와 함께 한림원에 예속돼 통일적으로 '한림'이라 불렸다.
수련의 입장에서 보면 바둑은 팔괘, 주역, 하도, 낙서와 마찬가지로 모두 이번 인류 문명시기의 산물이 아니며 사전(前)문화다.
일부 사람은 “중국의 장기(將棋)는 유가의 기(棋), 바둑은 도가의 기”라고 비유해 말하는데 꽤 적절한 표현이다.
장기의 수차마포사상병(师车马炮士象兵)은 각자가 움직이는 규칙과 직책이 있어 공자(孔子)가 말한 '군주는 군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행동하라'와 같은 이치다.
바둑은 어떠한가? 흑백 두 가지로, 조목조목 이루어진 틀의 제한이 없어 변화무쌍하다.
‘1음 1양’을 도(道)라 하며 물극필반, 과유불급, 외세(外勢)와 실지(地), 전쟁하지 않고 모든 적군을 항복시키는 것 등등 모든 박대정심(博大精深)한 이치가 형상적으로 바둑판에서 재연되고 있다.
천고 이래 얼마나 많은 제왕재상, 문인, 상인, 평민이 바둑을 즐기며, 그에 관한 많은 교훈과 미담, , 병서책략, 치국방침 등을 남겼던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에 와서는 바둑의 도(道)는 거의 실전되고, 단지 승부를 겨루는 두뇌 게임으로 전락했다.
어찌 바둑뿐이겠는가? 고대에는 각 업종이 모두 마음을 깨끗이 하고 호흡 조절(調息)을 중시했으며 경지와 내포를 추구했다.
바둑 두는 풍격은 그 사람과 같고, 글의 품격 또한 그 사람과 같다. 인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있어야 하는 상태여야 한다.
현대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류에게 물질적 번영을 가져다주었지만 사람의 도덕과 수양은 급속히 상실됐다.
물질이익의 유혹 하에 타산(打算)에 밝아졌고 공적(功績)과 이익, 승부를 따져 점차 사람으로서 마 땅히 있어야 할 상태를 상실했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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