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톈량(章天亮 시사평론가)
[SOH] 많은 사람들이 최근 중국 정세에 대해 혼란스러워 한다. 중국 양대 웨이보인 신랑(新浪)과 텅쉰(騰訊) 이 3일간 댓글을 폐지했는가 하면 저우융캉이 베이징 경찰을 광저우까지 보내 자신에게 불리한 소식을 퍼뜨린 우관충(巫冠聰 신안체육발전공사 운영총감독)을 체포했다. 또 지난달 31일 베이징일보(베이징 당위원회 기관지)가 공개적으로 ‘총서기는 당의 중앙조직을 능가하는 최고기구가 아니다’라고 주장해 공개적으로 후진타오를 견제했다. 이는 베이징시 서기 류치(劉淇)가 공개적으로 저우융캉을 지지하고 나선 것으로 해석된다.
저우융캉과 류치의 태도로 보건대 이들이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진 않다. 그런데 또 지난 3일에는 TV화면에 9명의 상무위원들이 단체로 식수하는 장면이 나와 중공 지도부의 단결을 과시했다.
그렇다면 후진타오는 저우융캉을 끌어내리지 않을 것인가? 만약 결심이 섰다면 왜 아직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후-원이 반드시 저우융캉과 결판을 낼 수밖에 없고 다만 시기가 문제라고 본다.
중공은 과거 정풍(整風)운동을 통해 지식인들의 당에 대한 비판을 격려하다가 갑자기 태도를 돌변해 숙청할 때까지 약 40일의 중간과정이 있었다.
장쩌민이 1999년 6월 10일 파룬궁 탄압을 위한 초헌법적 전문기구 ‘610 사무실’을 설립하고, 6월 14일 파룬궁 탄압에 대해 ‘전혀 근거가 없으며 인심을 미혹시키는 유언비어’라는 공개발표를 거쳐 7월 20일 정식으로 공개적인 탄압을 시작할 때까지 역시 약 40일이 걸렸다.
한편 이번 왕리쥔 사건이 발생한 날은 2월 6일이었지만 실제로 보시라이가 해임된 것은 약 40일 뒤인 3월 15일이었다. 이 과정에 보시라이는 후-원에게 아부하거나 협박을 했고 또 내외신 기자들과 기자회견을 갖는 등 충분히 자신의 입장을 표시할 기회가 있었다. 심지어 도처로 시찰을 다니거나 간판에 글자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때가 되자 보시라이는 곧바로 실종되었다.
역사를 돌아보면 중공 고위층의 정치투쟁에서는 거의 관례처럼 상대방을 타도하기 전에 한동안 느슨한 가상을 연출해 당 간부나 일반 국민들이 자유롭게 선택하게 한다. 그런 다음 강력한 공격을 시작한다. 이번 사건에서도 리창춘, 류치 등(류치, 리창춘, 저우융캉 등은 모두 파룬궁 박해에 앞장섰으며 해외에서 파룬궁 수련자들로부터 피소되었다)은 앞을 다퉈 저우융캉을 위해 나섰고, 정법위 부서기 왕뤄취안(王樂泉)은 후-원을 선택했다.
후진타오 입장에서는 이미 군부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저우융캉이 멋대로 행동하도록 풀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18대가 곧 개최되기 때문에 이 과정이 분명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저우융캉과 장쩌민 일파를 깨끗이 제거하자면 시간이 필요하다. 보시라이가 해임된 3월 15일 이후 후-원은 보시라이와 저우융캉이 모반한 내막에 대해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할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장쩌민의 사망을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원래 4월로 예정되어 있었던 리커창 부총리의 일본 방문이 갑자기 취소된 원인이 단순히 나고야 시장의 난징대학살에 대한 망언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보시라이에 대한 조사가 일단락되면 분명 더 윗선까지 불이 붙을 것이다. 이달에 중공 고위층에 또 다시 큰 지진이 발생한다 해도 필자는 전혀 놀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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