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최근 중국에서는 지난 달 31일 타계한 국보급 과학자 첸쉐썬(錢學森.98) 박사에 대한 추모 열기가 뜨겁습니다.
6일 오전 베이징 바바오산(八寶山)에서 열리는 영결식에는 후진타오 국가주석, 원자바오 총리와 중공 정치국 9명의 상무위원이 전부 참석할 예정입니다.
한편 중국 관영 언론이 미사일과 우주항공 연구에 대한 첸 박사의 공로와 애국심을 집중 조명하며 연일 찬양 일색의 보도를 쏟아내고 있는 가운데 일부 가려진 진실에 대한 보도와 글들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전 신화사 기자이자 상하이 ‘동방조보(東方早報)’ 경제 칼럼작가인 우샤오보(吳曉波)가 인터넷에 발표한 글입니다.
‘첸쉐썬, 당신은 위대하지만 미안하다는 한 마디가 부족했다’라는 글에서 우샤오보는 지난 1958년, 첸 박사가 “땅 한 무(畝)에서 쌀 1만근이 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마오쩌둥이 발동한 ‘대약진(大躍進)운동’에 힘을 실어준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당시 마오쩌둥은 ‘5년 내 영국을 따라 잡고, 10년 내 미국을 따라 잡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국민을 철강 제련에 동원했으며, 그 결과 3년 뒤 3천 만 명 이상이 아사하는 참극이 빚어졌습니다.
마오쩌둥의 전 비서 리루이(李銳)는 ‘대약진을 반성한다’는 글에서 “마오쩌둥이 대과학자인 첸쉐썬의 문장을 보고 땅 1무에서 쌀 1만근이 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기술했습니다.
천체물리학자 팡리즈(方勵之) 교수는 첸 박사 타계이후 BBC와 가진 인터뷰에서 “첸 박사가 과학자로서는 훌륭했지만 그의 정치적 입장과 관련해서는 논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1955년 미국에서 중국으로 간 후 지금까지 첸 박사는 언론을 통해 대부분 과학자가 아닌 정치적 모범 인물로 중국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첸 박사는 대약진 운동 당시 마오쩌둥을 지지한데 이어, 1989년 천안문 민주화운동 때에는 당국의 무력 진압을 지지했으며 2002년에는 인민일보에 장쩌민의 ‘3개대표’ 이론을 찬양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우파로 몰려 탄압 받았던 과학자 천스(陳詩)는 미국의 소리방송(VOA)와 인터뷰에서 “중국이 공산당 천하가 됐으니 첸쉐썬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당시 그가 미국에 귀국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공산당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라며 첸 박사를 대신해 변명했습니다.
다행히 첸 박사는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7,80년대부터 기공, 중의(中醫) 등 인체과학 영역에 관심을 갖고 연구에 매진하면서 1999년 장쩌민이 발동한 파룬궁(法輪功) 탄압만은 끝끝내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유물론과 무신론에 대한 첸 박사의 도전은 중국에서 수천년 동안 맥을 이어온 초상과학인 기공과 중의가 중공 당국의 탄압을 피해 다시 부흥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첸쉐썬 박사의 약력
저장성(折江省) 항저우(杭州) 출신의 첸 박사는 1939년 20대의 나이에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에서 항공학과 수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국방부에서 큰 공헌을 했지만, 1955년 미-중 양국간 협상을 통해 중국으로 돌아가 전략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을 선두 지휘했습니다.
그 후 그는 1964년 중국의 첫 핵실험과 1970년 지구위성 발사 등에 성과를 올렸고 2003년 유인우주선 발사에도 기여했습니다.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양수진, 최창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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