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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그 사람-(101)- 제23장: 천지에 높게 걸린 음양보경(陰陽寶鏡) 장쩌민 퇴임 후 그의 토적패를 숙청하다(상)
 
  
2008-10-22 03:59:11  |  조회 6636



천지에 걸린 음양보경 장쩌민, 여섯 번째 시간
 
4. 사회 위기: 화산구 위의 안정
 
(점차 증가하는 약세(弱勢) 집단)
중국의 재부는 현재 양극화 되고 있다. 장쩌민 집권 시의 정경 유착으로 권력자에게 경제 자금이 집중됐다. 권력이나 정부 측 인맥이 있는 사람은 쉽게 정부로부터 프로젝트를 얻거나, 은행 대출이 가능 했으므로 국유 토지와 공장을 팔아 벼락출세 할 수가 있었다. 2001년 장쩌민은 “자본가 입당 허락”을 당 헌장에 넣어 권력으로 재부를 축적하는 행위를 합법화 시켰다.
 
토지 구획을 예로 들면, 장쩌민 시대에 각 지역 토지는 투기꾼들이 권세와 결탁해 이익을 꾀하는 주요 목표가 되었고 토지를 획득하는 유일한 방법은 권력과 돈의 교환이었다. 땅 투기에 대해, 은행은 민간 대출에는 엄격한 규정을 두었으나, 재력과 인맥이 있는 사람들은 쉽게 불법적인 대출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불법적 땅 투기와 초과 대출은 “붉은 부호(紅色富豪)”의 증가를 가져왔다.
 
벼락부자와 분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점차 늘어나는 약세 집단이었다. 한 때, 국가의 주인으로 불리던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직장을 잃었으며, 공장 또한 더 이상 그들 집단의 소유가 아니었고 이전에 존재했던 많은 복리 혜택도 더 이상 누릴 수가 없게 되었다. 농민은 과중한 여러 항목의 세금 부담을 느꼈고 토지 또한 국가에 귀속되어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정말 힘든 농민, 정말 가난한 농촌, 정말 위험한 농업’은 중국 사회의 진실한 반영이다. 수많은 농민들이 생계를 위해 도시로 와 생명을 건 위험한 일들을 한다. 지난 90년부터 대륙 각지 탄광과 인광(燐鑛)에서 발생한 사고는 300여 차례에 달하며 약 2만 명 이상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중국 탄광에서는 매년 6천여 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고 있다. 이는 전 세계 탄광 사고 사망자 총수의 80%를 차지하는 반면 중국의 탄광 채석량은 전 세계 총량의 35%정도를 차지한다. 중국의 탄광 채석 시 사망률은 만 톤 당, 미국의 100배이며 남아프리카의 30배이다. 그러나 장쩌민의 강력한 언론 통제로 얼마나 많은 탄광 사고가 발생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또한 농촌의 90%, 도시의 60% 인구가 의료보험이 없어 병에 걸려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다.
 
장쩌민 집권 시 중국에서는, 상하이, 베이징, 선전(深圳) 등지에서 화려하고 현란한 현대식 건축물과 귀족적 분위기가 물신 풍기는 시설물, 사치한 과소비, 수백만 달러를 들여 자녀를 유학 시키는 풍조, 거액의 비자금을 해외 은행으로 유출하는 재벌, 고급 외제차와 여러 채의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전체 인구 1%에도 못 미치는 소수 권력층의 전유물일 뿐이다.
 
현재 중국의 빈부 격차는 이미 1949년 중공 집권 전의 “구사회” 당시 보다 더 악화되었고 최근 중국 재부의 85% 이상은 0.2%의 고위층에 집중되어 있다. 장쩌민 집권 시 빈부 격차를 나타내는 지표인, 지니 계수는 1991년 0.282에서 2003년에는 0.46으로 상승해 국제 최저선을 넘어섰다. 또한 중국 사회과학원의 조사 결과, 중국 도시와 농촌 간 수입 격차는 세계에서 가장 심한 것으로 밝혀졌다. 1991년 도시의 일인당 연 평균 수입은 1,570 위안이었고 농촌은 710 위안으로 두 계층 간의 비율은 대략 2.2:1이었다. 2003년 이 수치는 각각 8472와, 2622 위안이 되었고 두 계층 간 비율은 3.2:1로 상승했다. 한 중공 고위 관료는 “도시는 유럽같이 발전 하는데, 농촌은 아프리카처럼 발전해 간다.”는 자신의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중국 ‘부빈(扶貧)기금회’의 통계에 따르면, 2003년 중국 농촌에서 아직 원바오(溫飽: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는 것)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인구가 3천만 명에 달하고 저소득 인구(연평균 소득이 865위안 이하)가 6천만 명에 달해, 두 빈곤층을 합하면 모두 9천만 명이 된다고 했다.
 
건설 현장 노동자가 밀린 급여를 받지 못해 옥상에서 투신하는 사건, 퇴직 노동자가 생활고로 집에서 앓다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중공 고위 관료들 중 어떤 이는 한끼 식사비로 20만 위안을 사용하지만 어떤 빈곤층의 부모는 자녀의 대학 등록금, 2000위안을 구하지 못해 목을 매달기도 한다.
 
장쩌민 집권 시의 사회적 특징은 소수인들은 재벌이 된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욱 빈곤해진 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공산당이 50여 년 전에 비난하던 “극악무도한 구 사회”의 모습이다.
 
십여 년 동안 장쩌민의 정책은 약세 집단의 증가를 부추겼고 중국 대륙 사회의 향후 발전에 엄청난 문제들을 남겼다. 도시에서 농촌에 이르기까지 핍박과 착취를 당한 노동자와 농민들이 중공의 폭정에 품은 불만은 거대한 중국 사회에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사회적 모순을 형성했다. 다시 말해, 중국 사회는 지금 화산구 위에 있는 것과도 같다.
 
(화산구 위의 안정)
2000년 10월 하순에서 11월 중순까지 중국 155개 지역에서 모두 8150여 차례의 시위와 데모, 청원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동시에, 21개 성과 직할시 관할 당정기관 부문에서 530여 차례의 집단 파업과 청원, 상방 사건이 발생했다. 2004년, <뉴욕타임즈> 보도에 따르면, 당년 중국에서는 6만여 건의 항의 시위가 발생했다.
 
신화사의 간행지 <랴오왕둥팡저우칸(了望東方週刊)>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중국에서는 2003년 한 해 동안 비교적 큰 규모의 시위가 5만 8천여 차례, 매일 평균적으로는 1백6십여 건 정도가 발생했으며 그 중에서 당정기관에 직접 타격을 준 사건도 적지 않았다. 이 통계 자료는 2003년의 사회 동요 사건이 2002년에 비해 15% 증가했으며 10년 전과 비교해 약 7배가량 증가했다고 밝혔다 – 발생 빈도가 대폭적으로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와 폭력성도 상당히 확대 되었다.
 
장쩌민의 “사회 안정 유지” 수단은 사실 장쩌민 자신이 말한 “사고가 난 지역에서 그 책임을 진다”, “불안정 요소는 싹부터 잘라내야 한다”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각급 지방 관원들은 자신들이 부여 받은 법률 밖의 권력으로 무자비하게 민중을 억압해, 자신의 관할 지역 내에서의 민중 시위를 예방하고자 했다. 2003년 발생한, 대학생 쑨즈강(孫志剛)이 일시 체류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광저우시 경찰에게 구속돼 임시 수용소에서 구타로 사망한 사건은 사실 장쩌민 “안정” 수단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장쩌민의 파룬궁 진압 명령 하달 이후, 각지 경찰국에는 “제팡(截訪)”이라는 특수 편제 경찰이 생겼다. 그들의 임무는 농민과 강제 철거지역 이주민 혹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상방을 위해 탄원서를 제출하기 전, 구타나 협박 또는 체포 등의 불법적 방법으로 구금하거나 노교소로 보내는 것이었는데,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허베이성 타오린커우수이쿠(桃林口水庫) 이주 지역에서는 지방 관료의 인권침해와 재산착취 등으로 수 차례 상방이 있었다. 수만 명의 이주민들이 단체로 작성한 <탕산(唐山)시위원회 서기 장허(張和)의 전국인민대표자격과 허베이성 인민대표자회의 대표자격을 박탈하라는 합의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2004년 4월 1일, 우리 위톈(玉田)현 이주민 100여 명이 스자좡(石家庄)에 상방을 가던 중 경찰들에 의해 구타당했고 어떤 이는 골절되기 까지 했다. 또한 40여명이 체포되었으며 그들의 신분증은 아직까지 공안국에 보류되어 있고, 수만 위안의 벌금을 냈지만 영수증도 받지 못했다. 그 중 장펑(張鳳), 류쑤어(劉素娥), 류쩡푸(劉增復), 차이룬추(柴潤秋) 등 4사람이 공무집행 방해죄로 각각 3년에서 5년형을 선고 받았다. 장펑은 5년형을 선고 받고 현재 중병이 들었지만 여전히 탕산지둥(冀東)감옥에서 복역중 이다. 훙차오(虹橋)진(鎭)의 63세 할머니 장수친(張書琴)은 현장에서 놀라 사망했으며, 갓 결혼한 30세의 훙차오는 경찰에게 성희롱을 당했다. 그리고 탕산시 이주를 맡은 정부주임 리쩡룽(李增榮)과 장자오룽(張兆榮)은 이주민 지원금 1181만 위안을 횡령했고 이를 주도한 장허는 중형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5년형을 선고 받은 후,보석으로 풀려나 아무런 법의 제약도 받지 않았다.”
 
<합의서>에 기재된 바와 같이, “집행인원(執法人員)”들은 이주민들을 파룬궁 수련생을 구타하는 방법으로 대하는 현상은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장쩌민이 하급 조직에까지 “파룬궁 수련생에게는 어떤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명령을 하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감옥과 노교소의 경찰들은 파룬궁 수련생들을 악랄하게 고문하고는 의기양양해져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는 너희를 죽여도 상관없다!”
 
만약 상방을 원하는 이주민들이 지역 경찰을 피해 운 좋게 베이징에 도착했다 해도, 국무원과 런다(人大)신팡(信訪: 상방을 관리하는 곳)국 입구에는 제팡 경찰(사복을 입고 있을 때도 있다)들이 늘 상주해 있어 상방하러 온 이들이 그들의 목적을 포기하도록 위협했다.
 
상하이 시민 마야롄(馬亞蓮) 여사는 이주 요구에 불복해 강제 이주당하고 노교소 생활을 했다. 그 후 마야롄은 상방 과정 중에 존재하는 어두운 내막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2004년 3월 16일 상하이 경찰에게 또 다시 체포되어 1년 6개월 동안 노교소에 복역했다. 마야롄의 진술에는 “우리는 장쩌민이 말한 ‘안정’에 내포된 뜻을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상방 온 인민들을 가로 막는 “제팡” 경찰들의 극악무도함을 짐작할 수 있다:“ 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랴오닝성 번시(本溪)시 쑨웨이친(孫維琴)은 상방 당시 제팡 경찰에게 맞아 쓰러졌는데, 이를 본 어떤 사람이 도움을 요청했지만 주변의 경비원은 도움은 커녕 “누가 쓰러졌어? 난 왜 안 보이지?”라고 했다고 전했다 쑨웨이친은 이후에도 재차 청원을 했으나 잘 이루어지지 않아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산시(陝西)성 센양(咸陽)시 리사오팅(李小婷)은 제팡 경찰의 신분증 제출 요구를 거절해 순식간에 몰려든 한 무리의 경찰들에게 집단으로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같은 장소에 있던 상방자(上訪者) 덩뎬전(鄧殿全)은 경찰들을 만류하며 도움을 요청하다 4명의 제팡 경찰에게 당한 구타로 잠시 머물던 거주지에서 몇 주 동안 요양을 해야 했다.
 
조사에 따르면, 리사오팅을 구타한 것은 헤이룽장 성의 경찰들이었다. 덩뎬전을 구타한 사람들은 허난성의 사복 경찰이었다. 사실 수년 간 국가 신팡국에 있던 제팡자(截訪者)들은 모두 각 정부 관할에서 보낸 ‘공무원’이며 그들을 파견한 목적은 각 지의 상방자 들을 막아 당지 정부의 부패나 월권, 폭력과 강제 이주와 같은 각 종 추문이 누설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었다. 제팡자들은 각 지방 당국의 권력을 부여 받았을 뿐 아니라 조직 폭력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중공의 언론 봉쇄로 민중의 고통과 불행, 그리고 항의는 모두 “성스다롄환(盛世大聯歡)”의 “거우성핑(歌舞昇平)”에 의해 가려졌다. 장쩌민의 정책으로 사회적 불공평은 완화되기는 커녕 오히려 탄압만이 거세졌다. 만약 어느 날, 이 모든 것이 마치 화산처럼 폭발해 버린다면 중화민족은 어쩔 수 없는 참혹한 대가를 치뤄야만 할 것이다.



對중국 한국어 단파방송 - SOH 희망의소리
11750KHz, 중국시간 오후 5-6시, 한국시간 오후 6-7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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