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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3 04:42:51 | 조회 4739
해체 공산당문화 #009
제2장 체계적인 사상개조 첫 번째 유불도 사상 비판
수천 년 역사에서 유가, 불가, 도가는
중국사회의 각 계층에 깊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국의 유가는 ‘인(仁)’과 ‘의(義)’를 숭상하며
공자는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으면 용맹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지사(志士)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해 인(仁)을 해치는 일이 없고
살신하여 인(仁)을 이룬다.”라고 하였습니다.
유가의 하늘을 받들고 운을 따르는 천명관(天命觀)은
민간에 깊이 들어갔습니다.
논어에서는 “생과 사에는 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라고 했고
중용(中庸)의 첫머리에는
“하늘의 명을 일러 성이라 한다”라고 하여
사람의 근본특성은 하늘에서 명을 받은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옛 사람들에게 하늘은 만물의 근본이었고
모든 가치의 근원이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기왕에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이라면
생명의 목적은 바로 천명(天命)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속마음(內心)이 선(善)을 향하는 요구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유가사상에서 수많은 경전의 으뜸이라 하는 주역에서는
천(天), 지(地), 인(人)의 ‘3재(三才)’를 중시합니다.
주역에서는 또한, 사람은 천지를 본받아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할 수 있고,
천지의 운행은 불변의 천리(天理)를 준수하며,
백성들은 높은 곳에서 인간세상의 일체를 제약하는
‘하늘(天)’이 있어‘불변(不變)’의 천리로
인간세상의 일체를 가늠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유가사상은 도덕과 사회질서를 연계했습니다.
불가(佛家)는 선(善)과 자비를 중시하고
욕망을 참음을 중시하며
생명을 중시하고 중생이 평등함을 신봉합니다.
중공이 정권을 세우기 전에 이미
사람들은 불가의 육도윤회, 덕을 쌓고 선을 행하는 것, 인과응보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생의 원인을 알고 싶으면 금생에 받은 것을 보면 되고
내생의 결과를 알고 싶으면 금생에 지은 것을 보면 된다”라는 말이나
‘선악에 보응이 있다(善惡有報)’는 관념을 통해
사람들은 도덕을 유지하고 그와 더불어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도가(道家)는 ‘진(眞)’을 강조하고 청정무위(淸淨無爲)를 강조하며
사람과 자연의 조화로운 통일을 강조하여 반본귀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즉, “사람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으며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라고 하는 이치를 강조합니다.
중국의 중의(中醫)와 기공(氣功)은 모두 도가에서 기원했으며,
이외에도 기를 연마하고 단(丹)을 연마하는 것은
모두 도가의 양생(養生)의 도(道)입니다.
따라서 사람과 자연의 관계가 갈수록 대립되고
환경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화제가 되는 오늘날
각국의 학자들은 도가사상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공을 놓고 말하면
유가의 ‘천명(天命)’, 불가의 인과응보,
도가의 무욕무구(無慾無求)와 세상과 다투지 않음은
중공이 ‘계급투쟁’을 발동하는 데에 장애가 되었습니다.
유불도 경전에서 확립한 도덕관은
중공이 자신의 도덕권위를 수립하는 데에 장애가 되었으며
또한 중공의 반란(造反), 혁명, 전제정치와 같은 정치운동을 가로막았습니다.
생사를 초월하는 불도(佛道) 양가(兩家)의 수련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의로운 일을 행하는 유가의 수련은
중공이 물질수단을 이용하여 전반 사회를 통제하는 데에 장애가 되었고
중공이 무신론을 선전하는데 장애가 되었습니다.
1) 유가儒家 비판
1).1 공자 비판
유불도 3교 중에서 생활 속에 가장 융합된 것이 유가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중국인들이 줄곧 가족을 생활의 중심으로 여겨왔기 때문입니다.
유가에서 규범하는 것이 바로 가정윤리였으며
중국인들은 이러한 가정윤리를 사회생활과 정치로 다시 확장시켰습니다.
약 2천5백년 동안 중화문화는 기본적으로 유가문화가 주도적인 작용을 했으며,
인류에 대한 공자의 영향 역시 국경을 초월하여
일본, 한국,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들이 일부 유가사상을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 계몽시대의 대철학자 볼테르 역시 자칭 공자의 학생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중국은 한나라 때부터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향불이 끊이지 않았지만,
공산당은 국가 정권을 탈취하고서도
오히려 공자를 욕하고 공자의 사당을 파괴하는 행패를 부렸고,
마오쩌둥부터 시작하여 유가의 문화를 몹시 미워했습니다.
그 원인은 9평 공산당의 제6평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마오(毛)가 진시황을 아주 좋아하게 된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은
그가 진시황과 마찬가지로
법가(法家)의 권모술수를 이용해 나라를 어지럽혔기 때문이며,
마오는 특히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좋아하여
이를 모방하고 초월하였습니다.
학문, 실천, 충성, 신의의 ‘문행충신(文行忠信)’을 선도한 공자를
중공은 “일체 낡은 이론의 사표이자 사악한 세력(惡勢力)의 영혼”이라 욕했으며
“자고로 생명이 생긴 이래 공자처럼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없었으며
선량한 사람들과 대다수 사람들의 공적(公敵)이 되었다.
앞으로 인류는 함께 일어나 공격해야 한다!
고금중외(古今中外)의 모든 사상가들의 언행 중에서도
공자야말로 가장 황당무계한 사람이다.”라고 욕했습니다.
중공은 공자의 언론을 단장취의하고 논리적 함정을 파는 것 이외에
사람을 설득할 만한 증거를 내놓지 못하기 때문에
주로 이렇게 공공연하게 상스러운 욕설을 퍼붓는 식으로 공자를 비판하였습니다.
중공은 유가에 대해 계급투쟁을 기초로 삼아,
공자가 노예주인계급의 이익을 대표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오늘날 이미 중공에 가입했거나
혹은 중공 관원 자신이 거대 자본가
혹은 부와 권력을 모두 거머쥔 지주가 되었고,
계급투쟁 이론은 이미 파산되어
중공 자신조차도 이를 거론하기 싫어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중공이 계급투쟁의 수법으로 다른 사람을 계속 박해하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오늘날 유가를 비판했던 그 시절을 보면
모두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중공은 자신의 통치를 수호하기 위해
거짓으로 공자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게 없게 되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중공은 해외에서 소위 ‘공자학원’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자신들이 비판했던 공자를 이용하여
중국문화를 동경하는 사람들을 기만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한편으로 중공은 대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유가의 13경을 외우도록 가르친 민간학교를 금지하였습니다.
중공이 공자 비판에 상습적으로 사용하는 논리적 함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종류는 단장취의입니다.
공자가 학비를 받은 것에서
공자는 오직 귀족을 위해 봉사했다고 단정 지었으며
공자의 ‘가르침에 차별이 없다’는 주장을 전혀 관계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종류는 다른 사람의 말을 공자에게 뒤집어씌우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춘추곡량전은 자하의 제자가 쓴 책인데
그 중에 나오는 백희와 관련된 논술부분을 이용하여 공자를 공격했습니다.
세 번째 종류는 부당한 유추입니다.
공자가 말한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치를 꾀하지 않는다”에서
“이는 ‘나라의 흥망에 필부는 책임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라는
황당한 결론을 도출합니다.
개인이 직책을 대하는 태도에서 엉뚱하게 국민의 의무를 유추한 것입니다.
네 번째 종류는 부당한 비유입니다.
한나라 이후부터 내려온 독존유술과 진시황의 독존법가처럼
유가는 도덕으로 사람을 다스리지만 법가는 상벌로 사람을 유혹하고 협박하는데
이들은 전혀 다르지만 중공은 이를 상관하지 않고 비교하였습니다.
다섯 번째 종류는 원래 명제와 역(逆)명제가 같지 않음에도 서로 뒤섞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비판’에서
“기왕에 여자가 전부 소인이라면 남자는 모두 군자가 아닌가.”라고 말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 종류는 ‘반과학(反科學)’이라는 모자를 씌워
공자가 ‘자연과학을 위반’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공자가 담론한 것은 대부분 윤리와 정치 분야의 일이며
이런 것들은 자연과학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마치 자로 중량을 측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의 원리를 가지고 사람 행위의 선악을 가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종류는 암암리에 중상모략 하는 것입니다.
‘삼강(三綱)’을 써낸 사람은 명백하게 법가인 한비자(韓非子),
한나라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 등이지만, ‘비판’에서는 이 점을 인정하면서도
여자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살한 몇 가지 참혹한 예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들은 공자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공자의 며느리와 손자며느리는 모두 재가했습니다.
여덟 번째는 바로 사람들의 질투심을 선동하는 것입니다.
중공은 ‘비판’에서 ‘공자가 귀족생활’을 했다는 것으로
사람들의 질투심을 선동하였으나,
사실 ‘논어’에 나오는 “생선이 상하고 고기가 부패했으면 드시지 않았고” 등은
기본적인 양생의 도(道)이지 무슨 귀족생활이 아닙니다.
1).2 지식인 비판
중국 전통문화는 지식인들이 크게 솜씨를 발휘하는 역사적 무대였으며
수많은 별들이 찬란히 빛났고 인걸이 많았습니다.
중국 전통사회는 ‘사농공상’ 4계층을 중시했고
이 중에서 ‘사(士)’가 바로 지식인을 말하는데,
‘사대부’계층은 도덕의 각도에서 모든 문제를 바라보았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심지어 통치자보다도 발언권이 있었으니
일반 민중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따라서 중공은 지식인을 개조하는 것을 극히 중요한 것으로 간주했고,
지식인을 매개로 일반인들의 사상을 개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우선적으로 지식인들의 사상을 개조하였습니다.
1950년 6월, 마오쩌둥은 지식인에 대해
“그들을 이용해야 하는 동시에 교육과 개조를 진행해야 한다.
그들에게 사회발전사, 역사유물론 등 몇 개 과정을 배우게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오의 소위 교육과 개조는 대학과 중고등학교에서 교사들을 조직해
정치협상회의 3대 문건, 사회발전사와 신민주주의론을 학습하게 하는 외에
1951년부터 대량의 지식인들을 조직하여 한국의 6.25 전쟁에 참여하고,
토지개혁과 반혁명 탄압운동에 참가하게 했습니다.
이 한바탕 피비린내 나는 운동은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공산당의 잔인함과 흉악함을 보게 했으며
당시 수많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마오쩌둥은 1939년 12월에 발표한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이란 문장에서
지식인들을 ‘소자본가계급 범주’로 획정했습니다.
계급투쟁을 강령으로 여기던 그 시대에 ‘소자본가 계급’이란 모자는
지식인들로 하여금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중공은 선전기구를 통해 노동자와 농민을 찬양하면서
그들의 지식이 결핍한 것을 혁명의 동력으로 삼아
‘소박한 계급증오’라고 선전했으며,
공산당의 인도가 있으면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선동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지식인들을
안경을 쓴 채 두려워하며 위축된 모습으로 책이나 보는 책상물림으로 묘사하여
군중들 앞에 나서지 못하며 주관적으로 일을 한다고 왜곡하였습니다.
1958년 청인(成蔭)이 연출한 ‘상해아가씨’라는 영화는
공개 상영한 후 얼마 되지 않아 혹독한 비판을 받았는데,
그 원인은 뜻밖에도
“첫째 지식인이 당위원회 서기나 혹은 지부 서기의 비평교육이 없는 정황 하에서
원칙을 확고히 지키고 건설 중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당의 영도를 부인하는 것으로 당의 영도에 반대하는 것이다.
둘째, 지식인의 ‘연약성, 동요성, 현실과 괴리, 군중들과 괴리’ 등과 같은 결점을 그리지 않았다. 이는 자본가계급 지식인을 미화하는 것이다.
셋째, 주인공이 노동자 중에서 일부 낙후된 사상의 영향을 받아 급히 공을 세우려 하는데 이는 ‘노동자 계급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식인에 대한 이런 비방선전은 거대한 작용을 일으켰습니다.
그 원인은 지식인들은 줄곧 사회사상조류의 지도자였고
사회문제의 발언자였으며 전통문화의 전승자이자 논술자였기에
지식인의 형상에 성공적으로 먹칠을 한 후,
그들이 대표하는 가치관마저도 따라서 전복되었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의 눈에 지식인들은 더는 존중하거나 가르침을 구할 대상이 아니라
조소와 비판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욕이 ‘명예를 실추’하는 데에 속한다면,
지식인들의 밥그릇을 통제하는 것은 ‘경제적인 절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공이 정권을 탈취할 때 함께 생사의 위험을 무릅쓰며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민주인사들은
순진하게도 자신들이 정권의 기초를 다진 공신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사들은 참혹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중공의 행위를 목격했습니다.
장보쥔을 비롯한 저명한 문인들은 귀국한 해외유학 박사, 전 재산을 공산당에 바친 자본가, 부장, 교수, 문학가, 편집장, 기자의 지위에서 분분히 끌려 내려와
공산당 우파 외양간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싸늘한 현실 속에서 민주와 독재가 어떻게 중공에 의해 ‘인민전정’으로 결합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지켜온 정충보국, 목숨을 버리고서 의를 취함, 인격 존엄,
천하의 근심을 미리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나중에 즐기는 등의 전통적인 품격은
모두 마지막 유학자들의 사망과 함께 영원히 역사의 무대에서 소실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중공이 가장 먼저 건립한 것이 바로 인간지옥임을 보았습니다.
요행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때부터 전전긍긍하면서
더는 감히 전통적 가치를 제기하지 못했고
지식인의 독립적인 사고와 인격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펑유란(馮友蘭)과 궈모뤄(郭沫若)는 겨우 마오쩌둥의 한마디 비평에 놀라서 자신의 학술적 관점을 재빨리 개변했을 정도입니다.
일찍이 ‘지식인’은 도덕과 동의어였으며
청빈, 정의, 지식, 함양(涵養),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사회형상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장쩌민 시대에 이르러 당에는
‘정치적인 어용 문인’이라는 일종의 배역이 등장했습니다.
문인(文人)의 정통과는 판이하게,
그들은 정치무대 위에서 가마를 들고 나팔을 부는 장인에 불과하며
장쩌민과 같은 도적의 무리를 보좌하였습니다.
탱크로 사람을 깔아뭉개는 피비린내 나는 탄압 속에서,
국제사회에서 제재와 비난의 목소리가 고조되는 가운데 무대에 오른 장쩌민은
정치적으로 두터운 분칠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런 어용문인들은 단지 정치적으로 국가의 운명을 장사지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지식인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청렴결백을 오염시켰습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공의 소위 ‘전문 학자’들은
일찍이 심후한 정통문화와 행위방식을 계승한 그런 지식인들과는 달리
중공의 무신론, 투쟁철학, 사회발전사에 세뇌되어
정통적인 유불도 문화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연구를 하지 못했고
더욱이 생활 속에 융합하지 못했습니다.
중공은 ‘지식을 존중하고 인재를 존중’한다는 표어를 내걸고
‘당의 은혜는 가없이 크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에 맞추어 사이비지식인들은 복잡하고 번거로운 이론을 만들어
중공 통치의 합법성을 논증하거나
아니면 각종 사회비극의 합리성을 날조하였습니다.
또 일부 당문화에 심각하게 오염된 지식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비록 사람됨의 기본적인 양지(良知)는 지니고 있지만
나라와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이 없이
‘체제 내’의 신분과 ‘체제 내 개혁’을 쟁취하고
매사에 ‘체제 내의 해결’만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체제 내 해결’은 우선적으로 공산당에 굴종하는 것으로
자신에 대해 공산당과 당문화의 통제와 사용권을 승인하면서도
가련할 정도로 미미한 발언권을 얻을 뿐입니다.
선택이 없는 사회 환경 속에서
소련문학과 공산당의 저작 중에서 성장한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성장과정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이 독약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공산당에 대한 이상을 포기하기 힘들어하며,
사회의 불공정에 침묵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중공이 만 가지 악의 근원임을 알려주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중공에 희망을 거는 방법은
바로 개인의 덕행으로 중공의 추태를 감춰주는 것으로,
이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중공의 수명을 연장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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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중국 한국어 단파방송 - SOH 희망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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