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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공산당 문화-(35) 제3장4절 교과서를 이용한 당문화주입
2008-05-07 08:07:16 | 조회 10516
5. 각종 문예형식을 이용한 당문화 주입
공산당은 문예란 상부구조의 일부분으로
오직 통치계급의 이익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여깁니다.
중공이 정권을 탈취한 후 경제적으로 문예단체를 국유로 귀속시키고, 조직에서 문예계 인사들을 ‘체제 내 인사’로 개변시켰습니다. 아울러 그들의 사상을 개조하여 문예창작을 간곡하며 엄밀하게 통제했습니다. 이로써 짧은 시간 내에 모든 문예형식, 예를 들어 영화, 연극, 가무, 곡예 등이 모두 국가기구의 일부분이자 당문화(黨文化)를 주입하는 도구로 변화됐습니다.
1)영화를 이용한 당문화黨文化 주입
(1)‘영화는 가장 중요한 예술’
20세기 초, 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예술과 오락형식으로 간주되어
신속하게 사회에 보급되었습니다.
공산당은 일찍부터 영화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레닌은 “영화는 군중들을 교육시키는 가장 강력한 도구의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그는 “모든 예술 중에서 영화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고도 말했습니다.
1949년 8월 중공 선전부는 『영화사업 강화에 관한 결정』을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에서 “영화 예술은 가장 광대한 군중성과 가장 광대한 선전 효과가 있으므로,
반드시 이 사업을 강화하여 전국적으로 그리고 국제적으로
공산당과 신민주주의 건설 사업을 선전하는 더욱 힘 있는 사업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1951년 중공이 정권을 탈취한 후 실행한 최초의 사상개조 운동은
영화 『우쉰전』을 비판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마오쩌둥은 직접 칼을 들고 『우쉰전』을 대대적으로 비판했습니다.
마오쩌둥의 이런 행동은 앞으로 중공의 역대 당 두목들이
모두 영화라는 이 예술 형식을 각별히 중시하게 될 것을 예시했습니다.
1953년 영화산업에 대한 ‘사회주의 개조’를 모두 완성했습니다.
소련 전문가들의 도움 하에
중공은 제1차 5개년 계획에 영화제작을 넣어 영화에 대한 행정명령식 관리를 시행했습니다.
1949년에서 1966년 사이 중공은 총 70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해 “역사가 중공을 선택했다.”라는 거짓말을 전면적으로 날조했습니다.
또한 중공의 각 시기의 정책을 해설했으며,
당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긍정적으로 부각시키고 전통문화와 전통인물을 폄하했습니다.
이 시기 대표작들로는 『백모녀(白毛女)』,『강철전사(鋼鐵戰士)』,『남정북전(南征北戰)』,『청춘의 노래(青春之歌)』,『홍기보(紅旗譜)』,『지뢰전(地雷戰)』,『지도전(地道戰)』,『이쌍쌍(李雙雙)』,『붉은 태양(紅日)』,『소병장가(小兵張嘎)』,『영웅자녀(英雄兒女)』,『들불과 봄바람이 옛 도시와 싸우다 (野火春風鬪古城)』,『네온싸인 아래의 보초병(霓虹灯下的哨兵)』등입니다.
이들 영화 속에서는 중공 지도자, 중공의 소위 ‘영웅모범인물’은 물론이고,
심지어 음침하고 행실이 천박한 중공 특무마저도 찬양 대상이 되었습니다.
영화라는 이런 매체 형식은
중공으로 하여금 ‘진짜처럼 날조’할 수 있게 했습니다.
또한 멋진 남·여 배우, 시적인 정취와 그림 같은 정취,
로맨틱하거나 혹은 서사시 같은 줄거리 설정은 최대한도로 당 대표인물을 부각시켰습니다.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예술작품 속의 인물 형상이
더욱 ‘본질’적이고 더욱 보편성을 지녔으며
더욱 ‘당’을 대표할 자격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이 단지 ‘당’의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몰랐을 뿐입니다.
1949년 이전에 영화는 도시 예술이었습니다.
영화의 선전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중공은 행정구역 단위로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체계적으로 영화 상영팀을 구성해 선전의 촉각을 농촌과 탄광에까지 뻗쳤습니다.
1949년 중국 전체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곳은 646개였지만,
1957년에 이르러서는 9965개로 증가했습니다.
그 중 영화관이 1030개였으며
영화 상영팀이 6692개였습니다.
노동조합 상영팀은 1954년 1년간 11만 4000여 차례나 상영했으며
관람객 수는 1억1천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영화 상영팀은 줄곧 80년대 중반까지 활약했으며
당문화를 보급하는데 극히 큰 작용을 일으켰습니다.
문화 대혁명이 시작된 후, 중공은 1949년부터 1966년까지 17년 동안 만들어진 영화의 90% 이상을 독초(毒草)로 비판했고,
문예영역은 모범극 천하가 되었습니다.
1979년에 이르러서는 이 ‘17년’ 영화들의 상영금지를 풀어줌으로써
그 해 전 국민의 평균 영화 관람 횟수가 28차례나 되어
전국의 총 영화 관람객수가 293억에 달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사실 중공의 통치책략을 반영한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인민들의 모든 것을 박탈함으로써
경제 상황이 조금만 호전되어도 중공에게 감지덕지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문예영역에서도 인민들은 모든 것을 박탈당한 후,
당문화를 주입하는 선전 작품을 가뭄에 단비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매스컴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한 가지 매체가 사람의 여러 가지 감각을 만족시킬수록 더욱 쉽게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영화는 문학·음악·미술·공연 등을 종합한 예술로서
사람의 각종 감각기관을 전면적으로 자극하는 매우 강력한 선전 형식입니다.
중공이 영화 속에서 만들어 낸 당의 대표 인물들, 그들의 억양, 얼굴 표정 등은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의 모방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마오쩌둥이 지도를 앞에 두고 ‘지휘하는 모습’, 소련 영화에 나오는 레닌의 연설동작 등입니다.
많은 영화 속 어휘들이 사람들의 일상 언어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영웅자녀(英雄兒女)』 중 왕청(王成)의 대사 “승리를 위해 나에게 대포를 쏴라”라는 말은 오늘날까지도 유행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렇게 ‘조용한 변화’ 방식으로
사람들의 심리와 행동양식을 개조하며 그 효과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합니다.
중공의 영화 중시는 문학을 초월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더 심해졌습니다. 1989년 이후 중공은 이데올로기를 더욱 조여 1990년에서 1992년 사이에는 정치 홍보 영화를 지칭하는 ‘주선율(主旋律)’의 고조가 나타났습니다.
對중국 한국어 단파방송 - SOH 희망의소리
11750KHz, 중국시간 오후 5-6시, 한국시간 오후 6-7시
http://www.soundofhop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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