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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그 사람-(30)
 
  
2007-10-19 08:53:16  |  조회 8288


제9장 덩샤오핑이 사망하자 차오스를 사퇴시키고 난폭한 독재 실시  


1. 덩샤오핑의 사망

1997년은 중공 고위층으로 놓고 말하면 아주 중요한 일년이었다.

덩샤오핑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최후의 모습을 보인 것은 1993년 12월, 상하이 양푸(楊浦)대교에서와 설 전날 TV에 나온 것이었다. 덩샤오핑의 쇠약한 모습으로 홍콩 증시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중공 내부에서 덩샤오핑과 사이가 밀접했던 사람들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덩샤오핑의 사무실과 연락만 하고 덩샤오핑을 직접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던 장쩌민은 이번에 덩샤오핑의 모습을 보자 목을 조였던 밧줄이 느슨해지는 듯 했으며 이제는 살만한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장쩌민과 쩡칭훙은 어떻게 하면 더 확실하게 정권을 잡을 것인지에 대해 자주 연구했다. 그들은 자기 세력들을 배치해 기반을 독차지하는 것으로는 모자라며 인심을 널리 사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 몇 년 동안 장쩌민은 각종 부패한 수단으로 사람들을 끌어 들이고 패거리를 묶으면서 고위층 관리들을 매수했다. 장쩌민에게 있어서 ‘부패’는 또 다른 한 가지 용도가 있었는데,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으면 ‘반부패’의 명분으로 제거해 버리는 것이었다. 나중에 장쩌민이 정적을 타격할 때 이 방법은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살아있는 한 장쩌민은 일정한 제약을 받았다. 1996년 12월, 오랫동안 파킨슨병을 앓고 있던 덩샤오핑은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했다. 두 달이 지나도 덩샤오핑이 숨을 거두지 않자 장쩌민은 크게 실망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질질 끌면서 죽지 않고 있다가 병세가 호전되기라도 할까 봐 여간 안타깝지 않았다. 덩샤오핑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장쩌민으로 놓고 말하면 매우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1997년 2월 19일 저녁 9시 8분, 덩샤오핑이 끝내 사망했다.

장쩌민 세력들은 즉시 중공 중앙,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국무원, 전국 정치협상회와 군사위원회 명의로 ‘전당, 전군, 전국 각 민족 인민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해 장쩌민 동지를 핵심으로 한 당 중앙은 반드시 덩샤오핑이 개척한 개혁개방을 계속 추진해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덩샤오핑의 영결식에서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 장쩌민은 발언할 때 목소리를 가급적 비통하게 했으며 효과를 증폭시키기 위해 또 눈물까지 몇 방울 흘렸다. 그러나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장쩌민의 진실한 마음이 어떻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그 때 장쩌민이 눈물을 훔치는 사진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되고 있다.

영결식이 끝나고 이틀이 지난 후, 군부와 무장부대는 장쩌민의 추도사를 공부해야 했고 “장쩌민을 핵심으로 한 당 중앙과 절대적으로 일치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야 했다. 또 2월 25일 인민일보는 사설을 발표했는데 ‘장쩌민을 핵심으로 한 당 중앙’이란 문구가 9곳이나 있었다.


2. 차오스를 배척

당시 장쩌민과 쩡칭훙에 의해 낙마한 양상쿤은 이미 91세 고령이었지만 ‘불행히도’ 아직 살아있었다. 동생 양바이빙은 군사권은 잃었지만 군인들을 다스릴 권한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모두 장쩌민을 불안하게 했지만 어찌 되었건 일은 순서대로 처리해야 했으므로 차오스(喬石)의 목을 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차오스는 1924년 12월 상하이에서 태어나 16세 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상하이 학생운동을 조직한바 있다. 1945년부터 1949년 사이 상하이 퉁지(同濟)대학 지하당 총지부서기, 상하이 지하당 학생위원회 총책임자, 상하이 지하당 신스구(新市區) 위원회 부서기와 상하이 베이구(北一區) 학생위원회 서기직을 맡았다. 그러나 같은 시기 장쩌민은 어디에 붙으면 좋을지 몰라 우유부단하고 있었다. 중공이 정권을 건립한 후, 차오스는 지방에서 일하다가 1982년 중공중앙 해외연락부 부장, 중앙 조직부 부장, 국무원 부총리, 중앙 기율위원회 서기, 중공 중앙 당 간부학교 총장 등의 직무를 맡았다.

또 1993년부터 1998년까지는 제8기 전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 정치국 상무위원직을 맡았다. 중공 내부에는 차오스처럼 학생운동을 이끌다가 공업계통을 책임졌으며 해외연락을 맡았다가 다시 당조직 관리, 정보 관리, 기율 관리를 주관하다 나중에 최고위층에 들어간 사람은 아주 드물다. 장기간 지방 관리로 있었던 장쩌민은 물론 열사의 자녀인 리펑, 심지어 원로인 양상쿤, 보이보 등도 그와 비길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경험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장쩌민은 모두 차오스의 상대가 아니었다. 장쩌민은 베이징에 온 뒤, 차오스가 두 세력의 원로인 덩샤오핑, 천윈이 모두 좋아하는 인물임을 단기간 내에 알게 되었다. 중앙 기관의 사람들도 진정한 능력으로 승직했다고 차오스를 평가했다. 찔리는 데가 있던 장쩌민은 이것은 간접적으로 자신을 질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차오스를 증오했다. 사실 차오스는 1985년에 이미 후치리(胡啓立)와 함께 원로들에게 내부적으로 후계자로 지정되었다. 차오스의 침착하고 착실하며 민감하고 과감한 성격은 원로들의 호평을 받았다. 6.4사건 때, 총서기 자오쯔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덩샤오핑은 차오스를 그 대신 발탁하려고 했던 바 있다.

장쩌민은 자신의 위치가 차오스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차오스 배후에는 또 법률 계통과 인대위원회의 펑전(彭眞), 완리가 있었다. 장쩌민을 더 불안하게 한 것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차오스를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차오스는 개혁파와 보수파 원로들의 마음에 동시에 들어 13차 당대표대회 때 후계자로 내정되었다. 또 중공 14차 대표대회에서 차오스는 전체에서 한 표 모자라는 316표로 정치국위원으로 당선되었는데, 그 한 표는 바로 질투심이 강한 장쩌민의 표였다.

베이징에는 장쩌민이 내려가고 차오스가 올라오기를 바라는 민심을 보여주는 ‘강낙석출(江落石出)’이라는 말이 떠돌아 장쩌민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양씨 형제들이 낙마하기 전, 장쩌민은 항상 불안해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그가 중공 최고 보좌에 앉은 것은 덩샤오핑이 발탁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원로들이 서로 타협한 결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덩샤오핑은 망설이던 끝에 동의는 했지만 나중에 여러 번 그를 잘라버리려 했고, 진정으로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리셴녠도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아첨 때문이라는 것을 장쩌민 역시 알고 있었다.

장쩌민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1989년 6월 21일에 찍은 사진을 보았다. 거기에는 제13기 4중 전회 때 승직된 6명 상무위원 장쩌민, 리펑, 차오스, 쑹핑(宋平), 리루이환, 야오이린(姚依林)이 있었고 당시 군사위부주석 양상쿤이 가운데 서있었다. 덩샤오핑의 생각은 뻔했다. 양상쿤이 덩샤오핑을 대신해 대권을 쥐게 될 것이고 장쩌민은 오리구이 요리 접시에 있는 당근처럼 있어도 없어도 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양씨 형제가 제거되었고 덩샤오핑도 세상을 떠났기에 장쩌민은 담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는 덩샤오핑이 죽은 뒤 자신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중공의 ‘핵심’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오스는 장쩌민의 생각을 알아주지 않고 잘못을 보면 여전히 사정없이 지적하고 비평했다. 이는 장쩌민으로 하여금 항상 목에 뼈가 걸린 것처럼 불편한 느낌이 들게 했다.

상하이에서 출세하여 상하이 서기 직무를 맡고 있을 때부터 ‘상하이방’을 만들어 악명 높았던 장쩌민은 당정군(黨政軍) 대권을 손에 쥐게 되자 더욱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놓치지 않고 ‘상하이방’ 세력들을 배치했다. 덩샤오핑이 이를 여러 번 비평했고 차오스도 정치국에서 간부를 선발할 때 각 지방에서 고루 선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차오스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장쩌민에게 눈길을 돌렸다.

덩샤오핑이 죽은 뒤, 독일 경제일간지 ‘한델스블라트’에서 차오스를 인터뷰한 기사를 싣자 쩡칭훙은 즉시 사람을 찾아 번역하게 한 후 장쩌민에게 주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차오스가 법률 제도와 인민대표대회를 언급한 외, 기자에게 또 한 가지 일을 강조했답니다”라고 말하고는 일부러 좀 쉬었다가 장쩌민이 조급해 하는 모습을 보이자 말을 이었다. “차오스는 좌파를 반대해야 한다고 했답니다”라고 말했다. 장쩌민은 놀라며 “좌파를 반대한다고?”라고 하며 덩샤오핑이 남방을 시찰할 때, 하마터번 낙마할 뻔했던 위기를 반사적으로 떠올렸다.

1995년 3월 9일, 차오스는 CCTV의 인터뷰를 받을 때, “시장경제는 법제경제이기 때문에 경제 법률은 입법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고 일년 내에 완성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인대 부위원장 톈지윈(田紀雲)도 이에 호응해 “인대 대표는 후보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어야 하며 정부는 신 정책을 국민에게 공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차오스는 또 제8기 인대 3차 회의에서 “국가 공무원은 모두 인민의 공복이어야지 인민의 머리위에 올라앉아 있는 어르신이 아니다”, “제도적으로 청렴한 정치를 강화해야 하며 그 근본은 법률 제도에 의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쩌민은 차오스의 말이 구절마다 화살이 되어 자신을 겨누고 있는 것 같았다.

덩샤오핑이 죽고 양씨 형제가 숙청되자 장쩌민을 짓누르고 있던 돌덩이는 제거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법제를 주장하는 차오스가 장쩌민의 새로운 걱정거리가 되었다. 그리하여 차오스를 15차 당대표대회에서 퇴직시키는 것이 장쩌민의 다음 목표가 되었다.

장쩌민은 또 다시 보이보와 이익을 주고받는 거래를 했다. 보이보는 차오스에게 퇴직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을 약속했고 장쩌민은 보이보의 아들 보시라이(薄熙来)에 대한 ‘관심’은 너무나 부족했다고 사과하면서 ‘고칠’ 것을 약속했다.

1997년 4월 26일, 장쩌민이 차오스의 가장 큰 지지자로 생각했던 펑전(彭眞)이 사망했다. 펑전은 예전에 마오쩌둥마저도 속수무책이었다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무서운 펑전이 죽자 장쩌민은 크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3. 문인을 등용

장쩌민이 등용한 3명의 문인 텅원성(縢文生), 왕후닝(王滬寧)과 류지(劉吉) 중, 장쩌민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류지였고 가장 먼 사람은 텅원성이었으며 왕후닝은 장쩌민이 가장 떠받드는 사람이었다. 장쩌민이 쇼를 하는데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이 세 사람에게서 나왔다.

* 중난하이 제일 문필 텅원성

텅원성은 1940년 10월, 후난(湖南)성 창닝(常寧)에서 출생했고 1964년 중국인민대학 중공 당역사 학부를 졸업했으며 중공중앙 서기처 연구실 연구원, 이론연구소 소장, 부주임, 중국 직공(職工)사상정치공작연구회 상무이사, 중공 중앙 고문위원회 부비서를 역임했다. 또 1989년부터는 중앙 정책연구실 부주임직을 맡았다가 나중에 장쩌민에 의해 주임으로 승직했다. 그는 중공 제15기 중앙 위원이었으며 제16차 당대표대회 정치보고서를 썼다.

텅원성은 1980년, 중앙서기처 연구실에 있을 때, 전문적으로 진보 인사들을 제거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수집했다. 팡리즈(方励之), 왕뤄왕(王若望), 류빈옌(劉賓雁) 등은 모두 탕원성이 수집한 자료 때문에 당에서 제거되었다. 1987년 9월,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의 지지를 받고 이 연구실을 없앴다.

베이징의 내부 소식에 따르면, 마오쩌둥 연구 전문가인 텅원성은 장쩌민에게 마오쩌둥의 방식대로 정치국을 통제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즉, 권력을 어느 한 측근에게 모두 줄 것이 아니라 2, 3명의 관리가 서로 내부 투쟁을 하게하고 나중에 장쩌민을 찾아 중재하게 만드는 방식을 가리킨 것이었다.

텅원성이 장쩌민사상에 대한 최대의 공헌은 ‘3강’에 있는 ‘정치를 말한다’ 부분이었다.


* ‘3개 대표’를 작성한 왕후닝

1955년 10월 6일, 상하이에서 출생한 왕후닝은 1995년 중공중앙 정책연구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푸단대 국제정치학부 교수였으며 학생들의 박사과정을 지도했다.

장쩌민이 상하이 서기로 있을 때 이미 왕후닝의 이름을 익숙히 알고 있었으며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작품이 마음에 들어 매우 우러러 보았다. 몇 년 후, 왕후닝이 중앙정책연구실에 발탁되어 처음 장쩌민을 만나러 왔을 때, 총서기인 장쩌민이 그의 작품을 줄줄 외워 깜짝 놀랐다고 한다.

장쩌민이 다른 사람의 글을 외우기 좋아했던 것은 머릿속에 자신의 사상이 없어 다른 사람의 묻는 말에 늘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엉뚱한 대답만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또 자신이 박식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장쩌민이 자신을 내세우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당의 헌장과 헌법에 밀어 넣으려 했던 ‘3개 대표’를 작성한 사람이 바로 왕후닝이다. 장쩌민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느닷없이 다른 사람의 문장을 외우는데 고시(古詩)와 외국 경전으로 얼굴에 금칠을 하려해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되었다.

왕후닝은 쩡칭훙의 추천으로 중앙정책연구실에 들어갔는데 우방궈(吳邦國)가 그를 장쩌민의 정치 고문으로 추천하려고 생각했다. 우방궈는 베이징에 들어간 뒤 몇 번이나 장쩌민에게 이 일을 말했다. 나중에 왕후닝이 중난하이에 들어가자 장쩌민은 그를 만난 자리에서 농담으로 “당신이 베이징에 안 오면 그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해 장쩌민의 측근인 쩡칭훙과 우방궈가 장쩌민의 무능함을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지 보여주었다.

왕후닝은 베이징에 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장쩌민을 위해 14기 5중 전회 때 발표할 발언고 ‘12대 관계를 논함’을 썼다.

왕후닝의 최대 공헌은 장쩌민에게 ‘3개 대표’와 ‘시기를 맞춰 앞으로 나아간다[輿時俱進]’는 이론이다. 이는 장쩌민이 자리를 내놓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으며 장쩌민은 자신의 ‘창조적인 논술’인 이 이론을 당장(黨章)과 헌법에 밀어 넣었다. 왕후닝은 장쩌민의 특별 고문으로 있다가 2002년 11월 16차 당대표대회에서 장쩌민에 의해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장쩌민이 자리에서 물러난 후, 중앙정책 연구실 주임을 맡았던 왕후닝은 사회과학원 부원장직을 맡겠다는 요구가 거절을 당하자 또 당간부학교 부학장 자리를 요구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한편 장쩌민은 왕후닝이 ‘3개 대표’를 쓴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누설해 코가 납작해 졌으므로 괘씸해 죽을 지경이었다.

* 왕예핑을 형수라고 부르는 류지

장쩌민 신변에는 입이 되어주는 인물이 류지 한 사람 뿐이 아니었지만 ‘총관리인’ 쩡칭훙, ‘미용사’ 왕후닝 등의 사람들도 장쩌민의 앞에서 류지처럼 맘 놓고 행동하지 못했으며 사전에 통보하지 않고 장쩌민의 저택을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했다.

류지는 1935년 10월에 안후이성 안칭(安慶)에서 태어나 칭화대학 수리공정 학부를 졸업했고 졸업한 뒤에는 상하이에 배치되었다. 그는 이공과 출신이었지만 간부 이론을 열심히 연구했다. 장쩌민이 상하이에 있을 때, 류지는 천즈리가 이끄는 상하이시 당위원회 선전부에서 부부장으로 일하다가 1993년, 베이징에서 중국사회과학원 부원장직을 역임했다.

류지는 주로 ‘명주론(明主論)’에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 장쩌민을 진보적인 이미지로 만들려고 했으며 ‘핵심론’과 ‘신권위론’을 주류 사상으로 만들어 장쩌민으로 하여금 권세를 이용해 주먹을 휘두를 수 있게 하고 권력을 확대하게 만들었다.

장쩌민은 왕후닝이 쓴 글을 외우면서 자신의 이론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명주론’은 측근들이 자신의 얼굴에 금칠하기 위해 쓴 것이었으므로 이것만은 외우지 않았다. 장쩌민으로 놓고 말하면 국사(國師)로 모시고 있는 류지에게서 권력투쟁 기교를 교육받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다.

장쩌민이 중난하이에 들어간 후, 류지는 미리 통보할 필요 없이 장쩌민의 저택을 마음대로 드나들었는데 경호원도 감히 막지 못했다. 상하이에 있을 때, 류지는 ‘쩌민동지’라고 직접 이름을 불렀으며 베이징에 온 후에야 총서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장쩌민의 아내 왕예핑에게는 여전히 형수라고 불렀다.

류지는 베이징에 옮겨와 근무하게 된 후, 일반적으로 베이징주재 상하이 사무실에서 밥을 먹었는데 입맛을 바꾸고 싶으면 차를 타고 곧장 장쩌민의 자택으로 갔다. 왕예핑은 기분 좋으면 직접 주방에서 류지가 좋아하는 강남 요리를 해주기도 했다. 왕예핑이 바빠서 요리를 해주지 못해도 느닷없이 찾아오는 류지에게 이미 습관된 주방 일꾼들이 언제든지 그에게 밥을 차려주었다.

그러나 집정 후기에 류지가 일부 개혁파 지식인들을 공개적으로 지지해 장쩌민은 그를 멀리했고 류지도 나중에 사회과학원 부원장 자리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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