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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그 사람 - (24)
 
  
2007-08-04 04:20:12  |  조회 6096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정계에서 사라지면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유력한 조수를 잃었다. 제3세대 지도자의 핵심인 장쩌민은 개혁개방을 추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대했다. 덩샤오핑은 생각하던 끝에 딸 덩난(鄧楠)의 도움을 받아 남방 시찰의 길에 올랐다. 그는 늙고 쇠약한 몸으로 멈춰버린 개혁개방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움직이려고 결심했다.

1992년 1월 17일, 덩샤오핑을 실은 전용 열차는 베이징에서 출발해 남부로 질주했다. 당시 88세 고령이었던 덩샤오핑은 부인과 딸, 그리고 친구인 양상쿤(楊尙昆)과 함께 1월 18일부터 2월 21일까지 우창(武昌), 선전(深圳), 주하이(珠海)와 상하이를 시찰했는데 ‘덩샤오핑의 남방시찰[南巡]’로 유명하다.

덩샤오핑이 남방시찰을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장쩌민이 극좌적인 노선을 고집하며 개혁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덩샤오핑이 남방시찰을 진행하고 발표한 연설 보도를 가로막은 사람 역시 장쩌민이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나중에 뻔뻔스럽게 개혁의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고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외국인을 매수해 자신의 평전을 쓰게 했다. 사실 당시 덩샤오핑을 도와 개혁개방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은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양상쿤, 양바이빙 형제였고 덩샤오핑의 뒤를 이어 경제 발전을 가장 크게 추진시킨 사람은 주룽지였다. 중국공산당 제14차 대표대회 이후 군사권을 잃은 양씨 형제는 장쩌민과 원수지간이 되었다. 그러던 1998년, 장쩌민과 쩡칭훙은 양상쿤을 죽음에로 내몰았을 뿐만 아니라 줄곧 양바이빙을 궁지에 몰아넣어 후환을 없애려고 생각했다. 장쩌민이 이렇게 한 것은 사적인 원한과 질투 때문뿐만 아니라 개혁의 공로를 자신의 것으로 돌리는데 있어서 그들 형제가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1992년 1월 18일, 우창에 도착한 덩샤오핑은 후베이성 당위원회 관광푸(關廣富) 서기와 궈수옌(郭樹言) 성장을 만났다. 덩샤오핑은 두 사람에게 “13차 대표대회 노선을 반대하면 관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말하고 이 말을 장쩌민에게 전달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이를 안 장쩌민은 앙심을 품고 덩샤오핑의 남방시찰 연설이 발표된 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시하지 않았다.

이튿날, 선전(深圳) 특별구에 도착한 덩샤오핑은 이례적으로 긴 연설을 발표해 장쩌민에게 최후통첩을 내렸다. “개혁개방은 막을 수 없는 대세로 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 때문에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은 관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이와 동시에 덩샤오핑은 양상쿤과 완리에게 연말에 열리는 중공 제14차 대표대회에서 발표할 총서기를 포함한 인사변동 명단을 준비하게 했다. 덩샤오핑은 친구이자 국가주석, 군사위 부주석인 양상쿤과 남방시찰 일정을 함께 했으며 개혁개방 추진에 유리한 인물들인 차오스(喬石), 류화칭(劉華淸), 예쉬안핑(葉選平), 주룽지, 양바이빙 등과 각각 단독으로 만났다. 덩샤오핑은 또 장쩌민 대신 차오스를 발탁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남방을 시찰하는 기간, 자오쯔양이 경제를 책임진 5년 동안 “큰 발전을 가져와 공로가 크다”고 거듭 칭찬했으며 시찰이 끝난 뒤에는 여러 차례 사람을 파견해 자오쯔양에게 잘못을 승인하도록 설득했으나 자오쯔양은 따르지 않았다. 공산당 내부에서 자오쯔양처럼 당성(黨性)이 아닌 양심을 꿋꿋하게 지켜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보기 드물었다.

장쩌민은 총서기 자리에 앉은 2년 동안 극좌적인 노선으로 나아가며 ‘반평화연변(演變)’을 떠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개혁을 반대하면 관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한 덩샤오핑의 말은 장쩌민의 급소를 찔러 줄곧 불안하게 했다. 2월 20일 오전, 장쩌민은 정치국 회의를 열고 덩샤오핑의 연설을 전달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연설을 전국 각지에 전달하는 문서로 만들 때, 장쩌민은 “당 간부들의 사상을 불안정하게 할 수 있다”는 구실로 “개혁개방은 막을 수 없는 대세이고 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기에 개혁하지 않으면 관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부분을 비롯한 많은 내용을 삭제했으며 덩샤오핑의 남방시찰을 언론에서 자세하게 보도하지 못하게 했다.

2월 하순의 어느 날, 정치국 상무위원 리루이환(李瑞環)이 ‘인민일보’ 사장 가오디(高狄)에게 왜 덩샤오핑의 남방시찰 연설을 발표하지 않고 아무런 반응이 없는지 묻자 가오디는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덩샤오핑은 지금 일반 당원이기 때문에 어떤 신분으로 발표해야 될지 우리도 난감합니다”라고 말했다. 가오디가 감히 리루이환과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배후에 장쩌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장쩌민에게 총서기 자리를 준 사람이 덩샤오핑이며 군대를 손에 쥐고 있는 덩샤오핑이 언제든지 장쩌민의 자리를 다시 회수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1992년 3월 20일부터 4월 3일까지, 베이징에서 제7기 전인대 5차 회의가 열렸다. 이번 회의의 초점은 당연히 개혁 진행여부를 둘러싼 토론이었다. 장쩌민이 덩샤오핑의 남방시찰 연설내용을 삭제하면서 중공 정치투쟁에서 가장 위력 있는 군부가 나서기 시작했다. 회의에서 중앙서기처 서기, 군사위 비서 겸 정치부 주임인 양바이빙이 가장 먼저 “개혁개방의 순조로운 진행을 보호할 것”이라고 태도를 표시했으며 ‘해방군보’에 똑같은 제목으로 사설을 발표하도록 지시해 공개적으로 덩샤오핑을 지지했다. 군 장령 중에서 이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허치쭝(何其宗) 부참모장이었다. 양바이빙의 이번 행동은 직접 장쩌민을 겨냥했으므로 장쩌민은 양바이빙과 허치쭝 두 사람을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했으며 나중에 끝내 보복하고야 말았다.

회의 기간인 3월 26일, ‘선전특구보’는 제1면에 ‘동풍이 불어오니 봄이 오네...덩샤오핑의 선전 시찰’이라는 제목으로 가장 먼저 덩샤오핑의 남방시찰과 중요한 연설을 보도했다. 같은 날 오후 ‘양청완보(羊城晩報)’에서 ‘선전특구보’의 보도 전문을 전재했으며 이틀 뒤에는 상하이 ‘원후이보(文匯報)’, ‘중화공상시보(中華工商時報)”에서도 잇달아 보도를 전재했다. 그러나 장쩌민파들이 통제하고 있는 신화사는 나흘이나 지난 3월 30일에야 뒤늦게 보도를 내보내 장쩌민의 꼬인 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양바이빙은 군대를 대표해 덩샤오핑의 남방시찰 연설을 공개적으로 지지해 덩샤오핑의 가장 든든한 뒷받침이 되었다. 해방군의 지지는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들의 기세를 꺾어 놓았으며 형세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장쩌민은 군대의 칼끝이 자신을 압박함을 느끼자 당황했고 항상 그래왔듯이 바람 따라 노를 젓기로 결심했다. 4월 1일, 일본 정치인사들을 접견할 때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연설을 지지하는 척 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그가 전혀 성의 없는 빈말만 했다고 평가했다.

중공 제14차 대표대회 개막이 몇 개월 앞으로 다가오자 양바이빙은 군대의 힘을 앞세워 중공 고위층에서 역량을 과시했고 베이징의 정치 형세는 한치 앞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남방시찰 후, 능력 없고 기회주의적이며 진실하지 못한 장쩌민에 대한 덩샤오핑의 인내심이 극에 달했다. 5월 22일, 덩샤오핑은 무더위를 무릅쓰고 베이징 강철회사를 시찰하고 강철회사의 간부와 노동자들 앞에서 “일부 사람들은 나의 연설을 겉으로만 지지하는 척하고 또 일부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는데 사실은 반대하는 것이다. 현재 소수의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개혁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 당시 덩샤오핑과 함께 있었던 베이징 정부 관리 리시밍(李錫銘)과 천시퉁(陳希同)이 덩샤오핑의 지시대로 이 말을 장쩌민에게 전달했다.

이 기간, 정치국상무위원, 법률위원회서기, 중앙당간부학교 교장 차오스도 “덩샤오핑의 연설을 단지 형식적으로 지지하는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지적하면서 간접적으로 장쩌민을 비평했다.

부총리 톈지윈(田紀雲)은 덩샤오핑의 개혁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톈지윈은 차오스의 요구에 따라 1992년 5월, 중앙당간부학교에서 장쩌민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그를 비평하는 연설을 발표했다. 그는 “‘좌’적 영향을 제거할 때, 특히 기회주의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항상 입장을 바꾸면서 기회만 있으면 개혁개방을 반대하는데 이런 사람이 대권을 장악하면 국가와 인민에게는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라고 말했다.

형세가 불리하자 다시 개혁파의 모습으로 가장하려했던 장쩌민은 뜻밖에 톈지윈에게 들통 나자 괘씸해 죽을 지경이었다.

리셴녠은 오래전부터 개혁개방을 지지한 톈지윈을 증오했다. 6.4사건 직후인 1989년 10월 27일 열린 정치국회의에서 장쩌민이 자오쯔양의 개혁성과를 부정하자 톈지윈이 즉석에서 “성과는 다 같이 노력한 결과이고 문제가 생기면 누구에게나 책임이 있다”며 지적했다. 이를 안 리셴녠은 “자오쯔양의 앞잡이가 또 설쳐대는군!”하고 욕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 톈지윈이 장쩌민을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하고 있을 때 장쩌민의 가장 큰 배후 지지자인 리셴녠은 병원에 입원해 있어 장쩌민을 안타깝게 했다. 5월 말, 전문 의료진이 리셴녠의 병세가 위태롭다고 보고하자 장쩌민은 더더욱 불안해 졌다. 형세가 불리해지자 그는 부득이 태도를 바꿔 자산계급화한 개혁을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했다.

6월 9일, 장쩌민은 차오스와 군인, 경찰들에 둘러싸여 중앙당간부학교 회의실에 들어갔다. 당교의 강사와 학생들은 그 광경을 보고 “장쩌민이 차오스에게 압송되어 왔다”고 조롱하듯 말했다. 이날 장쩌민은 차오스의 압력으로 덩샤오핑의 남방시찰연설을 지지한다고 표명했다. 하지만 장쩌민은 체면을 잃었다고 느껴 차오스를 더욱더 증오하게 되었다. 회의가 끝난 뒤,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장쩌민이 마음에 없는 말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수군댔지만 겉으로나마 장쩌민의 태도는 많이 달라졌다.

그 해 여름, 총서기인 장쩌민의 인기는 바닥으로 떨어져 일부에서는 장쩌민이 총서기 자리를 보존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소문마저 떠돌았다. 6월 21일, 리셴녠이 베이징에서 병으로 사망하자 장쩌민은 형세의 변화에 못 이겨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노선을 지지한다고 뒤늦게 밝혔다. 그러나 장쩌민은 관직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으로 갈수록 두려워졌고 특히 과거와 현재에 국민들에게 진 피의 빚을 함께 갚을 날이 올까 봐 침식을 잊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몰래 덩샤오핑을 찾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를 따라 개혁개방을 끝까지 진행하겠다고 ‘결심’을 표시했다.

장쩌민은 양씨 형제, 차오스, 완리, 톈지윈 등으로부터 오는 강대한 압력을 느꼈으며 그들을 증오하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개혁을 반대하던 데로부터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장쩌민에게 있어서 어떻게 하면 자신을 사상이 개명한 개혁파 인물로 포장해 이 고비를 넘길 것인지는 아주 중요한 과제였다. 자신의 역사를 숨기고 왜곡하는 것이 장기인 장쩌민은 “사실 따져보면 장쩌민도 역시 경제개혁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라고 쿤에게 자신의 평전에 써넣게 했다. 이는 처음부터 개혁을 방해하고 ‘반평화연변’을 떠벌린 장쩌민의 많은 수작들을 순식간에 덮어 감췄으며 오히려 보수파에 의해 납치당한 ‘피해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한번 찾아가 이야기하면 끝났을 것이며 구태여 군사권을 쥔 양상쿤과 함께 남방시찰을 떠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對중국 한국어 단파방송 - SOH 희망의소리
11750KHz, 중국시간 오후 5-6시, 한국시간 오후 6-7시

http://www.soundofhop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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