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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9 04:16:50 | 조회 4997
7.끝나지 않은 악몽
6.4사건 이후,장쩌민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는 늘 누군가가 6.4사건과 자오쯔양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까 두려웠다. 자오쯔양이 천안문 광장의 학생들을 방문한 사진들은 오히려 그가 학생들을 학살 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증거물로 되었다. 십 몇 년 동안 사람들이 6.4기념일에 늘 이 사진을 언론에 게재할 때마다 장쩌민은 자신의 떳떳하지 못한 승직을 간접적으로 질책하는 것 같아 머리가 괴로왔다. 장쩌민은 6.4사건 전 자오쯔양이 자신을 비평한 일에 앙심을 품고 보안부문의 사람들마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오쯔양의 가택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늦추지 않았다.
6.4사건 이후, 전 세계 거의 모든 매스컴은 왕웨이린(王維林)이라고 부르는 청년이 맨몸으로 달려오는 탱크 부대를 막아선 사진을 전재했다. 해외 언론에서는 평화적으로 폭행에 맞선 그의 용기를 찬양했으며 그를 20세기의 영웅이라 불렀다. 왕웨이린은 당연히 6.4사건의 명예 회복을 촉구하는 잠재적 요인으로 되었다. 이에 분노한 장쩌민은 밀령을 내려 왕웨이린을 찾게 했으며 비밀리에 그를 처형했다.
2000년 미국 CBS 방송국의 저명한 기자 마이크 월레스가 장쩌민을 인터뷰하면서 왕웨이린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청년의 용기를 탄복합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이에 대하여 장쩌민은 “그는 절대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라고 동문서답했다. 이는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기자로 말하면 이미 답안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6.4사건에서 해외 중국인들이 찬양하는 영웅이 또 한 사람 있는데 바로 38군 쉬친셴(徐勤先) 군장이다. 그는 6.4때 학생들에게 총을 쏘라는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기에 군사위 주석인 장쩌민에 의해 군사 법정에서 비밀리에 판결 받고 5년 동안 감옥에 감금되었다.
6.4사건이 얼마 지난후 한 차례 내외신 기자회견이 있었다. 그때 프랑스의 한 기자가 6.4사건에서 체포된 한 여 대학원생이 쓰촨(四川) 감옥에서 윤간당한 일을 물었는데 장쩌민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는 한 마디 말을 던졌다. “그녀는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장쩌민에게는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6.4 사건을 최대한 축소시켜 중국인들로 하여금 6.4사건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갖게 함으로써 6.4사건이 명예회복을 받지 못하고 또다른 사람이 그의 최고 권력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청소년 시절부터 아버지 장스쥔(江世俊)이 한 차례 대학살을 속임수를 이용해 민중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한 것을 직접 본 적이 있는 장쩌민으로서는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버지 때보다 기술 조건이 훨씬 좋아졌다. 장쩌민은 즉시 명령을 내려 학생들의 폭력 행위를 과장, 부각시킨 TV프로그램을 제작하게 했다. 그는 일부 군용차들을 일부러 태우면서 현장을 촬영하게 하는 등, 전 국민들로 하여금 군인들이 부득이하게 총을 쏘았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직접 사건을 겪지 않은 국민들은 베이징에서 정말로 학생들의 폭동이 일어났다고 믿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장쩌민은 또 각 회사와 국가 기관에서 6.4민주화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을 지지하고 진압을 반대한 사람들을 낱낱이 조사했으며, 검거 적발을 장려하는 수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보복했다. 거짓말과 위협을 동시에 가한 결과, 민중들은 더 이상 감히 6.4를 담론하거나 돌이킬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중에 사람들은 많은 일들에 대해 정확한 서술이나 판단을 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6.4사건 후 가장 논란이 되었던 문제 중 하나는 진압 당시 중공의 탱크가 사람을 깔아 죽였는지에 대한 여부였다. 전 중공중앙 문헌연구실 위원이자 저우언라이 연구팀 팀장이며 ‘만년의 저우언라이(晩年周恩來)’의 저자인 가오원첸(高文謙)은,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탱크 부대는 확실히 사람을 깔아 죽였습니다. 나중에 저는 해외로 망명 갔는데 많은 당사자들이 신화문 육부커우(六部口)에서 탱크가 천안문에서 철수하고 나오는 학생들을 덮쳐서 많은 학생들이 그 자리에서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렸다고 증언했습니다. 이 사건은 즉시 퍼져 나갔지만 필경 전반 사건 중에서 작은 부분이었죠. 육부커우 근처에는 중앙선전부의 기숙사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중앙선전부에서 지원하고 있는 박사 공부 중인 젊은 관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중앙선전부의 후계자로 아주 신임을 받았는데 그가 당시 그 장면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날조라고 주장했으며 만약 이 일이 포로되면 사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할 것입니다. 탱크가 사람을 쫓아가서 깔아 죽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다른 것은 더 해석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정부는 더욱 이 소문을 날조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조사원들은 수소문하고 추적하여 중앙정부의 한 박사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계엄부대로 끌고 가 고문을 하겠다고 위협하며 ‘정말 보았소?’라고 물었죠. 그는 ‘확실히 보았습니다, 저는 당원으로서 당에 대해 충성해야 하기 때문에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저는 확실히 보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계엄부대 책임자는 1,000볼트에 달하는 고압 전기 충격기를 손에 들고 위협하며 ‘정말로 보았소?’라고 물었습니다. 그 박사는 여전히 ‘보았습니다, 저는 확실히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고압 전기봉을 그박사에게 들이대었고 팍하는 소리와 함께 박사는 즉시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좀 지나 그가 깨어나자 그들이 또 물었습니다. ‘정말 보았소?’ 박사가 또 보았다고 대답하자 전기봉을 다시 한번 들이댔고 그는 또 쓰러졌습니다. 이렇게 몇 번 반복하자 결국 박사는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박사는 신체뿐 아니라 정신이상자가 되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전기고문이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공산당은 자신이 진실한 말을 한다고 표방하며 실사구시를 해야 한다고 국민에게 요구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진실한 말을 못하게 합니다. 저는 이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이 말이 생각납니다. ‘먹으로 쓴 거짓말이 어찌 피로 쓴 사실을 덮어 감출 수 있으랴.’”
6.4당시 베이징 체육대학에서 이론학과를 공부했던 졸업반 학생 팡정(方政)은 고속으로 질주하던 탱크에 두 다리가 깔려 절단되는 끔찍한 일을 겪었다.
16년 후, 팡정은 대기원시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저는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넘어졌으며 탱크가 두 다리를 깔아뭉개며 지나갔습니다. 처음에 제 바지가 탱크의 톱니 달린 무한궤도 바퀴에 휘감겨 들어갔는데 매우 큰 압박감을 느꼈으며 몸이 땅에서 끌려가는 것을 조금 남은 의식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의사가 말해 주었죠. 머리, 등 뒤, 어깨에 모두 상처를 입었다고. 탱크의 바퀴가 저의 두 다리를 잘라버리고 바지마저 찢어지자 저는 바퀴에서 떨어져 나와 길옆 가드레일로 굴러서 부딪힌 채 정신을 잃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인터넷을 접속하여 우연히 당시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해외의 웹사이트에서는 두 다리가 탱크에 깔려서 잘려나간 채 길가 가드레일 곁에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의 사진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접니다. 저의 오른쪽 다리는 허벅지 윗부분까지 절단되었으며 왼쪽 다리는 무릎까지 절단되었습니다”라고 그는 증언했다.
이번 사건에서 장쩌민은 선전기구와 폭력기구를 익숙하게 이용하며 진상을 덮어 감추고 죄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웠으며 사건에 불리한 사람들은 조사해 처리했다. 이런 수법은 나중에 파룬궁 진압에서도 같은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차후에 서술하려고 한다.
장쩌민의 손은 많은 피를 묻혔으며 이 사실을 아무리 덮어 감추려고 해도 해마다 6.4기념활동은 중단되지 않고 있다.
총서기자리에 오른지 일년 조금 더 되었을 때 미국과 이라크 간에 걸프전이 발생했다. 미국이 이 전쟁에서 ‘사막의 폭풍’ 작전으로 크게 승리하면서 덩샤오핑은 중국의 향
후 발전을 다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갑자기 쿠웨이트를 침공해 하루 만에 쿠웨이트를 완전히 함락시켰다. 이라크의 이런 침공 행위는 국제 사회를 깜짝 놀라게 했다. 미국 등 여러 서방국가들은 유엔안보리의 허락을 받아 쿠웨이트의 영토 수복을 위해 이라크에 군사적인 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라크의 사악한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중공과 친한 사이였으며 양국은 암암리에 밀접하게 왕래해 왔다. 그러나 당시 중공은 6.4천안문사건으로 국제사회에서 매우 고립된 상태였으므로 후세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못했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장쩌민은 6.4천안문 민주화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을 학살한 ‘공로’로 총서기 자리에 올랐다. 그의 별명이 ‘클리쿤(허풍쟁이)’인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허풍치고 쇼를 하며 상급에 고자질 하는 것이 그의 장기였다. 걸프전은 중국 총서기인 장쩌민의 정치적인 위기극복 능력을 검증하는 기회였다.
이렇게 큰 난제를 맞은 장쩌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때서야 그는 총서기가 편안한 자리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중국은 6.4대학살 이후 서방국가들로부터 무기수입 금지 제재를 받고 있었으며 그를 지지해 주는 국가도 별로 없었다. 외교적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덩샤오핑은 ‘말을 적게 하고 끼어들지 말자’는 정책을 취하고 걸프전 결의안 유엔안보리 회의에서 기권했다. 이는 장쩌민으로 하여금 시험에서 무사히 벗어나게 했다.
對중국 한국어 단파방송 - SOH 희망의소리
11750KHz, 중국시간 오후 5-6시, 한국시간 오후 6-7시
http://www.soundofhope.or.kr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2-0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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