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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그 사람 - (15)
 
  
2007-06-07 05:59:35  |  조회 5023
오늘은 장쩌민이 상하이 학생운동에서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아첨하여 승급한 경위로 이야기 시작 하도록 하겠다. 장쩌민은 상하이와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었다. 그가 난징 중앙대에서 매국노 노릇을 했지만 상하이 교통대학으로 전학하면서 자신의 수치스러운 그 한 단락 역사를 숨길 수 있었듯이 그가  베이징 국가전자공업부에 있을 때는 평범했지만 상하이에서 시장 및 당위원회 서기를 맡은 기간에 학생운동을 진압한 피의 대가로 총서기로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장쩌민은  총서기가 된 후,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 상하이방의 역량을 키웠다. 때문에 사스 같은 위기에 부딪혔을 때, 장쩌민이 가장 먼저 떠올린 피신처도 바로 상하이였다.

장쩌민은 상하이 당위원회 서기 천궈둥(陳國棟), 상하이 시장 왕다오한이 함께 뒤에서 밀어준 덕분에 1985년에 다시 상하이로 가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은 공산당을 위한 것도 있었지만 장상칭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다.

장상칭은 전에 왕다오한의 상사였다. 항일전쟁 초기, 왕다오한은 장상칭의 관할 하에 있는 중공 안후이(安徽) 자산(嘉山)현 당위원회 서기를 맡았으며 천궈둥도 장상칭의 덕분에 안후이 링비(靈璧)현 현장으로 되었다.

40여년 후, 이 화둥(璜) 출신의 두 중공 간부는 큰 벼슬을 하게 되자 장상칭의 양자라고 속이는 장쩌민을 있는 힘껏 밀어 주었다. 때문에 장쩌민이 높은 자리로 올라가게 된 것은 업무 능력과 관계가 없으며 권력을 열망하고 있던 중에 죽은 삼촌의 덕을 본 것에 불과했다.

상하이는 영향력 있는 여러 중공 원로들이 겨울을 나는 곳이다. 그들 중, 특히 대권을 손에 쥐고 있었던 천윈(陳雲)과 리셴녠(李先念)은 장쩌민이 계속 권세에 빌붙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천윈 역시 상하이 출신이었는데 준의회의(遵義會議) 후, 홍군이 북쪽으로 도주할 때 명령을 받고 상하이에 가서 지하당을 재개했으며, 중공이 정권을 잡은 뒤에는 중앙 서기처 서기를 역임한 동시에 중공 정무원(나중에 국무원으로 명칭을 고쳤음) 부총리 겸 국가 재정경제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천윈과 관계가 밀접한 간부들은 거의 모두 계획경제 정책을 지지했고 좌파적인 정치를 주장했으므로 보수파로 불렸다. 나중에 중앙 조직부 부장으로 된 천윈의 사돈 쑹런충(宋任窮), 제자 야오이린(姚依林)을 포함한 화둥 지역의 간부들은 거의 모두 천윈의 지지자들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천윈의 조수이자 화동 지역 재정경제위원회 주임이었고, 현임 정치국 상무위원회 쩡칭훙(曾慶紅)의 아버지 쩡산(曾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밖에, 천궈둥(陳國棟), 왕다오한 및 후리자오(胡立敎) 등의 사람들도 모두 천윈 수하에서 일했다. 특히 리셴녠은 덩샤오핑과 모순이 많았으며 개혁개방 정책을 지지하지 않았다.

천윈, 리셴녠 세력과의 대치 속에서 제2세대 지도자인 덩샤오핑은 줄곧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으며 쌍방은 어느 쪽도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하지 못했다. 상하이 시장인 장쩌민은 실질적으로는 보수파였으므로 천윈과 리셴녠을 만나면 굽실거리며 계획경제를 찬양하고 아첨했다. 하지만 동시에 덩샤오핑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조심했고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앞에서는 태도를 바꿔 개혁을 지지하는 척 했다.
 
장쩌민이 상하이에 왔을 때, 상하이에서는 마침 도시개혁을 진행 중이었는데 음식물과 생필품 가격이 1년 사이에 17%나  올랐다. 이러한 물가상승을 중공은 중요한 고비로 생각했다. 그러나 상하이는 이 고비를 넘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대한 사회적 불만과 동시에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학생들은 정부에 생활비를 증가시켜 줄 것과 간부 부패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 당시 최고 권력을 잡고 있었던 후야오방은 적극적으로 정치 체제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으므로 장쩌민도 개혁파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대학에서 1만여 명 되는 교사와 학생들 앞에서 강연을 하면서 생필품 가격의 상승은 예상 밖임을 승인하면서 시장경제 제도는 결국 가격을 적당한 범위로 안정시켜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생들은 당시 그 말을 믿었다.

1986년에 몇 가지 일이 발생했다. 7월, 당시 중국 과학기술대학 부학장인 팡리즈(方勵之)가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연수를 마치고 귀국해 일련의 강연을 하면서 민주를 제창했다. 9월, 대만 첫 야당인 ‘민주진보당(民主進步黨, 약칭 민진당)’이 성립되었는데 14년 후, 이 당은 대선 중에서 승리하여 중화민국 정당교체의 서막을 열었다. 당시 민주 계몽교육을 받은 적지 않은 대학생들은 미국의 소리 방송(VOA)에서 같은 민족인 대만에서 야당을 성립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흥분했다.

그해 말, 안후이성 지방 인민대표선거에서 과학기술대학 당위원회에서는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이 당국에서 지정한 입후보자와 경선하지 못한다고 규정한 사건이 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12월 초, 중국 과학기술대학 학생 등 허페이(合肥)의 수 만 명 대학생들이 두 차례나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소식이 상하이로 전해지자 학생운동 규모는 확대되었다. 상하이 퉁지(同濟)대학, 교통대학 학생들은 잇따라 거리로 나가 호응을 하면서 민주, 자유, 평등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독재를 종식할 것을 요구했다. 그 후, 학생운동은 베이징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상하이 학생들은 장쩌민과 대화할 것을 요구했으며 정치개혁, 언론자유, 정치적 통제 완화 등의 요구를 제기했다. 장쩌민은 12월 8일 상해시 당위원회 선전부장 천즈리(陳至立, 현 국무위원)과 함께 상하이 교통대학에서 학생들과 대화했는데 매우 아이러니했다.

장쩌민은 강단에 올라 돋보기를 걸치고 미리 준비한 강연고 한 장을 손에 들고 학생들의 관심사와는 동떨어진 5년 경제계획의 성과를 한바탕 연설했으므로 아래 있는 3천여 명 학생들의 불만을 샀다. 화가 난 장쩌민은 학생들을 위협하듯이 쏘아 보았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떠들며 항의했다. 어떤 학생들은 “신문과 TV에서 매일 말하는 것들은 필요없습니다, 이젠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입니다!”라고 소리쳤으며 또 어떤 학생들은 항의 구호를 외쳤다.

장쩌민은 소리를 가장 크게 낸 학생을 가리키며 “내 앞에서 떠들어도 소용없어! 이름이 뭐야? 그렇게 대단하면 강단에 올라와서 얘기해봐!”라고 화를 내며 말했다.

뜻밖에 이 학생은 정말 강단에 뛰어 올라가 마이크에 대고 민주에 대한 관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십여 명 학생들이 즉시 강단에 올라가 장쩌민과 마주 서서 변론하려고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장쩌민은 두 다리에 힘이 빠져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학생들은 언론자유를 요구하며 시위행진을 언론에 공개하고 공정하게 보도할 것을 요구했고 대자보를 붙이고 변론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 대학생들의 발언은 강단 아래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장쩌민을 가장 당황하게 한 것은 학생들이 “당신은 어떻게 시장으로 되었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이었다. 입장이 난처해진 장쩌민은 억지로 웃어 보이면서 한걸음 한걸음 강단 변두리까지 물러섰다. 그는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함께 온 선전부장 천즈리에게 강단에 올라온 학생들을 나중에 보복할 수 있도록 사진을 찍어 두게 했다.

학생들의 격앙된 강연이 끝나고 장쩌민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면서 “방금 오면서 캠퍼스에서 ‘국민이 소유하고(民有), 국민이 다스리며(民治), 국민이 누리는(民享)’ 정부를 건립할 것을 요구하는 대자보를 보았는데 이는 1863년 11월 19일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제기했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누가 지금 링컨의 연설을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다시 외울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흥분하고 있었던 학생들은 장쩌민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몰라 갑자기 조용해졌다. 임기응변을 하여 시선을 다른데로 돌리게 하는 것이 장기인 장쩌민은 학생들이 속임수에 넘어간 것을 보고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는 배를 쑥 내밀고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영어로 전날 밤 외워두었던 미국헌법 첫 부분과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문화대혁명이 종식되고 개혁개방을 진행한 초기여서 학생들의 영문 수준은 보편적으로 높지 않았다. 장쩌민은 기억나는 데까지 외우고 나서 득의양양해하면서 “알아들었습니까? 중국과 미국의 상황은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민주는 공산당의 지도를 전제로 해야 한다는 등 장황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때, 한 학생이 “우리는 시위행진의 자유를 헌법으로 규정할 것을 요구하고 언론의 자유를 요구합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장쩌민은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누가 교통을 가로막고 생산을 파괴하면 바로 개혁을 가로 막는 것이므로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학생들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어느 한 국가든지 시위가 교통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시위를 제한하지 않으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헌법이 국민들에게 부여한 시위행진의 권리라는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없다. 학생들은 더는 마이크를 쥘 기회가 없었지만 여전히 격동된 분위기 속에서 계속 장쩌민과 대치했다.

강의실 분위기가 3시간이 넘도록 점점 가열되자 장쩌민은 다른 일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강의실을 떠났다. 도망치는데 급했던 장쩌민은 나가다가 반쯤 열려져 있는 문에 머리를 부딪쳐 크게 다치지는 않지만 피를 많이 흘렸다. 장쩌민은 상처를 돌볼 사이도 없이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는 그대로 승용차에 올라 도망갔다. 장쩌민이 허겁지겁 꽁무니를 뺀 이 일은 학생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웃음거리로 전해졌다.

상하이 시장이었던 장쩌민은 사무실에 돌아오자 즉시 상하이 교통대학 당위원회 서기 허유성(何友聲)에게 전화를 하여 천즈리에게서 발언한 학생들의 사진을 찾아가게 했으며 이름과 학급을 알아내라고 명령했다. 사건이 커진 것을 의식한 허유성은 분부대로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장쩌민은 상하이 교통대학이 자산계급 자유화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모든 학생단체를 해산시키고 간행물을 폐간시켰으며 무도회를 제외한 단체 활동을 금지시켰다. 장쩌민은 그때부터 방탕한 생활에 물젖게 하는 수단으로 민주와 인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전이시켰는데 이 방법은 효과를 보았다. 1989년, 학생운동이 일어나 각지 학생들의 상호 성원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상하이 교통대학 학생들만은 문을 닫아걸고 밤새도록 무도회를 열었으며 같은 해 5월 13일, 베이징 대학생들이 단식 투쟁을 시작해 상하이 대학생들이 모두 나와서 시위하면서 성원할 때에도 상하이 교통대학 학생들만은 여전히 매일 무도회를 열고 있다가 5월 19일, 계엄이 시작되기 전날에야 대규모 시위에 가담했다.

교통대학 학생들은 장쩌민과 대화가 있은 다음 날, 인민광장에 모여 집회를 열고 시정부 앞까지 시위행진을 하면서 장쩌민과 대화를 계속할 것을 요구했다. 경험이 생긴 장쩌민은 이번에는 사전에 2,000명의 경찰을 광장에 긴급 출동시켜 대기하게 했다. 무력의 보호가 있게 되자 장쩌민은 더는 웃음을 띠지 않고 아주 강경하게 나왔으며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는데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대화는 실패했고 경찰들이 강제로 학생들을 해산시키고 가장 적극적인 학생들을 체포했다. 이 이틀 동안의 사건은 장쩌민으로 하여금 강압 정치의 중요함과 무장진압의 단맛을 보게 했다.

보복심이 극히 강한 장쩌민은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가만두는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사람들 앞에서 그를 난처하게 만든 학생들을 당연히 가만두지 않았다. 천즈리가 찍은 사진에 있는 학생들은 한 학급이 아니었으며 같은 학년도 아니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대학생들이 졸업한 뒤 직장을 국가에서 배치해 주는 제도를 실시했으므로 장쩌민은 손에 쥔 시장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그런 학생들을 전부 가장 가난한 국경 지역으로 배치했다.



對중국 한국어단파방송 - SOH희망의소리
11750KHz, 중국시간 오후 5-6시, 한국시간 오후 6-7시

http://www.soundofhop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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