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07-05-11 03:30:43 | 조회 5585
1966년, 장쩌민은 불혹의 나이인 마흔 살에 들어섰다. 그 해 5월, 장쩌민은 제1기계공업부 산하의 우한 열역학기계연구소 소장직을 맡은 동시에 당위원회 서기를 겸직하게 되었다. 이는 장쩌민이 13급 간부로 승직되어 고위층 관리 서열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때는 마침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기 전야였다. 장쩌민은 연구소 소장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허풍대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이회사에 온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직은 흠잡을 만한 이렇다 할만한 문제가 미처 없어 장쩌민을 비판하지는 못했다. 이것은 장쩌민으로 놓고 말하면 의외의 행운이었다.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발동한 목적은 당내부에서 류사오치(劉少奇)등 정적들에게 빼앗긴 독재 권력을 다시 빼앗아 오기 위해서였다. 마오쩌둥은 학생과 일반 노동자들에게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빼앗을 것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당시 거의 모든 마오쩌둥의 정적 세력들은 투쟁 대상이 되었으며 심지어 감옥에 들어가고 심하게 구타 당했다. 특히 상하이에서 장춘차오(張春橋)와 왕훙원(王洪文)이 일으킨 반란은 매우 격렬했다. 기세가 드높은 문화대혁명이 종식된 후, 재난 속에서 살아남은 상하이의 장쩌민 동료들은 서로가 서로의 행방을 알아보았다. 놀랍게도 허풍쟁이 장쩌민은 우한에 숨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것을 발견하였다. 오히려 1972년에는 루마니아에 파견되기까지 하였다. 문화대혁명의 쓴맛을 볼대로 본 장쩌민의 동료들은 “허풍쟁이라고 비웃었더니 허풍을 떤 덕분에 그 폭풍과 같은 문화대혁명마저 넘길 수 있었구나”라며 감탄하였다.
사실 장쩌민도 문화대혁명 과정 중에 줄곧 두려움에 떨었다. 다만 행운스럽게도 우한 열처리기계연구소가 새로 성립된 까닭에 직원들이 모두 각지에서 모여 왔으므로 사람들 간에 많은 모순과 원한을 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후에도 개인적인 원한을 갚는 비참한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사실 장쩌민은 소장이라는 책임직에 있었기 때문에 빈번하게 진행되는 조사와 적발로 일본 괴뢰정부 시기의 일이 드러날까 봐 두렵기만 했다. 1966년 11월, 장쩌민은 친척 방문과 작업보고라는명분으로 베이징에 들어가 정치적 형세를 알아본 후 그길로 상하이에 돌아가 수 주일간 머물면서 수상한 낌새가 있는지 알아보았다. 동시에 당시 여전히 상하이에 있었던 왕아내 왕예핑에게 절대 말조심 해야 할 것이며 특히 출신문제를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왕예핑은 당연히 시키는대로 잘하였다. 왜냐하면 장쩌민이 매국노가 되면 그 자신도 매국노 가족이 되므로 피해를 입을 것은 강건너 불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왕예핑은 장쩌민에게 방법을 가르쳐 주기까지 했는데 일부러 작은 일을 잘못해 반란파들의 주의력을 정치 국면과 관계없는 작은 일에 돌리게 하라는 것이었다.
한편 장쩌민자신도 우한에 돌아가 관건적인 일은 신중히 하면서 자신과 별로 관계없는 일에서는 모두 수긍하는 태도를 취했다. 군중들이 장쩌민은 착실하게 일하지 않고 허풍만 떤다고 비판하자 그는 “다들 맞게 말했습니다, 저는 확실히 허풍만 떨었습니다”라고 반성했다. 장쩌민은 어려서부터 양저우 연극배우들의 영향을 받아 호주머니에 언제나 빗을 넣고 다녔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빗을 꺼내들고 여자들처럼 머리를 빗으며 아주 만족해했다. 그래서 ‘자본주의파’를 비판할 때, 군중들은 ‘작은 빗으로 큰 머리를 빗었다’, ‘자산계급의 행동을 했다’라고 비평했는데 이것도 장쩌민은 흔쾌히 승인했다.
2003년, 장쩌민이 전인대회 기간 후베이(湖北) 대표단을 접견할 당시 이렇게 말했다. “반란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했을때 나는 마오쩌둥 주석이 가장 두렵다고 대답했습니다. 결국 나는 이 한마디 말 때문에 3일 동안이나 투쟁 당했지요.” 마음에 숨기는 것이 없다면 왜 마오쩌둥을 두려워했겠는가? 당시 다른 사람들은 우상으로 모시려고 안달이었는데 말이다! 당시 정치 심사를 하는 사람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조사해서 아주 오래 전의 사소한 일까지 다 조사해냈다. 이런 상황에서 장쩌민이 끝내 넘어지지 않은 것은 ‘혁명열사의 고아’라는 금빛 간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9년, 중공 제9기당대표대회가 열리자 중국정국에 변화가 발생했다. ‘열사의 고아’인 장쩌민은 정치 심사를 쉽게 통과하고 ‘57간부학교’에서 노동 단련을 한 뒤 1970년, 베이징 제1기계공업부 외무국 부국장으로 발탁되었다.
중공은 제9차당대표대회 이후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미국과 소련 두 대국은 모두 중공에 위협이 되었다. 중국과 소련 두 공산국가는 국경을 두고 마찰을 빚어 몇 차례 무력 충돌까지 일어났다. 중국은 고립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타 작은 형제 국가들을 끌어 모으려고 노력했다. 중국은 알바니아에 이어 루마니아를 끌어들였으며 루마니아와 파키스탄을 통해 미국과 화해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약 20년 동안(1970-1989년)미국과 연합해 소련에 대항하는 국제 전략을 시행했다.
중공은 루마니아 공산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루마니아의 공업 건설을 도와주기로 결정하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 때 장쩌민은 러시아어를하였기에 팀장으로 선발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당시 저우언라이가 장쩌민을 접견했는데 장쩌민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중공 내부에서 가장 쉽게 넘어지지 않는 인물로 속은 잔인하지만 겉은 사람을 잘 미혹시키기로 소문났다. 외부에서는 저우언라이를 겸손한 군자로 보고 있지만 사실 그는 상하이 구순장(顧順章) 일가족 몰살 사건을 직접 주도해 팔순 할머니와 어린나이의 어린이 그리고 목숨을 구해준 은인까지 악독한 수단으로 살해했다. 저우언라이의 참여가 없었더라면 중공의 정치투쟁은 절대 그렇게 크게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저우언라이 접견 후에 장쩌민은 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71년 중국 전문가들과 함께 루마니아에서 15개 공장을 건설할 수 있을 지 조사를 진행했다. 그 이듬해 귀국한 장쩌민은 제1기계공업부 외무국 부국장으로부터 국장으로 승직했으며 8년 동안 자리를 지켰다.
1972년, 마오쩌둥은 중국사회와 경제가 자신이 벌인 문화대혁명 때문에 형편없이 파괴된 것을 보고 저우언라이와 의논하여 당 내부에서 ‘제2호 자본주의파’로 몰아 투쟁한 덩샤오핑을 복직시켜 정상적인 경제 질서를 회복하려고 했다. 장쩌민처럼 말재주로 살아가는 사람은 관건적 시각에는 힘을 쓰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한 동안 원래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외무국이란 자리가 본래 물품이 흔한지라 생필품이 귀했던 70년대에는 외무국과 조그만 관계가 있어도 모두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때문에 장쩌민은 그 기간 기회가 되는 대로 상급 간부들에게 뇌물을 가져다 바치면서 승직의 기회를 노렸다.
그 시기 왕다오한은 정계에서 내리막 길을 걷고 있었으나 장쩌민은 여전히 그를 잊지 않았다. 왕다오한의 당내 경력과 신분으로부터 보았을 때 언젠가 충분히 다시 일어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장쩌민은 앞을 멀리 내다보며 전략적인 투자를 하기로 했다.
왕다오한이 매월 식용유 4량, 설탕 반근씩 분배받아 생활하고 있을 때, 루마니아에서 돌아온 장쩌민은 즉시 루마니아산 분말우유와 사탕 등을 가지고 왕다오한의 자택을 찾아가 그의 가족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장쩌민의 아들 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