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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그 사람-(84)- 제20장: 사스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군권 유지를 위해 애써 허덕이다
2008-06-13 13:05:10 | 조회 10419
(사스를 피해 도망 다니며 군권 유지를 위해 허덕인 장쩌민, 마지막 시간)
잠수정 사건으로 측근을 정계로 내보내다
2003년 5월 2일, 중국 해군 잠수정이 네이장산(內長山) 동부의 중국 영해에서 정규 훈련을 하던 중 잠수정 내의 70명의 승조원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 원인에 대해서는 의론이 분분했다. 중공측은 기계 결함이라는 공개 보도를 했으나 나중에는 부적절한 지휘와 조종이 원인이었다는 정정 보도를 냈다. 그러나 사고를 당한 잠수정을 이양한 후 조사한 결과, 어떠한 기계적인 결함도 없었음이 밝혀졌고 또한 70명의 승조원들은 극히 짧은 시간에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해외 군사 전문가들은 모든 잠수정에는 반드시 구명보트를 설치해 비상시 승조원들의 탈출에 대비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번 사건에서 한 사람도 생존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한 군사 평론가는 랴오둥(遼東)반도의 해역 수심은 대략 100, 200m 정도로 이 수치는 잠수정에게는 상당히 낮은 수심에 해당하므로 설령 기계에 이상이 생기더라도 어느 정도의 탈출 시간은 있었을 것이라며 70명 전원이 사망했다는 사실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들로 이 사건은 아주 많은 의문점을 남기게 되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로 얼마 뒤, 중공의 한 해군 관계자가 그 잠수정 사고는 퇴역을 앞둔 한 해군 군관이 장쩌민이 군대를 감소시키려는 조치에 불만을 품고 고의적으로 계획한 자살성 보복 행위였다고 밝혔다. 장쩌민은 연륜이 많은 군관들의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 그들을 퇴임 시키고 자신의 심복을 배치하는 인사 조정을 하려고 했으며, 이에 대해 많은 퇴역을 앞둔 군인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어 베이하이(北海) 함대사건과 같은 대형 참사가 발생하게 된 것이었다.
사건 당일, 베이하이 잠수정에는 본래 57명이 탑승할 예정이었으나 출항 전 함대의 한 부지대장인 대령이 순시하면서 20여 명을 추가로 탑승시켰다. 퇴역을 앞 둔 그 해군 군관은 그 출항을 가장 좋은 보복의 기회로 삼아 잠수정이 칭다오(靑島)해군기지를 출발하자 잠수정의 산소 밸브를 잠가 산소 공급을 막아 버렸으며 얼마 후 그는 69명의 승조원들과 함께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사건 발생 후에도 장쩌민은 여전히 그의 계획을 굽히지 않고 해군 사령원 스윈성(石雲生)과 정치위원 양화이칭(梁懷慶) 그리고 베이하이 함대 사령원 및 정치위원 4명을 모두 퇴직시키고 그 자리를 자신에게 충성을 보인 측근으로 채웠다. 현재의 해군 사령 장딩파(張定發)가 바로 그 당시 장쩌민에게 발탁된 인물이며 장쩌민은 그로 하여금 중앙군사위원회에서 후진타오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장쩌민의 통제 하에 있던 신화망 베이징 지사는 6월 13일, 해군 잠수정 361 사고 조사 결과 “부적절한 지휘 조종”이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했으나 그 구체적인 사유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잠수정 사고 유족 위문 행사에 신경을 쓰는 동안 장쩌민은 잠시 후진타오 에 대한 타도를 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측근에게 명령하여 그 행사에 반드시 후진타오가 참석하도록 하고 그가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임을 강조해야 된다고 말하면서 “부(副)”라는 글자의 의미를 거듭 강조 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기사, 즉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장쩌민,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후진타오, 궈보슝, 차오강촨 등이 5일 다롄(大連)에서 해군 361호 잠수정 사건의 유족 대표와 소속 부대 대표를 접견했다. 장쩌민은 중앙군사위원회를 대표해……”라는 내용의 보도를 접할 수 있었다. 표면적인 기사의 내용으로는 마치 장쩌민이 민심(民心)과 군심(軍心)을 얻고 서열 상 후진타오보다 앞서는 듯 했으나 오히려 이 사고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이었으므로 그의 우매함을 더욱 부각시킨 것에 불과했다.
아들에게 “선저우5호”의 공로를 훔쳐 주다
2003년 10월 15일 9시 정각 190억원을 투자해 개발한 “선저우(神舟)5호” 유인 우주선이 간쑤(甘肅)성 주취안(酒泉) 위성발사센터에서 발사되었다.
이 우주선의 발사 전 장쩌민은 우방궈, 쩡칭훙과 함께 위성발사센터를 방문하여 우주 비행사와의 최초 전화 통화를 시도해 후진타오가 전 세계 매스컴의 초점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계획을 시간은 기다려 주지는 않았는데 그가 간수성으로 떠나려 할 때, 후진타오가 이미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거의 쓰러질 뻔했다. 후진타오는 현장에서 발사 장면을 관람했을 뿐만 아니라 우주선 발사 후 소감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다음 날에야 겨우 충격에서 기운을 되찾은 장쩌민은 총지휘관 리지나이(李繼耐)에게 축전을 전했다.
“선저우5호”는 장쩌민에게 큰 기회를 주었는데“선저우5호의 부(副)총지휘관” 이자 그의 장남인 장몐헝(江綿恒)이 우주선 발사에 관한 일등 공신 으로 뽑혀 각각 2위와 4위에 오른 것이다. 중공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광밍르바오(光明日報)>는 10월 17일 “선저우5호”를 빌어 장몐헝을 대서 특필했고 이 보도는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장몐헝은 1991년 6월, 미국 드렉셀 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HP에서 근무하다가 1993년 1월 중국과학기술원 상하이 야금소(冶金所)로 돌아왔고, 1997년 7월 상하이 야금소 소장으로 승진했으며, 2년 후인 1999년 11월 중국과학기술원 로켓발사센터의 부원장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인 장쩌민의 지시 덕분으로 6년 만에 이름 없는 과학자에서 중국 과학기술원 부원장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중국 유인 우주선 지휘센터는 “선저우5호”를 책임지는 최고 기구이고, 중앙군사위원이자 총장비부 부장인 리지나이가 총지휘를 책임졌다. 기타 4명의 부총지휘관 중에, 장몐헝을 제외하고는 모두 로켓 관련 전문가인데,그들은 각각 총장비부 부(副)부장 후스샹(胡世祥)과 중국 항공 과학기술 그룹의 장칭웨이(張慶偉) 그리고 국가항공우주국 국장 롼언제(欒恩杰)이다.
장몐헝은 유인 우주선과 관련된 전문 지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실전 경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장몐헝은 본래 과학 기술 연구보다는 부친의 권력을 이용해 국고를 해외로 반출시키거나 중국 인민들에게 전달되는 정보를 차단하기 위한 선진적인 인터넷 기술 도입, 그리고 본인의 실력과 노력 없이 고속 승진하는 법과 장씨 왕조의 운명을 계속해서 유지시킬 수 있는 방법 등에만 관심이 있었다.
장쩌민은 권력에 미쳐 실권(失權)을 몹시 두려워 했으므로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이 권력을 잡지 못하면 마음을 놓지 못했다. 전면적인 권력 승계에 직면해서 두려움이 더욱 커진 그는 권력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아들에게 이양하는 것만이 안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실력이나 경험 면에서 턱없이 자격이 부족한 자신의 아들 장몐헝을 남들의 이목을 무시한 채 항공우주국의 부 총지휘관의 자리에 투입시켰고 적절한 시기를 이용하여 그가 군대의 대권을 잡을 수 있길 희망했다.
사실 장쩌민은 그가 권력을 장악한 장기간 동안 계속해서 자신의 아들 혹은 친지를 정계의 핵심 인사로 삼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장남인 장몐헝에게는 과학기술원 기술부문을 관리하도록 하여 중국의 전신(電信)과 국제 인터넷을 감독하고 기술부분과 경제분야를 장악할 수 있도록 했으며 차남인 장몐캉(江綿康)은 아버지의 권력으로 난징(南京) 군관구에서 소장(所長) 부(副)정치위원이 되었다. 당 내외와 국 내외에서 장쩌민의 군권 이양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계속적으로 군권을 장악하길 원했던 장쩌민은 장남인 장몐헝을 군 간부로 진급 시키고자 하였고 “선저우”가 발사되고 나서, 장쩌민 부자는 곧바로 계획을 수행했다.
이와 동시에, 2003년 장쩌민은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보수 집단과 정부인 천즈리(陳至力)를 국가군사위원회와 국방과학기술 그리고 교육 관련 분야 업무에 참가 시키려 했다. 그러나 군 고위 간부들은 모두 천즈리를 무시하면서 심지어 그녀를 “기생 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토론 당시 장쩌민의 이러한 제안들은 무시 되거나 보류되었다.
정계에서 물러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장쩌민은 갖은 수단을 강구했으나 더이상 아무런 효과가 없었으며 그의 권력은 얼마 더 지속되지 못하고 반대파의 강한 비난을 뒤로 한 채 정계를 떠나야 했다
http://www.epochtimes.co.kr/news/article.html?no=4939
對중국 한국어 단파방송 - SOH 희망의소리
11750KHz, 중국시간 오후 5-6시, 한국시간 오후 6-7시
http://www.soundofhop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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