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그인
    • 회원가입
    • 사이트맵
    • 04.10(목)
페이스북 바로가기 트위터 바로가기
  • 중국

  • 국제/국내

  • 특집

  • 기획

  • 연재

  • 미디어/방송

  • 션윈예술단

  • 참여마당

  • 전체기사

검색어 입력
장쩌민 그 사람-(82)- 제20장: 사스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군권 유지를 위해 애써 허덕이다
 
  
2008-06-13 09:09:56  |  조회 10149



(사스를 피해 도망 다니며 군권 유지를 위해 허덕인 장쩌민, 다섯 번째 시간)
 
 
(천팡안성의 사직을 강요)
  
파룬궁 진압 이후로, 제 23조 입법은 장쩌민의 명령으로 구체적인 계획이 잡혔고, 중공은 계속적으로 홍콩 정부에 시행 압력을 가하며, 빠른 법률 제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무국 국장이었던 천팡안성(陳方安生)을 필두로 한 홍콩 고관들은, 홍콩의 이미지 유지를 위해 필요하지않다는 이유로, 이 일을 방임했다.
  
한결같은 일관된 자세로 홍콩의 양심이라고 불려 온 천팡안성은 1997년 홍콩이 중공에 반환된 후, 그녀는 홍콩에서 가장 환영 받는 관원이 되었다. 적지 않은 홍콩 시민들은, 만약 홍콩이 첫 번째 특별행정구 장관을 선거한다면, 바로 그녀가 선택될 것이라고 믿었다. 장기간 민주제도 하에서 생활하고 일한 천팡안성은 자유는 하나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에 관한 문제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파룬궁 진압이 시작된 후, 그녀는 홍콩의 서열 2위에 해당하는 권력가로써 파룬궁 단체에 법제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를 부여했고 이것을 못마땅히 여긴 장쩌민은 천팡안성을 퇴임시킬 방법이 없자 결국 그녀를 강제 사직시켰다.
  
둥젠화의 특별행정구 장관 연임, 율정국 국장 양아이스의 연임과 함께 장쩌민을 위해 공을 세우기를 간절히 바라는 보안국 국장 예류수이(葉劉淑儀) ,이 세 사람 간의 삼각 권력 구도가 형성되어 드디어 장쩌민이 원하고 기다리던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장쩌민이 선택하려고 한 수법과 초기의 파룬궁 탄압 방법은 아주 유사하게도, 단 번에 맹렬한 기세로 속전속결하는 것이었다. 국제 사회의 여론을 의식한 장쩌민은 홍콩에 대해서는 형식적이긴 하나 3개월이란 여론 조사 기간을 주었지만 국제 사회의 관심 밖에 있는 마카오에 대해서는 아예 어떤 조사 기간도 주지 않고 바로 법률 제정을 시도했다.
  
홍콩에 대한 긴고주(緊箍呪: 서유기에서 손오공을 괴롭히던 당승의 주문)를 읽는 것에 급급했던 장쩌민은 한 가지 사실을 망각했는데, 제 23조의 조항은 바로 “6.4”시기, 홍콩의 백만 시민들이 두 차례나 거리로 나가 민주 운동을 성원하고 중공의 살상 행위를 질책한 후에, 없어진 기본법과 같은 내용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제 23조의 조항은 파룬궁을 진압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700만 홍콩인의 민주 의식에 도전한 것이 되었는데, 이 같이 장쩌민은 어떤 음모를 계획할 때, 그 후과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각계의 반대)
  
23조 문제는 각국 정부와 기구, 비정부조직 및 종교계 그리고 언론과 해외 홍콩인, 법조계와 학생 또한 상인뿐 아니라 대만 각계 계층의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홍콩 각계 인사 및 세계 각지의 중국인들은 계속해서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점점 더 강력하게 대응했다. 홍콩 민주인사와 사회 각 층의 사람들은 함께 힘을 모아 민중들에게 23조의 위험성을 알리고 서구 사회의 지지를 구했다.
  
2002년 12월 15일 일요일 오후, 홍콩의 40여 개 단체는 97년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넘어간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평화 시위를 거행해, 당국의 홍콩 기본법 제 23조에 근거한 “반전복법(反顚覆法)” 제정을 반대했다. 시위에 참가한 인원수에 대해 홍콩 경찰은 1만 2천명이라고 밝혔으나 민간 단체는 최고 6만 명이라고 밝혀 서로 다른 주장을 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넘어간 97년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참가한 시위였다는 점이다. 당시 제 23조 입법안이 언론 자유와 신문 자유 및 인권 등에 파급 될 부정적 영향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표현하기 위해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시민들이 이 시위에 참가한 것이었다.
  
당시 해외 각지의 중국인 단체와 홍콩의 여러 단체들은 모두 23조에 반대하는 활동을 주관했고, “홍콩을 지키는 것이 양심을 지키는 것이다”, “23조에 반대하며, 정권을 민중에게 돌려달라” 는 범세계적 항의 운동은 그 서막을 열게 되었다.
  
2002년 12월 4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성립된 “전 세계 23조 입법 반대 대 연맹(全球反對23條立法大聯盟: 大聯盟)”의 취지는 다음과 같다. ‘홍콩의 인권과 법제를 지키자. “대연맹(大聯盟)”은 해외 중국인들의 시위 동참을 요구하며, 홍콩의 민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다 같이 노력해, 홍콩이란 동방의 진주가 계속해서 밝은 빛을 발산할 수 있도록 하자’는 호소를 했다. 이 연맹의 인터넷 사이트에는 단 몇 일만에 전 세계 각지 9000여 명의 23조 입법 반대 서명을 받았다. 대 연맹은 워싱턴과 로스앤젤레스 두 지역에서 집회를 열고, 동시에 홍콩의 시위 운동을 지지했다. 전 세계 화교 민주평화연맹”의 각 지역 단체와 캐나다 벤쿠버 중국인 단체에서도 현지인들에게 중공의 23조 입법 반대를 호소했다.
 
  
(50만 홍콩인, 거리로 나와 세계를 놀라게 하다)
  
홍콩 주권의 중국 반환 6주년이 되던 7월 1일, 최소한 50만 명의 홍콩 시민들이 무더위를 무릅쓰고 거리로 나왔다. 사람들은 홍콩 정부의 기본법 제 23조 입법 추진을 항의했는데, 그 반대 세력의 규모가 예상을 뛰어 넘어 홍콩뿐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시위는 40여 개 조직으로 구성된 단체인 “민간 인권 전선(民間人權前線)”에서 일으킨 것이었다. 오후 3시에 시작한 이 시위는 저녁 9시 30분까지 총 6시간 30분 동안 이나 진행되었다. 주관 단체는 시위 참가자는 50만 명을 넘어서, 예상 수치를 훨씬 초과했다고 했으며 심지어 일부 매체에서는 참가자가 120만에 달한다고 했으나 홍콩 경찰은 최소 35만 명일 것이라고 밝혔다.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예측치는 50만 명인데, 당시 홍콩 인구수는 고작 680만 명이었다.
  
대부분의 서양의 언론매체와 통신사들은 홍콩의 지속적인 평화 시위를 보도했고, 홍콩 대다수의 언론들은 이 역사적인 사건을 톱기사로 내보냈다. 미국 AP 통신사는 당시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의 모습을 “분노하고 걱정하는 홍콩인”으로 묘사했으며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는 시위대가 각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고 보도했다. 또한 <월스트리트저널>은 홍콩 정부가 민의(民意)를 저버려, ‘홍콩 쇠미(衰微)’를 드러냈다고 비평했으며 <뉴욕타임스>는 1989년 천안문 사건 이래 최대 규모로 수십만의 홍콩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홍콩이 직면할 민주자유 상실”의 위기를 애도했다고 보도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의 대다수 인민들은 당시 세계를 놀라게 한 이 사건을 거의 모르고 있었는데 이는 중공이 거의 모든 관련 소식을 봉쇄했기 때문이다. 중공의 기관지, 봉황위시(鳳凰衛視)는 7월 1일 6만 명의 사람들이 “홍콩 반환 행사”를 했다고 보도만 했을 뿐, 50만 명의 대규모 시위 운동에 관한 구체적인 보도는 언급을 피했으며 대륙의 다른 언론 매체는 아예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다.
  
홍콩의 대규모 시위운동은 국제 사회뿐 아니라, 베이징 당국도 매우 놀라게 했다. 홍콩 각 파의 정치 세력은 거대한 민의에 따라 분화되기 시작했다. 7월 6일 저녁, 자유당 주석인 톈베이쥔(田北俊)은 행정회의 의원직에서 물러났다. 동시에 자유당은 성명을 통해, 23조 초안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을 발표했다.
  
둥젠화는 입법회의 60석 중 친중공 세력 의석이 절반 정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고 자유당 주석인 톈베이쥔도 자신의 명령에 따를 의무가 있었으므로 그의 수중의 8석을 포함하면 시민들의 반대 시위에 상관없이 입법 통과를 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톈베이쥔의 뜻밖의 발언으로 23조 입법 검토 절차는 무기한으로 연기되었다.
  
중공을 추종하던 보안국장 예류수이는 23조 입법을 강력하게 추진하다 대중의 지지를 잃었고, 재정부장 량진숭(梁錦松)은 공금으로 개인 자동차를 샀다가 홍콩 감사원에 적발되어 율정국의 처벌을 받았다. 7월 16일 저녁, 홍콩 정부는 성명을 통해 예류수이와 량진숭의 퇴임을 공식 발표했다.
  
같은 해 9월 5일, 제 23조 강제 제정이 무산화 되자 홍콩 특별행정구 장관 둥젠화는 시민들의 제 23조 입법에 대한 의문을 없애기 위해, ‘국가안전(입법조문) 조례 초안’ 철회를 결정한다는 발표를 했다.
  
장쩌민은 홍콩 23조를 통해 파룬궁을 진압하고, 홍콩 사람들을 압박하려는 계획이 철저히 실패하자 그는 곧 바로 자신의 잘못을 수습하기에 바빠졌다. 장쩌민은 홍콩 사무를 주관했던 후진타오를 중앙에 정확한 홍콩 민정을 제공하지 않아 정책이 실패했다는 구실로 해직하고 심복인 쩡칭훙을 앉혔다.
  
장쩌민의 명령에 따라 홍콩 인민의 이익에 저해되는 수많은 일을 도모하여 홍콩에서 신임을 잃은 둥젠화를 중공은 더 이상의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 하고 새로운 인물을 홍콩 장관으로 임명하여 홍콩 시민들을 혼란에 빠뜨리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2005년 3월 10일 든든한 후원자였던 장쩌민에게 버림받은 둥젠화는 특별행정구 장관직에서 강제 퇴직당하는 신세로 전락되었다.
  
 
중문 : http://www.dajiyuan.com/gb/5/6/17/n957853.htm


對중국 한국어 단파방송 - SOH 희망의소리
11750KHz, 중국시간 오후 5-6시, 한국시간 오후 6-7시

http://www.soundofhope.or.kr

1273 장쩌민 그 사람-(92)-제22장: 사면초가에 빠져 거짓 전기를 출간하고, 9평은 중공에 비바람을 뿌리다. 2008-08-29
1272 장쩌민 그 사람-(91)-제21장 전 세계에서 기소 열풍이 불고, 광범위한 법망(法網)을 피할 방법이 없다 2008-08-29
1271 장쩌민 그 사람-(90)-제21장 전 세계에서 기소 열풍이 불고, 광범위한 법망(法網)을 피할 방법이 없다 2008-08-01
1270 장쩌민 그 사람-(89)-제21장 전 세계에서 기소 열풍이 불고, 광범위한 법망(法網)을 피할 방법이 없다 2008-07-17
1269 장쩌민 그 사람-(88)-제21장 전 세계에서 기소 열풍이 불고, 광범위한 법망(法網)을 피할 방법이 없다 2008-07-17
1268 장쩌민 그 사람-(87)-제21장 전 세계에서 기소 열풍이 불고, 광범위한 법망(法網)을 피할 방법이 없다 2008-07-10
1265 장쩌민 그 사람-(86)-제21장 전 세계에서 기소 열풍이 불고, 광범위한 법망(法網)을 피할 방법이 없다 2008-06-25
1264 장쩌민 그 사람-(85)-제21장 전 세계에서 기소 열풍이 불고, 광범위한 법망(法網)을 피할 방법이 없다 2008-06-25
1258 장쩌민 그 사람-(84)- 제20장: 사스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군권 유지를 위해 애써 허덕이다 2008-06-13
1257 장쩌민 그 사람-(83)- 제20장: 사스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군권 유지를 위해 애써 허덕이다 2008-06-13
1256 장쩌민 그 사람-(82)- 제20장: 사스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군권 유지를 위해 애써 허덕이다 2008-06-13
1249 장쩌민 그 사람-(80)- 제20장: 사스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군권 유지를 위해 애써 허덕이다 2008-05-20
1245 장쩌민 그 사람-(78)- 제18장 호색한이라 처첩이 한 무리고, 소인배가 출세하니 친인척이 날뛰네. 2008-05-19
1244 장쩌민 그 사람-(77)- 제18장 호색한이라 처첩이 한 무리고, 소인배가 출세하니 친인척이 날뛰네. 2008-05-07
1240 장쩌민 그 사람-(76)- 제18장 호색한이라 처첩이 한 무리고, 소인배가 출세하니 친인척이 날뛰네. 2008-05-03
  
12345

특별보도

더보기

핫이슈

더보기

많이 본 기사

더보기

SOH TV

더보기

포토여행

더보기

포토영상

더보기

END CCP

더보기

이슈 TV

더보기

꿀古典

더보기
444,898,741

9평 공산당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