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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그 사람-(45) 제13장 주위 권고를 뿌리치고 파룬궁 박해에 팔을 걷고 나서다
2007-12-12 11:28:09 | 조회 7856
파룬궁에 대한 장쩌민의 이지를 잃은 독단적인 탄압, 네 번째 이야기.
(5. 주룽지에 대한 협박)
파룬궁 탄압이 큰 성과를 보이지 않자 보이보는 장쩌민에게 “이번 일이 잘 추진되지 않는 이유는 주룽지가 관심을 보이지 않고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과 관련 있다”고 말했다.
중국 민간에는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책 몇 권이고, 마오쩌둥 사상은 책 한 권이며, 덩샤오핑 이론은 문장 몇 편이고, 장쩌민 학설은 말 몇 마디이다”라는 말이 유전되고 있었는데, 사실 장쩌민의 ‘3강’과 ‘3개대표’를 합하여도 몇 십 글자에 불과해 그 무슨 사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파룬궁 탄압이 시작한 뒤부터 쩡칭훙은 전국적으로 기세 드높이 ‘3강’을 선전하기 시작했고 장쩌민도 ‘3강’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만들려고 생각했다.
쩡칭훙은 4.25사건 때 직접 파룬궁 수련생들을 접견했던 주룽지가 지금 언론에 나서지 않는다면 당 중앙이 분열되었다는 추측을 외부에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군중들이 신임하는 주룽지가 탄압을 지지하게 된다면 많은 사람이 장쩌민을 지지하게 될 것이고 파룬궁수련생들도 청원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3강’ 운동을 이용해 주룽지에게 입장을 표명하도록 강요했다.
쩡칭훙에게 이 말을 들은 장쩌민은 즉시 주룽지를 불러 ‘3강’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3강’을 당을 수호하는 운동으로 간주하고 중시할 것을 요구했으며 또 주룽지가 장기간 정치 국면을 따르지 않고 당 중앙정책을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3강’에서 가장 핵심은 ‘정치를 말한다.’는 것인데 현재는 파룬궁 탄압이 바로 가장 중요한 정치라고 말했다. 장쩌민은 “주룽지 동지, 당 중앙은 국무원에게 ‘정치를 말할 것’을 아주 잘 할 것을 요구하며 ‘3강’ 보급과 현재 가장 중요한 정치를 잘 결합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을 분열시키는 것이 됩니다.”라고 협박했다.
장쩌민의 사무실에서 나온 주룽지는 무거운 침묵 속에 잠겼고 얼마 후, 주룽지는 자신의 마음을 어기고 장쩌민의 탄압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는 아마 우파로 몰려 고생스러웠던 과거로 다시 돌아가길 원치 않았을 수도 있고 또는 자오쯔양처럼 비참한 처지에 빠지기 싫었을 수도 있다.
‘3강’은 사실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으로서 민간에서는 정치국위원 우관정(吳官正)과 정치국 상무위원 웨이젠싱(尉健行)의 이름을 빌려 “정치, 학습, 바른 풍기를 아무리 말해도 바른 관리가 없고[无官正, 역주 - 吳官正과 발음이 같음], 탐오, 부패, 타락을 아무리 반대해도 행하는 것을 보지 못했네[未見行 역주 - 尉健行과 발음이 같음].” 라는 말이 떠돌고 있었다.
3국 시대 사마소(司馬昭)가 어떤 인물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사마소는 충복인 가충(賈充)을 앞세워 나쁜 일을 하게하고 자신은 뒤에 숨어 있었다. 마오쩌둥 역시 린뱌오(林彪), 장칭(江靑)과 장춘챠오(張春橋) 등의 사람을 앞세워 문화혁명을 발동했으나, 우둔하며 비이성적인 파룬궁 탄압에는 앞장을 서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장쩌민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예로 4.25 저녁에는 밤새도록 정치국에 보낼 편지를 작성했으며, 9월에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린 아 태 경제 협력회의에서는 체면이 깎이는 것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 정상들에게 직접 파룬궁 비방 소책자를 나누어 주기도 했다.
장쩌민은 각국 정상들이 이번만큼은 중국 내정을 상관하여 그의 탄압을 지지해 줄 것을 바랐으나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클린턴은 미국 국무원을 통해 1999년 9월 11일, ‘국제종교자유보고서
’를 발표하면서 중국대륙의 파룬궁 박해를 질책했으며, 얼마 후에 워싱턴에서 열린 인권회의에서도 중국의 파룬궁 탄압을 공개적으로 질책하면서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체포를 인권유린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았다. 장쩌민은 신앙의 자유가 천부인권이라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파룬궁 탄압을 지지하는 민주국가 지도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나눠준 소책자가 역효과를 얻게 되자 그는 즉시 늘 써오던 수법인 ‘내정 간섭’과 ‘반(反)중국’이라는 몽둥이를 내들었다.
(6. 국가 재산을 탕진한 축제)
중국에서 언론을 이용한 파룬궁 비방은 하루도 중단되지 않았다. CCTV 뉴스에서는 매일 한 개 이상의 파룬궁 비방 뉴스가 나갔는데 이런 상황은 두 달 동안 지속되다 갑자기 며칠 동안 중단되었다. 그 이유는 중공이 정권 탈취 50주년 대형 축제를 위해 여론상 안정, 단결의 정치 분위기를 조성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50주년 축제를 가장 손꼽아 기다린 사람은 바로 중공 총서기 장쩌민이었다. 그는 축제 때 자기 사진을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나란히 놓음으로서 만민 위에 올라선 기분을 느껴 보고 싶었다. 그는 또 덩샤오핑이 정권 탈취 35주년 축제에서 했던 것처럼 3군을 검열하며 군사위 주석의 재미를 맛보고 싶었다. 이 밖에 그는 천안문 의장대에 “장쩌민 동지를 핵심으로 당 중앙 주위에 긴밀히 뭉치자” 는 문구로 된 현수막을 들게 하여 전 세계에 자신의 권력을 자랑하려 했다.
당시 중앙 정치국에서는 50주년 기념 축제를 35주년 때와 같은 예산을 들인다는 원칙을 결국 지키지 못했다. 기념 축제 전야에 주룽지 총리는 국가계획위원회의 청페이옌(曾培炎)과 재정부장 샹화이청(項懷誠)을 찾아 축제 예산에 대해 상세히 물어 보았는데, 각종 선물, 공무원과 퇴직자 임금인상, 기초시설 추가 건설 등에 들어간 지출이 총 1천 8백억 위안에 달하는 것을 안 그는 화가 난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후에 그는 사람들에게 “나는 총리직을 아무 것도 수행하지 못한다. 베이징의 이 몇 개 행사는 국가 재산만 낭비하고 있지만 나는 말릴 수가 없다. 미국에서는 50주년이 아니라 100주년을 경축한다 해도 감히 이렇게 하지 못하는데 그렇게 하는 사람은 즉시 쫓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전 국민들의 돈을 베이징에 다 써버려서야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축제는 기세가 있어야 한다. 50주년 축제는 정치적인 득실을 따져야하므로 경제 장부에 너무 얽매일 필요가 없다. 하물며 우리 현재의 국력으로 못해낼 정도가 아니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장쩌민이 이번에 탕진한 돈은 100여 개 희망공정(역주 - 극빈지역에 학교를 짓는 공정)을 실현하여 약 2억 명의 학생을 도와 줄 수 있는 돈과 맞먹었으며 3천만 실업자들이 일년을 살아갈 수 있는 돈과도 맞먹었다.(한 사람당 매월 500위안으로 계산)
장쩌민은 사열 차량에 서서 천안문 앞을 서서히 지나면서 덩샤오핑처럼 “동지들 안녕하십니까.”를 외치긴 했지만 덩샤오핑처럼 자신만만하지는 못했다. 베이징대학의 학생들이 “샤오핑 안녕하십니까?”라는 표어를 손에 들던 당시만 해도 덩샤오핑은 전 국민, 적어도 전국 농민들의 추대를 받고 있었지만 장쩌민은 축제가 있기 전야에 1억이나 되는 선량한 백성들을 적으로 만들었는데 그들의 가족과 친척, 친구들을 합한다면 이는 결코 적지 않는 숫자였기 때문이었다.
對중국 한국어 단파방송 - SOH 희망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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