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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대당고리-대당의 북치는 병사들
 
  
2008-11-06 02:40:25  |  조회 9512

안녕하세요.

전통문화 옛사람에게 배운다의 박정임입니다.


오늘은 대당고리; 대당의 북치는 병사들에 관해 전해드리겠습니다.
2008년 1월 30일 신당인 전 세계 화인(華人) 신년만회가 뉴욕 라디오 시티 공연장에서 개최되어 ‘대당고리(大唐鼓吏)’가 울려 퍼졌습니다. 대당의 북소리가 바람처럼 천둥처럼 울려 퍼지니 마치 만 마리 말이 달리는 듯하고 보는 이들의 마음을 진작시키며 그야말로 중화 남아(男兒)의 양강(陽剛)한 기운을 유감없이 표현해 냈습니다. 춤과 노래가 일제히 펼쳐지며 대당천조(大唐天朝)의 성세천위(盛世天威)를 찬양했습니다.


나는 대당남아
높고 큰 만리 산하에
뇌정천위(雷霆天威)가 진동하며
나를 도와 마귀와 간사함을 제거하노라


我爲大唐儿男,
巍巍萬里河山,
雷霆天威震蕩,
助我掃魔除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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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隋)나라 말년 양제(煬帝) 양광(楊光)은 포악하고 주색에 빠져 사람의 도리를 모르며 사치를 즐겼습니다. 게다가 대형 토목공사와 전쟁을 잇달아 벌이자 민심은 돌아서게 되고, 대업(大業) 9년 월국공(越國公) 양현감(楊玄感)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킨 이후 천하호걸들이 봉기를 일으켜 “18로(路)가 반란을 일으키고 82로가 혼란에 휩싸였던.”시절...
대업 13년인 서기 617년 당국공(唐國公) 이연(李淵 후의 당 고조)이 태원(太原)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서쪽 가호보(賈胡堡)로 향하니 수나라 무아낭장(武牙郎將) 송노생(宋老生)이 2만 정병을 이끌고 곽읍(霍邑)에 주둔하며 당군에 맞서게 되었는데......


“둥, 둥, 둥….” (무거운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송노생은 이미 몇 번이나 되는 당군의 북소리를 들었는지 모릅니다. 북소리를 듣는 그의 마음속엔 점점 번민이 생겼났습니다.
“당나라 군사들은 먼 길을 온 탓에 피로할 테니 지금이 아주 공격에 적기인데 내가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그 입지가 탄탄하지 못해 공격하고자 해도 손을 쓸 수 없다니. 게다가 생각지도 못한 큰 비를 만나 군대를 동원하기엔 적당하지가 않구나. 아! 정말로 하늘은 나를 돕지 않는구나!”
심사가 우울해졌지만 잠시 후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지금 반란군이 도처에서 봉기해 우리 대 수(隋)나라도 시련을 겪고 있다. 하지만 이런 때야말로 우리가 공명을 성취할 좋은 때이다. 내 손에 2만의 정예 병사들을 장악하고 있으니 하찮은 당군, 오합지졸들이야 곽읍성 아래에서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돌궐(突厥)이 유무주(劉武周)와 결탁해 당군(唐軍)의 빈곳을 틈타 기습하기로 했다는 정보가 있었으니 당군은 앞뒤로 협공을 당할 것이다. 설사 이 말이 유언비어라 해도 당나라 군대의 군심(軍心)이 동요할 것이니 나는 단지 그들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결전의 날이 올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송노생은 앞에 있는 탁자를 치면서 갑자기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장군께, 아룁니다!….” 이때 갑자기, 급박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전령이 장막 안으로 달려 들어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장군님께 알립니다, 당군(唐軍)이 또 나타나 우리 진영 앞에서 욕을 해대고 있습니다.”
“또 정탐하러 왔군.” 막 울적한 마음에서 벗어났던 송노생은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장군들은 나를 따르라.”
송노생은 화가 나서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오너라! 내 직접 나가 적들을 맞이하리라.”

당군의 기병교위(騎兵校尉) 모천(慕天)은 흥분을 참지 못하고 송노생과 결전을 치르려 했습니다. 대장군 이연(李淵)이 몸소 성(城) 동쪽에 나와 적을 유인했고 좌군(左軍) 대도독(大都督) 이건성(李建成 이연의 큰아들)과 우군(右軍) 대도독 이세민(李世民)이 각기 수십 기의 병사들을 이끌고 송노생의 출전이 두렵지 않다는 듯이 성을 포위하려 했습니다. 이세민의 뒤를 쫓아 달리는 말들이 한바탕 먼지를 일으키며 단번에 남문(南門)까지 이르렀습니다.
송노생은 군대를 나누어 동문과 남문으로 각각 출정했고,
송노생이 단기(單騎)필마로 직접 이연을 공격하려 하니 뒤에 있던 당나라 병사들이 벌 떼처럼 밀려왔습니다.
깃발에는 ‘우군대도독 이(李)’라 쓰여 있었으니 바로 이세민의 정예기병들 이었습니다. 남문은 이미 전투에 패한 것 같고 이렇게 되면 앞뒤로 협공을 당하게 생겼으니 어떻게 당군을 대적하랴.  이때 앞에 있던 당군의 북소리가 크게 울렸고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송노생의 목이 이미 잘렸다.”라는 함성이 들려왔습니다.


당군이 승기를 잡고 반격에 나서니 수나라 병사들은 앞뒤로 협공을 당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또 자신들의 대장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으니 순식간에 사기가 꺾여버렸습니다. 송노생은 이미 형세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나를 따라 동문(東門)으로 가자!”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퇴각했습니다.
그러나 당군이 동문을 공격하자 이곳을 지키던 수나라 병사들이 전투에 패하면서 다급한 김에 성문을 걸어 잠그고 안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있었으니 송노생이 군대를 퇴각시켜 돌아가려 해도 이미 성문을 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성으로 몰래 돌아가려던 찰라 당나라 장수 유홍기(劉弘基)가 나타나 송노생을 단칼에 베어 버렸습니다.
송노생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자 성안에 있던 병사들도 더 이상 전의를 상실했고 결국 당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곽읍성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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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포학을 토벌한다(興義師討暴虐)”
다음날 당군은 곽읍성 아래에  방을 붙이고 병사들을 모집하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이번에 군사 모집을 주관한 모천(慕天)은 이세민의 수하로 우수한 병사를 선발할 수 있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시 군사를 선발하는 3가지 관문이 있었는데 먼저 그 의용(儀容 겉모습)을 보아 신체에 문제가 없어야 했으며, 곽읍 백성들은 무예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활을 쏘고 큰 돌을 들어 올려야 하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한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무예 시험장은 시험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갑자기 큰 갈채소리가 나더니 한 거구의 남자가 3석(石 1석은 120근에 해당한다.)에 달하는 큰 활을 당기니 활이 둥글게 구부러지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습니다. 갑자기 폭발할 듯한 큰 소리가 들리더니 거한은 서서히 활줄을 풀었고, 사방을 둘러보며 아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시험관이 큰 소리로) “우승(優勝)” (모천:)“음  아주 만족스럽구만! 이번엔 좋은 군사들을 선발할 수 있겠구나.”
다음에 시험에 나선 청년은 겉보기에 신체가 좀 왜소해보였고 2석짜리 활을 잡았지만 한참을 당겨도 당길 수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비웃자 청년의 얼굴은 벌겋게 변했지만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다시 1석짜리 활을 잡고 당기자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만 샀습니다. (당시 시험의 표준은 1석을 당기면 합격, 2석은 양호, 3석은 우승이라고 했다)그는 이번에도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안간힘을 썼지만 겨우 반밖에 당기지 못했습니다.
(시험관)“탈락, 다음!”
“나으리, 제게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자네는 활을 당길 힘이 없으니 달리 할 줄 아는 것이 있는가. 내가 보기에는 취사병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또 한바탕 웃었습니다.
“취사병이라고요? 취사병도 전투에 참가할 수 있나요?”
“취사병이 무슨 전투에 나가겠나, 불 때고 밥 짓는 일을 하면 그만이지. 적을 죽이는 그런 일은 취사병의 일이 아니야. 자네가 원한다면 내가 이 일을 주관하시는 어른께 사정해서라도 자네를 취사병으로 만들어줌세.” “좋습니다.”
청년은 자신을 희롱하는 모습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대답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모천은 청년의 인내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그는 청년 옆으로 다가갔습니다. 시험을 주관하던 병사에게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시험 보게 하곤 몸을 돌려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이름이 어찌 되는가?”
청년은 모천이 병사와 나누는 대화를 듣고 그가 이번 시험의 책임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뜻밖에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자 잠시 당황해 멍하니 있다 겨우 대답을 했습니다. “자네는 노나라의 대부 조귀(曹劌)가 전쟁을 논한 이야기를 아는가?”
“네. 『춘추 좌전에 전쟁의 승패는 용기에 달린 것입니다.“한 번 북을 치면 병사들의 투지가 치솟기에 응전을 하지 않았고, 두 번 북을 쳤을 때에는적의 투지가 떨어졌기에 응전하지 않았고, 세 번 북을 쳤을 때에는 적의 투지가 완전히 가라앉게 된 것이었습니다. 저들은 용기가 이미 고갈되었고 우리는 용기가 충만하였기에 승리를 한 것입니다. 이런고로 제나라의 대군을 노나라는 이기게 된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번엔 자신감이 좀 더 있는 듯 하구만! 그럼 오늘 이것으로 자네가 3가지 관문을 통과한 것으로 치겠네. 이렇게 하세. 자네는 이름을 기록하는 곳에 가서 적도록 하게. 내 우선 그대를 우리 당군의 고리(鼓吏)로 삼겠네.”


이 청년은 몰락한 관리의 자제로 성은 조(趙), 이름은 회의(懷懿), 자는 선덕(先德). 그가 군대에 선발되려는 이유는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였으며 남자라면 모름지기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워야 한다는, 평소 이런 포부가 있었습니다.
“이번엔 비록 전투병으로 직접 전투에 참가하진 못하지만 북을 치는 고리(鼓吏)가 되어 전장(戰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거야. 어쩌면 나중에라도 직접 전투에 참가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 도대체 북을 치는 고리와 조귀(曹劌)의 전투이론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이해가 안 되는데...... 아마 시험을 주관하시는 분이 생각나는 대로 질문한 걸게야.” 조회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추측했습니다.


‘고리(鼓吏)란 북을 치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북에도 큰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으며, 세워서 치는 것도 있고 눕혀서 치는 것도 있었으니 세워서 치는 큰 북은 3사람이 함께 에워싸야 하며 큰 북채를 들고 북을 치는데 소리가 백 리 밖까지 울리고, 반면 눕혀서 치는 북도 길이 8척에 북 면이 4척 가량 되며 양면은 가죽으로 덮였으니 한번 울리면 그 기세가 아주 웅장했습니다.
조회의는 이렇게 북을 치느라 허리가 시큰거리고 등이 아팠으며 적지 않은 고생을 겪어야 했지만, 결국 그는 제대로 북을 칠 수 있게 되었고 힘도 기를 수 있었습니다. 몇 달 동안 북을 치며 전투를 응원했고 당군 역시 연전연승을 거두며 단번에 수도인 장안까지 진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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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조회의는 모천(慕天)의 부름을 받고 우군도독부로 향했습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도독부 안에 있는 편당(偏堂)으로 들어가 보니 모천이 한 청년장군과 앉아 있었습니다. 황급히 예를 갖추려 하자 모천이 제지하면서 “오늘은 군영(軍營)이 아니니 그리 예의를 차릴 필요 없네. 오늘 자네를 이리로 부른 것은 자네를 고리의 도두(都頭)로 삼고자 하는데 평소 자네가 늘 전투에 직접 참가해 적을 죽이고 싶어 하기에 한번 물어보려는 것일세.”
“회의(懷懿)는 여전히 전투에 나가 적을 죽이고 싶습니다. 비록 소졸(小卒)이라 해도 좋습니다. 장군께선 저의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아! 자네 이름이 조회의, 조선덕이라 했지, 음, 의덕(懿德)이라 좋은 이름일세. 사람이 덕이 없으면 설 수 없는 법이지.” 모천을 바라보는 청년장군의 눈에 웃음기가 보였습니다. 마치 조회의의 뜻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럼 내 자네에게 하나 묻겠네, 왜 전투에 참가하려 하는가? 감추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솔직히 말해보게나.”
잠시 생각한 후 “남아(男兒)라면 모름지기 종횡으로 전장을 누벼야 합니다.”
“아, 정말 좋은 생각일세. 전에 모(慕)장군에게 들으니 자네가 글을 익혔고 또 군사전략에 대해서도 잘 안다고 하더군. 그럼 오늘 내 자네에게 문제를 하나 내겠네. 무엇을 일러 장수의 오덕(五德)이라 하는가?”
“장수의 오덕(五德)이란 지(智), 신(信), 인(仁), 용(勇). 엄(嚴)입니다. 지혜가 있어야 상대를 알고 나를 알 수 있으며 그런 후에야 지모(智謀)가 나옵니다. 믿음이 있어야 상하가 한마음이 될 수 있고 그런 후에 전투에 임하면 불리하지 않습니다. 어진 마음을 품어야 백성들을 사랑할 수 있고 그런 후에야 병사들을 아끼고 위험을 알 수 있습니다. 용맹이 있어야 좁은 길에서 적과 마주쳐도 그 뜻을 꺾을 수 있습니다. 군령이 엄해야 명령이 행해지며 그런 후에야 병사들을 뜻대로 부릴 수 있습니다.”
“자네가 기왕 장수의 오덕을 안다면 그럼 북에도 오덕이 있음을 아는가?”
“(‘북에도 오덕이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장군. 그것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제게 답을 하교해주십쇼!”
“그렇게 겸손할 필요 없네. 내가 자네보다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데 무슨 하교를 한단 말인가. 그저 우리가 서로 교류한다고 생각하게.”


“예전에 황제(黃帝)가 탁록(涿鹿)에서 치우(蚩尤)와 전투를 치를 때 기(夔)를 죽여 그 가죽으로 북을 만들었는데 그 소리가 5백리까지 들렸다고 하니 이것이 바로 전고(戰鼓)의 시작일세.” 청년장군은 약간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이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고(戰鼓)는 바로 신(神)이 만든 것이니 구하고자 해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닐세. 오늘날의 전고는 대소를 막론하고 그 작용은 같지만 그 효과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네.”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고요?”
“그렇다네. 군대의 위엄(軍威)은 북에서 성대해지는데 북을 치는 사람이 덕(德)이 있으면 북에 혼(魂)이 생기고 북에 혼이 있으면 군대의 위엄이 저절로 성대해지기 마련이라네. 그러므로 북을 우레처럼 울려 군대의 사기를 올리는 것을 일러 북의 지혜(鼓智)라 하고, 한번 울려 떨쳐 일어나고 두 번 울려 다그쳐 전진하며 세 번 울려 전투 대형을 갖추는 것을 일러 고신(鼓信)이라 하네. 북이 우(羽)음을 내면 대장부의 강건한 뜻이 덕(德)에 서니 이를 일러 고인(鼓仁)이라 하고, 한번 울리면 투지가 치솟는 것을 일러 고용(鼓勇)이라 하며, 북을 울려 전투할 때 멈추거나 휴식하지 않는 것을 일러 고엄(鼓嚴)이라 하네.”


청년장군은 여기까지 말한 후 조회의에게 몸을 돌리고는 그의 어깨를 치면서 말했습니다. “장수가 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고리(鼓吏)가 되는 것 역시 쉽지 않네. 장수 혼자 공을 세울 수 있다면 고리(鼓吏)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회의 자네의 마음은 내 이미 잘 알았으니 우선 이 고리(鼓吏)의 임무를 잘하도록 하게.”


조회의는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하찮은 고리가 군대의 사기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을!  “당군의 고리(鼓吏)가 되길 원하옵니다.” 회의는 장군의 명령을 받들 것을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당 무덕(武德) 3년(서기 620년) 진왕(秦王) 이세민은 반란군 두목 유무주(劉武周)를 깨뜨리고 곤경에 처한 당나라를 구했고 당시 이를 기뻐한 하동(河東)의 백성들이 길에서 춤을 추고 노래했으며 군인들은 군중에 있던 옛날 악곡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승리를 경축했습니다. 이리하여 마침내 진왕파진(秦王破陣 진왕 이세민이 적진을 깨뜨렸다는 의미)의 악곡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 악부(樂府)에 편입되었습니다.
조회의는 이미 여러 차례 군공을 세워 효기위(驍騎尉)로 승진했고 예전의 청년장군은 바로 지금의 우군대도독이자 진왕(秦王)인 이세민이었습니다. 조회의는 이때 비록 더 이상 고리는 아니었지만 고리에 대해 더욱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관(貞觀) 원년(서기 627년) 당태종은 위징(魏徵) 등에게 명해 7수의 가사를 짓게 하고 여재(呂才)의 협률도곡(協律度曲)을 ‘진왕파진악(秦王破陣樂)’이라고 고쳐 부르게 했습니다.
정관 7년 태종이 직접 ‘파진무도(破陣舞圖 진을 깨뜨리는 무용도)’를 만들어 무용을 수정했고 이 작품은 한편의 웅장한 무무(武舞)에 해당하며, 공연에 필요한 인원만도 무용수 120명, 합창단원 100명, 악단 100명이나 됩니다. 원래 예전에 유행하던 음악을 여재(呂才)의 수정을 거쳐 완성한 것으로 춤 동작 하나하나는 모두 태종이 직접 구상한 것입니다. 무용대열의 왼쪽은 원형, 오른쪽은 장방형을 이루며, 앞에는 전차(戰車)가 있고 뒤로는 보병들이 따르고 무용은 3번 변(變)하는데 매 변(變)마다 4개의 진법(陣)이 나오기 때문에 총 12가지 진법이 가사에 따라 바뀌게 됩니다. 이것을 일곱 가지 덕을 지닌 무용이란 의미로 ‘칠덕지무(七德之舞)’라고도 합니다.


원래 이 작품은 3품 이상의 관원들과 ‘외국에서 온 추장’들이 현무문(玄武門) 밖에서 연주했었고, 당시 큰북을 울리면 백리 밖까지 북소리가 진동해 그 기세가 아주 대단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또 기병 2천명을 동원해 대열을 이뤄 입장하게 했는데 이 또한 더욱 장관이었죠.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시를 통해 “칠덕(七德)을 노래하고 칠덕을 춤추니, 성인께서 복을 내리심이 끝이 없도다. 이 어찌 한낱 무력을 떨치고 성스런 문채를 과시하려 함이랴. 태종의 뜻은 왕업(王業)을 다지려는 것으로 왕업의 어려움을 자손들에게 보이시기 위함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정관 17년 2월 태종은 능연각(凌烟閣)을 설치하고 24명의 공신들을 그려두고 늘 옛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태종이 칠덕의 춤을 만든 이유는 왕업을 다지고 창업의 어려움을 보여주기 위함으로 또 이렇게 한 후에야 뇌정(雷霆)의 위엄 뒤에는 북을 치는 고리(鼓吏)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북소리를 넣어주세요)
당나라의 휘황함 뒤에는 바로 이와 같은 대당고리-대당의 북치는 병사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전통문화 여기까지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對중국 한국어 단파방송 - SOH 희망의소리
11750KHz, 중국시간 오후 5-6시, 한국시간 오후 6-7시

http://www.soundofhop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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