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장중경이 활약한 시대는 후한 말기 난세였습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아 유랑민이 넘쳐났고, 전염병과 부상으로 신음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런 세태를 틈타 사람을 현혹하는 사이비 종교와 어설픈 학설이 판을 쳤고, 의학에서도 인술보다는 가짜 약을 팔아 재물을 축적하고자 하는 돌팔이 의사가 많았습니다.
질병에 죽고 가짜 약의 합병증에 죽고, 환자들은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장중경의 역작 상한론(傷寒論) 서문에서 그는 ‘의사들이 의술에는 정진하지 않고, 권세에 빌붙어 명리만 추구하니 군주와 부모의 병도 고치지 못하고, 사람들을 재난에서 구하지 못한다’고 당시의 풍토를 개탄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당시는 전반적으로 기온이 낮아 질환의 상당수가 한기(寒氣)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역사서적에도 조비가 늦가을에 군사훈련을 하려 했으나 강물이 얼어 취소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장중경도 상한론 서문에서 건안(建安) 이래 십여 년 만에 친척의 2/3가 죽었고, 열에 일곱은 상한으로 사망했다고 했습니다.
전편에 서술한 바와 같이 차곡차곡 의술을 익혔던 장중경은 훗날 장사 태수로 부임하게 됩니다. 당시 장사는 전임 태수 손견을 비롯해 군웅이 겨루던 곳으로 전염병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장중경은 태수로 부임한 뒤에도 업무를 보는 시간외에는 한시도 쉬지 않고 환자를 치료했습니다. 그는 상한 즉 외부의 한사의 침입으로 병이 발생하는 것에 있어서 병을 태양(太陽), 양명(陽明), 소양(少陽), 태음(太陰), 소음(少陰), 궐음(厥陰) 등 6경(經) 병으로 구분했습니다.
이는 일종의 침입 단계 혹은 인체의 상태에 따른 병의 진행 부위를 파악하는 개념입니다. 여기에 진단을 위한 객관적인 기준과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한의학의 원전이라 불리는 황제내경이 병의 원인과 생리, 병리에 대해 다뤘다면, 상한론에 이르러서는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기술을 정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한론의 진단법과 처방은 정확하고 신속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후한 환제(桓帝) 제위 시기, 어느해 봄 하남 완성 일대에 질병이 창궐해 마을마다 곡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장중경을 찾는 인파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용릉(舂陵)에 사는 유원외(劉員外)라는 사람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장중경을 찾아왔습니다. 장중경이 유원외가 데리고 온 아들을 살펴보니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 있고 몸은 불덩어리였으며, 잘못된 투약으로 합병증까지 생긴 상태였습니다.
장중경은 진찰을 끝내고 처방전을 적어주고는 서둘러 다른 환자를 보기 위해 자리를 떴습니다. 처방의 내용은 갈대뿌리, 띠뿌리, 민들레 뿌리였습니다.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였지만, 이삼일이 지나자 아들은 정신이 돌아오고 밥을 먹을 수 있게 됐습니다.
갈대뿌리는 한의학에서 노근, 띠뿌리는 백모근, 민들레 뿌리는 포공영이라고 하며, 모두 열을 내려주고 항균, 항바이러스, 면역증강 등의 작용이 있습니다.
보름 후 아들이 완쾌되자 유원외는 잔치를 열어 장중경을 초대했습니다. 하지만 장중경은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의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아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유원외는 장중경의 인품을 잘 아는 터라 그를 배웅하며 금품으로 사례를 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다른 방법으로 사례를 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유원외는 그날 저녁 아들이 앓았던 병의 증상과 장중경의 처방전이라며, 약의 복용방법 등을 상세히 적어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 곳곳에 붙였습니다. 유원외의 아들이 걸렸던 병은 유행성 질환으로 이 병에 걸리는 환자가 나날이 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이 일대의 환자들은 병원을 찾지 않고도 병을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장중경이 사용한 처방은 세 가지 뿌리를 사용했다 하여 삼근탕(三根湯)이라 불렸으며, 현재에도 유효한 처방입니다.
고대명의를 연재하며 만난 명의들은 사(私)보다는 공(公)을 위하고, 자신보다는 환자를 위하며, 돈벌이보다는 진료와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이는 영원히 변치 않는 진정한 인술과 의술에 도달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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