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한의학과 중의학 등 동양의학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문화권에서 장중경(張仲景)의 가치는 남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아직도 그가 남긴 의학 이론과 처방을 주요하게 쓰는 한의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파생되어 발전한 학파도 상당수 입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그의 처방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관련 파생 약품도 개발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장중경의 처방으로 질환을 치료하는 한의사가 많으며, 정규 교과 과정의 교재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장중경의 이름은 기(機)이며 자(字)는 행(行)입니다. 지금의 허난 성에 해당하는 동한 남양(南陽)에서 태어났습니다. 남양은 동한(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光武帝)의 고향이기도 하며, 뛰어난 풍수지리와 문화 역사적인 조건으로 역대로 인물이 많이 난 곳으로 유명합니다. 장중경은 어릴 때부터 유가 경전을 즐겨 읽었고 총명함이 남달랐기에 집안에서는 장중경이 장차 벼슬길로 나아갈 것이라는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장중경이 훗날 의학자와 의사의 길을 걷게 되는 데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편작의 일생을 다룬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에는 인술을 펼친 편작의 비범함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의사는 그리 존경받는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유학자와 관료를 귀하게 여긴 당시 풍토의 탓도 있었지만, 용의(庸醫)라 불리는 의사들이 의술에는 관심이 없고 환자의 돈을 갈취할 궁리만 하는 행태가 심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남양 일대에 이름 높은 명사 중에 하옹(何顒)이라는 학자가 있었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동탁(董卓)도 하옹의 진가를 알아보고 여러 차례 등용을 권했으나, 하옹은 신병을 이유로 거듭 등용을 고사하고 칩거했습니다. 장중경이 16세 되던 해 아버지는 중경의 재능을 시험해 보고자 하옹을 만나러 갔습니다. 하옹은 중경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아버지에게 중경이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의사가 될 자질이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집안에서는 의학자의 길을 걷겠다는 중경의 뜻을 점차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중경은 날개를 단 듯 앞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수년 동안 홀로 의서를 탐독한 중경은 당시 명의로 이름난 장백조(張伯祖)를 찾아 예를 갖추고 제자로 삼아주길 청했습니다. 장백조는 중경을 시간을 두고 지켜본 뒤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장백조의 가르침으로 황제내경, 난경 등의 의학서적을 독파한 중경은 장백조를 도와 서서히 환자를 치료했고, 일취월장을 거듭해 남양 지역에서 장중경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장중경은 양려공(陽勵公)을 스승으로 모시고 임상 경험을 쌓았으며,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양양 지역의 왕신선이라 불리는 외과 의사를 찾아가 비방을 전수받는 등, 각 의가의 비방을 찾아 나섰습니다. 당시 의가들 사이에는 서로 견제하고 비판하는 악습이 있어 비방을 좀처럼 공개하지 않았지만, 장중경은 이미 명의로 이름이 나 있음에도 명리에 마음 두지 않고 자신을 낮춰 예를 갖췄기에 각 의가의 정수를 전해 받을 수 있었습니다.
훗날 장중경은 자신만의 이론을 구축하고 수많은 처방을 만들어 천하에 공개했으니, 그에게 도움을 준 의가들의 선심도 더욱 좋게 발휘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청나라 명의 장지총(張志聰)은 “불명사서자불가이위유, 불명상한론자불가이위의(不明四書者不可以爲儒, 不明傷寒論者不可以爲醫)”라는 말을 남긴 바 있습니다. 즉, 사서에 밝지 않다면 유학자가 될 수 없고, 상한론에 밝지 않다면 의사라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서는 아시다시피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뜻하고, 상한론은 장중경이 훗날 저술한 의서입니다. 장중경과 그의 저작이 후대에 어느 정도로 위상을 떨쳤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장중경과 동시대 인물로 화타가 있습니다. 화타는 장중경의 저서를 생전에 접할 수 있었고, “저진시일본구활인명적호서(這眞是一本救活人命的好書)”이라는 찬사를 남겼습니다. 즉, 진실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좋은 서적이라는 뜻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장중경이 남긴 업적과 일화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