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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객 의사, 부청주(上)

편집부  |  2013-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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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 명조에 멸망의 기운이 감돌던 1607년, 산서성 양곡현에서 태어난 부청주(傅靑主)는 시대를 대표하는 의사일 뿐만 아니라 명나라를 대표하는 자존심이었습니다.


서극 감독의 무협영화 칠검에도 등장하는 부청주라는 캐릭터는 의협심이 강하고 뛰어난 무술과 의술로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으며, 실제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부청주의 원래 이름은 정신(鼎臣)이지만 훗날 산(山)으로 바꾸었고, 많은 자(字)와 호를 가지고 있지만 주로는 청주로 불렸습니다. 특히 여과, 즉, 산부인과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며, 여러 저서를 남겨 후대에 의술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부청주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간략히 다루고 다음 편에 그가 남긴 일화를 통해 한의학 업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부청주에 대해 당시 세인들은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부청주의 이름을 모르는 세인은 없다. 허나 누가 그의 자를 아는 것이 그의 시(詩)만 못하고, 그의 시를 아는 것이 그의 그림만 못하며, 그의 그림을 아는 것이 그의 의술만 못하고, 그의 의술을 아는 것이 그의 인품을 아는 것만 못함을 알겠는가?’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부청주는 강직하고 학식이 높은 원계함(袁繼鹹)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15세에 이미 향시에 단독 합격할 정도로 신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명말 백성에 대한 관리들의 착취와 압박 등의 횡포가 심하여 백성의 생명과 재산은 보장받지 못했으며,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을 채용하지 않아 벼슬이 없는 선비로 종신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또한, 스승 원계함은 환관 장손진(張孫振)의 모함을 받아 붙잡혔습니다. 부청주는 당시 정치적 부패를 직시하고, 장손진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북경으로 압송되던 스승이 탄 호송차를 미행하면서 전국의 생원들에게 원계함의 무고를 증명하고 장손진의 죄상을 폭로해 조정의 여론을 끌어냄으로서 도리어 장손진이 처벌을 받게 하였습니다.


부청주는 22세에 장정군(張靜君)과 결혼하여 미(眉)라는 자식을 낳고 자를 수모(壽髦)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26세 되던 해 부인을 잃고 그 애달픔을 간직한 채 그 후 평생토록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부청주가 39세 되던 해. 명조가 멸망하고 청조가 들어섰습니다. 부청주는 한탄하며 모친과 아들을 데리고 토굴 속으로 들어가 칩거하면서 가끔 약재와 땔감을 내다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모아 반청복명(反淸復明)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뜻을 같이 하던 스승 원계함은 체포되어 끝까지 불복하다 처형당했습니다.


그는 스승의 유고를 정리하고 북경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 선비의 복장을 벗고 도가의 복장으로 위장해 저항 활동에 나섰습니다. 그때 얻은 별명이 ‘붉은 옷의 도인’입니다. 저항 활동을 하는 중에도 부청주는 의사로서 병자를 계속 진료했습니다. 그의 진료소는 종일 진찰을 받으러 온 사람으로 복작거리어 혼잡스러웠습니다. 그럼에도 왕진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200~300리 되는 거리도 사양하지 않았으며, 집이 빈곤한 사람에게는 무료로 약을 지어줬습니다. 하지만 관리와 지방 토호의 왕진에는 응하지 않았고, 내원해야만 비로소 진찰했으며 또한 다른 환자와 평등하게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순치 11년, 그의 나이 48세 때 반역자의 밀고로 부청주는 태원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감옥 속에서 9일간 단식하며 끝까지 회유에 굴하지 않다 졸도해 쓰러지기를 수차례. 청조정에서는 하는 수없이 부청주를 풀어주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또다시 부청주는 천하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됐습니다. 청조도 민심을 얻어야 천하를 얻는다는 이치를 깨달으면서 나라가 평안해지기 시작하자, 부청주는 결국 반청복명이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청주가 73 세 되던 해 강희 17 년(서기 1678 년) 청나라 조정에서는 명말(明末) 의사(義士), 지사(志士)와 유민(遺民)들의 항청반항(抗淸反抗)을 와해시키기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박학홍유과(博學鴻儒科)를 설치하였고, 부청주를 등용하고자 했습니다. 부청주가 거듭 거절하자 지방 관리는 부득불 반강제로 그를 북경까지 이송했습니다. 상경 후 부청주는 강한 설사약인 대황을 먹고 중병이 난 것처럼 꾸며 조정에 들어가는 것을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강희제는 부청주를 대면하고 이 같은 행동이 강직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처벌하는 대신 처사로 예우하고 지방 관리가 특별히 안부를 묻고 챙겨야 하는 직책인 내각중서(內閣中書)를 내립니다.


그는 스스로를 끝까지 백성으로 칭하고 시골에 거주하면서 ‘고상한 뜻은 높은 바람과 바위와 같은 성품과 절개가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의 서예는 당대인 청나라 초기 제일 서예로 불리었으며, 그의 그림 역시 높은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화징록(畫征錄)’에서는 “부청주의 산수에는 준법이 많지 않고 작품 속에 뜻이 깊으며 먹으로 그린 참대도 기가 있다”는 평이 실려 있습니다.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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