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2011년 5월 중앙서기처 서기이자 중앙조직부장인 리위안차오(李源潮)가 충칭을 방문했다.
중앙조직부장은 정치국 상무위원 이하 3대 요직의 하나로 인사권을 쥐고 있으며, 리위안차오는 후진타오의 심복으로 알려져 있다. 칼럼니스트 장웨이핑(姜維平)은 그의 방문은 보시라이의 베이징 입성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고 분석했다.
보시라이는 충칭 당서기가 되자마자 공산당 찬양 운동 즉, 창홍(唱紅)을 주도했다. 공산당 서적 홍서(紅書)를 읽고, 찬양하는 편지인 홍신(紅信)을 보내고, ‘장군 후대 합창단’을 만들어 태자당의 힘을 결집했으며, 공산당에 충성을 지키는 당원과 젊은이의 지지를 끌어냈다.
곧바로 이어진 폭력조직 소탕작전인 타흑(打黑)으로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는 개인 기업주를 ‘흑사회’로 몰았고, 당 내의 반대파를 부패 관료로 몰았다. 특히 그는 왕리쥔이 주도하는 약 7,000명의 200여개 특별 수사팀을 통해 충칭의 모든 고위층 관리의 경제 문제를 철저히 조사했다. 특히 중앙기율위원회 허궈창(賀國强) 서기와 광둥성 왕양(汪洋) 당서기가 주요 목표였다. 이들은 충칭시 당서기 전임자로 보시라이와 경쟁 관계에 있다.
허궈창은 후진타오의 지시로 보시라이의 근거지인 랴오닝성을 조사하던 중이었지만, 뜻밖에 보시라이가 원창 전 충칭시 사법국장 등을 체포해 사형시키기 직전 확보한 정보로 후진타오, 왕양, 허궈창을 선공하고 나섰다.
양측의 거래가 시작됐고 리위안차오 조직부장의 충칭 방문은 밀사의 성격이 컸다. 보시라이는 왕양, 허궈창 등 전임 충칭시 서기의 과거 행적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고, 오히려 타흑의 성과를 전임자들에게 돌렸으며, 후진타오도 보시라이의 행적을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보시라이의 중앙 요직 입성을 약속하게 된다.
만일 왕리쥔의 망명시도가 없었다면 보시라이는 어쩌면 18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해 장쩌민파인 저우융캉의 뒤를 이어 중앙정법위 서기직을 물려받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헤아림은 하늘의 헤아림만 못하다’라는 말처럼 왕리쥔이 보시라이의 치부를 드러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외신은 보시라이의 창홍타흑이 장쩌민파 쩡칭훙 전 부주석의 책략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그 목적은 현 지도자인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를 난감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후진타오가 대표하는 공청단파도 대응책을 갖고 있었다. 리위안차오 등 공청단파 주요 인사들은 보시라이의 무리한 타흑 운동으로 각층의 반발이 거세지기를 기다려 보시라이와 저우융캉 등 장쩌민파를 일시에 제거할 계획이었다.
누가 이 책략을 지휘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왕리쥔의 망명시도로 중앙정치국의 상무위원 9명과 장쩌민 넓게는 오바마 대통령까지 중국 공산당 권력 암투에 휘말리게 됐고 모든 과정이 폭로는데 중공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2011년 5월 보시라이는 왕리쥔을 충칭부시장으로 임명하고, 공안과 정법 등 영역을 주관하게 했다. 5월 27일 충칭 언론은 ‘왕리진이 만장일치로 부시장이 됐다’고 보도했지만 실제 내막은 첫 번째 투표에서 나온 기권표가 불만스러웠던 보시라이는 재투표를 실시했으나 여전히 기권표가 나왔다. 보시라이는 왕리쥔이 만장일치로 뽑혀야, 타흑이 충칭에서 의견분열 없이 추진된다는 것을 알릴 수 있다며 3차 투표를 지시해 결국 만장일치로 왕리쥔이 당선됐다.
소식통에 따르면 보시라이는 상무위원 진입을 위해 10여 년 전부터 신변 정리에 들어갔다. 보시라이가 관직에 입문한 후 구카이라이가 벌어들인 돈이 최소 50억 위안에 달해 추후 잡음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소식통은 보시라이가 아들 보과과를 2000년 외국으로 보내면서 법적으로 구카이라이와 합의 이혼했다고 밝혔으나 대외적으로 보시라이 부부는 여전히 금슬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식통은 구카이라이가 암에 걸렸으며 치료를 위해 기공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보시라이는 전처 리단위(李丹宇)와 낳은 아들을 불법 영업을 한 혐의로 진저우 감옥에 수감했다. 그가 상무위원 진입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보시라이는 늘 ‘기를 써야 이길 수 있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다. 보시라이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조차 이를 부담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중공 고위층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 효과적인 기준이 있다. 파룬궁 탄압 문제와 파룬궁 수련자 장기적출 문제 앞에서, 이를 주도하고 옹호하는 장쩌민, 저우융캉, 리창춘, 자칭린, 뤄간 등 장쩌민파가 있는가 하면, 후진타오, 원자바오, 시진핑, 리커창, 허궈창 등 침묵 혹은 회피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부류다.
장쩌민파는 파룬궁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정법위와 610사무실의 기능을 대폭 강화해 권력의 추를 군부와 공안 쪽으로 기울게 했다. 장쩌민은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면서도 심복인 저우융캉을 정법위 서기이자 상무위원으로 심는 데 성공했다. 18대 지도부 구성에서 저우융캉의 뒤를 이어 보시라이를 진입시키려 했지만 왕리쥔 사건으로 좌절됐다. 중국 공산당 내부 투쟁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일대 격전이 예상되며, 경우에 따라서 50년 넘게 중국을 장악하고 있는 공산당 정권의 붕괴도 점칠 수 있는 상황이다.
미국 정부는 왕리쥔으로부터 건네받은 기밀 자료를 아직 전면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하나둘씩 알려지고 있다. 이와 함께 중국 공산당이 파룬궁을 탄압한 내막도 드러나게 됐으며, 장쩌민파로서는 큰 부담을 안게 됐다.
왕리쥔 사건 이후 중국인들은 하나둘씩 중국 공산당을 마음속에서 지우고 있다. 이는 중공 관련조직 탈퇴자 증가로 이어지고 있으며 매일 5만여 명이 동참하고 있다.
탈당센터 관계자는 최근 탈퇴를 선언한 중국인들이 공산당의 부패와 붕괴를 자주 언급한다면서, 당국의 인터넷 봉쇄를 돌파하는 프로그램도 요청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중국인들이 언론통제와 인터넷 통제에 가려진 실상을 직접 파악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신기원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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