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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가 경계한 보시라이의 야심

편집부  |  201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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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 보시라이 일가에서 보시라이-구카이라이 부부만 유명한 것은 아니다. 아들 보과과도 못지 않다.

 

보시라이가 다롄시장이 된 후 2000년 보과과는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학비는 22,424파운드, 생활비는 최소 연간 5,000파운드가 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보과과는 1년 후, 중국 최초로 영국 명문 사립 해로우 스쿨에 입학했다. 학비는 매년 30,930파운드에 달했다. 또 2006년 보과과는 영국 옥스퍼드대에 입학해 철학과 정치학 그리고 경제학을 배웠다. 학비는 매년 2만 6천 파운드였다.


2009년 보시라이의 후광을 업고 영국에서 ‘빅벤상’을 받으면서, ‘영국 10대 걸출한 중국인’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중국청년보는 그가 부모의 학비 지원없이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녔다고 보도했다. 당시 보시라이의 연봉은 14만위안으로 영국 돈으로 1만파운드가 약간 넘었으며 보과과의 학비와 생활비에 비교하면 턱없이 작은 금액이다. 홍콩 언론은 보과과의 영국 유학비용은 다롄대상집단 이사국 뉴강(牛鋼)위원장에게서 나왔다고 보도했다.


2011년 11월 26일 월스트리트저널은 보과과가 주미 중국대사 훙보페이(洪博培)의 딸과 페라리를 타고 데이트중이라고 보도했다. 이외에도 태자당 천샤오단(陳曉丹)과 티베트에서 휴가를 보낸 사진도 유포됐다.

 

중국 공산당과 행정부가 밀집한 중난하이 소식통에 따르면, 2004년 초반 보시라이가 랴오닝을 떠나면서 전 랴오닝성 기율검사위원회 가오쯔(高姿) 서기, 다롄 중법 부원장 류샤오빈 등 13명의 감옥에 갇힌 간부나 당원 그리고 기업가들이 중난하이 지도자에게 편지로 보시라이의 부정부패와 위법 사실을 고발했다. 제보를 접한 원자바오는 사안의 중요성을 인식했지만 중공 원로 보이보와 충돌을 꺼려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보시라이는 베이징으로 떠나면서 비서 처커민을 다롄 국가안전국 서기로 앉혀 놓고, 첨단 첩보 기법을 동원해 반 보시라이 세력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게 했다. 국가안전부 직속인 다롄 국가안전국은 보시라이 우호 세력인 저우융캉의 지휘하에 있다. 현재까지 보시라이의 수뢰와 부정부패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인 수사나 보도가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중난하이에서 볼 때 다롄은 작은 마을에 불과하다. 후진타오가 우려하는 것은 보시라이가 다롄에서 저지른 부패보다 중앙으로 진출하려는 야심이었다. 후진타오는 보시라이가 군부 고급 장성과 밀접한 왕래를 한 것을 익히 알고 있었고, 군부 장악력이 약했던 후진타오로서는 보시라이가 언제 성동격서(聲東擊西)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보시라이와 절친한 군부 이사로는 쉬차이허우(徐才厚) 중국 군사위 부주석과 해군사령관 우성리(吳勝利), 청두 군구 정치위원이자 중공 원로 장전(張震)의 아들 장하이양(張海洋) 등이다.


보시라이의 주도면밀함은 충칭으로 좌천된 후에도 살아 있었다. 후진타오는 우이 부총리와 원자바오 총리의 건의에 따라 보시라이를 서부 중심 도시인 충칭시로 보내면서 전력을 집중해 보시라이를 포위하려 했다. 당시 중공은 서부 개발 정책을 펼치고 있을 때여서, 겉으로는 보시라이에게 서남왕이라는 호칭을 주고 정책을 펼쳐보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전임 충칭시 서기였던 왕양과 허궈창 직계가 여전히 남아 있는 충칭은 한편으로는 후진타오가 판 함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두 직계의 공격으로 보시라이를 지치게 만든 뒤 리커창 등 후계 집권시 보시라이를 권력에서 완전히 밀어 낼 계산이었다. 또 보시라이의 측근을 압박해 보시라이의 수족을 묶을 방책도 준비했다.


하지만 보시라이 역시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최고의 지략가인 아내 구카이라이를 비롯해, 쩡칭훙과 저우융캉, 장쩌민의 후방 지원을 등에 업고 충칭으로 가자마자 폭력배 소탕작전과 공산당 찬양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칼럼니스트 장웨이핑은 구카이라이가 마오쩌둥의 세번째 부인이자 문화혁명을 주도한 장칭의 술수를 빼닮았다고 설명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보시라이는 누구도 믿지 않고 구카이라이를 통해 중요한 일을 처리했다. 구카이라이는 장쩌민 관저를 제집처럼 찾았고, 충칭과 베이징을 자주 왕래했다.


구카이라이는 1999년 중앙기율검사위가 장궈광(張國光) 전 성장을 좌천시킨 뒤 부정부패 혐의를 찾아 하나씩 공격해 무릎 꿇게 한 사례를 지켜보고, 보시라이도 같은 방식으로 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구카이라이는 보과과를 유학보내고, 재산을 해외로 유출한 뒤 충칭으로 돌아와 보시라이와 공산당 찬양 및 조폭 소탕 작전을 논의했다.


공산당 찬양을 뜻하는 창홍(唱紅)은 군부와 정계 보수파의 지지를 얻기 위한 포석이다. 여기에는 장쩌민과 리펑, 군부 구징성(谷景生) 등이 포함된다. 폭력조직 소탕을 뜻하는 타흑(打黑)는 겉으로는 국민의 신임을 얻기 위한 것이지만, 실제는 반대파인 왕양과 허궈창의 수하를 공격해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포석도 깔려 있다. 제거 대상에는 원창(文强), 장다오(張弢), 우샤오칭(烏小靑), 장중하이(張宗海), 리창(黎强) 등 경찰과 언론 그리고 기업계 인사도 다수 포함돼 있다. 소식통은 구카이라이가 ‘생사가 결판나는 투쟁으로, 승패가 여기에 달려 있다’고 했다고 전했다.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는 이외에도 인터넷과 여론을 살펴 왕훙쥐(王鸿擧) 시장 등을 숙청 리스트에 올리고 조사에 착수했다. 이면으로는 중앙 정부에 서면 보고로 조사 결과를 알리면서 협상에 들어갔다. 보고서에는 허궈창과 왕양 등 차세대 지도자의 위법 혐의가 상세하게 담겨 있었다. 중앙에서는 원창 등 국장급 간부만 처벌하고 더 이상 범위를 확대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와 동시에 보시라이를 대상으로 한 중앙기율검사위원회의 조사도 중지했다. 일종의 거래로 보시라이는 흡족한 성과를 거둔 셈이다. 이는 중국 정계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양상이다.


왕훙쥐 시장은 중앙기율검사위의 쌍규는 피했지만 정계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왕훙쥐의 빈자리는 황치판(黄奇帆)이 대신했다. 황치판은 장쩌민이 추천한 인물로 경제통으로 불린다. 황치판은 보시라이가 계급투쟁에는 능숙했지만 경제에는 문외한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충칭에서 최고 경제 관료로 꼽힌다.


2009년은 충칭에서 ‘창홍’이 가장 활발한 해이고, 2010년은 ‘타흑’이 가장 심할 때였다. 구카이라이는 ‘장군후대 합창단’에서 아버지 세대의 위풍을 노래해 공청단파를 감동시켰고 보시라이 집안과 원한 관계에 있는 일부 공산당 원로 가족과 화해의 장을 마련했다. 보시라이는 타흑 과정에서 일부 조폭과 전과자를 처리했고 정적을 제거하는 소득을 얻었다. 숙청 대상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여론을 참작해 기업주를 하루아침에 거지로 만들어 한시적으로 시민들은 통쾌함을 느꼈다.


하지만 창홍과 타흑 운동을 펼치는 데는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2011년 충칭시의 재정 수입은 2900억 위안, 지출은 3900억 위안으로 적자가 1천억 위안에 달했다. 이는 다롄시를 떠날 때 재정이 바닥났던 장면과 겹친다. 만약 보시라이가 빠르게 승진하지 못할 경우 재정 적자를 해결해야 한다. 혹자는 보시라이가 18대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되고자 했던 이유를 충칭을 빨리 떠나야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타흑 운동 기간 중 충칭시 공무원과 간부들은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연일 불안에 떨었다. 언제 불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휴대용 세면도구 세트를 사무실에 비치한 사람도 있었다. 동시에 보시라이는 공무원들을 심하게 질타했고, 밤 12시에 회의를 소집해 30분 내 도착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2009년 8월, 사법국장 원창이 체포됐다. 당시 체포된 공무원 중 가장 직급이 높았다. 그밖에도 공무원 2천여 명이 자의반 타의반 물러났으며 청장급 관료도 8명이나 물러났다. 보시라이는 문화에 쉬밍, 공안은 왕리쥔, 경제는 황치판 등 삼두마차 체제로 개편했다.


황치판은 대표적인 충칭 토박이 관료다. 충칭시장 왕훙쥐가 숙청되기 전에도 언론 노출 빈도는 부시장 황치판이 잦았다. 물론 보시라이와 왕리쥔은 연일 언론을 장식했다. 2009년 11월 경제관찰보는 왕 시장이 왕톈룬(王天倫)의 폭력 조직에 연루되어 있다고 보도했다. 경제관찰보는 왕톈룬이 작성한 서면 지시 사항을 입수해 보도했다.


그해 11월 28일 충칭시 고급법원 우샤오칭 집행국장이 충칭시 제2 구치소에서 자살했다. 우샤오칭의 자살은 석연찮은 면이 많아 타살 의혹이 아직까지 제기되고 있다. 왕훙쥐는 우샤오칭의 자살 소식을 듣고, 충칭시 상무위원회의 14차 회의에서 시장직을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아직 임기가 1년이 남았지만 왕훙쥐의 선택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보시라이는 왕훙쥐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보시라이는 구이원즈(鬼文子)라는 인터넷 논객을 이용해 ‘왕훙쥐는 왜 타흑의 기세가 높을 때, 수백 명의 간부가 연루가 탄로나 낙마할 때 사직서를 제출하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유능한 후임자에게 자리를 물려준다기 보다는 또 하나의 검은 우산이 넘어지고 있음을 뜻한다’라고 쐐기를 박았다.


2500만 인구를 책임진 거대 도시의 시장을 하루아침에 갈아치울 수 있다는 점은 전국적으로도 파급력이 컸다. 하지만 왕훙쥐는 중앙 정부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한다. 2009년 12월 26일 그는 환경자원 보호위원회 부주임으로 임명돼 베이징으로 향하고, 황치판 부시장이 시장직을 물려받았다.  [신기원 전재]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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