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퉈(韋拓) 기자
[SOH] 왕리쥔 사건으로 그의 막후 세력인 보시라이가 큰 곤경에 빠졌다. 하지만 중공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상황은 그리 낯설지 않다. 1970년대 린뱌오의 사망, 90년대 천시퉁의 몰락, 최근 천량위의 체포 등 많은 정치인이 중공 내부투쟁의 희생양이 됐다. 이제 그들의 역사를 돌아보며 권력자가 중공에 의해 어떻게 내팽개쳐졌는지 살펴보자.
마오의 ‘황태자’ 린뱌오
린뱌오(林彪)는 중공 개국원로이자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중공 당장(黨章)에 기재된 실력자였으나 마오쩌둥과 사이가 벌어지면서 세력을 잃고 말았다.
린뱌오는 일찍이 천두슈(陳獨秀), 마오쩌둥의 군사인재 배양 계획에 따라 황푸(黃埔)군관학교에 입학해 당 지부 서기가 됐다. 이후 1926년 10월 국민혁명군을 따라 제2차 북벌전쟁에 참여했다. 1927년 국민당이 청당(淸黨, 공산당 축출)을 단행하자 이에 맞서 중공군의 난창폭동(南昌暴動)에 참가하지만 실패했다.
이후 린뱌오는 국민당군과의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했고, 1930년 2월 23세의 나이로 홍사군(紅四軍) 군단장에, 25세에 군단 총지휘관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마오쩌둥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37년 핑싱관(平型關) 전투에서 ‘출정하면 장수가 군령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구실로 마오쩌둥의 다섯 차례 전보를 모두 거절했다. ‘중국인으로서 일본인들의 만행을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 결과 린뱌오가 지휘한 115사단은 핑싱관 북동쪽에서 일본군 1,000여 명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뒀다. 이에 마오쩌둥은 린뱌오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안간힘을 썼다.
1955년 린뱌오는 원수(元帥)로 임명됐고, 이듬해 9월 중공 제8차 전국대표대회(이하 8대)에서 마오쩌둥은 중공 주석에 재선출됐다. 1958년 5월 린뱌오는 8대 2차 회의와 제8기 5중 전회에 참석했고, 이때 마오쩌둥은 린뱌오를 중공 중앙 부주석으로 추대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린뱌오는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이 톈안먼에서 홍위병을 8차례 만났을 때, 병약한 몸을 이끌고 마오쩌둥 곁에서 ‘마오 주석을 반대하는 자는 전 인민과 공산당이 처단할 것이다’라고 외쳐야 했다.
1970년 중공 제9기 3중 전회에서 마오쩌둥이 정치운동을 전개하자 린뱌오는 수차례 마오쩌둥을 만나려 했지만 실패했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이후 린뱌오는 아들과 함께 무장 쿠데타 계획(571 공정기요(工程紀要))을 세워 마오쩌둥을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비행기로 도망가던 중 몽골에서 추락사했다. 당시 마오와 린뱌오의 추문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베이징방’ 대표 천시퉁(陳希同)
1998년에 있었던 천시퉁, 왕바오썬(王寶森) 사건은 최근 보시라이, 왕리쥔 사건과 상당히 유사하다. 천시퉁은 1990년대 ‘베이징방(北京幫)’을 대표하는 인물로 장쩌민을 인정하지 않았고 상하이방(장쩌민파)과도 대립했다. 그러나 1995년 측근인 왕바오썬 자살사건을 계기로 장쩌민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 1998년 7월 부정부패와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16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베이징 상무부시장 겸 재정국장이었던 왕바오썬은 부정부패 혐의가 밝혀지면서 베이징 근교 화이러우(懷柔)에서 권총자살했다. 이에 대해 해외 중화권 신문인 인민보(人民報)는 ‘중앙후보위원에 불과하던 보시라이가 제16대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왕바오썬과 천시퉁 덕분’이라고 꼬집었다.
여기에서 장쩌민과 보시라이의 관계를 한번 짚어보자. 1995년 봄 덩샤오핑(鄧小平)은 보이보(薄一波, 보시라이의 아버지)에게 장쩌민을 처분할 것을 명령했다. 천시퉁을 중심으로 한 7명의 성급 간부들이 장쩌민의 위법행위를 고발하는 서신을 덩샤오핑에게 보냈기 때문이다. 보이보는 후야오방(胡耀邦)의 퇴진과 자오쯔양(趙紫陽)의 연금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보(薄)씨 가문의 이익을 위해 장쩌민을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구제해줬다. 당시 천시퉁의 서신을 본 장쩌민은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고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보이보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고 한다.
그 후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중국 정가에 큰 충격을 안겨준 왕바오썬 자살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여파는 곧바로 천시퉁에게 번졌다. 중앙 정부가 천시퉁의 구속수사를 결정한 것이다. 관영 언론은 천시퉁이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해 왕바오썬의 자살을 강요했다는 논조를 폈지만, 덩샤오핑이 두려웠던 장쩌민은 1997년 2월 그가 사망한 후에야 심리를 진행했다. 당시 천시퉁은 재판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건을 천시퉁을 희생양으로 한 장쩌민의 정치적 보복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장쩌민을 뒤에 업은 보시라이는 중앙위원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보시라이 사건과 닮은 천량위 사건
천량위(陳良宇) 사건 역시 보사라이 사건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2006년 여름에 터진 사회보장기금 스캔들은 상하이 정•재계 인사 28명이 연루된 대형 정경유착 사건이었다. 당시 수십억 위안의 사회보장기금이 유용되거나 불법으로 주식시장에 흘러 들어갔다.
그해 6월 중앙 정부는 수사팀을 상하이에 파견해 사회보장기금 비리 조사를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천량위이지만 잡아들인 이는 그의 비서였던 바오산(寶山)구 구청장 ‘친위(秦裕)’이었다. 또 천량위의 측근이었던 ‘주쥔이(祝均一)’ 노동사회보장국장과 ‘우밍례(吳明烈)’ 신황푸(新黃浦)그룹 회장을 체포하면서 천량위를 압박해갔다. 이후 천량위의 비리 사실이 밝혀지면서 상하이시 서기에서 해임되고, 당 정치국 위원직도 정지됐다. 2008년 4월 11일, 천량위는 뇌물수수 및 직권남용 혐의로 18년형을 선고받고 30만 위안의 개인재산을 몰수당했다.
중국 최대 부패사건으로 손꼽히는 이 사건의 배후에는 후진타오가 상하이방의 핵심인물인 천량위를 공격해 장쩌민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천량위를 대신해 상하이시 서기가 된 이가 바로 시진핑이다.
미국 인권잡지 ‘베이징의 봄’의 후핑(胡平) 편집장은 이번 사건의 결과를 두 가지로 분석했다. 왕리쥔의 비참한 말로에서 보듯이 보시라이 역시 제18차 전국대표대회가 시작되기 전 정치 무대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현재 보시라이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왕리쥔은 인터넷에 올린 공개서신을 통해 ‘보시라이는 모든 사람을 껌으로 생각한다. 다 씹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며, 누구의 발바닥에 묻든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야말로 흑사회(범죄 조직)의 최대 두목’이라고 강도높게 비난했다. 보시라이의 앞날이 좋지 않을 것은 확실하다. [신기원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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