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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한신(韓信) ‘한나라의 천하를 평정하다’ (6)

편집부  |  20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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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SOH 자료실]


[SOH] 전국시대 말기 여러 제후들이 할거해 분열되었던 국면이 진나라에 의해 통일됐다. 진시황은 재위 37년 순행을 나갔다 사구(沙丘)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진시황은 유조(遺詔)에서 장자인 부소(扶蘇)를 불러 장례를 주관케 하고 도성에 들어와 제위에 오르라고 했다. 하지만 조서를 관리하던 조고(趙高)가 승상 이사(李斯)와 결탁해 거짓 조서로 부소를 자살하게 하고 어린 아들 호해(胡亥)를 황제로 옹립하니 그가 바로 진이세(秦二世)다.


진이세가 즉위 후 진시황의 옛 신하들과 황실의 종친들을 멋대로 살해하자 진시황이 심혈을 기울여 건립한 제국의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이세 원년(기원전 210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900명의 수졸(戍卒 변방에서 수자리 하는 군사)을 인도해 가다 대택향(大澤鄉)에서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고(斬木爲兵) 장대를 들어 깃발로 삼으며(揭竿爲旗)” 진이세의 통치에 도전했다.


그들은 진(陳) 땅에 정권을 세우고 국호를 ‘초(楚)’ 또는 ‘장초(張楚)’라고 했다. 이를 기회로 각지에서 진나라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앞다퉈 자신의 역량을 조직하고 순식간에 군웅이 할거 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마치 여러 제후들이 각축하던 전국시대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6. 새벽에 장수의 인을 빼앗기다


한신이 북방에서 연속으로 승리를 거둔 후 천하의 전반적인 형세가 한나라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항우는 매우 긴장했다. 그는 자주 군사를 파견해 연나라와 조나라 국경에서 소요를 일으켰다. 이에 대해 한신은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초나라 군을 물리치고 백성들을 편안히 하는 동시에 병력을 훈련하고 신병을 모집해 유방을 지원했다. 이와 함께 조나라와 대나라 등에서도 수시로 작은 전투가 발생하자 이 지역을 관리하는 방편으로 유방에게 장이를 조나라 왕으로 삼도록 천거했다. 사실 한신의 공로를 감안하면 자신을 왕으로 삼아달라고 청하는 것도 당연했다. 장이는 원래 유방과 교분이 두텁고 신뢰도 깊은 데다 유방이 항우에게 눌려 고전하던 상황이라 유방은 흔쾌히 한신의 요청을 수락했다.  


한신이 대나라와 조나라를 격파할 때 항우는 유방에 대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유방은 당연히 항우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초나라 군은 순조롭게 형양 동쪽 한나라 군의 거점을 전부 차지한 후 형양으로 가는 군량미를 차단했고 형양을 물샐 틈조차 없도록 단단히 포위했다. 이런 포위상태가 1년 이상 계속됐다.


유방은 전투 자체에는 능하지 못했지만 목숨을 부지하는 데는 오히려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우선 항우의 심복 영포(英布)를 모반하게 했고 진평에게 4만금을 주어 항우와 초나라 대장 종리매(鍾離昩), 용저(龍且) 등의 관계를 이간질시켰다. 또 항우가 가장 신임하던 모사 범증 역시 화가 나서 진영을 떠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형양의 포위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유방은 결국 거짓으로 항복하고  장군 기신(紀信)을 자신으로 가장하게 한 후 혼란을 틈타 형양성을 탈출했다.


항우는 형양을 탈환한 후 승세를 타고 추격에 나서 군사적 요충지인 성고(成皐)마저 수복했다. 유방은 무관(武關) 남쪽으로 움츠러들어 수비만 할 뿐 전투에 나서지 못했다. 동시에 잇달아 팽월에게 항우의 후방을 교란해달라고 요청했다. 팽월이 줄곧 팽성 인근을 공격하며 직접적으로 초나라 수도를 위협했다. 이에 항우는 팽월을 공격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병력을 천리나 후퇴시켰다. 유방은 압력이 줄어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고와 형양을 되찾았다. 항우는 팽월을 물리친 후 다시 형양으로 군사를 돌려 유방을 공격했고 한달도 못되어 연속으로 형양과 성고를 되찾았다. 성고성을 빼앗기기 직전 유방은 하후영과 둘이 달아났다.


세력이 잔뜩 위축되고 항우에게 겁먹은 유방은 대체 어디로 도망가야 안전할 수 있을까? 그는 수무(修武 하남성 획가현)에 군사를 주둔시킨 한신을 생각했다.


당시 한신은 연나라를 수복한 후 제나라로 밀고 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유방이 정면전에서 계속 패배하자 한신은 병사들을 훈련시켜 유방을 지원하기 위해 위나라 최남단의 수무(修武)를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유방의 전장과 비교적 가까운 곳이었다.


한신을 생각한 유방의 심사는 아주 복잡했다. 한편으로는 한신에게 지탱해 위태로운 국면에서 기사회생할 수 있어 다행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신은 겨우 3만의 병력으로 북방의 제후들을 제압했지만 자신은 왕의 신분으로 연전연패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 지금 한신은 이미 10만이 넘는 병력을 가졌지만 유방은 겨우 수레 한 대와 하후영밖에 남지 않았다. 구원병을 데려오고 싶지만 그렇다고 한신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았다. 이에 고심 끝에 생각해낸 계책이 바로 ‘새벽에 장수의 인을 탈취(晨奪將印)’한 것이다.


한고조 4년(기원전 203년) 6월 성고에서 패주하던 유방과 하후영은 풍찬노숙을 하며 한신의 주둔지인 수무로 도피했다. 하지만 의심 많은 유방은 바로 한신의 진영으로 찾아가 한신과 장이를 만나지 않고 몰래 역참으로 잠입했다. 이튿날 새벽 한신과 장이가 잠든 사이에 한왕의 사자를 가장해 한신의 장막에 몰래 들어가 두 사람의 인부(印符)를 훔쳐 병권을 빼앗았다. 그리고 다른 여러 장수들을 소집해 부서를 새로 배치한 후에야 겨우 마음을 놓고 한신과 장이 두 사람을 깨우게 했다.


한신과 장이가 황급히 의관을 차려 입고 알현하러 오자 유방은 한신을 상국으로 삼고 조나라 의 청년들을 징집해 새로 훈련시켜 제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또 장이에게는 조나라와 대나라 땅을 다스리게 한 후 자신은 한신이 이끌던 대군을 거느리고 전장의 위기를 구하러 나섰다. 한신의 대군과 팽월의 협조에 힘입어 유방은 마침내 형양과 성고를 다시 탈환했다.  / (계속) 大紀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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