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중국어로 된 책이나 잡지, 신문을 읽다 보면 국가원수나 정치지도자가 외국을 순방하거나 국제적인 관광명소를 방문할 때 '어느 호텔에 하탑(下榻)한다'라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현대뿐만 아니라 고서에도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당나라 때의 시인 유장경의 송가삼북유(送賈三北遊)라는 시에도 하탑이 등장하고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도 '그대가 마음 편히 쉬게 하고자 오늘 저녁에는 초가집에서 하탑하겠습니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중국인은 투숙이나 숙박을 왜 하탑이라고 했을까요?
하탑이란 단어를 풀이해 보면 下는 머물다, 투숙한다는 뜻이고 탑(榻)이란 폭이 좁고 긴 의자를 말합니다. 직역하면 의자를 내린다는 뜻입니다.
의자를 내리는 것이 왜 사람이 숙박한다는 뜻으로 변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후한서 진번전(後漢書 陳蕃傳)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한 말기의 대신이었던 진번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준엄했습니다. 한나라 때는 아직 과거제도가 형성되기 전이라 효렴(孝廉)을 천거하는 방식으로 인재를 선발했습니다.
지방관들이 부모에게 효성스럽고 청렴하며 단정한 인물을 조정에 천거하면 조정에서 이들을 불러 관리가 되게 했습니다.
진번은 20대에 효렴으로 천거돼 벼슬길에 올랐으나 오래지 않아 모친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해 상을 치렀습니다. 후에 다시 불려 와 낙안 태수로 임명됐습니다.
당시 낙안군에는 보기 드문 뛰어난 인재인 주구(周璆)라는 선비가 있었습니다.
여러 태수가 앞다퉈 그를 발탁하려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하지만 진번만은 그를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진번은 주구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자(字)를 불렀습니다. 또한 주구를 위해 관부 안에 특별 의자를 설치해 그가 투숙할 때마다 의자를 접대했으며 그가 떠나면 의자를 들어 올려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만큼 특별히 예우했던 것입니다.
후한서 서치전(後漢書 徐稚傳)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습니다. 자(字)가 유자(孺子)인 서치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했으나 학문이 넓고 깊었으며 고결한 품행으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관부에서는 여러 차례 그를 불러 관직을 맡기려 하였으나 그는 모두 거절했습니다.
당시 진번은 서치가 사는 지역의 태수였습니다. 원래 관아에서 따로 빈객을 접대하지 않는 진번이었지만 유독 서치만은 두터운 예를 갖춰 초빙한 후 그를 위한 전용의자를 만들어 그가 오면 설치해 주고 그가 떠나면 들어 올려 매달아 놓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당나라의 시인 왕발(王勃)이 쓴 등왕각서(滕王閣序)의 소재가 됐습니다.
'이곳 물산의 정화는 하늘이 내린 보배이니 용천검의 빛이 견우성과 북두성 사이를 쏘았고 인물 걸출하고 땅에는 영기가 있어 서유는 태수 진번이 걸상을 내려주며 맞이했네.'
여기서 서유는 바로 서치를 가리킵니다.
앞에서 보았다시피 하탑의 원뜻은 진번이 현명한 인재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의자를 내렸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禮)로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선비를 후대한 진번을 칭송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전고는 간단히 진번하탑(陳蕃下榻) 또는 진번탑(陳蕃榻)으로 불렸고 현명한 인재를 존중해 빈객의 예로 대우하는 것을 가리켰습니다. 점차 하탑이란 용어가 널리 쓰이면서 지금은 일반적인 투숙과 숙박의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씬위(心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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