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사극을 보면 관아에서 ‘곤장 50대를 쳐라’라는 판결이 떨어지면 죄수들은 볼기를 맞습니다.
그러면 왜 팔, 다리, 가슴, 등, 등을 때리지 않았을까요?
신당서 형법지를 보면 ‘당태종이 명당침구도(明堂針灸圖)에서 사람의 오장이 등에 가까워 침구를 잘못 놓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고는 탄식하며 말했다. ‘무릇 채찍 형은 다섯 가지 형벌 중에서 가벼운 것에 속하고 죽음이란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다. 어찌 가벼운 죄를 저질러 형벌을 받다 사람을 죽일 수 있으랴?’ 이에 앞으로는 죄인을 다스릴 때 채찍으로 등을 때리지 못하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나라는 중국 의학 역사상 눈부신 발전을 보였습니다. 남북조(南北朝) 때의 의학 유산을 계승하고 수(隋)나라 때 설치된 관방 의료체계의 기초 위에서 중국 의학을 종합했으며 유명한 의학자와 중요한 의학서적들이 잇따라 나온 시기입니다.
이중 견권(甄權)은 당나라 초기의 저명한 의사로 특히 침구에 뛰어났습니다.
621년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이 하남을 평정하고 이습예(李襲警)를 노주 지방에 파견하면서 민간의 명의를 초빙했습니다. 이때 이습예를 수행했던 의사가 견권이었습니다.
어느 날 견권이 고심 끝에 완성한 명당인형도(明堂人形圖)를 이습예에게 보여주었으나 침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습예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한번은 노주자사(潞州刺史, 지방관직 중 하나)가 갑자기 풍을 맞아 활시위를 당길 수 없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의사를 찾던 끝에 견권이 그를 진찰하고는 어깨에 있는 견우 혈에 침을 놓자 즉각 활을 당길 수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심주자사가 목이 심하게 부어올라 사흘 동안 미음조차 넘길 수 없었습니다.
견권이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 끝에 침을 놓자 즉시 숨이 편안해졌고 하루 만에 음식을 정상으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견권에게 이와 같은 예는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가 제작한 명당인형도도 유명해졌습니다.
당태종 정관(貞觀) 초년에 태종은 견권에게 명당인형도를 보완 교정하게 하여 630년 그림과 글이 함께 들어간 명당침구도를 완성해 관방에서 출판했습니다.
태종은 명당침구도를 읽어보고는 사람의 가슴과 등 부위에는 오장의 경맥과 혈도가 집중되어 있어 잘못 맞으면 불구자가 되거나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태종은 오형인, 사형, 유배, 징역, 장형, 태형 중에서 채찍으로 때리는 형벌인 태형(笞刑)이 비교적 가벼운 형벌임을 감안하여 5등급으로 부위를 나눠 때렸던 것을 이후로는 가슴과 등은 금하고 혈 자리가 가장 적은 둔부만을 때리게 했던 것입니다.
씬위(心語)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