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정지용 시인의 ‘향수’ 라는 시에 보면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아내를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라고 묘사하면서도 아내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 고대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내를 칭할 때 어떻게 불렀을까요? 정지용의 표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아내를 묘사한 표현이 있을까요?
서유기 제19회에 보면 손오공이 저팔계에게 하는 말 중에 ‘자네는 이미 불문에 들어와 승려가 됐으니 앞으로 더는 졸형이란 말은 꺼내지도 말게!’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두고 온 아내를 그리워하는 저팔계에게 충고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졸형이 왜 자신의 아내를 지칭하게 됐을까요?
사기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전국칠웅 중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했던 조나라에는 염파라는 뛰어난 장군과 인상여라는 훌륭한 재상이 있었습니다.
염파는 이미 70이 넘은 고령의 장군으로 여러 차례 전쟁에 나가 큰 공을 세운 반면 인상여는 미천한 신분에서 출발해 뛰어난 임기응변과 결단력으로 왕을 도와 재상의 자리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성격이 강했던 염파는 수많은 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공을 세운 자신보다 겨우 혀를 몇 번 놀린 인상여가 자신보다 높은 지위인 재상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되어 인상여를 만나면 단단히 혼내주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인상여는 이 말을 듣고 조정에 가는 길에 염파가 탄 수레를 만나기라도 하면 샛길로 피하곤 했습니다.
그의 부하들이 창피하게 여기며 재상인 인상여가 무엇이 두려워 염파를 피하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인상여는 “우리나라가 영토와 인구가 적음에도 강국들 사이에서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염파장군과 내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운다면 분명 어느 한쪽이 죽거나 다칠 것이니 이렇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염파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습니다. 그는 사죄하는 뜻에서 웃옷을 벗고 싸리나무 묶음을 등에 지고는 인상여를 찾아갔습니다.
인상여는 맨발로 달려 나와 염파를 친절하게 맞아들였고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변치 않는 우정을 맺었습니다.
여기서 싸리나무를 지고 죄를 청한다는 뜻의 부형청죄(負荊請罪)란 고사성어가 나왔습니다.
싸리나무는 아주 흔했습니다. 그래서 고대에 가난한 집 여인들은 싸리나무 가지를 가져다 비녀를 만들곤 했는데 이를 형채(荊釵)라고 했습니다.
당나라의 시인 이산보(李山甫)는 ‘가난한 여인’이라는 시에서 ‘평생 수를 놓은 화려한 옷은 알지도 못하거니 한가할 때면 형채(荊釵)를 잡고 자신을 슬퍼하노라(平生不識繡衣裳,閑把荊釵亦自傷)’라고 노래했습니다.
졸형(拙荊)의 유래는 형채와 관련있습니다.
송나라 백과사서인 태평어람(太平御覽) 718권 비녀(釵)에서는 열녀전의 기록을 인용해 ‘양홍의 처 맹광은 형채와 거친 베로 만든 치마를 착용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싸리나무 가지로 비녀를 만들고 거친 베로 치마를 해 입을 정도로 생활이 검소했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형채(荊釵)란 단어가 자신의 아내를 겸손하게 지칭하는 용도로 쓰였습니다. 또한, 졸(拙)이란 말은 원래 ‘어리석고 서투르다’는 뜻으로, 자신이 쓴 책을 졸저(拙著)라고 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위와 같은 이유에서 자신의 아내를 낮춰 말할 때 ‘싸리나무 비녀를 꽂은 볼품없는 사람’이란 뜻으로 졸형을 쓰게 된 것입니다.
비슷한 표현으로 졸처(拙妻)와 졸내(拙內)가 있습니다.
이외에도 중국 고대에 아내를 가리킨 단어에는 좋은 배필이라는 뜻의 호구(好逑), 내조(內助), 집안에서 요리와 취사한다는 뜻의 중궤(中饋), 쓰레받기와 비를 뜻하는 기추(箕帚)등이 있습니다.
씬위(心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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