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씬위(心語)
[SOH] 베이징을 찾는 사람들이 꼭 들러보는 관광지 중에는 베이징 북쪽 약 40km 지점의 창평구 천수산 아래 위치해 있으며 200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명십삼릉(明十三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고대 제왕의 묘를 능이라 부르게 되었을까요?
능이란 큰 토산(土山)을 가리킵니다. 좌전 희공 32년에는 '효에 두 개의 능이 있다(殽有二陵焉)'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큰 산이 두 개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주(周)나라 이전까지 군왕(君王)의 무덤은 모두 묘(墓)로 칭했지 능(陵)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상서태갑상(尙書 太甲上)에 보면 '태갑이 제위에 올랐으나 현명하지 못했다. 이에 이윤이 그를 ‘동’으로 추방했다(太甲既立,不明,伊尹放諸桐)'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주석에 ‘동’이란 탕(湯)임금의 묘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나라 때는 군왕의 무덤을 묘라고 칭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 역대 제왕의 무덤을 능이라 칭하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대 중기부터입니다.
이 시기 조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기 조세가(趙世家)에는 조나라의 숙후가 15년에 걸쳐 수릉(壽陵)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도 효문 왕을 수능에 모시는 등 진나라 역대 제후들을 능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런 기록들을 미루어보아 이 시기부터 군왕의 묘를 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봉건왕권이 끊임없이 강화되던 시기라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의 왕에게는 지고무상한 지위가 부여됐고 무덤도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광활한 영역을 차지했으며 높이도 마치 산처럼 높아졌기 때문에 능이란 용어가 사용된 것입니다.
규정에 따르면 황제의 무덤은 9장 높이까지 지을 수 있었지만 일반적인 왕의 능도 이 높이를 넘어서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일반 백성의 무덤은 분(墳)이라 칭했을 뿐만 아니라 높이도 3척(1m)으로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으며 이를 어길 경우에는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대신들의 무덤 역시 엄격한 제한이 있었고 함부로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한나라 이후 대부분 황제의 능에는 호칭이 있습니다. 가령 한무제의 능은 무릉(茂陵)이고 당태종의 무덤은 소릉(昭陵)이라 합니다.
나중에는 생전에 제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자손이 황제에 올라 자기 조상을 황제로 추존(追尊)했어도 그 무덤을 능이라 칭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 역대 제왕은 왜 이렇게 거대한 능을 조성했을까요?
중국은 역대로 유가사상이 성행해 조상에 대한 장례절차가 복잡하고 거창했으며 죽은 사람을 살아 있을 때처럼 효심으로 모시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황제 대부분이 대량의 인력과 물력을 소모하면서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존귀했던 제왕의 권력도 안개처럼 사라지고 거대한 능묘만이 휘황했던 권력의 역사를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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