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중국 고대에는 사직(社稷)으로 국가를 대신 지칭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예기(禮記) 단궁하(檀弓下)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옵니다.
왕기(汪踦)라는 동자가 전투에 나가 싸우다 죽자 노(魯)나라 사람들이 그의 장례를 성년의 장례로 치를 것인지 아니면 미성년의 장례로 치를 것인지 의논이 분분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숭고한 뜻을 기리자니 미성년인 것이 마음에 걸렸고 그렇다고 미성년의 장례를 치르자니 망자에 대한 예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창과 방패를 들고 사직을 지킬 수 있었다면 상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해도 가능하지 않은가?'라고 했습니다. 장례의 형식보다는 사직을 위해 목숨을 바친 뜻을 기르자는 것이지요.
국내에서도 정비석의 글 '비석과 금강산의 대화'에서 '태자의 몸으로 마의(麻衣)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에 들어온 것은 천 년 사직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 몸에 짊어지려는 고행이었으리라'고 하여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의 심정을 묘사했습니다.
그렇다면 고대인들은 왜 사직이란 단어로 국가를 지칭했을까요?
원래 사(社)란 사회에서 보듯이 일정한 집단의 사람들이 모여 제사(祭祀)를 지내는 것을 뜻합니다. 중국에서 사는 본래 토지신을 가리켰습니다.
글자 자체를 풀어보면 신령을 의미하는 시(示)에 토지를 뜻하는 토(土)가 결합되어 토지를 주관하는 신, 또는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 됩니다.
한편 직(稷)이란 본래 기장을 의미하는데 기장은 상나라나 주나라 시대에 가장 귀한 곡식이었습니다. 때문에 곡식을 주관하는 신의 뜻으로도 쓰였습니다.
결국 사직이라 하면 토지신과 곡식의 신을 가리키는데 사람이 살아감에 땅과 곡식이 없으면 살 수 없듯이 한 나라가 제대로 서려면 가장 먼저 조상을 받드는 종묘(宗廟)와 땅과 곡식을 주관하는 사직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중국 후한(後漢) 때 역사가 반고(班固)가 편찬한 백호통(白虎通)에서는 사직에 대해 '사람은 땅이 없으면 설 수 없고 곡식이 없으면 먹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대 중국의 제왕들은 나라가 평안하고 오곡(五穀)이 풍성할 것을 기원하며 사직에서 매년 큰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런 풍습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사직이 바로 국가의 상징이 되었고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사직을 국가로 지칭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사직을 모시는 전통이 형성됐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사직을 받드는 제사를 처음 시작한 왕은 고구려의 고국양왕(故國壤王)으로 391년에 국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라에서는 선덕왕 4년인 783년에 최초로 사직단(社稷壇)을 세웠고, 고려와 조선 역시 나라를 세운 이후 종묘와 사직을 건립해 국가의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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