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김예영(원명학당 원장)
[SOH] 토끼가 잡혀 죽고 나면 사냥개는 삶아진다는 말로 곧 토끼사냥이 다 끝나고 나면 그 사냥에 쓰였던 사냥개는 쓸모없게 되어 삶아 먹히고 만다는 말입니다.
원말은 ‘교토사 양구팽(狡免死良狗烹, 교활한 토끼가 죽고 나면 좋은 개는 삶아진다)’, 또는 ‘교토사 주구팽(狡兎死走狗烹)’으로서 쓸모가 있을 때는 긴요하게 쓰이다가 다 쓰여 지고 나서 쓸모가 없어지게 되면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것을 비유하여 쓰이는 말이지요.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候列傳)’, 한비자(韓非子) ‘내저설(內儲說)’,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 실려 있습니다.
한(漢)이 세워지고 난 후 고조(高祖)가 된 유방(劉邦)은 한신(韓信)을 소하(蕭何), 장량(張良)과 함께 창업공신으로서 높이 대우하고 초왕(楚王)으로 봉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한신에게는 예전에 항우(項羽)의 밑에서 용맹을 떨쳤던 종리매(鐘離昧)가 몸을 의탁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고조는 종리매에게 고전했던 과거의 기억 때문에 몹시 노해 한신에게 종리매를 당장 압송하라고 명령했으나 한신은 이를 어기고 그를 숨겨 주었습니다.
그러자 한신을 두려워하고 의심하던 고조는 이를 구실로 한신을 숙청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섣불리 손을 될 일은 아니어서 참모 진평(陳平)의 헌책(獻策)에 따라 제후들에게 운몽호(雲夢湖) 지역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알리고 모든 제후는 수행을 위해 초(楚) 땅의 진(陳)에 모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곳에 한신이 오면 붙잡던지 아니면 군대를 동원해 주살(誅殺)하던지 숙청하기로 한 것이지요. 이에 불만을 느낀 한신은 생각 끝에 순순히 고조를 배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직접 반역을 꾀한 것도 아니고 죽을 만큼 그렇게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몹시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측근이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가면 의심이 풀릴 것이라고 은근히 권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제 안위를 위해 어찌 친구를 배신한단 말인가. 한신은 고민하다가 종리매에게 사정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종리매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분개해 말했습니다.
“고조가 초나라를 치지 않는 것은 자네 곁에 내가 있기 때문이네. 지금 내 목으로 한왕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은가. 자네가 내 목을 가지고 가겠다면 지금 당장 내 손으로 죽어 주지. 내가 죽으면 그 땐 자네 역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게.”
몸을 숨길 곳 없는 패장(敗將)으로서 우정을 배신당할 처지에 놓인 친구로서 종리매는 드디어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한신은 그 목을 가지고 고조를 배알했습니다. 그러나 종리매의 말대로 그는 역적으로 포박 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한신은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며(狡免死 良狗烹), 높이 나는 새를 다 잡고 나면 좋은 활은 감추어지며(高鳥盡 良弓藏),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모신(謀臣)은 버림 받는다(敵國破 謀臣亡)고 하더니 그 말 그대로구나.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는 이제 팽살(烹殺, 삶아 죽임) 당하겠구나.”
그러나 고조는 이때 바로 한신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을 도와 한나라 창업에 큰 공을 세웠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고조는 한신을 회음후(淮陰候)로 좌천시키고 장안(長安)에서만 있을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 결국에는 모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기 ‘월세가(越世家)’에는 한신보다 앞서 월나라의 범려(范蠡)가 월을 도망쳐 나올 때에 ‘교토사 주구팽’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주구는 뜻이 변해 ‘앞잡이로 이용되는 자’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지요.
진정으로 사람을 아끼고 신의와 의리가 있다면 큰일을 도모했던 동지를 버리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요긴하게 이용될 때는 대견하다고 어르고 대우해 주다가 쓰임새가 다 끝나고 나면 결국 폐기해 버리는 것, 같이 전장을 누비며 생사를 같이 했던 전우의 옛 공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그런 의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으니 정치란 이렇게 비정한 것일까요?
이 고사는 인간을 그런 서글픈 지경으로 몰고 가는 비정한 현실을 웅변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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