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사람들은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가족관계, 친구관계, 직장관계 등 관계가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집에 가면 남편이나 아내로서, 또는 아빠나 엄마로서 역할을 한다. 직장에 가면 자신의 역할에 맞는 직위가 있다.
○ 페르소나(Persona)
사람들은 각자 가면을 하나씩 쓰고 산다. 집에서는 가장이라는 가면을, 직장에서는 직위라는 가면을 쓰고 산다. 마치 연극배우가 상황에 맞는 배역을 소화해 내는 것 같다. 이런 가면을 또 다른 말로 ‘페르소나(Persona)’라 한다. 융심리학에서 나온 말로 또 하나의 페이스(Face)를 말한다. 그래서 집에 가면 가장의 얼굴, 직장에 가면 예를 들어 부장의 얼굴을 한다.
여러 가지 얼굴로 살다 보면 자신의 참된 얼굴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가면을 자신의 얼굴로 착각할 때도 있다. 직장에서 부장이라는 직함이 자신의 본 모습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다. 이렇게 사람들은 또 하나의 페이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상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대표적이다.
○ 집도 절도 없을 때
누구나 하나 이상의 상(相)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때그때 알맞은 역할을 해야 한다. 상이 너무 강하면 어떻게 될까? 아상(我相)이 너무 강하면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럴 경우 ‘나홀로’가 될 수 있다.
우리 속담에 ‘집도 절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집도 없다’라는 말은 알겠지만, ‘절도 없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아마 옛날에는 절이 양로원이나 고아원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 본다. 요즘도 TV를 보면 종종 절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옛날에는 갈 곳이 없으면 절로 갔었나보다. 요즘도 툭하면 “머리 깎고 절에나 갈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절이라는 곳이 삶에서 마지막으로 거쳐 가는 장소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가야 할 집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수단인 가야 할 절도 없다면 그 심정은 어떠할까? 그래서 ‘집도 절도 없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 호불호(好不好)가 명확한 사람
사람들은 홀로 살아 갈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관계를 맺고 살아 갈 수밖에 없다. 무인도에서 홀로 살지 않는 한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 살아간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세상을 혼자 힘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자기주장이 뚜렷한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주관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주관이 지나쳐 버리면 어떻게 될까? 아마 ‘완고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한마디로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고집이 센 자들은 대게 ‘이기적’이다.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모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한다. 그래서 누구나 ‘내 뜻대로’따라야 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다 보니 ‘호불호(好不好)’가 명확하다.
한번 좋으면 ‘죽어라 좋아’하고 한번 싫으면 ‘죽어라 미워’한다. 대체로 권력자나 부자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많이 가진 자들이 ‘안하무인격’인데 이는 호불호가 분명하기 때문이라 본다.
○ 탐욕과 성냄은 배설물과 같아
호불호가 분명하면 어떤 일이 발생될까? 아마 십중팔구는 ‘탐욕’과 ‘성냄’으로 귀결 되고 말 것이다. 한번 좋으면 죽어라 좋아 하는 것은 탐욕의 발로이다. 한번 싫으면 죽어라 미워하는 것은 마음속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호불호가 뚜렷한 사람은 탐욕과 성냄으로 사는 자들이다. 부처님이 가장 경계하였던 ‘탐(貪)·진(瞋)·치(痴)’로 사는 자들이다.
불교에서는 탐욕과 성냄을 버려야 할 번뇌로 보고 있다. 그런데 번뇌에 대해서는 ‘오염원’으로도 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탐욕과 성냄으로 사는 자들은 오줌이나 똥과 같은 오염원과 함께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요즘은 화장실이라 하지만 옛날에는 ‘측간(변소)’이라 하였다. 마당을 가로질러 한 켠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만든 것이 측간이다. 수세식으로 되어 있는 화장실만 사용하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잘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옛날엔 똥차들이 골목을 누비고 돌아다니며 변소의 똥을 퍼갔다. 이렇게 한번 똥을 푸면 온 동네가 똥냄새로 진동했다.
똥냄새는 역겨운 것이다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탐욕과 성냄은 똥과도 같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오염원이기 때문이다.
○ 자아가 강한 것은...
오염원은 빠알리어(불교의 성전어)로 ‘낄레사(kilesa)’라 한다. 왜 낄레사라 하였을까? 그것은 사람들을 더럽히고 타락하게 하는 상태로 끌고 내려가기 때문이다. 아비담마(불교 초기경전 이론서)에 따르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 자만, 사견, 의심, 게으름(해태), 들뜸,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 이렇게 열 가지 오염원이 있다. 이런 오염원은 냄새 나고 더럽고 악취풍기는 것이다. 그래서 ‘오물장(汚物場)’과도 같은 것이 오염원이다.
주관이 너무 뚜렷하여 개성이 강한 자가 있다. 그러다보니 좋아하고 싫어함도 분명하다. 한번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조금도 융통성이 없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 내 뜻대로 안되면 마구 화를 낸다. 대개 권력자나 많이 가진 자에게서 볼 수 있다.
개성이 강한 자는 이기적이기 쉽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화합하기 어렵다. 호불호가 분명해서 탐욕과 성냄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늘 긴장과 갈등을 유발한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자는 관계가 엉망이다. 가정이나 직장에서나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는다. 가정에서는 싸움 그칠 날이 없고 직장에서는 시기와 질투, 중상모략이 그칠 날이 없다.
이기주의자들은 아상(我相)을 바탕으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탐욕적이고 분노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사람을 볼 때 악취가 나는 것 같다. 버려야 할 오염원을 잔뜩 짊어지고 있어서 마치 오물장과도 같은 사람이다.
○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간단하다. 이기적으로 살지 않으면 된다. 이 말은 ‘이타적’으로 살자는 말과 같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이기적으로 살면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지만 이타적으로 살면 관계가 부드러워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이기적 삶의 트레이드마크라 볼 수 있는 탐욕과 성냄 대신 관용과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탐욕의 상극은 관용이다. 성냄의 상극은 자애이다. 그래서 탐욕과 미움으로 사는 이기주의자는 오물장과 같은 견해를 가졌으므로 악취를 풍기지만, 관용과 자애로 사는 사람은 관계가 좋아 향내 나는 사람과도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한마디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욕심 부리고 성내는 상대방이 있다. 성낸다고 하여 같이 성을 낸다거나 욕심 부린다고 하여 미워하면 똑같은 사람이 된다. 이럴 경우 마음을 돌려야 한다. 마음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내 뜻대로 하려는 상대방에게 연민의 마음을 내면 된다. 연민의 마음을 낼 때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 날 수 없다.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 ‘측은지심’으로 마음을 돌려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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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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