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남송(南宋)시대 영종(寧宗) 경원 연간(慶元·서기 1195~1200년) 처주(處州·지금의 절강성 여수시)에 ‘범공(梵公)’이라는 아전(관에서 일하는 하인)이 있었다.
그 지방 현령은 사건 발생으로 용의자를 심문할 때 자백을 쉽게 받아 내기 위해, 아전들이 곤장을 좀 많이 치더라도 제한하지 않았다.
이것은 죄가 있는 사람에게는 몰라도 누명으로 잡혀 온 이들에게는 큰 고통이었는데, 결백을 고수하다 계속되는 고문에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범공은 마음이 자비로워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여겨, 동물 피를 속이 빈 파속에 붓고, 그 파를 용의자를 고문하는 숨겨 넣어 적지 않은 사람을 몰래 도왔다.
당시 고문 규정에는 용의자를 곤장으로 심문할 때 곤장에 피가 보이면 고문을 중단해야 했고, 구금 기간도 하루 줄일 수 있었다.
어느 날 현령은 범공이 걸을 때 그의 몸이 땅으로부터 약 석 자정도 떨어져 떠다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그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범공은 자신도 잘 모른다고 답했지만 현령은 범공의 평소 행적을 살펴봤고, 범공이 평소 용의자들을 심문할 때 ‘가짜 피’를 이용해 고통을 덜 당하도록 도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현령은 범공의 심성에 크게 감화했다.
얼마 후 범공은 아전을 그만두고 유유히 떠나 백학산(白鶴山)으로 가서 이 산에 초가를 짓고 수행에 전념했고 오랜 세월 끝에 결국 수행에 성공했다.
범공은 천근의 돌절구를 머리에 이고 언덕에 올라 산등성이를 오른 후 여러 사람 앞에서 우화비승(羽化飛升)하는 신적을 보였다.
이후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범공성선(梵公聖仙)’이라 불렀고, 그에게 기도하면 많은 영험이 있었다.
명조의 승려 부흡(溥洽)이 쓴 《고참수를 보내고 월 땅에 돌아오다(送高懺首還越)》라는 시에서 “이곳에는 아직 범공의 흔적이 남아 우리에게 다시 참회의 문을 열어주네(梵公此地跡猶存,爲我重開懺悔門)”라는 구절에서 말한 ‘범공(梵公)’이 바로 그를 가리킨다.
자료출처: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박물휘편(博物彙編) 신이전(神異典) 제25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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