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화궈펑이 그의 뒤를 이었지만 마오의 최대 악업인 문화대혁명에 대한 뒷수습을 제대로 하지 못해 책임을 지고 2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은 덩샤오핑이 권력을 잡게 됐다. 그는 마오쩌둥 시대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폭망한 중국의 경제를 다시 살리기 위해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노리는 ‘개혁개방’을 시도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많은 권한을 쥐게 된 관료들은 부정부패를 일삼기 시작했고, 혈연과 지연 등의 인맥을 중시하는 문화까지 유행하면서 빈부 격차는 한층 심화됐다.
게다가 그동안 마오쩌둥의 철권통치에 억눌려있던 사회 분위기가 당시 상대적으로 좀 느슨해지면서 각종 범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덩샤오핑은 다시 칼을 빼들었다.
덩샤오핑은 1983년부터 중국판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는데, 그 영향으로 당시 웬만한 범죄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당시 처형자 수는 연간 2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 같은 엄중한 조치에도 부정부패한 당 간부와 유력자들은 돈과 권력을 이용해 처벌을 피하는 사례가 허다해 공산당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은 계속 커졌다.
여기에 개혁개방으로 서서히 들어오는 외국의 문물을 보고 각성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중국의 대학생과 시민들은 공산당을 향해 사회 여러 분야에 대한 민주화와 부벙부패 척결 등을 요구하며 여러 차례 시위를 벌였다.
당시 공산당의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은 사람들의 이러한 민주화 요구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들의 시위를 적극적으로 진압하지 않았다.
후야오방은 이전부터 당의 고위 간부들과 친인척들이 저지르는 부정부패를 막으려는 입장이었기에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다른 공산당 간부들의 압박으로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2년 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후야오방의 죽음을 계기로 각지의 대학생과 시민들은 베이징에 모여 민주화와 자유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당시 시위는 각계 각층의 참여로 이어지며 톈안먼 광장에는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렇게 해서 중국의 미래를 결정하게 되는 6.4 톈안먼 민주화 항쟁이 시작됐다.
4월 17일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은 후야오방을 추모하기 위해 인민영웅기념비로 모였고, 그 과정에서 수백명 규모의 시위대가 만들어지며 항쟁이 시작됐다.
그들은 스스로 만든 화환을 든 채 진혼곡을 부르면서 톈안먼 광장까지 행진했는데, 그들 중에는 후야오방의 집에 문상을 가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후야오방의 장례식이 끝난 후부터 베이징에서 시위가 벌어지는 지역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을 폭도로 취급했고, 그것을 알게 된 시위대는 크게 분노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시위 분위기는 상대적으로 온건했지만 점차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5월 15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가장이 중국을 방문했다. 당시 톈안먼 광장은 시위대로 가득했기 때문에 그는 제대로 된 환영행사를 받지 못한 채 뒷길로 돌아 자신의 숙소로 가야 했다.
이후 진행된 회담에서도 시위대의 함성이 이어져 중국 지도자들은 체면이 구겨졌다.
당시 회담은 소련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목적이었는데, 소련 서기장 앞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한 중국공산당은 크게 분노하며 시위대를 응징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5월 18일 베이징 일부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군통수권을 쥐고 있던 덩샤오핑은 비무장 상태의 시민들을 상대로 군을 출동시키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5월 20일 중국공산당은 5만 명의 대군을 베이징에 투입했지만 예상외로 학생들과 시민들의 저항이 강해 군인들은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고 주변만을 포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시위를 하던 학생이 탈진해 쓰러지면 군의관이 그들을 돌보거나 군 차량으로 병원으로 이송시켜 주었고,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물과 음식을 가져다 주기도 하는 등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때문에 중국공산당도 바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시위자들에게 톈안먼 광장을 비울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공산당과 시위대의 각 내부 진영에서 좀 더 강하게 맞서자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긴장감이 고조됐다.
6월 3일 밤, 중국공산당은 군인들에게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당일 19시, 베이징으로 진입한 계엄군은 처음에는 비무장 상태로 시민들에게 해산을 요구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하자 곤봉을 들고 다시 접근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계속 강력히 저항했다.
결국 군인들은 기관총과 소총을 들었고 비무장 상태인 시위대를 향해 난사하며 유혈진압에 들어갔다.
군은 시위자들에게 해산할 것을 계속 요구했고, 시위대 지도부는 이후 자신들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해산했다.
당시 끝까지 광장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계엄군에게 잔인하게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바로 다음 날인 6월 4일부터 중국공산당은 전날의 약속을 어기고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을 체포하거나 추방했는데, 거리 곳곳에서는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짓밟혔다고 한다.
일부 목격자들은 “그 날 도로에는 자동차 대신 탱크와 장갑차가 지나다녔고, 불탄 시민들의 시신이 곳곳에 널려 있어 죽음의 도시 같았다”고 회상했다.
당시 사상자 수는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지만 최소 15000명으로 추산된다.
이연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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