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중국 사람들은 제공(濟公)스님을 제공활불(濟公活佛)이라 부른다. 부처님처럼 사람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신 분이라는 의미이다.
제공스님의 이름은 이수연(李修緣)이고, 법명은 도제(道濟)이며, 남송시대 소흥(紹興)원년 (1131년) 3월 6일 절강성 천태(天台)현 영녕촌(永寧村)에서 태어났고 중국 항주 영은사(靈隐寺)에 출가했다.
영은사는 중국 선종 10찰에 속하는 고찰로, 인도에서 온 혜리 스님이 이곳에 들렀다가 인도의 영취산을 닮은 산을 보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던 천축국의 영취산이 어떻게 여기로 날아온 것인가’라고 감탄하며 이름을 ‘비래봉(飛來峰)’으로 짓고, 맞은편에 신성한 신령이 깃들어 있는 곳이라는 뜻의 ‘영은사’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영은사는 5대10국의 오월(吳越)시대에 가장 번성했다. 당시에는 9개의 누(樓), 18개의 각(閣), 72개의 전(殿)에 모두 1천200여개의 방이 있었고, 승려 수는 3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816년 큰 화재로 폐허가 된 후 1823년부터 5년에 걸쳐 대웅보전과 천왕전, 약사전 등이 재건됐다.
■ 첫 번째 이야기
어느 날 이수연이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한 승려가 우산을 들고 걸어왔다. 수연은 그에게 “우산을 함께 쓰자”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수련자는 자비로워야 하며 사람을 제도해야 한다”면서 부탁을 들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승려는 오히려 수연에게 “남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이번에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교훈을 명심해 앞으로는 주의하라”고 충고하며 그냥 지나갔다. 이후 승려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선기(仙氣)로 변해 사라졌다.
이는 혜원(慧遠)대사가 이수연을 고험한 한 가지 작은 일화다. 수연은 수련자가 남에게 편리를 제공하는 것을 위난(危難)에 빠진 사람을 구도하는 행동이자 불가(佛家)의 자비심으로 여겼고, 부처의 선(善)과 중생을 잘 대하는 것을 ‘사람을 제도’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것은 불타의 말씀과 차이가 아주 큰데, 불타는 사람을 제도함에 사람 마음의 교화(敎化)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불타의 자비란 사람이 마음으로 불법(佛法) 진리를 깨닫고, 이를 통해 각종 고험과 간고한 수련을 거쳐 속세의 고해(苦海)에서 벗어나 극락의 피안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수연의 생각은 바로 현대인들이 이해하는 불타의 자비와 아주 유사하다. 사람들이 부처님을 찾아 절을 하는 대부분의 목적은 건강과 부, 명성, 행복 등을 얻어 이 세상 중에서 잘 살기 위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부처(佛)란 이 장엄한 단어가 도구가 되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부처님에 대한 진정한 신앙이 없고 자신의 소원을 비는 대상으로 여길 뿐이다. 사람 마음의 변이가 진실로 가련하고 비참할 정도에 이르렀다.
■ 두 번째 이야기
혜원대사가 선기로 변해 사라진 후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히더니 곧 하늘이 맑아졌다. 수연은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다시 생각하고 있는데, 한 맹인 승려가 길을 지나갔다.
수연은 그가 맹인인 것을 보자 장난기가 발동해 놀리려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승려가 든 지팡이에 한 대 얻어맞았다.
수연은 맹인인 승려가 등불을 든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다.
“당신은 빛을 보지 못하면서 무엇 때문에 등불을 들고 있습니까? 이는 다른 사람을 위해 비춰주려는 겁니까?”
그러자 맹인 승려가 말했다.
“그렇단다. 하지만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단다. 다른 사람이 나와 부딪치지 않도록 말이지.”, “이런 것을 가리켜 ‘남에게 장미를 선물하면 손에 향기가 남는다’고 한단다.”
진심으로 타인을 위할 때 자신이 얻는 수확은 매우 크다. 다른 사람을 위한 당신의 선념(善念)이나 선행(善行) 등은 반드시 좋은 결과로 당신에게 돌아온다.
■ 세 번째 이야기
수연이 영은사(靈隱寺)에서 여러 차례 사찰의 규범을 어기자 모두들 다 그를 징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연이 혜원대사 앞에 무릎을 꿇고 손으로 칼을 들어 처분을 기다렸다. 그러나 대사는 칼을 땅에 던지며 승려들을 향해 “덕(德)으로 원수를 갚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징벌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수련계에서 말하는 ‘이덕보원(以德報怨; 덕으로 원수를 갚는다)’을 뜻하는 것이자 전통문화의 미덕(美德)으로서, 원수와의 모순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설명한다.
어떤 모순이 발생해 화가 날 때 이를 참을 수 있다면 자신을 수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할 기회를 갖게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순에 대한 참음은 문제에 직면한 쌍방 모두에게 ‘정신적 경지’가 승화되는 이익을 가져오는 더 없이 큰 선(善)이 될 수 있다.
불가의 말에 따르면 덕과 원한은 전세(前世)에 쌓은 것으로 덕은 선을 행해서 얻은 것이고 원한은 악을 저질렀기 때문에 얻는 것이다. 하지만 선악(善惡)에는 보응이 따르는 것으로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한다.
속담에 “언제나 원한을 갚을 것인가”라는 말이 있는데 만약 원한으로 원한을 갚는다면 다음에 또 다시 갚아야 한다. 만약 덕으로 원한을 갚는다면 전세의 원한을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이를 통해 선연(善緣)을 맺거나 또는 선덕(善德)을 쌓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대인은 이렇게 여기지 않는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해야 한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손실을 용납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속이거나 협박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위협하는 일도 서슴치 않는데, 이러한 현상이 심화하면서 사회적인 안정과 신뢰는 약해지고 있다.
덕으로 원한을 갚는 것은 곤경이나 불행을 좋은 결과로 역전시킬 수 있지만 그 진정한 함의를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 정견망
편집부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